언론과 시사

영화계 큰 별이 지다..'국민배우' 신성일 별세

도토리 깍지 2018. 11. 4. 12:49
강신성일 '손가락 하트'


강신성일 '손가락 하트'(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지난달 4일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 배우 신성일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배우 신성일 폐암으로 타계…향년 81세


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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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현정 기자]





영화계 큰 별이 지다..'국민배우' 신성일 별세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김승욱 기자 =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밝게 빛난 '별'이 안식에 들었다.

'국민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전날 오후 한때

고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다시 위중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고 결국 몇 시간 뒤 숨을 거뒀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고(故)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사용했으며, 이후 본명을 표기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예명을 살려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사흘 만에 부모와 함께 대구로 이사했으며 1956년 경북고를 졸업하고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 폐암 투병 중이던 '국민 배우' 신성일이 4일 새벽 2시 30분 세상을 떠났다.


ⓒ데일리안 DB




레드카펫 밟는 강신성일


레드카펫 밟는 강신성일(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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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와 함께한 '영원한 스타' 신성일


잘생긴 외모·반항적 이미지로 1950∼60년대 청춘스타 등극
주연작만 500여편…"나는 종합예술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난 '딴따라'가 아닙니다.
종합예술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

4일 새벽 향년 81세로 타계한 신성일은 한국 영화 역사와 발자취를 함께한 '영원한 스타'였다.

빼어난 외모와 지적이고 반항적이면서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이미지는 1950~60년대 기존 배우들과 차별화하며 그를

 당대 최고 청춘스타로 만들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신성일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무작정 상경해 서울대 상대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3천여 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당시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 전속 연기자 됐다.


신 감독 영화 '로맨스 빠빠'(1960년)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신필름을 나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은 김기덕 감독 '맨발의 청춘'(1964).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반항적인 이미지로 당대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청춘영화 대명사가 된 이 작품은 당시 서울에서만 약 36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한 청춘 영화가 쏟아졌다. 





 

강신성일 '신사의 품격'


강신성일 '신사의 품격'(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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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은 인기 최절정기인 그해 11월 워커힐호텔에서 엄앵란과 결혼했다.

 하객과 팬 4천 명의 인파가 몰린 두 사람의 '세기의 결혼식'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신성일은 나중에 외도와 사업실패 등으로 40년 넘게 별거 상태로 지냈지만, 힘든 시기에는 서로 곁을 지키며 기둥이

 돼줬다.


신성일의 전성기는 결혼 이후에도 계속됐다.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위험한 청춘'(1966), '불타는 청춘'(1966)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남자 배우로서는 독보적이었기에, 당시 거의 모든 여배우가 신성일의 상대역을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60년대 신성일 인기는 미국의 제임스 딘, 프랑스의 알랭 들롱과 비견될 정도였다.






밝은모습의 신성일


밝은모습의 신성일(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배우 신성일이 18일 오후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
에서 열린 한국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申)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17.11.18
jin90@yna.co.kr


부산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신성일 회고전'을 맞아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 따르면 1967년 한해에만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 51편이 극장에 걸릴 정도였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천194편 중 324편에 그가 등장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책에서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 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평했다.

신성일은 무력과 좌절에 빠진 지식인을 연기한 '별들의 고향'(1974)을 비롯해 '겨울여자'(1977), '장남'(1984)

, '길소뜸'(1985) 등 70~80년대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다.


2005년에는 '태풍'에 특별 출연했고, 2013년에는 '망각 속의 정사'(1993) 이후 20년 만에 영화 '야관문: 욕망의 꽃'

주연을 맡으며 연기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다.

