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시사

청산 안된 과거의 그늘…기로에 선 한일관계

도토리 깍지 2019. 8. 14. 11:44


작년 大法 강제징용 배상 판결 계기 한일 '65년 체제' 도마 위에
日 보복조치로 정부간 외교갈등 경제전쟁으로 비화…민간교류도 급랭
"판결 이행케하고 通商보복 별도대응" vs "전략적 큰그림 생각해야"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올해로 74주년을 맞는 광복절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지만, 작금의 한반도 상황은 국민들 심경을 복잡하게 만든다.


광복 이후 한일관계가 생활 속에 녹아들며 잊혀가던 일제 강점의 기억이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의 관계 속에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한일관계에서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의 그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광복 74년] ① 청산 안된 과거의 그늘…기로에 선 한일관계 - 2



문재인 정부 출범(2017년 5월) 후 외교부 주도의 검증 작업을 거쳐 한일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무력화하면서 재부상한 역사 갈등은 작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계기로 폭발했다.

역사 문제에 따른 정부간 외교 갈등이 일본의 일방적인 경제 보복성 조치로 인해 한일 '경제전쟁'으로 비화했고, 과거 한일관계 악화 때 '저지선' 역할을 했던 양국간의 민간 교류와 인적 왕래까지도 정부간 갈등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 지형 속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한일, 한미일 대북공조마저 위기다.

광복 70주년이자 일본의 패전 70주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었던 2015년 과거사 문제에서 양국은 새 이정표를 만

들 기회가 있었지만, 문제를 '미봉'하는데 그치면서 어설프게 덮어둔 갈등이 4년 만에 터져 나오면서 한일관계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엇보다 작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그 판결을 둘러싸고 불거진 한일간 공방은 과거사 갈등의 '본질'을

건드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양국이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기로 하고 미봉했던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논란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셈이다.


대법원 판결이 일제의 강제징용을 '불법적 식민지배'가 잉태한 '불법 행위'로 간주하자 한일병합조약이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은 판결이 한일청구권 협정에 배치되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반발했고, 결국 일방적 경제 보복이라며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었다.

당분간 한일관계에서 '복원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간 외교갈등을 중화시켜온 의원외교 채널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최근 방일한 한국 국회의원과 만나기로 했던 자민당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의 '노 쇼' 사건이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민간 교류 역시 상대국에 대한 혐오감정 속에 삐걱대고 있다.


아베 정권의 역사 인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 내에서 반일감정이 거세진 것만큼이나 일본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되며 정부간 갈등이 양국 국민간 갈등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더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논리와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일본의 대한국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 일본 국민 과반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 일본 내 여론조사 결과는 일본 내 양심세력의 퇴조와 보수화 경향 속에 아베정권 뿐 아니라 일본 일반인들까지 한국에 깊은

불신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보복조치를 '가해국의 적반하장'으로 규정했지만,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서 문 대통령 말에 공감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은 상황이다.

이런 국민감정은 양국 정부 중 어느 쪽도 상대국에 대한 강경기조를 푸는 선택을 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당장 이달 안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연장 문제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야 한다. 그 결정의 방향은 향후 한일관계에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향후 한일관계 정상화 방안과 관련해서는 대법원 판결 내용에 입각한 원칙적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상대국의 협조 없인 판결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기 어려운 현실과 한국의 외교·안보 차원 이해관계를 고려한 정치적 해결에 무게를

 실은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김창록 경북대 교수는 13일 "일본의 통상(通商)분야 공격과 과거 청산은 그 성격과 대응 양식에서 별개 사안"이라며

 "통상 문제는 통상 문제로서 강한 대응을 해야 하고, 대법원 판결은 판결 집행(일본 기업의 배상 이행)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 교수는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한일 간에 '식민지배 책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고 선언

한 것"이라며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문제는 자료를 쌓고 법리를 가다듬어가며 우리가 찬찬히 풀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한일관계가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고, 동북아 국제관계의 맥락 속에 위치하는 만큼 동북아 각국과의 이해관계를 관리하면서 평화 프로세스를 끌고 가는 전략적 큰 그림 속에서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대법원 판결로 제기된 피해자 배상 문제는 우리 정부가 보훈 정책 차원에서 국내적으로 해결한 뒤 대일

 '도덕적 우위'에 서서 문제를 풀어 가거나,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1998년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한 김대중(金大中·1924∼2009)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1937∼2000) 총리의 사례와 같은 양국 정상의 정치적 결단에 입각한 갈등 봉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홍구 전 총리 등 국내 정·관계, 종교계, 학계 등의 원로들이 참여하는 동아시아평화회의가 12일 발표한 특별성명에서 "한국과 일본은 김대중·오부치의 공동선언 정신과 해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한일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오부치 당시 총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함으로써 한일 외교 사상 처음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공식 합의 문서로 명확히 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며 화답했다.


하지만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철저한 친일청산을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과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전후체제 청산'을

정치인생 최대 목표로 삼는 아베 총리 사이에 '건너기 어려운 강'이 존재하는 상황이어서 정상외교를 통한 급반전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울러 한국 정부가 역사 수정주의적인 아베 정권에 강하게 맞서더라도 보통의 일본 국민을 향한 공공외교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사에 대한 해결 노력과 동시에 한일관계를 중시하고, 미래 지향적 관계를 구축하길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일관계 위기를 넘어 동아시아 평화로'


'한일관계 위기를 넘어 동아시아 평화로'지난 12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동아시아평화회의 주최로 열린 '한일관계의 위기를 넘어 동아시아평화로 : 레이와(令和)
시대·도쿄올림픽을 적대 아닌 평화로'라는 주제의 8·15 74주년 특별성명 발표 기자회견에서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여는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jhcho@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부산 곳곳에서 다양한 경축행사가 펼쳐진다.
  • 사진=부산시 제공






  • 일본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왼쪽)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함께 1905년 찍은 사진. 이토는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위키피디아]


    일본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왼쪽)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함께 1905년 찍은 사진. 이토는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


    [위키피디아]








    초대 조선 통감으로 침략의 설계사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옥중 모습.[중앙포토]



    초대 조선 통감으로 침략의 설계사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옥중 모습.


