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주년 5·18] 광주교도소 암매장과 5·18 왜곡의 진실을 캔다② 5·18 ‘교도소 병력배치요도’ 40년만에 확인 신군부, 8년 후 시민 사망지점 지우며 왜곡 희생자들, 귀가하다 광주~담양도로서 피격 광주교도소, 최근 미확인 유골 261구 발견
전두환, "시민들 집요하게 교도소 공격"
“(80년) 5·18사태 때 시위대의 공격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였다.
그곳은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전두환(89) 전 대통령이 2017년 4월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 쓴 내용이다.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는 5·18 당시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을 “폭도”라 하며 ‘교도소 습격설’을 주장해왔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북한이 광주에 있는 고정간첩망에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포착됐다”라는 북한군 개입설도 담겨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이란 5·18 나흘째인 80년 5월 21일부터 무장한 시민군이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이다. 신군부 측에서 5·18이 폭도에 의한 소요사태라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근거로까지 악용해온 사례이기도 하다.
5·18 당시 시민들의 교도소 습격사건의 허위성을 담고 있는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가 확인한 3공수 내부자료(원본)에는 시민들이 사망한 피격지점이 표시돼 있지만(왼쪽 2개) 88년 광주청문회 당시 제출됐던 자료에는 피격지점이 삭제돼 있다.
[사진 전남대 5·18연구소] 프리랜서 장정필
교도소 공격하다 사망?…담양 가던 민간인
하지만 40주년 5·18기념식을 앞두고 교도소 습격이 허위임을 증명하는 신군부 측 문건이 나와 주목된다.
중앙일보가 지난 14일 입수한 ‘(광주)교도소 지역 병력배치 요도(5·18)’에 따르면 당시 교도소 앞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피격 위치는 교도소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확인됐다.
당시 교도소에 주둔한 계엄군이 표기한 사망지점은 교도소와 멀리 떨어진 광주~담양 간 도로 한복판이었다. 더구나 이들 사망지점은 교도소 외벽에서도 100m 이상 떨어져 교도소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외부에 2층 높이인 5m짜리 장벽에 둘러싸인 데다 교도소 입구 밖 50m 지점부터는 장갑차와 소방차·트럭 등으로 철저히 차단됐다. 계엄군이 '피격지점'이라고 표기한 지점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제 계엄군이 "시민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주장한 80년 5월 21일 오후 7시30분에는 광주교도소 앞에서 4명이
총격을 당해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당시 공수부대에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광주에서 볼일을 보고 귀가하던 담양 주민으로 확인됐다.
담양에 있는 집에 가려다 계엄군에게 희생된 민간인이 훗날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둔갑한 것이다.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이 기관총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광주교도소, 장갑차까지 배치된 철옹성
신군부가 강조해온 ‘교도소 습격설’은 5·18이 끝나고 8년이 지난 뒤 갑자기 사실처럼 처음 등장했다.
88년 국회청문회 당시 공개된 국보위 합동조사단의 보고서에 ‘(80년) 5월 21일 12시20분부터 익일 5시까지 시민군
광주교도소 공격’이란 내용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앞서 5·18 직후인 80년 6월 작성된 국보위 보고서에는 정작 ‘교도소 습격’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 청문회 때 함께 공개된 ‘교도소 병력배치 요도’는 시민들 피격지점을 삭제함으로써 되레 교도소 습격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이용했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교도소 습격사건이 나중에 신군부가 꾸며낸 허위
사실임을 밝히는 핵심 증거가 40년 만에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문서에 남은 병력배치 현황도 교도소 습격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계엄군이 장갑차 등 핵심 병기와 버스·유조차 같은 차단막을 교도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도로에 집중해놓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계엄군의 이날 작전 자체가 교도소 방어가 아닌 광주~담양 간 도로를 차단하는 데 맞춰졌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보고 있다.
첫 정부 공개요청…비공개 처리 정보도 모두 공개 발포명령자 등 주요 쟁점 사항은 없어 美대사 전두환 면담 공개…全 "12·12, 박정희 암살 조사 위한 것" 아휘성 계엄사령관 "통제 안하면 베트남될 수"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우리 정부의 정보공개 요청에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미국 기밀 문서가 일부 공개됐다.