총 500편이 넘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가 배우 외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정치에도 눈을 돌린 신성일은 11대(1981), 15대(1996) 총선에서 거푸 낙선한 끝에 2000년 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사진=연합뉴스





2003년에는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와 관련해 광고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영화계에서도 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1971년엔 '연애교실'로 감독에 입문했고, 1989년에는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70대에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며 건강에 신경 쓴 그는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그는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떨쳐내겠다. 이겨낼 자신을 있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학창시절 육상과 평행봉, 유도 등 다양한 운동을 한 그는 병마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회고전을

 비롯해 올해 10월 열린 부산영화제에도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으며 손 하트를 날리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취재진과 만나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딴따라 소리 들으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투병 이후 '인생 2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었다.


그는 "막장드라마 대신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영화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 중이며, 김홍신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도 영화로 옮길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북 영천에 한옥을 지어 살던 고인은 그곳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소규모 음악회를 여는 등 사람들의 쉼터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고인은 한 마지막 바람들을 끝내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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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 연합뉴스,





배우 엄앵란(왼쪽)과 고(故) 배우 신성일(오른쪽) [KBS, MBC 화면 캡처]


배우 엄앵란(왼쪽)과 고(故) 배우 신성일(오른쪽) [KBS, MBC 화면 캡처]



엄앵란 “신성일 내가 책임진다...우린 동지야, 멋있게 죽어야해”





4일 영화배우 신성일(81)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동료 배우이자 아내인 엄앵란(82)에게도 관심이 쏠린다. 

엄앵란은 인생의 동반자로 남편 신성일의 곁을 묵묵히 지켜왔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신성일은 그동안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당시 아내 엄앵란은 신성일이 무탈하게 병원 치료를 받도록 병원비를 직접 마련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투병 생활을

 뒷받침했다.   


 부부의 막내딸 강수화(48)씨는 지난 3월 MBC 시사예능프로그램 '휴먼다큐-사람이 좋다'에 출연해 일화를 공개

하기도 했다.

 강씨에 따르면 당시 엄앵란은 신성일이 암 선고를 받던 날 말 없이 병원비를 부담했다. 
 
강씨는 "아버지가 퇴원하시던 날, '얼마냐, 계산할게'라고 하시더라.

그랬더니 (엄마가) '내가 계산했다'고 하셨다"면서 "아버지가 입원하는 그 날, 엄마가 카드를 건네셨다더라"라고 두 사람의 대화를 전했다.   


      이후 신성일은 엄앵란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운 마음을 수줍게 전하기도 했다.

엄앵란은 오랜만에 받아 본 신성일의 전화에 "왜 감사 인사가 없었나 했다.

기다렸다"고 말했고, 신성일은 "고맙소"라고 짧게 답했다. 





영화 ' 잃어버린 태양 '에서 주연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 중이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


영화 ' 잃어버린 태양 '에서 주연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 중이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




 
특히 엄앵란은 딸 강씨에게 "내 남편 신성일은 내가 책임져야 하고, 먹여 살려야 하는 큰아들"이라며 "죽을 때까지
 VVIP 특실에서 대우받고 돌아가셔야 한다. 작은 방에서 병원비도 없어서 돌아가시는 거 못 본다.
 내 남편이니까. 난 그걸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네 아버지가 '돈 꾸러 다니면서 병원비 내고, 자식들에게
손 벌리는 배우는 싫다'고 했다"며 "우리는 동지야.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한다"라며 남편에 대한 동지애를 드러냈다.
 
엄앵란 역시 올해 초 채널A '뉴스 TOP10'과의 인터뷰에서 "신성일이 초라하게 죽을 수는 없다"며 "마지막까지 특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병원비를 준비했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톱스타들이 초라하게 죽었던 옛날 시대에
살았다.
내 남편은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며 남편을 향한 애정을 보였다.  
 
1960~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고인은 데뷔작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엄앵란과 1964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두 사람의 결혼식은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확연히 다른 생활 습관 때문에 20여 년 넘게 별거를 하는 등 대중에게는 별거 부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2016년 엄앵란이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되며 신성일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이후에도 서로 취향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며 별거 아닌 별거를 해왔다.
 