    [중앙포토]

              


    일제침략 수괴 조선총독·통감 10명…아베 지역구 출신이 4명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1905년 을사늑약 뒤 통감·총독 10명
    이토 제외, 전원 군인…총칼로 통치
    아베 지역구 조슈번 출신이 4명 차지
    조슈·사쓰마 출신, 메이지유신 주도

    군·관 요직 독점해 번벌 정치 펼쳐
    셋은 A급 전범으로 체포, 둘만 처벌
    사이토는 쿠데타 세력에 살해 당해
    간토 조선인 학살 책임자가 총독으로
    마지막 총독 아베, 아베 총리와 무관
    제국주의·군국주의 반인류 범죄 실행자






    올해 8·15로 광복을 맞은 지 74년이 된다.
    그런데도 일제 통치 35년의 상처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현실 정치와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

    일제가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이 땅에서 조선인을 억압하면서 군국주의·제국주의 침략정책을 추진한 행동 책임자가 조선총독이다.
    조선총독의 면면을 살펴보면 식민통치의 추악한 본질이 드러난다.  

    일왕 대리인으로 전권 행사한 침략 수괴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세 명의 통감을 잇달아 파견해 이른바 ‘통감 정치’를 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했다.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이다.  
     
    일제는 이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을 불법 병탄했다.
    일제는 이 시기에 모두 10명의 통감과 총독을 조선에 보냈다. 이 가운데 데라우치는 통감을 거쳐 총독이 됐으며, 사이토는 총독을 두 차례 지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에서 삼권분립 원칙을 도입해 적용하고 있었으나, 조선총독은 본국의 국회나 내각에 책임지지
     않고 아무런 간섭이나 견제 장치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조선에서 군과 경찰, 행정기구는 물론 재판소까지 좌지우지하는 권한을 지녔다.

    직권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공무원을 임명하면서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오로지 일왕에게만 책임을 지면서  조선에서 왕의 대리인 역할을 한 셈이다.
     조선총독이 조선인을 억압하면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침략 수괴’의 자리였음을
     잘 보여준다.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1909년 10월 26일 하벌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의 모습. 왼쪽 모자를 벗고 있는 인물이다. 이 직후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이뤄졌다. ㅔ중앙포토]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1909년 10월 26일 하벌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의 모습. 왼쪽 모자를 벗고 있는 인물이다. 이 직후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이뤄졌다.


    ㅔ중앙포토]




    군인이 총칼로 억압…3명은 A급 전범 지목

    이 가운데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인 출신이며,  총독을 지낸 8명은 전원이 군인 출신이다. 일제 통치의 군국주의적이고 폭압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인도
     총독을 행정가나 귀족에게 맡겼던 점과 대조적이다.  

    이 가운데 둘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총독을 지냈다.
    사이토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육군 출신이다.
    일본에 17명밖에 없는 육군원수 가운데 두 사람이 조선 총독을 지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장이다.
    이 가운데 3명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으로 지목됐다.

    이 중 두 사람이 기소돼 각각 종신형과 20년형을 받았다.
    이 중 하나는 감옥에서 병사했고, 다른 한 명은 말년에 가석방됐다.
    유일한 해군 제독은 도쿄로 돌아갔다가 군국주의를 외치는 젊은 장교에게 살해됐다.

    통감과 총독 10명 중 5명이 총리를 지냈으니 군과 정치가 한몸이 돼 침략 정책을 추구했던 20세기 초반 일본 군국주의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3대 조선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육군 원수인 현역 군인으로서 조선 총독을 맡아 무담통치로 조선인을 억압했다. 오늘날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3대 조선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육군 원수인 현역 군인으로서 조선 총독을 맡아 무담통치로 조선인을 억압했다. 오늘날 아베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있는 조슈번 출신이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아베 지역구인 조슈 출신이 4명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년, 재임 1906년 3월~1909년 6월)는 메이지 유신의 본산인 죠슈(長州)번 출신이다. 현재 아베 신조(安培晋三) 일본 총리의 지역구인 야마구치(山口) 현이다. 1,5,7,10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
    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曽禰荒助, 1949~1910년, 재임 1909년 6월~1910년 5월)은 조슈번 출신의 군인으로 육군대장이었으며 외무대신을 지냈다.

    소네가 병에 걸려 물러나면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년, 통감 재임 1910년 5월~8월, 총독
     재임 1910년 10월~1916년 10월)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을 맡았던 조슈번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군인이다.
    육군원수로 현역 군인 신분으로 3대 통감과 초대 총독을 지내다. 1902년 9월~1911년 8월에는 육군대신을 겸임했다.
    무단통치의 원조로 통하는 데라우치는 일제 식민통치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총독을 지낸 뒤 귀국한 그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1916~18년 18대 일본 총리를 맡았다. 외무대신·재무대신을 겸한 권력자였다. 데라우치는 집에서 숨을 거뒀지만 대를 이어 군에 들어가 육군원수가 됐던 그의 아들을 그렇지 못했다.
     일본 역사상 왕족을 제외하면 유일한 부자 원수다.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内 寿一: 1879~1946)는 태평양전쟁
     당시 남방사령관을 맡았다가 패전 뒤 영국 여왕의 인척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에게 직접 군도를 바치며 항복했다.