한국 정부가 미 측에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정보 요청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정부는 이를 발판 삼아 앞으로 진상규명 작업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입장이다.
◇美 5·18 관련 자료 일부 공개
15일 외교부에 따르면, 이날 미측이 공개한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기밀 문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웹사이트에 공개됐다.
미측이 공개한 자료는 총 43건, 143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대부분 주한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발송한 전문이다.
이번 자료 공개는 지난해 11월 우리 정부가 외교 경로를 통해 미측에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문서의 비밀해제 검토를
공식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측에 이 같은 요청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한데 이어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 제정으로 진상규명 조사 작업의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 정보 요청의 배경으로 풀이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면서 “시민단체 의견을 수렴해서 미국에 요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美대사, 전두환 만남 눈길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내용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12·12 쿠데타 직후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만남,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뒤 최광수 비서실장과 나눈 대화, 그리고 5·18 당일 이휘성 계엄사령관과
나눈 대화 등이다.
전 사령관은 당시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행동이 쿠데타나 혁명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며, 개인적인 야심은 없다고 해명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 사령관을 만난 뒤 “최소 10일 전부터 군사 반란을 조심스럽게 계획한 것을 보이는데, 전두환은
이를 철저하게 감췄다”고 전했다.
그는 전날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신군부 세력을 ‘영턱스’(Young Turks)라고 표현하며, 젊은 투르크 장교들의 군사 반란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17일 최광수 비서실장을 만나 사태를 원만히 해결할 것을 조언했지만, 최 실장은
며칠내 최규하 대통령이 중대 발표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현 상황과 군부가 학생들에 대한 온화한 정부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을 들어 계엄령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튿날 광주에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이 이뤄진 후 이휘성 계엄사령관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이 사령관은 “사람들은 길거리의 학생들과 경제 악화에 대해 우려하며 왜 계엄군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같은 목소리는 조직화되고 심각해지는 학생 시위가 일어난 이후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이를 통제하지 않을 경우 한국이 베트남과 유사한 방식으로 공산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핵심쟁점 정보없어…국방부 문서 확보 관건
다만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는 5·18민주화운동의 핵심쟁점인 발포명령자, 지휘책임자 등에 대한 정보는 담기지 않았다. 공개된 내용 또한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의 회고록을 통해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 대다수다.
그동안 계엄군의 진압작전과 관련해 한미연합사 또는 주한미군과 협의 또는 사전 인지 가능성이 큰 만큼 미국 측에
관련 문서가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5·18 민주화운동의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 국방부나 백악관에서 생산된 문서 확보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역시 향후 관련 자료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우선 미측이 이번 우리 정부의 공개 요청에 전향적으로 협조했다는 부분에서도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정보제공자 및 출처를 보호하기 위해 비공개 처리됐던 부분이 모두 공개되면서 추가 증언 확보 등 향후
조사 작업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날 전에 자료를 준 것은 굉장히 우호적인
제스처“라면서 ”자료 확보의 첫 단계로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사진=연합뉴스)
5·18 美비밀문서 공유 첫발…발포 명령자 찾아낼까
143페이지 미국 측 문서 전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공개 완전한 형태 비밀해제 첫 전달 사례…향후 진상규명 협조할 길 열려 전두환 "개인적 야심 없다"…신군부 기만행위 추가로 드러나 군사정권 거치며 사라진 5·18 '미싱링크' 확보할 가능성 기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미국 측의 비밀 해제 문서가 우리 정부에 처음으로 공식 전달되면서 발포 명령 지휘체계 등
5·18의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질지 기대된다.
◇'신군부 세력 정권 찬탈~광주 학살' 경과 담긴 미국 비밀문서 공유
외교부는 지난 12일 미국 측으로부터 전달 받은 43건 143페이지 분량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문서(사본)에
대한 검토 작업을 거쳐 15일 '5·18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했다. 이들 문서는 부분적으로는 이미 공개된 것이지만, 이번에는 기존에 누락됐던 비밀해제 부분까지 포함된 완전한 형태로 우리 측에 전달됐다.