두 사람은 이혼만큼은 하지 않았다.
엄앵란은 2011년 12월 SBS TV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에 출연해 "(사람들이) 심심하면 이혼했다고 한다.
 언론에서 언급한 대로 이혼했으면 50번은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도 있고 저렇게 사는 것도 있지 어떻게 교과서적으로 사느냐"며 "악착같이 죽을 때까지 (신성일과)
 살 것"이라고 말했다.
 엄앵란은 MBC와의 인터뷰 말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변하지 않고 의지하는 기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성일은 아내 엄앵란의 무조건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4일 새벽 향년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지난달 초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은 고인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됐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영화배우 신성일. 뉴시스







 





맨발의 청춘’ 신성일, ‘별들의 고향’으로…향년 81세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고(故)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사용했으며, 이후 본명을 표기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예명을 살려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사흘 만에 부모와 함께 대구로 이사했으며 1956년경북고를 졸업하고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김승호 주연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을 남기며 독보적인 스타 자리에 올랐다.
출연작품 편수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

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다.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아울러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거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화인 단체 대표들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릴 예정이었으나 23호실로옮겨졌다.



 전화 02) 3010-2000(대표번호)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영화계 큰 별 '국민배우' 신성일 별세


영화계 큰 별 '국민배우' 신성일 별세(서울=연합뉴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밝게
 빛난 '별'이 안식에 들었다. '국민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30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1세.
  2018.11.4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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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신성일과 윤정희. 영화 99편을 함께 찍었다. 윤정희의 남편은 피아니스트 백건우





'클래식 애호가' 신성일과 베토벤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폐암으로 투병하다 4일 별세한 '영화계의 큰 별' 신성일(81)에게 독일의 악성 베토벤

(1770~1827)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곡가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년에 이례적으로 파마머리를 했다.

 이로 인해 '베토벤' 같다는 인상 비평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계 걸작으로 통하는 '맨발의 청춘'(1964)에서도 베토벤이 등장한다.

신성일은 이 영화에서 깡패 '두수'를 맡았다.

밀수품을 파는 건달 두목의 심부름 등을 하면서 먹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평소 자신과 거리가 말런 오케스트라 콘서트장에 가고, 베토벤의 '운명'을 듣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부잣집 딸 '요안나'(엄앵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신성일이 실제 베토벤을 닮은 머리를 하게 된 까닭도 베토벤 때문이다.


 의원 시절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2년간 수감 생활을 할 당시 그와 막역한 피아니스트 백건우(72)·배우 윤정희(74) 부부가 면회 와서 선물해준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가 계기가 됐다.  
신성일은 2009년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베토벤의 비장한 삶이 내 고난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면서 "그의 삶도 삶이지만, 자유분방한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어 베토벤 스타일로 파마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 신성일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다.

 고향 대구에 있는 음악 감상실에서 베토벤은 물론 오페라 등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딸 수화씨는 올해 초 신성일의 암 투병기를 전한 MBC TV '사람이 좋다'에서 "아버지 방에는 클래식 음반과 책이 빼곡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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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배우 신성일.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고인의 화려한 삶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아울러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축사하는 신성일


축사하는 신성일(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배우 신성일이 18일 오후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한국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申)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17.11.18
jin90@yna.co.kr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며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거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화인 단체 대표들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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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의 상징 ★ 지다···데뷔 반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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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다. 영화 507편을 주연,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1960∼1970년대 충무로에서 영화와 함께 청춘을 보냈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 톱스타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9명에 달한다.

신성일과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한 여배우는 윤정희(74)로 99편에 함께 출연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걸출한 용모에 공부도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 영덕중을 거쳐 명문 경북고에 합격했다. 서울대 진학이 목표였으나 2학년때 꿈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환경 때문에 떨어졌다.  

 방황하던 신성일은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를 했다.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고,
 1957년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그때
신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성은 신 감독의 성씨를 따랐다.

고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걸출한 용모에 공부도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 영덕중을 거쳐 명문 경북고에 합격했다. 서울대 진학이 목표였으나 2학년때 꿈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환경 때문에
 떨어졌다.  