    일본군을 통틀어 육군 18명, 해군 13명만 있던 원수 중 유일하게 적에게 군도를 내밀며 항복했다.
    그는 종전 전인1945년 5월 미얀마 임팔 작전에서 일본군이 참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충격을 받아 뇌경색 증세를 보였다. 1946년 말라야 반도의 포로수용소에서 병세 악화로 객사해 싱가포르에 묻혔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 해군의 미주리 함상에서 태평양전쟁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리고 있다. [중앙포토]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 해군의 미주리 함상에서 태평양전쟁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리고 있다.


    [중앙포토]



    국제정세와 현실감각 떨어진 군국주의자들 

    패전 직전 일본 본토에는 왕족을 제외하고  육군의 하타 슌로쿠(畑俊六,1879~1962),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1880~1945), 해군의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1880~1947) 등 3명의 원수가 생존해 있었다.

    항복 하루 전 일왕은 이 셋을 불러 원수회의를 하며 의견을 물었더니 하타 슌로쿠를 제외한 두 사람은 본토결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현실 감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본토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고백한 하타는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54년
    가석방됐다.

    후쿠시마 출신인 그는 1927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을 때 책임자인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의 경질을 건의한
    인물이다.
    육군대신, 참모총장, 교육총감 등 일본 육군의 세 장관을 모두 역임한 스기야마는 후쿠오카 출신으로 당시 본토 결전을 위한 제1총군의 사령관이었다.

     패전 직후 권총 자살했다. 고치 출신인 나가노는 일본 해군의 3요직으로 통하던 해군대신, 연합함대사령관, 군령부총장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진주만 기습 당시 군령부 총장으로 책임이 있어 패전 뒤 A급전범으로 재판을 받던 중 1947년 병사했다.  
     
    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曲川好道: 1850~1924년)는 데라우치에 이어 1916년 현역 군인 신분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한 뒤 헌병을 앞세운 무단통치를 했다. 1919년 조선 민중이 3·1운동으로 피로써 저항하며 독립운동에 나서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조슈번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 보신전쟁·세이난전쟁 등 메이지 유신 후 벌어진 내란에 중앙군(관군)으로 참전했다. 1912~15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15년 육군원수가 됐는데, 그 이듬해에 군복을 입고 조선총독에 부임했다.   




     
    일본 총리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코 마코토가 해군 제독이던 1910년 경의 모습. [위키피디아]



    일본 총리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코 마코토가 해군 제독이던 1910년 경의 모습.


     [위키피디아]




     

    사이토, 총독 퇴임 뒤 쿠데타군에 피살

    3대와 5대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총독 자리를 맡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実: 1858~1936년)는 총독 가운데 첫 예비역
     군인이며, 유일한 해군 출신이다.
    해군 대장으로 다섯 차례나 해군대신을 지냈다.
     3·1운동 뒤인 1919년 9월 총독에 부임하다가 서울역에서 강우규 의사(1955~1920년) 등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강 의사는 이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서울역 광장에 폭탄을 들고 있는 강 의사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사이토는 제네바 군축협상에 전권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1927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9년 총독에 재기용됐다.
     1931년 다시 물러난 뒤 귀국해 1932~34년 총리를 지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 일왕 보좌관인 내대신을 지내다 군국화 강화를 요구하는 젊은 장교의 쿠데타(2·26사건) 당시
     도쿄의 자택에서 살해됐다.
    47군데에서 총상, 10여 군데에 칼로 베이거나 찔린 상처가 발견됐다.  
     

    종전 뒤 참의원에 선출된 전 조선총독

    우가키 가쓰시게(宇垣一成: 1868~1956년)는 현역 군인이던 1927년 임시 총독을 지낸 뒤 예비역 대장 신분이던
    1931~36년 총독을 맡았다.
    1925년 육군대신으로 있으면서 군축을 주도하는 바람에 동료들의 미움을 샀다.
    1937년 조각을 맡아 총리가 될 뻔 했으나 육군이 반발하면서 포기했다.

    대신 1938년 외무대신 겸 척식대신(대만·남만주 식민과 이권 담당)을 맡았다.
    1930~40년대 내각 해산 때마다 총리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자리에 오르지 못해 ‘정계의 혹성(태양(총리)의 주변을 도는 별이라는 의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종전 뒤 공직에서 추방됐다가 1952년 제한이 풀리자 이듬해 참의원에 출마해 당선했다. 조선총독 출신으로 종전 뒤
    선출직 공직은 맡은 유일한 인물이다.
     일본이 과거 침략의 역사와 제대로 결별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간토 조선인 대학살 책임자가 조선총독으로 

     

    일본 도쿄 스미다(墨田)구 도립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 있는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추도비.[연합뉴스]


    일본 도쿄 스미다(墨田)구 도립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 있는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추도비.


    [연합뉴스]




    5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1864~1944년)는 1927~29년 총독을 맡았다.
    1923년 9월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계엄사령관을 맡았다.
    당시 혼란을 틈타 일본 군경과 민간인 자경단원들이 조선인을 콕 집어 6000~6600명을 무차별 살해한 광란의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인의 인종청소이자 집단증오 범죄이며 파시즘적인 광기의 학살극이다. 평
    범한 얼굴의 일본인이 아무렇지 않게 조선인 수천 명과 중국인 600여 명을 집단 학살했다. 단지 조선인이고 중국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대지진이 발생해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일본 내무성이 경찰에 내려 보낸 문서에 ‘조선인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게 발단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인은 죽창과 칼, 몽둥이를 들고 조선인을 보는대로 무차별 학살했다. 행정당국과 군대까지 가담했다.
     학살은 우에노 공원이나 이케부쿠로 등 도쿄 중심부에서 주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인구 1300만 명의 초현대도시가 90여 년 전에는 1990년대 르완다나 유고슬라비아처럼 ‘인종 청소’의 잔혹한 살육극의 현장이었다.