주로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형태의 이들 문서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이후 이듬해 5월 광주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의 경과와 미국 측 정세
판단이 담겨있다.
◇당시 미 대사, 전두환 신군부를 야심많은 "Young Turks"로 지칭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12·12 쿠데타 이틀 후 전두환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을 처음 만나 그에 대한
인상과 평가를 본국에 보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을 야심찬 젊은 장교단을 뜻하는 'Young Turks'로 지칭하며 정치적 야심이 많은데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전 사령관은 "(자신들의 행동은) 쿠데타도 아니고 반란도 아니며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 지으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사적인 야심이 없고, 개인적으로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정치 자유화 일정(liberalization program)을 지지하며, (쿠데타로 인한) 군부내 분열상도 한 달 내로 정리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철저한 기만전술을 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1980년 5월 17일 자정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다음날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한 결과도 추가적으로 공개됐다.
이 사령관은 계엄령 확대를 통해 국회 해산과 대학 휴교 조치 등을 내린 이유에 대해 "이런 통제가 없다면 한국이
베트남과 유사한 방식으로 공산화될 것을 우려한다"고 강변했다.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씨가 지난달 27일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친 뒤광주 동구 광주지법을 나서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대통령 직을 승계한 최규하 정권의 나약하고 불안한 국정 운영의 단면도 추가 공개됐다. 1980년 5월 17일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난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은 "학생 소요 사태를 대하는 정부의 온건한 방식에 대한 군부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최 대통령이 계엄령에 대해 언급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내용은 전문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미국 측이 1996년 관련 문서를 1차 공개했을 때 제외되긴 했지만 대체로 알려진 것들이다.
따라서 새로운 사실의 발굴로서의 의미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완전한 형태의 비밀해제 문서를 처음으로 제공함으로써 향후 5·18 관련 문서 공유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진상 규명이 오랜 시일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내에선 이미 사라진 관련 기록을 미국 측 협조를 얻어 공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국무부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전향적으로 관련 문서를 전달한 것은 굉장히 우호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첫술에 배 부를 수는 없기에 미국 측이 추가로 공개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을 펴나가겠다"고 말했다.
미국 측 문서에 대한 접근이 특히 중요한 것은 5·18 진상규명의 '미싱 링크'라 할 수 있는 발포 명령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10여년을 이어가는 동안 발포 명령과 관련한 국내 기록물은 거의 대부분 폐기됐다.
당시 한미연합사령부가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발포 명령에 대한 기록도 주한미군 등 미국 측이 어디엔가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이번에 미국이 제공한 문서 가운데는 국방부 소관 기록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공유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둔 15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40년 전 신군부 날조 문건 입수
교도소 앞서 사망한 사람들의 위치 계엄군이 당시 표기한 지점과 달라
“(80년) 5·18사태 때 시위대의 공격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였다.
그곳은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전두환(89) 전 대통령이 2017년 4월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 쓴 내용이다.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는 5·18 당시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을 “폭도”라 하며 ‘교도소 습격설’을 주장해왔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북한이 광주에 있는 고정간첩망에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포착됐다”라는 북한군 개입설도 담겨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이란 5·18 나흘째인 80년 5월 21일부터 무장한 시민군이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이다. 5·18이 폭도에 의한 소요사태라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근거로 신군부 측이 악용해온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40주년 5·18기념식을 앞두고 교도소 습격이 허위임을 증명하는 신군부 측 문건이 나와 주목된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광주)교도소 지역 병력배치 요도(5·18)’에 따르면 당시 교도소 앞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피격 위치는 교도소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확인됐다.
당시 교도소에 주둔한 계엄군이 표기한 사망지점은 교도소와 멀리 떨어진 광주~담양 간 도로 한복판이었다.
