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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의 진흥왕순수비' 감악산비 글자, 350년 만에 읽어냈다

도토리 깍지 2019. 9. 24. 09:42



   





                     





'제5의 진흥왕순수비' 감악산비 글자, 350년 만에 읽어냈다





“광(光), 벌(伐), 인(人)…. 감악산 비석에서 몇자 읽었어요.”

얼마전 서예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대전대 서화연구소책임연구원)와 연락을 취하던 중 ‘감악산 고비 운운’하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그러면서 손 박사는 “마침 삼국시대 석비와 관련된 논문을 썼노라”면서 오는 30일 곧 게재될 학술지 논문(<한국사상과 문화> 99집)을 보내줬다.

 손 박사는 논문에서 감악산비를 진흥왕순수비인 북한산·황초령·마운령비와 함께 진흥왕대(재위 540~576) 혹은

 진평왕대(579~632)에 조성된 신라고비로 분류해놓았다.













기자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10여 년 전 감악산고비가 ‘제5의 진흥왕순수비’(앞서 거론한 3곳과 경남 창녕의 진흥왕척경비 포함)일 가능성을 취재

했던 경험 덕분이었다.

 그런데 손 박사는 “예전(1999년)에 감악산 정상에서 뜬 비석탁본에서 몇 자를 판독했다”는 말을 꺼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왜냐면 감악산비는 글자는 있었지만 판독할 수 없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왔기 때문이다.


조선 중후기의 문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은 1666년(현종 9년) 감악산 정상에서 올라 “석단 위에 비석은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됐다”(<기언> ‘하·산천 상·감악산기’)고 썼다.

1982년 동국대조사단이 학술조사를 벌였지만 어렴풋 12~13자의 자흔(글자흔적)만 확인됐다.








감악산비문에서 등장하는 벌(伐)자는 중국 감숙성 무위에서 확인된 무위의 무덤에서 출토된 ‘무위의례’ 목간의 ‘벌’자와 유사하다. 가운데 一자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가있다. 이런 서법은 6세기대 신라고비에서 흔히 나타나며 삼국시대가 끝날 무렵엔 사라진다.   |손환일 박사 제공



감악산비문에서 등장하는 벌(伐)자는 중국 감숙성 무위에서 확인된 무위의 무덤에서 출토된 ‘무위의례’ 목간의 ‘벌’자와 유사하다. 가운데 一자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가있다.

 이런 서법은 6세기대 신라고비에서 흔히 나타나며 삼국시대가 끝날 무렵엔 사라진다. |손환일 박사 제공          


당시 동국대 조사단의 보고서는 “북한산 순수비와 외관 및 규모 면에서 이상하리만치 흡사하다”면서 “그러나 당시

임창순·고병익·황원구·남도영·이병도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비문을 판독하려 했지만 글자의 흔적만 겨우 12~13자

확인했을 뿐”이라고 썼다.


 이 보고서는 “삼국시대 고비는 틀림없지만 ‘기적적으로’ 새로운 자료나 판독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판단은 유보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해~임진강~서울 축선에 자리잡고 있는 감악산 정상에 우뚝 선 감악산비. 글자가 마멸된 몰자비로 알려져 왔다. 신라의 순수비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현재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돼있다. 국가 지정문화재 승격이 시급하다.




황해~임진강~서울 축선에 자리잡고 있는 감악산 정상에 우뚝 선 감악산비.

글자가 마멸된 몰자비로 알려져 왔다.

신라의 순수비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현재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돼있다.

국가 지정문화재 승격이 시급하다.          


이렇듯 최소한 350년 넘게 ‘몰자비’로 인식됐던 감악산 비석에서 몇 자를 읽어냈다면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어떤 글자냐”고 되물었더니 손박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석자, 즉 광(光)자와 벌(伐)자, 인(人)자를 표시한 자료를 보내주었다.