     지금도 백주대낮에 버젓이 ‘조선인을 몰살하라’라고 외치는 혐한(嫌韓) 시위가 벌어지는 도시이기도 하다.
     도쿄는 민족차별 또는 인종주의에서 비롯한 유언비어에 선동돼 평범한 사람이 학살에 손을 담근 과거를 갖고 있는
     도시다.    
     
    야마나시는 계엄사령관으로서 이 잔혹한 인종 학살을 방관하거나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육군대신까지 지내다 1925년 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됐다. 1927년 조선총독에 임명됐으나 경성에 지점을 낸 곡물업체가 측근을 통해 야마나시에게 당시로는 거액인 5만엔을 뇌물로 준 부패 사건으로 해임됐다.

    당시 재판에서 미곡업체 대표와 야마나시의 측근은 유죄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지만 야마나시는 무죄를 선고 받은
     황당한 판결이 나왔다.
     ‘깃털 유죄, 몸통 무죄’의 판결이다. 






             
    일본 전범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모습. 7명이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됐다. [위키피디아]



    일본 전범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모습. 7명이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됐다.


    [위키피디아]




    “국방이 정치 우선” 미나미, 조선인 놀림감으로  

    8대 미나미 지로 (南次郎: 1874~1955년)는 육군 중장 시절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육군대신을 맡던 1931년 9월 18일 만선철로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벌이고 이를 빌미로 만주 지역을 점령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 뒤 관동군(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 겸 만주국 대사를 지냈다.
    1936년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된 지 불과 몇 달 뒤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1942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국방이 정치에 우선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인물로 대표적인 군국주의자로 통한다. 종전 뒤 만주사변 발발의 책임을 물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금고형에 처해졌다.
    1954년 가석방됐다가 이듬해 숨졌다.

     총독 재임 중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는데 일부 조선인은 미나미 총독의 성을 따서 미나미 다로(南太浪)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미나미 총독의 이름인 지로는 차남이란 뜻이며 다로는 장남을 의미하므로 이는 ‘미나미 총독의 형님’이라는 뜻이 된다. 조선인들은 미나미의 내선일체 정책에 이처럼 지독한 풍자로 저항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이다 해방 뒤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 1926년 조선인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건립돼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 철거됐다. [중앙포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이다 해방 뒤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 1926년 조선인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건립돼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 철거됐다.


     [중앙포토]

     

    고이소, A급 전범으로 종신형 복역 중 사망

    9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1880~1950년)은 관동군 참모장과 조선군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육군대장이다.\ 1942~44년 총독을 지냈으며, 물러난 뒤 1944년 7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총리대신을 맡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50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스가모 교도소는 종전 전 사상범이 주로 수용됐고 소련 스파이를 하다 체포된 독일인 리하르트 조그게의 사형이 집행된 곳이기도 하다.

    전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사형 선고를 받은 A급 전범 7명이 처형됐다.
     이들을 비롯한 A급 전범 13명은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일본의 침략을 경험한 아시아 국가들이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이유다.

    고이소는 감옥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전사자가 아닌데도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야스쿠니에 합사된 유일한 조선총독 출신이다.   






    일제의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아베 신조 총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한자도 다르다. [중앙포토]



    일제의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아베 신조 총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한자도 다르다.


     [중앙포토]

     




    마지막 아베 총독, 전범재판 피해

    마지막 조선총독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년)다.

    인터넷에서 아베신조(安部晋三) 총리의 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도는데 사실이 아니다.

    한자부터 다르고 출신지도 아베 총리의 야마구치가 아니라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다. 가나자와는 윤봉길 의사가 처형돼 묻힌 곳으로 위령비가 서있다.   

     
    아베 총독은 1944년 7월 부임해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한 연합군에 의해 쫓겨났다. 1933년 육군대장에 올랐으며
    1936년 예편했다.

    1939년 8월부터 40년 1월까지 36대 일본 총리를 지냈으나 독일과 동맹을 맺고 미국과 영국에 맞선다는 육군 측의 방침에 반대해 내각 총사퇴를 했다. ‘처세의 장군’으로 통했던 그는 전후 연합군에 체포돼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재판 시작 직후 피고에서 제외됐다.
    어떤 처세가 통한 것일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 최재형 기념관에 있다. 백성호 기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 최재형 기념관에 있다.


     백성호 기자



    독립운동은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저항

    아베가 총독 취임 직후 항공대에 근무하던 아들이 영국 군함을 공격하다 충돌해 전사했다.
    일본 패망 직후 할복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로 끝나 1945년 9월 9일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항복 조인식장에 나와
    항복 조인 문서에 서명했다.
    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제 조선총독의 마지막 모습이다. 일

    제 조선침략의 행동대장을 맡았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처럼 제국주의·제국주의 추악한 민낯
    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의 독립투쟁은 이러한 반인륜적이고 반인류적인 범죄에 맞서 싸운 세계사적인 전쟁이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한일관계 ‘기로’…열강 틈새속 힘의 균형 재정립 기회



    동북아 지각변동

     미, 패권국가 의무 방기하고 편익만 추구
    미-중 대결 격화로 ‘키신저 질서’ 붕괴
    한-일 충돌도 동북아 세력재편 한 부분
    한국, 아시아의 종속·독립 변수 갈림길

     





    한국과 일본의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가 직접적인 발화선이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수십년 유지돼온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가 붕괴
    되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는 충돌이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 블록 몰락 이후 아시아를 규정했던 미국 주도의 지정학적 질서는 무너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중국의 패권 도전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최소한의 ‘공공재 제공’이라는 패권국가의 의무는 저버린 채
    편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현재 격변에 처한 아시아 지정학적 질서는 멀리는 미국과 중국이 화해한 1970년대 초, 가깝게는 두 나라가 본격적 협력에 들어간 1990년대 초에 형성됐다.
    소련이 붕괴한 뒤 미·중은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분업체제라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확산의
    버팀목이 됐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5일 ‘아시아의 전략 질서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내 칼럼에서 이런 질서를 미-중 수교를 이끈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이름을 따서 ‘키신저 질서’라고 이름 붙였다.
    신문은 최근 아시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결국 ‘키신저 질서의 붕괴’라고 규정했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국의 상대적 약화로 이런 질서가 파탄 났다는 것이다.