더구나 이들 사망지점은 교도소 외벽에서도 100m 이상 떨어져 교도소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외부에 2층 높이인 5m짜리 장벽에 둘러싸인 데다 교도소 입구 밖 50m 지점부터는 장갑차와 소방차·트럭 등으로 철저히 차단됐다.
계엄군이 ‘피격지점’이라고 표기한 지점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제 계엄군이 “시민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주장한 80년 5월 21일 오후 7시 30분에는 광주교도소 앞에서 4명이
총격을 당해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당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광주에서 볼일을 보고 귀가하던 담양 주민으로 확인됐다.
계엄군에게 희생된 민간인이 훗날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둔갑한 것이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교도소 습격사건이 나중에 신군부가 꾸며낸 허위 사실임을 밝히는 핵심 증거가
40년 만에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문서에 남은 병력배치 현황도 교도소 습격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계엄군이 장갑차 등 핵심 병기와 버스·유조차 같은 차단막을 교도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도로에 집중해놓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계엄군의 이날 작전 자체가 교도소 방어가 아닌 광주~담양 간 도로를 차단하는 데 맞춰졌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5·18 당시 교도소 작전에 사격선수 출신의 병사들이 투입됐다는 점도 습격설을 부정하는 논리로 꼽고 있다.
훈련도 받지 않은 시민 몇몇이 특출한 사격능력을 보유한 저격병과 장갑차까지 포진한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 자체가 허위라는 분석이다.
김희송 교수는 “옛 광주교도소는 5m 높이의 외곽 담장으로 둘러싸인 데다 저격병까지 배치돼 시민들의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이라며 “광주교도소가 습격을 받은 곳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방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된 현장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광주사태 보고서’ 40년 만에 첫 공개 신군부 “가매장”만 주장…허위 뒷받침 “계엄군, 매장 시체 찾으러 가” 증언도
신군부, '광주시민 암매장' 철저히 은폐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최근 옛 광주교도소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유골들과 5·18과의 연관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광주교도소는 80년 5월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암매장을 당한 곳이어서다.
광주시는 최근 발견된 유골들과 5·18 행방불명자와의 유전자 대조를 위해 지난 2월부터 오는 29일까지 행불자 가족에 대한 혈액채취 신청을 받고 있다. 5·18단체 등은 이번 유골발견 사건을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올해 5·18이 40주년을 맞은 상황에서도 북한 개입설이나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같은 왜곡과 폄훼가 여전해서다.
중앙일보는 새로 발굴된 군 내부문건과 관련자 증언 등을 토대로 5·18 당시 암매장의 진실과 신군부의 5·18에 대한
왜곡·폄훼 상황을 재조명했다.
〈편집자 주〉 5·18 당시 신군부가 사망한 시민들을 암매장한 사실을 자인한 당시 정부 문서가 최초로 확인됐다.
80년 5월 이후 암매장 사실을 줄곧 부인해왔던 신군부가 ‘암매장(暗埋葬)’이라는 단어를 쓴 공식 문서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18 당시 암매장은 지난해 12월 19일 옛 광주교도소에서 신원미상의 유골 261구가 발견된 후 40주년 기념주간의
화두로 등장했다. 13일 중앙일보가 확보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광주사태 진상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신군부는 계엄군들이 사망한 시민들을 상당수 암매장했다.
해당 문건에는 당시 신군부가 5·18로 인한 사망자를 ‘민간인·군인·경찰 포함 총 184명’으로 집계하며 ‘암매장된 사망자의 발견 및 중상자의 사망으로 사망자 수는 다소 증가할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신군부 산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진상조사단이 5·18 직후 작성한 ‘광주사태
진상 보고서’에 '암매장'이란 단어가 확인된다. 당시 국보위 조사단은 1980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광주·전남에서 5·18 진상조사를 한 뒤 ’암매장된 사망자가 발견되면 사망자 숫자는 다소 증가할 것으로 추정“이란 진상조사 기록을 남겼다.