기자가 “삼국시대 글씨체가 맞냐”고 물었더니 손 박사는 “예서 기법이 가미된 삼국시대 해서체가 맞다”고 확인했다.


“감악산비의 ‘벌(伐)’자를 보면 가운데 一자 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갔는데, 이런 필법은 삼국시대가 지나면

없어집니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국시대땐 기마부대가 한국전쟁 땐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국군이 건너올만큼 수심이 얕은 지점이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국시대땐 기마부대가 한국전쟁 땐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국군이 건너올만큼 수심이 얕은 지점이다.      




    


손 박사는 “도드라지게 구별되는 글자만 3개 찾은 것”이라면서 “묻어두었던 감악사비 탁본을 꼼꼼히 들춰보아 글자를 더 읽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판독 가능한 글자 중에는 ‘중(中)’자와 ‘김(金)’자도 있다고 전했다.

손 박사는 “겨우 몇 자를 읽은 것으로 전체적인 석비 내용과 의미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판독한 ‘벌(伐)’자는 의미심장한 글자다. 다른 나라의 땅을 정벌했다는 의미이거나, ‘이벌찬’ 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다.

손 박사는 “관등명이라면 앞쪽이나 뒤쪽에 보이는게 신라 고비의 상례”라며 “비석의 한가운데서 보인 감악산비의

 ‘벌(伐)’자는 ‘어느 땅을 정벌했다’는 의미의 동사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신라의 임금(진흥왕 혹은 진평왕)이 영토를 임진강 유역까지 넓힌 기념으로 새 영토가 훤히 보이는 감악산에 올라 비석을 새긴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북한산과 창녕, 황초령, 마운령의 경우를 보라. 한결같이 중요한 국방시설 인근지역이다.


 창녕비(561년) 인근의 화왕산성은 낙동강 남쪽 의령과 함안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고, 마운령비 인근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잇는 통로를, 황초령비 인근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잇는 통로를 각각 통제하는 곳이다.

물론 북한산비가 있는 북한산성은 개성과 서울을 잇는 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요충지다.


감악산비는 어떤가. 감악산 앞에는 삼국시대부터 요충지였던 칠중성이 버티고 있다.

“638년(선덕여왕 7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들이 산골짜기(감악산)로 들어갔고, 대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선덕여왕조’)는 기록이 있다.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년·고구려 보장왕 19년) 고구려·신라간 전투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신라의 칠중성 현령 필부가 고구려군에 맞서 20일간이나 성을 지켰다,

 고구려가 포기하고 퇴각하려 했지만 반역자 대사마 비삽이 은밀히 고구려와 밀통해서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공격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고구려군이 화공(火功)으로 공격했다.

필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맞아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때까지 싸우다 죽었다.


”(<삼국사기> ‘열전·필부전’)








감악산 정상에서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감악산 정상에서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1951년 4월 이곳은 영국군·중국군의 치열한 국제전쟁터가 된다.

캐슬고지로 명명된 칠중성을 지키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중국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세를 3일간이나 지연시켜 중국군의 서울 재점령을 막았다.


멀게는 1400년 전부터 가깝게는 60여 년 전까지 칠중성과 감악산이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이곳을 흐르는 임진강이 유난히 얕아 사람은 물론이고 말(삼국시대)과 탱크(한국전쟁)가 도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악산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는 개성 송악산과 남으로는 삼각산까지 훤히 조망하며 통제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북한산 비봉 정상(556m)에 순수비를 세웠다면 황해도~한강을 잇는 지름길인 임진강 유역을 확보한 뒤 바로 감악산 정상에 같은 성격의 비석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짙다.

아닌게 아니라 감악산 비석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너무도 흡사하다.    


감악산비는 높이 170㎝, 너비 74㎝, 두께 15㎝이다.

북한산비는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 154㎝, 너비 69㎝, 두께 15㎝이다.

석재도 둘다 화강암이다.