    미국이 공황 상태에 빠졌던 2008년 금융위기는 변곡점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실존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고, 중국은 자신의 부상을 미국이 싹부터 자르려 한다고 반발하면서 양쪽의 전략적 불신이 깊어졌다.
     ‘G2’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미·중의 공개적인 경쟁 구도가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행정부는 ‘아시아 회귀’를 내걸고 중국 견제에 돌입했다.
     하지만 ‘협력 속 경쟁’이나 ‘경쟁 속 협력’으로 양국 관계를 규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협력적 요소는 남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이르면서 ‘협력’이란 단어는 사라지고 경쟁과 전쟁만 남았다.

    미-중이 4차례의 무역협상을 벌였으나 ‘미래 경쟁’인 지식재산권이나 첨단기술을 둘러싼 양쪽의 첨예한 견해차로 근본적 합의에 대한 전망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패권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패권유지 비용은 오롯이 동맹국과 우호국들에 전가하는 트럼프 행정부 외교정책의 최대
    인화점은 중국이 위치한 동아시아다.

     경제전쟁은 이미 군사 분야로까지 확대됐다.
    미국은 7월 들어 중국이 가장 민감해하는 대만해협에 미 항모를 항행시켰다.
    중국도 베트남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 해역에 석유시추선을 보내 양국 전함의 대치를 불렀다. 중국의 첫 동남아 지역 군사기지 개발이 캄보디아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국제 군축체제의 한 축인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에서 지난 2일 공식 탈퇴한 뒤 하루 만인 3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은 “중국 미사일 보유고의 80% 이상이 중거리핵전력 사거리 시스템”이라며 중국을 겨냥한 아시아 중거리
    미사일 배치 의향을 밝혔다.
     존 볼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6일 한국과 일본이 중거리미사일 배치의 대상국임을 밝혔다.

    중국과 러시아의 공개적이고 강도 높은 미국에 대한 공동대응은 동아시아 지정학 질서의 균열을 재촉한다.
    중국은 한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를 적시하며 “이웃 나라가 미국의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협박했고, 러시아도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 7월 말 첫 연합초계비행을 동해에서 펼쳤으며,이 과정에서 러시아 군용기의 한국 독도 영해 침범이 벌어졌다.
     한반도 주변 해역이 미-중 대결의 전장이 될 수 있다는 신호다.

    일본은 동아시아 재편 과정에서 미국과의 군사협력 강화 및 중·러와의 관계 개선이라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일본의 제안으로 시작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기존 동맹 체제에 대한 미국의 해태에 대응한 일본의 자구책이다. 일본은 이를 통해 미-일 동맹에서의 종속적 지위를 벗어나 대등하고 독립된 지위를 노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러-일 평화조약 교섭, 중국과의 관계 개선, 북-일 교섭을 추진하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지난 6월30일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이 있은 지 하루 만에 아베 정부는 대한 수출규제를 감행했다.
    여권의 소식통들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 이후 한·일이 물밑 협상도 제대로 하지 못한 배경에는 북한 문제에 대한 일본의 집요한 훼방에 감정이 상한 한국 쪽의 불신이 있다고 전한다.

    더 근본적으로 이는 기존 한-일 관계 틀의 시효 만료를 말한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기초한 기존 한-일 관계는 기본적으로 미국은 군사안보, 일본은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을 후견하는 체제였다.
    하지만 미국은 과거처럼 군사안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데다, 한국은 몸집이 커져 ‘65년 체제’에 대한 현상변경을
    시도한다.

    결국 과거사 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놓고 일본의 전략적 이해가 한국에 관철되지 않는 상황이 대한국 수출규제로
    촉발된 한-일 관계 악화의 근본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인 경쟁자들인 중·러라는 북방 대륙세력을 견제하는 교두보인 한반도가 자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에 대한 일본 쪽 초조감의 발로다.

    한국도 아시아의 격변하는 지정학적 질서 속에서 미증유의 위기와 기회에 처했다.
    불확실성 시대는 주변 열강의 종속변수로선 생존할 수 없다.
     위기다. 하지만 잘 대처하면 독립변수가 될 수 있다.
    기회다. 재정립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일 관계가 바로 그 징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Awakening via Getty Images




    이안 부루마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한일 관계 갈등의 근원'

    세계적인 일본 연구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지닌 문예 종합지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역대 세 번째 편집장이었으며 바드대학 겸임 교수이자

    동아시아 역사에 친숙한 학자 이안 부루마가 뉴욕타임스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제목은 ‘냉전이 절대 끝나지 않는 곳’(Where the Cold War Never Ended)이다. 이안 부루마는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에서 거주한 바 있다.


    이후 아시아 전역을 여행하며 프리랜서 작가 생활을 하기도 했다.

    쉽게 얘기하면, 그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제삼자다.

    제삼자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합리의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은 가장 친한 친구여야 마땅하다”라며 ”두 나라의 문화와 언어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두 나라의 경제는 단단하게 얽혀 있다”라고 썼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대만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얼마 안 되는 국가라는 점을 지적하며 ”북한의 호전성과 중국의 우세에 함께 맞서야 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부루마 교수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부터 최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하며 촉발한 일련의 무역 분쟁 사태를 서술하고 ”최근의 분쟁은 한국을 침탈한 과거사에 대한 일본 관료들의 진정성 없는 사과, 전쟁 당시 일본의 만행을 과소 서술한 일본의 교과서 개정, 한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적인 일본군 위안부 징집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보수 정부의 태도 등에 다른 또 다른 갈등”이라고 밝혔다.