[사진 전남대 5·18연구소] 프리랜서 장정필
“암매장 발견되면 사망자 증가할 것”
이 문건은 5·18 당시 계엄군의 암매장 자체를 부정해온 신군부가 직접 작성한 정부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군부의 정치기반을 확보하고 5·18진실을 감추기 위해 설립된 기구(국보위)가 암매장을 인정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5·18 학살의 최고 책임자로 꼽히는 전두환(89)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암매장은 유언비어일 뿐이고,
실제로 땅을 파헤쳐보기도 했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신군부, “암매장은 없었다” 줄곧 주장
앞서 계엄군 지휘관들도 1988년 국회의 5·18 광주청문회 당시 암매장 의혹이 불거지자 “암매장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심지어 신군부는 '암매장'된 희생자들이 발견돼도 “불가피하게 가매장(假埋葬)을 한 것”이라는 논리로 맞서왔다.
“전시나 다름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부패하는 시체를 인계할 여유가 없어 가매장했다”는 주장이다. 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정주교 변호사도 최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계엄군이 부득이하게 가매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신을 가지고 암매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국보위 조사단의 진상조사를 담은 문서에서는 ‘암매장’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기록돼 있다.
국보위는 5·18 직후인 80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광주·전남에 대한 진상조사를 토대로 해당 기록을 남겼다.
암매장 기록을 남긴 시기는 5·18 진상조사 및 수색작업이 끝난 뒤인 80년 6월 12일에서 19일 사이로 추정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숨진 광주시민들.
[연합뉴스]
정부 문건서 ‘암매장 자인’ 의미 커
국보위는 신군부가 5·18을 무력으로 진압한 사흘 뒤인 80년 5월 31일 설치한 임시 기구다.
전 전 대통령(상임위원장)을 비롯해 노태우 전 대통령,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장관, 황영시 계엄사령부
부사령관 등 5·18 주역들이 위원을 맡았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군 기록상) 신군부가 ‘암매장’이라 기록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며, 매장
이라고 적더라도 ‘가매장’이라는 표현을 써왔다”며 “신군부가 부정해온 암매장에 대한 기록이 그들이 남긴 첫 정부
차원 보고서에 뚜렷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5·18 이후 보안대 자료에는 ‘옛 광주교도소에서 시민 28명이 숨졌다’고 기록돼 있으나 실제로는 11구의 시신만 수습
됐다. 5·18단체는 나머지 17명 이상의 시신이 옛 교도소 주변에 버려졌거나 암매장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5·18 이후 행방불명 신고는 총 448건이며, 이 중 84명이 행방불명 관련자로 인정됐다.
“계엄군, 광주 다시 가서 매장지 팠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검찰의 ‘5·18, 12·12 수사기록’(1995년)에서도 계엄군이 시신을 곳곳에 매장한 사실이 확인된다.
5·18 당시 11공수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A씨는 95년 검찰 조사에서 “(80년 5월 27일) 공수부대 철수 직후인 6월에 다시 광주로 불려가 가매장지를 수색한 계엄군들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 “(80년 6월) 시체를 매장한 인원들을 다시 광주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5·18때 공수대원들이) 부상자 2명을 사살하고 묻어준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도 했다.
1995년 검찰의 ‘5·18 12·12 수사’에서 확보된 11공수여단 63대대 정보장교 A씨의 조서. 당시 그는 ’경희대에 있는 동안 시체를 매장한 인원들을 광주에 내려보낸 사실이 있다“는 진술을 했다.
[사진 전남대 5·18연구소] 프리랜서 장정필
교도소 유골-암매장과 연관성 ‘촉각’
A씨의 진술은 ‘(계엄군이) 5·18 직후 광주에서 가매장지에 대한 수색 작업을 벌였다’는 군 내부 문건과 일치한다.
최근 공개된 ‘전교사 작전일지’에는 ‘가매장 예상지역 수색 결과’(80년 6월 2일 오후 6시40분)에는 매장지 재수색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해당 문건에는 ‘20사단 61연대 수색대대가 시체 1구를 발견하였으나 많이 부패하여 더는 파보지 못하고 가매장’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5·18 당시 20사단과 11공수가 가매장지 수색에 나선 시기가 80년 6월 초로
동일하다”며 “가매장이라고 표현했지만, 광주에서 이뤄진 ‘암매장 수색’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40주년 5·18 기념식이 다가오면서 해당 문건·증언과 옛 광주교도소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유골들과의 연관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계엄군의 암매장을 뒷받침하는 문건과 증언이 속속 확인되는 가운데 교도소 내 기록에 남지 않
은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돼서다.