 나중에 얹어놓았다는 덮개돌(감악산비)을 빼면 두 비의 형태와 규모는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어느 누가 명문도 없고, 또 별 의미도 없는 비석을 해발 675m 산 정상에 올려 놓았겠는가.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은 “감악산과 칠중성은 신라가 소사(小祀·작은 규모지만 국가차원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했다.


 신라는 초창기 왕경(경주)인근에서 대사(大祀)를 지냈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사(中祀)-소사 등으로 국가제사를 추가했다. 북한산도 소사를 지낸 곳이다.

따라서 감악산 소사는 북한산과 함께 신라가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과정, 즉 6세기 중엽~7세기

 초엽 추가한 제사일 가능성이 짙다. 이


 시기는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강과 임진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까지 영역을 넓힌 기념으로 순수비를 세운 시기와 일치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강원 철원 고석정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진솔왕(진평왕 비정)의 비석’에 착안해서 감악산

 고비 역시 진평왕(재위 579~632)순수비로 여기기도 한다.


진평왕이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차지한 뒤 할아버지(진흥왕)를 벤치마킹해서 순수비를 건립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가설이다.

그렇다면 상당부분 판독이 가능했던 다른 순수비와 달리 감악산비는 왜 그렇게 ‘몰자비’로 전락했을까.


 오랜 풍우난설로 자연 훼손된 이유도 클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신라시대부터 왕실 및 공경사대부는 물론 일반백성들의 기도처였던 것도 주요 원인이 됐을 것이다. 정상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훼손했을테니까….

이 대목에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했을 때의 기록을 떠올린다.


 19세기초까지 북한산비는 ‘무학대사비’나 혹은 ‘나말의 고승인 도선국사비’로 구전됐다. 그러나 1816년(순조 16년) 7월 북한산 비봉에 오른 추사가 비석의 탁본을 떠내 살펴본 결과 진흥왕의 ‘진(眞)’자와 순수(巡狩), 경(境)자를 읽어냈다. 추사는 “1200년만에 무학비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완당전집> 1권)고 기뻐했다.


감악산비는 어떨까.

지금까지 ‘몰자비’로 인식됐고, 지금에 와서는 더더군다나 읽기 어렵게 된 비석이 됐지만 추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 1999년까지의 탁본이 남아있고, 또 한 연구자가 읽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진 몇글자를 찾아냈으니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얼마전 3D 스캔 이미지를 활용해서 판독이 불가능했던 포항 중성리비 글자들을 읽어냈다.


감악산비도 최첨단 기술로 몇글자 더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진흥왕(진평왕) 순수비임을 알리는 진(眞)자나 순(巡), 수(狩), 경(境) 자같은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면 상황 끝이다.

무엇보다 산정상에서 자연의 풍우난설(風雨亂雪), 인공의 손길로 훼손되는 감악산비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지금

 감악산비는 파주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됐을 뿐이다.


삼국시대, 그것도 진흥왕(진평왕) 순수비로 추정되는 비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두지않고 저렇게 둘 것인가.

후손들의 무심이 안타깝기만 하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감악산 정상 산비. 옛날에는 설인귀비, 빗돌대왕비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감악산비로
안내하고 있다.






허목 <감악산紺嶽山>] “ 산은 모두 석봉…정상엔 비석 산석 사이 석굴에 노자像”



감악산(675m)은 경기 5악 중의 하나다. 경기 5악은 지정 당시 행정구역 기준으로 개성 송악산,
안양 관악산, 포천 운악산, 가평 화악산이다.
감악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여러 모로 족보 있는 산이다.
 삼국시대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삼국사기>권32 잡지 제사편에 ‘3산·5악 이하 전국의 명산·대천을 나눠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소사는 상악霜岳(현 강원도 고성), 설악, 화악, 겸악鉗岳(칠중성: 지금 양주에 있는 감악산), 부아악, 월내악, 무진악,
 서다산, 월형산, 도서성, 동로악, 죽지, 웅지, 악발, 우화, 삼기, 훼황, 고허, 기아악, 파지곡원악, 비아악, 가림성,
가랑악, 서술 등 전국 24곳이 해당한다.