 방황하던 신성일은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를 했다.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고, 1957년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그때 신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성은 신 감독의 성씨를 따랐다.


4일 폐암 투병 중 타계한 배우 신성일. 한겨레 자료사진



4일 폐암 투병 중 타계한 배우 신성일.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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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핸드프린팅,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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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으며, 1960년 신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코미디를 가미한 멜로 드라마로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했다.
 조각 같은 용모와 강렬한 눈빛으로 반항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독보적인 스타가 됐다.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 1963년 '가정교사' '청춘교실'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4년 김기덕(1930~2017) 감독의 '맨발의 청춘'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뒤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82)과 1964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명이 몰려 큰 화제를 모았다.

'떠날 때는 말없이'(1964) '초우'(1966) '별들의 고향'(1974) '겨울 여자'(1977) 등 숱한 히트작을 내놓았다.
 1966년에는 한 해 동안 89편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낸 고인은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고,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제작·감독한 작품은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이다.
 감독한 영화는 '그건 너'(1974), 제작작은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다.

원래 이름은 강신영, 예명이 신성일이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81년 11대 총선 서울 용산·마포구에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 동구 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2001년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 17대 총선에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해 불출마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영화와 관련된 일에 앞장섰다.
2002년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 2003~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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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영화상 인기상(1963~1973),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1979),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86),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90),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94),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

(2004),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2008), 제17회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2008), 제8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2010), 제47회 백상예술대상 공로상(2011),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상(2013), 제37회 황금촬영상 공로상(2017),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상 공로상(2017) 등을 받았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올해 '제8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9일 서울
 충무로 명보아트홀에서 열릴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치르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now@newsis.com 



 

 배우 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뉴스1]

 


배우 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뉴스1]





미남배우의 대명사 신성일, 주연영화만 507편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종합예술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치료에 전념해왔다.
지난달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며 최근까지도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당시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더불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레드카펫을 밟아 이목을 끌었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취재진과 만나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딴따라 소리 들으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투병 이후 ‘인생 2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었다.
그는 “막장드라마 대신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영화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 중이며, 김홍신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도 영화로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걸출한 용모에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 영덕중을 거쳐 명문 경북고에 합격했다.

 서울대 진학이 목표였으나 2학년 때 꿈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환경 때문에
떨어졌다.  
 
방황하던 신성일은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를 했다. 재수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고, 1957년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그때 신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성은 신 감독의 성씨를
따랐다.   




 





로맨스 빠빠/신성일

  


           
주요 출연작은 ‘아낌없이 주련다’(1962) ‘가정교사’(1963) ‘청춘교실’(1963)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맨발의 청춘
’(1964) ‘초우’(1966) ‘별들의 고향’(1974) ‘달빛 사냥꾼’(1987) ‘위기의 여자’(1987) ‘레테의 연가’(1987) ‘아메리카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증발’(1994) 등이다.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고,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제작·감독을 맡은 작품은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이다. 감독한 영화는 ‘그건 너’(1974), 제작작은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
’(1990) ‘물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다.  
     
청룡영화상 인기상(1963~1973),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1979),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86),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90),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94),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
(2004),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2008), 2008년 제17회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2008)
등을 수상했다.   

1979년 한국배우협회 회장, 2001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초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82)과 1964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명이 몰려 큰 화제를 모았다.
초청장이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되는가 하면 결혼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호텔 측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결혼식은 지금까지도 ‘세기의 결혼식’으로 회자되고 있다.  
    



배재성 기자 hongdoya@joongang.co.kr



4일 폐암 투병 중 타계한 배우 신성일. 한겨레 자료사진



4일 폐암 투병 중 타계한 배우 신성일.