    이어 부루마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복잡한 역사는 그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4세기 백제와 일본이

     교류한 사실, 중국의 기술을 한국이 일본에 전달한 점, 일본이 16세기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사실 등을차례차례 짚었다.

    이어 그는 일본은 ‘강력한 이웃’인 중국에서 한국보다 멀리 떨어져 상대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은

     더 강력하고 잠재적으로 호전성을 띤 상대들을 막아내면서 한국인들에겐 치열한 민족주의가 자리 잡았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그러나 한편 한국의 엘리트들은 간혹 필요에 따라 혹은 국내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외의

    세력과 협력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비슷한 상황이 현대에 와서도 다시 재현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1965년 한일협정에 사인한 대통령 박정희는 일본 황군에 복역했던 장교 출신으로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은 그를 친구로 생각했다”라며 ”그중 하나는 전범으로 구속되어 기소될 위기에 처했다가 후일 일본의 총리가 된 바 있는 기시

     노부스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국수주의적인 아베 총리가 그의 손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가 흔히 ‘친일파’라 일컫는 한국의 조력자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한국 보수의 멤버이며 탄핵당한 전 대통령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라고 밝혔다.

    기시 노부스케는 패전과 동시에 A급 전범용의자로 구속되었으나 증거불충분 등으로 풀려났다. 

    이어 그는 ”한국의 좌파는 협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엘리트들을 용서한 적이 없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의 우익인 박정희 등에 저항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며 ”좌파인 문재인 대통령이 1965년 협정을 깨뜨리려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단순한 일본에 대한 분개가 아니라 현재 일본의 지도자가 중국과 일본의 노동력을 착취한 혐의까지 받은 전범의 손자라는 사실이 그 이유다”라고 밝혔다.


    이안 부루마는 영미권에서는 ‘근대 일본‘,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등을 쓴 일본학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그

    의 역사 기술에는 동의할 수 없는 몇몇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한일 간 갈등의 근인을 제삼자의 시선에서 살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박세회 sehoi.park@huffpost.kr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비소녀상 모습. 사진은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세계로컬타임즈 DB






    김광진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 9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광진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 9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의철 기자

     


    김광진 “한국과 일본은 지금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 정부·국민, 일본에 잘 대응하고 있다…금방 끝날 싸움 아냐”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본격화된 한일 간 분쟁이 어떻게 귀결될지 예측하기 힘든 상태다. 일본은 끝내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우대국)에서 한국을 배제하면서 확전을 꾀하고 있다.

     한국은 장기전까지 내다보면서 대일전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사실상 '경제전쟁'이 시작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명목상 경제조치지만 확실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은 과거사가 발단의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한일관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일본은 전략물자의 수출을 규제하면서 한국을 사실상 '안보우려국' 취급하고 있다.

    이 사안이 양국의 문제를 넘어 동북아 정세에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 한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경제전쟁'보다는 '역사전쟁'에 가깝다.

    돈의 문제보다는 식민지배 역사와 단절해야 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열쇠를 쥔 당사자는 일본이다."


    일본의 의도와 전망에 대해 복잡하고 다양한 분석이 난무하면서 갈수록 본질을 들여다보기가 어려워질 때,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


     김광진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은 9일 '민중의소리' 인터뷰에서 한일 간 제대로 종결짓지 못한 과거사가 여전히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점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광진 국장은 대학원에서 일제시대와 '친일' 문제를 전공한 역사학도 출신이다. 민족문제연구소(전남동부지부) 사무국장도 지냈다.


     현실의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이를 바로잡는 분야에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지난 19대 국회의원을 지냈을 때는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씨를 "민족반역자"로 지칭했다는 이유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뉴시스




    김 국장은 인터뷰에서 "일본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불만을 빌

    미로 다른 형식을 빌려 보복하는 것"이라며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 이른바 '1965년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 지적했다.


    그는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한 번도 '개인청구권' 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개인청구권을 포함해)

     한일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종결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그래서 모순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한일협정은 병탄조약 등 과거 강압적으로 이뤄진 양국 간 조약 및 협정의 효력에 대한 해석의 모호성을 제공

    으로써, 일본이 침략 역사를 '합법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식민지배가 유효하고 정상적이었다고 가정해야 일본 입장에서는 사과와 배상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김 국장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이중플레이'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일본은 1963년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과,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에 억류

    됐던 일본인들이 1981년 제기한 강제징용 배상 청구 소송에서 미·소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적이 있다"며 "한국에 대해서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고 밝혔다.


    나아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의도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이 가능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국내 정치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있다"며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와 비슷한 일본 중심의 시대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 국장은 한국 정부가 대응카드로 폐기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에 대해서는 "이 협정은 평화헌법을 지키라고 주장해야 하는 한국이 스스로 일본의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해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지소미아 체결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미 체결된 조약을 폐기하는 데 있어서는 '국가적 신뢰성'의 문제를 들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 국장과 진행한 인터뷰의 내용이다.



    "일본 '개인청구권 소멸' 주장은 모순"


    김광진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 9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광진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 9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의철 기자




    질문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촉발된 현재의 한일 간 분쟁 상황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답변 "요즘 '경제침략'이라고 많이들 얘기하는데, 사실은 한일 간 역사논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일본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불만을 빌미로 다른 형식을 빌려 보복하고 있는 거잖아요.

     결국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중이고,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 중요하죠.


    그게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다른 하나는 '1965년 한일협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지점에 대해 한일 간 합의가 종결되지 않은 것이죠.

    양국 간에는 끊임없이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옳고 그르다는 관점에서 딱 잘라서 판단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과거 범죄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으로 충분히 종결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걸 하지 않으니까 문제죠."


    질문 일본이 경제보복 조치의 후폭풍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거사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두 끝났다는 입장을

     강하게 고집하고 있지만, 대법원 판결은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데 방점이 있습니다.