여기서 겸악이 바로 감악산이다. 겸악, 즉 감악산이 어떤 산이기에 소사로 지정됐고, 왜 겸악이 감악산이 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이 지역은 난은별이라는 백제의 영토였다.

이후 고구려가 빼앗아 낭비성이라 했고, 신라의 영토가 되자, 신라는 칠중성이라 했다.
소사에 나오는 칠중성 바로 그곳이다.
 성의 주위가 2,000척이 넘는 첩첩의 깊은 곳이라 하여 칠중성이란 지명이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고려 때 적성현으로 바뀐다.

적성이란 뜻은 이곳에 성城이 많아서 명명됐다.
칠중성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곳은 칠중성뿐만 아니라 칠중하七重河라고도 불렸다. 연천의 대탄大灘(지금의 한탄강), 적성에서 술탄戌灘, 파주에서 광탄廣灘(지금의 문산천), 장단에서 사천이 임진강으로 합류할 정도로 지류가 많아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많은 성과 하천이 칠중성과 칠중하란 지명을 만든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칠중성은 그 지명만큼 삼국시대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신라가 영토를 확장한 성덕여왕 때 고구려군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러 쳐들어오자 주민들은 감악산으로 대피했다.
 이에 여왕은 알천을 보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문무왕 때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전투를 벌일 때도 칠중성으로 진격로를 개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감악산은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 집결지였다.
 6·25전쟁 때도 어느 지역보다 격전을 치른 곳이지만 남북 분단 이후 그 기능이 사실상 사라졌다.









감악산 정상 군사기지 옆 정자에서 북쪽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견불사는 지금 봉암사가 가장 유력한 듯

그 감악산의 원래 이름은 겸악이었다.
 ‘鉗岳겸악’은 칼같이 우뚝 솟은 바위산을 가리킨다.
남쪽 사면에 있는 임꺽정봉, 병풍바위 등이 칼같이 우뚝 솟은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북쪽 사면은 남쪽과는 다르게 육산의 형세를 띠면서 일부 가파른 암벽이 있다. 그 일부 암벽이 검붉은색으로 비쳐 ‘紺’자가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허목도 감악산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있다.

‘저녁에 견불사에 머물고, 새벽에 절정에 올랐는데 그늘진 벼랑에 급신정汲神井이 있다.
그 위에 감악사가 있어, 석단이 3장丈이다. 단 위에는 산비山碑가 있는데, 하도 오래되어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곁에 설인귀 사당이 있다. 혹자는 왕신사라고 하니, 음사이다.
그 신이 능히 요망한 짓을 부려 화복을 가져오므로 사람들에게 제삿밥을 얻어먹는다고 한다.’

정상에 설인귀 사당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다. 단 위에 있는 산비도 몇 십 년 전까지는 ‘설인귀비’라고 소개한 안내판도 있었다.
 지금은 ‘감악산비’로 안내하고 있다. 빗돌대왕비, 진흥왕순수비, 광개토대왕비라는 주장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름들이다. 빗돌대왕비는 사람들이 돌에 정성을 다해 빈다고 해서 명명됐다고 전한다. 

그런데 감악산 산신이 설인귀라고한다.
설인귀는 사실 신라가 통일을 이룬 뒤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호국신으로 좌정시킨
 성격이 짙다.
 그의 용맹성 때문이다.

 설인귀는 당 태종과 고종 시기에 활약한 장수로 용문龍門(지금의 산서성 하진)에서 농민 출신으로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마와 궁술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44년 당태종이 고구려 침입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자 장사귀張士貴의 부하로 지원하면서 장수의 길로 들어섰다.