한겨레 자료사진






생전의 고 신성일(오른쪽)과 엄앵란. [사진= MBC]







엄앵란, 영화 ‘로맨스 빠빠’로 故 신성일과 인연... ‘스타 부부’로 다른 삶




[서울=뉴스핌] 김용석 기자 = 4일 새벽 타계한 고(故) 신성일의 부인은 역시 ‘1960년대 최고 영화배우'중 한명이던

 엄앵란이다. 

그의 부인 엄앵란(82)은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데뷔했다.


한살 연하인 신성일과 ‘로맨스 빠빠’를 시작으로 52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로맨스 빠빠’는 신성일의 데뷔작이기도하다. 이후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엄앵란은 서울, 신성일은 경북 영천에서 생활한 공식적인 ‘43년 별거 부부’였다. 엄앵란과 신성일은 1975년부터 별거

 생활을 했다.  


신성일은 생전, 배우자의 투병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내가 수술하자 신성일이 ‘아내의 건강을 챙기겠다’며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바람둥이’라는 세간의 말에 자신은 ‘바람둥이가 아닌 순수한 로맨티스트’라며 당당한 삶을 말하기도 했다.


영화 배우라는 공통분모와 함께 둘은 각기 다른 암을 앓았다.

폐암3기에 걸인 신성일은 4일 새벽 향년 81세로 타계 했지만 엄앵란(82)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

지난 2015년 모 방송 건강 프로를 찍던 중 자신이 유방암1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확인해 보니 유방암 2기였다. 결국 오른쪽 가슴 한 쪽 전체를 절제했다.


고 신성일은 한때 ‘은발의 파마’로도 유명했다. 그의 파마머리는 음악가 베토벤의 헤어스타일이다.

 그가 감옥(옥외물 광고계약 관련 뇌물 혐의)에 있을 때 배우 윤정희,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가 선물해준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란 책에 감명을 받은 후 머리 스타일을 바꿨다.

영화배우를 천직으로 여긴 신성일은 506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9명에 달한다. 잘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그는 “졸작은

 없다”라는 말로 영화가 그의 또다른 애인이었음을 대변했다. 


그의 마지막 공식석상도 영화제였다. 올 10월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도 그는 노신사의 풍모로 근황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신성일은 단정한 은발 머리에 회색 재킷으로 ‘로맨스 그레이’로의 마지막 모습을 남겼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는 한국의 제임스 딘(미국), 알랭 들롱(프랑스)이었다.






[부산=뉴스핌] 이윤청 기자 = 배우 신성일이 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 행사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이 모습이 신성일의 마지막 공식 석상이됐다.


 2018.10.04 deepblue@newspim.com



  

fineview@newspim.com 












▲ 1962년 신성일과 엄앵란 주연의  ‘아낌없이 주련다’





흑백사진으로 다시보는 신성일.. 그리고 엄앵란




[뉴스투데이=김연수기자] 신성일과 엄앵란. 1964년 한국사회 세기의 커플로 불리며 결혼하며 숱한 스토리를 남긴
 영화계 간판부부이다. 

엄앵란은 남편 신성일의 숱한 스캔들과 뜬금없는 폭탄 발언 등으로힘든 생활을 보냈지만, 자신의 남편이었기에 결코
 신성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부부를 넘어 엄앵란의 평생동지였던 신성일의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흑백영화의 장면들을 통해 살펴본다.







1960년 신성일의 스크린 데뷔작인 ‘로맨스 빠빠’. 당대 영화계를 주름잡던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왼쪽부터 최은희, 신성일, 남궁원, 도금봉, 김진규, 엄앵란, 주증녀, 김승호.






▲ 1963년 김지미와 함께 주연한 ‘77번 미스 김’





▲ 1964년 ‘맨발의 청춘’에서 트위스트 김(왼쪽에서 셋째)과 신성일






▲ 1967년 ‘새벽길’에서 고은아(오른쪽), 남정임과 함께한 신성일







▲ 1974년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과 함께


배우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 <마부>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배우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 <마부>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배우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 <맨발의 청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배우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 <맨발의 청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신성일 엄앵란 부부.

신성일 엄앵란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