     해석의 문제일까요?


    답변 "정권은 유한해도 국가는 존속되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 때 맺은 그 협정이 우리에게 불리하거나 잘못됐더라도

    국가의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따져볼 수는 있죠. 일단 청구권협정문 그대로만 보더라도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국제법상 잘못된 주장입니다.


    한일협정의 '청구권' 부분은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4조에 따른 국가 간 재산권 처리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

    이고, 특히 일본은 7차례에 이르는 협의 과정에서 한 번도 '개인청구권' 논의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실제 일본쪽 속기록을 보면 '개인청구권은 독립돼있는 것이고, 따라서 협정에서는 국가 간 채무관계에 대해서만 논의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게다가 아베 총리 이전의 일본 정부는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하지 않았어요.

    한일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종결됐다는 주장은 그래서 모순되는 거죠.


    또 하나 중요한 건 일제강점기에 대해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어요.

    당시를 정상적인 병탄 절차를 거친 것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불법적인 강제점령으로 볼 것이냐. 한일 기본협정문에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돼있는데, 여기서 '이미 무효'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모호한 표현을 쓴 거죠. 한국은 병탄조약 등이 당시부터 무효라고 해석하고, 일본은 1948년 한국정부 수립과 이후 한일협정을 통해 무효가 됐다고 주장합니다."



    '식민지배 불법성' 해석에 모호성 남겨둔 한일협정


    지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아베규탄 4차 촛불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모이자 815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아베규탄 4차 촛불문

    화제에서 참석자들이 모이자 815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질문 당시의 해석이 지금까지도 문제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는 거군요?

    답변 "한일 간 협정문 해석에 이견이 있으면 영문본을 따르게 돼 있는데, 그게 "already null and void"에요. 이미

    무효이고 효용가치가 없다는 뜻이지만 모호성이 더해지죠.


    한국은 오래전부터 명백히 무효라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같은 입장을 유지하는 게 맞지만,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극우세력은 '당시에는 유효했다'는 해석을 통해 식민지배의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요.

     일본 입장에서는 식민지배가 유효하고 정상적인 것이었다고 가정해야 사과와 배상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결국 일본이 경제보복의 빌미로 삼은 강제징용 판결은 1965년 한일협정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한일 간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 부분이기도 해요. 저는 이 문제를 국제법상으로 다퉈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1963년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이 자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과,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일본인들이 1981년 제기한 강제징용 배상 청구 소송에서 각각 미국·소련에 대한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적이 있어요.


    다시 말해 자국민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일본이 다른 국가에 개인청구권을 요구하는 거죠. 그러니까 한국에 대해서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명확한 거에요.

    물론 한국도 한일협정을 맺을 때 의도적이든 실수였든 간에, 이걸 맺으려고 계엄령까지 발동해서 국회에서 통과시킨

     거에요.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정상적인 외교협상을 거두지 못한 것은 인정해야겠죠."


    질문 일본 정부가 지금에 와서 이 문제를 걸고 도발에 나선 배경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답변 "물론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일단은 아베 총리가 생각하는 '정치적 이념성'이 주요하게 작동한 것이죠.


    소위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군대를 가질 수 있는 보통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중요한 건 지금의 평화헌법은 일본 다수의 국민이 동의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거잖아요.

    그것을 바꾸려고 한다면 평화헌법에 기초한 사과와 반성이 필요한 것이고, 군대를 갖추더라도 과거 범죄

    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하는 거죠.


     그게 없이는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야망으로 오인될 수 있지만, 아베 총리는 그것을 정치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물론 일본의 선거 이슈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경제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일본으로서는 한국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도 엿보이는 거죠. 따라서 경쟁대열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와 비슷한 일본 중심의 시대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측면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게 자신의 생각만큼 효용성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네요."




    "지소미아는 '자위대=군대' 인정한 꼴, 쉽게 끝날 싸움 아냐"



    김광진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 9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광진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 9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의철 기자




    질문 한국 정부는 일본과 2급 이하의 군사기밀을 공유하는 '지소미아 폐기' 카드를 검토하는 분위기입니다.

    국회의원 시절에 지소미아 체결에 반대했던 입장에서 어떻게 보시나요?

    답변 "미국은 한국보다는 일본을 '적화'의 마지노선으로 삼아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를 완성했고, 그 토대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우선적으로 확장시켜나갔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2014년 한미일군사정보공유 양해각서(MOU), 2016년 지소미아가 체결된 거죠.

    저도 국방위에 있을 때 이 협정에 끝까지 반대했는데요,

    기본적으로 일본의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입장에서 군사협정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닙니까.


    일본에 평화헌법을 지키라고 주장해야 하는 한국이 자위대를 군대로 사실상 인정해버린 것, 그게 지소미아입니다.

    다만 체결되기 전에는 이게 반대할 수밖에 없는 협정이지만, 이미 한일협정과 동일하게 체결된 협정이잖아요.

     아무리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식물대통령 상태에서 했더라도 대한민국과 일본이 국가 대 국가로서 맺은 협정인 거죠.


    그래서 이걸 중단시키려면 한국이 국가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감이 있는 겁니다. 협정을 맺기 전과 후의 입장은 다른

     무게감을 갖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금 일본과의 협상카드로 우리가 지소미아 폐기를 꺼내고 있는데, 우리가 먼저 이걸 폐기하겠다고 하는 게 과연

     우리에게 유리한 전술인가 하는 의문은 듭니다.


    일본이 한국에 수출하는 전략물자가 잘못 쓰일 염려가 있으니 수출을 통제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일본이 지소미아 폐기를 선언해야죠.

    전략물자 수출도 못하겠다는 나라와 2급 군사기밀을 어떻게 공유하겠냐고 일본 스스로 선언하는 게 맞죠.