 645년 요동 안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전격 발탁됐다.
661년 천산天山 인근의 위구르 연맹과 전투를 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장군의 화살 셋이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길게 노래하며 관문으로 들어선다”는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고
전한다.

설인귀는 한반도를 다스리기 위한 행정조직으로 안동도호부를 뒀는데, 초대 도호를 맡았다.
 지금도 감악산 주변에는 설인귀 관련 지명이나 동굴이 남아 있다.
감악산 임꺽정봉 바로 아래 설인귀굴이 있다.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고 전해지는 동굴이다.

임꺽정굴이라고도한다. 설인귀굴은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을 정도로 깊다.
깊은 만큼 어두워 내려갈 수도 없다.
밧줄을 묶어 놓았으나 위험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설마치薛馬峙고개는 설인귀가 말을타고 달리던 고개라고 전해진다.
어룡고개, 어영고개라고도 하는데, 왕이이곳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감악산의 신성성이나 중요성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태조실록>3권 1393년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편에 ‘이조에서 경내의 명산·대천·성황·
해도의 신을 봉하기를 청하니, 송악의 성황城隍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안변·완산의 성황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무등산·금성산·계룡산·감악산·삼각산·백악白嶽의 여러산과 진주의 성황은 호국백護國伯이라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의 신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大司成 유경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예조에 명하여 상정한
것이었다’고 나온다. 지리산과 격을 같이할 정도였다.







미수 허목 초상화.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허목은 누구인가?

미수 허목은 송시열과 예학에 관해 논쟁한 남인의 영수로서 조선 중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끈 인물이다.
허목은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개성의 서경덕에게 학문의 연원을 두고 있으며, 젊은 시절 아버지 허교의 임지를 따라
창녕·의령 등에도 머물러 남명 조식의 학문적 영향도 받았다. 따라서 화담학파와 남명학파의 사상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 

허목은 도가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집 <기언>에 산수를 유람하고 남긴 기록이 상당수 있으며, 그가 73세에 쓴 <청사열전淸士列傳>이 대표적이다. 정상에서 봤다는 무자비도 도가적 성향의 비석이다.
 자연에 대한 감탄을 글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도가적 성향은 <감악산>에서도 그대로 보여 준다.
‘신사의 곁 산석 사이에 석굴이 있어, 돌로 만든 노자를 보았다.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뒤덮고 있으며 손을 모으고 있어서 마치 신통력이 있는 듯하다.’
후반부에는 노자와 공자에 대한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감악산에서 그 노자를 보고 유람록의 절반 이상을 노자와 공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청사열전>은 실존 인물인 김시습, 정희량, 정렴, 정작, 정두 5명에 대한 일생을 열전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속을 버리고 자연에 은둔하면서 자신의 행실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도 세상에 대한 자기 표현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허목도 실제 경기도 연천에서 상당 기간 은거했다. 그가 연천에서 기거할 때 감악산을 두 차례 올랐던 것이다.

연천을 고향 삼아 자연에 은둔

허목의 학문은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근기近畿남인의 계보 중 한 맥이기도 하고, 조식→정구→허목
으로 이어지는 북인적 기반도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허목은 북인과 남인의 학문을 고루 수용한 기반 위에서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이나 정약용 같은 남인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 실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 학문적 수양의 터가 바로 연천인 것이다.







차문성 파주 향토문화연구 소장이 미수 허목이 유람했던 동선을 지도를 보며 추론하고 있다.







봉암사 아래 미타사는 두 계곡이 합류되는 지점이라 암벽이 더욱 가파르고 아름답다.






허목은 감악산 어디로 올랐나?

허목은 <감악산>에서 유람 동선을 견불사→급신정→감악사→산비(무자비)→설인귀 사당(왕신사)→석굴(노자상)→
운계사→운계폭포로 기술하고 있다.

그가 연천에 머문 시기는 총 두 차례. 관직으로 진출하기 이전(1640년대 중반까지)과 관직에 있다가 다시 연천으로
 돌아와 자연에 묻혀 살았던 시기다.
 두 번째 내려온 시기는 1662년. 그가 감악산에 오른 시기는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 그렇다면 연천에서 머물며
감악산에 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가 감악산에 도착해서 머문 장소는 견불사.
연천에서 임진강을 따라 내려와 당시 포구가 있는 어유지리(마을)에 내려 걸어서 감악산으로 접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감악산 주변에 있는 사찰은 설마리의 범륜사, 객현리의 봉암사와 미타암, 수월사 등이고, 당시 있었다고 전하는
 사찰은 운계사, 감악사, 신암사, 운림사 등이다.
 운계사는 지금 범륜사로 중건됐다고 파주 향토사학자들은 말한다.
미수가 머문 견불사는 감악산 북쪽에 있는 사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현재 객현리나 그 주변일 가능성이 높다. 객현리 봉암사와 미타암이 견불사였거나 그 터에 중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곳 스님에게 물었으나 견불사란 명칭은 전혀 알지 못한다.
 지역 향토사학자들도 금시초문이라고 한다. 동행한 파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차문성 소장은 “견불이 사찰이 아니고 당시 지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지명이라 하더라도 견불을 아는 사람은 없다.
유람록의 전후 맥락으로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허목은 견불사에서 머물다 새벽에 단숨에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늘진 벼랑에 급신정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북쪽에서 정상까지 가장 빠른 코스는 지금 봉암사가 있는 곳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봉암사 스님은 “봉암사를 중건할 때 많은 기와와 사찰유물들이 출토됐다”며 “그중에 절구통도 있다”고 지금 보존하고 있는 절구통을 보여 줬다.

봉암사에서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길이 제일 유력하다. 하지만 급신정은 찾을 수 없다.
감악산 정상은 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다. 설인귀 사당이나 감악사 등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감악산비가 3단 위에 세워져 있다.
 과거 설인귀비, 혹은 빗돌대왕비, 무자비라 불렸던 그 비석이다.
혹자는 진흥왕순수비라고도 한다.







미타사에는 동굴이 있어 그 속에 석불과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지금 임꺽정굴이 허목이 가리켰던 석굴 추정 

허목이 가리켰던 ‘신사의 곁 산석 사이석굴’을 찾아본다.
정상 주변에 있는 석굴은 지금 임꺽정굴이라 불리는 동굴이 유일하다.
입구는 조그만데 안쪽은 널찍하다. 입구에 내려갈 수 있도록 밧줄을 걸어놓고 있다.

아슬아슬한 암벽 사이라 동굴로 들어가는 게 엄두가 안 날 지경이다. 허목이 가리킨 동굴이 이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맞는다면 그가 이 동굴을 어떻게 들어갔는지 궁금할 정도다.
 그는 여기서 노자와 공자에 관해서 한참 묘사한다.전체 유람록의 절반 이상 분량이다. 

‘(전략) 노자가 살았던 해로부터 공자의 때까지는 160년이다.
태사 첨까지는 200여 년이다. 대개 노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 석기를 고찰하건대, 성화 4년에 등신상을 세웠다고 한다. 돌 위에 앉아 석이石茸를 채집했다.

<본초>에는 영지가 명산의 바위 벼랑에 난다고 했다.’ 이후 미수는 그 서쪽 석봉 아래 운계사로 해서 운계폭포를 살펴본 후 봉대 서쪽에 옛날 은자의 자취를 보고 내려와 그 사실을 기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운계사는 지금 범륜사로 거의 검증된 사실이고, 운계폭포도 그 계곡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는 운계폭포 주변을 청학동이라 했다는 문헌까지 나온다.
<유운계기>와 <우계집>에 기록돼 있다.
감악산뿐만 아니라 운계폭포까지 제법 풍광을 내세울 정도였던 듯하다.






       




글 박정원 편집장

  • 사진 이신영 기자

  • 2019.04.03일자 기사 재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