    그래서 지소미아 폐기 여부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효용가치'만을 놓고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봅니다."


    질문 현재 일본의 조치에 대응해나가는 문재인 정부와, 자발적 불매운동을 벌이면서 국제 여론전에 한 몫 보태는 시민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모든 국민이 인식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촛불혁명 이전과 이후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국민의 정치적 성숙도가 '공동의 지향점'이라는 것으로 발전한 것은 촛불 이후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와 국민들이 함께 잘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들이 명확하게 지적하고 양국이 함께 나아갈 길을 보여줘야죠.

    이 싸움이 쉽게 끝날 싸움은 아닙니다. 단순히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철회한다고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정상적으로 사죄와 반성을 하고 국제법적 배상까지 해야 끝나는 것이지, 100년이든

     200년이든 시간이 지나서 식민지의 아픔을 경험한 세대가 사라진다고 없어질 문제는 아닌 거죠. 그래서 이 긴 싸움에 국민들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 더욱 의미가 크다고 봐요."





    지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아베규탄 4차 촛불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아베 규탄 손피켓을 들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아베규탄 4차 촛불

    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아베 규탄 손피켓을 들고 있다.


    김철수 기자


      

    신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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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로 각의를 열고 한국을 '백색국가' 명단

    에서 제외하기로 의결한 2일 강남구 관계자들이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서울

    테헤란로에 게양된 만국기 중 일장기를 철거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일본은 적인가







    [김정남 칼럼] 지난 7월 4일, 일본 정부가 반도체 등의 핵심소재 3가지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한 데 이어 8월 2일에는 한국을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에서 제외함으로써 이제 한국과 일본은 사실상 경제전쟁에 돌입한
    상태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바로 그날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과 함께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8월 5일에는 “남북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단숨에 일본경제를 따라잡을 수 있다”면서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이 지원하는 쌀 5만 톤의 수령마저 거부하고 미사일 도발을 거듭하는 북한을 놓고 평화경제는 뜬구름 잡는 얘기
    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하나 되어 싸워야 하고, 그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것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싸우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며, 험하고 살벌한 모습으로 국민 내부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싸우기 전에 이미 패한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또한 증오와 적대를 내세우기보다는 지면서 이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다. 8·15를 맞이하면서 느끼는 소회다.

    잃어버린 한국의 도덕적 우위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보복 조치를 하게 된 이유를 이리저리 구차하게 돌려 말하더니 8월 6일, 아베는 징용문제를
    놓고 한국이 협정을 지키지 않아 양국 간의 신뢰가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보다 앞서 문재인 정부가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 때 이루어진 한일간의 위안부 문제 합의를 파기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참에 경제적으로 한국의 기를 꺾어 놓자는 계산이 있을 수 있고, 정치적으로는 아베의 숙원이라 할 헌법개정이라는 정치목표와 연결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요시다 쇼인, 이토 히로부미 등 조선 침략 이데올로기의 맥을 잇고 있는 아베한테 이런 보복을 당하는 것은 아프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틈을 타고 더욱 치밀하게, 정밀타격을 준비해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대응은 무능해 보이고 미덥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일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느끼고 겪은 한두 가지 경험을 전하고 싶다.
    아마도 1993년 1월쯤이었을 것이다.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YS와 재야인사들과의 면담이 63빌딩에서 있었다.
     자리에서 홍성우 변호사가 그때 막 떠오르기 시작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에 돈을 내서 피해를 보상
    하라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우리도 이만큼 살 만하게 되었으니, 그분들의 생계는 한국정부가 스스로 책임지고, 일본 정부는 다만 그 진실을 밝히고 그 역사적 죄과를 사과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소견을 밝혔다.

    YS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3월 13일, YS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한국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태조사와 생계대책을 마련하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스스로 밝히고 역사와 세계 앞에 사죄하라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문민정부가 막 출범한 직후라 그 발언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로부터 얼마 뒤 주일 한국대사가 나를 찾아와 자신의 외교관 생활 중 일본 앞에서 일찍이 그렇게 당당해 본 적이
    없었노라던 모습이 지금도 새롭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도덕적 우위마저도 잃고, 경제보복까지 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청년과 일본청년이 손잡는 날

    2008년 아니면 2009년이었을 것이다.
    YS가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내가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됐다.
     도쿄는 물론 오사카와 교토, 나라까지 들렀는데 나이 든 교포들이 때때옷을 차려입고, 전직 대통령과 사진 찍고 자기들이 손수 만든 떡과 잡채와 김치 등을 들고 와서 대접하던 그 따뜻하고 눈물겨운 정경들이 아련하다.

    그때 와세다 대학에서 YS의 특강연설이 있었다. YS는 청중들 앞에서 “나는 일본을 원수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내가 정치인이 되고 나서야, 일본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야 할 이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통령 재임 중 잘한 것 하나 있다면 나는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유치를 꼽고 싶다.

    한국과 일본의 2천 년 역사에서 이룩한 최초의 협력이 2002년 한일월드컵이었다.
    내가 죽을 때 한국의 청년들을 향해 우리들의 이웃인 일본의 청년들과 손에 손잡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진보를 향해 나가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일본이 지난날의 식민지배와 착취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때 일본은 도덕적 대국으로 거듭날 것이며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은 기꺼이 손잡고 미래로, 세계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한국 민주화 투쟁의 고비고비마다 일본 시민사회의 양심으로부터의 지지와 협력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일본 안에서 일본 정부를 향해 “한국이 적인가”를 묻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김정남

    출처 : 금융소비자뉴스(http://www.newsf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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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동구 도로변에 조성된 '노 아베' 현수막 거리./사진=뉴스1(민중당 울산시당 제공)


    울산 동구 도로변에 조성된 '노 아베' 현수막 거리.


    /사진=뉴스1(민중당 울산시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