광주시, 행불자 가족들 추가로 혈액채취
법무부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은 교도소 무연고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유골들과 5·18 행불자간 연관성을 조사 중이다. 광주시는 해당 유골과 5·18 행불자와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행불자 가족의 혈액채취 신청을 지난 2월 3일부터
추가로 받고 있다.
오는 29일까지 진행되는 혈액채취에는 현재까지 17가족 18명이 신청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최종권·진창일 기자, 김민상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5·18 광주민주화운동 40년을 앞두고 당시 시민군들이 24일 계엄군의 고문 장소 중
하나인 광주 서구 쌍촌동 옛 505 보안부대 터를 찾았다. 고문 피해자들인 이 방을
고문과 취조를 당하던 공간이라고 증언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으로 끌려와
물고문과 전기고문, 구타 등을 당했다.
[광주=뉴시스] 조수정 기자 = 2020.04.24. chocrystal@newsis.com
고문 악몽에 아직도 악쓰다 깨어나”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고문 피해자들 트라우마 치유차 505 보안부대 찾아 다시 울컥 구타에 물· 전기고문까지…참혹했던 당시 증언 “시간이 없다. 중요한 건 발포명령 등 진상규명”
옆에 있던 허춘섭 씨는 당시 형사가 총 가진 시민군을 잡으면 한 정당 300만원 포상금에 1계급 특진이었다며 “난 총 20정을 모두 반납하고 끌려 왔는디 형사가 포상금 300만원 나오면 네 엄마 주고 난 승진만 할 테니 총 숨겨놓은 곳을
가르쳐 달라 하더라고. 없는 총이 어디서 나오겄어.
그럼 고문하는 거제. 고문을 못 이겨서 집에 숨겨 놨다, 뒷산에 묻어 놨다 거짓 자백을 해야 혔소.”라 한다.
“상무대 영창에서 저녁 배식이 끝나면 검은 포니 승용차가 와.
그럼 안대를 묶고 5분 거리인 여기에 도착하제.
보통 지하실로 끌고 가는디 나는 다시 안대를 채워서 차를 타고 10분쯤 가면 나오는 하천에서 물고문을 받았제.
그때 내가 머리를 다쳤었는데 물고문까지 당하니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다보니 여기서 죽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제.”
이후 허 씨는 고문실에서 머리를 두들겨 맞다 쓰러졌고 지금까지 세 번의 뇌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고문 중에 어차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했다고 했다.
“살아있는 게 더 힘들었거든. 상무대 영창은 누울 잠자리도 없는데 새벽되면(고문이 끝나고 상무대로 돌아가면) 녹초가 돼서 쓰러졌제. 옛날엔 여기가 정말 넓어 보였소. 그런데 지금 보니 정말 좁구마.” 비좁은 고문실이 넓게 보이던 건 공포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짚는다. 서로 고통의 기억을 털어놓다가 보안부대 앞에 돗자리를 폈다.
또 “가장 중요한 건 전두환의 사살 명령과 관련한 진상 규명인데 진조위에 수사권이 없어 조사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5·18왜곡, 폄훼 등을 바로잡으려면 전두환 등 소환 조사가 꼭 필요한데 출석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5·18 당시 재수생으로 전남도청 ‘기동타격대’에 합류했다가 5월 27일 도청에서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당했던 양동남
씨도 진상 규명을 강조한다.
양 씨는 5·18을 폄훼하는 수구 논객 지만원에 의해 광주에 내려온 북한 특수군 '제36 광수' 권력 서열 10위권에 드는
최룡해로 지목되며 왜곡과 폄훼의 피해까지 겪었다.
양 씨는 “진상 규명을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허장환, 김용장 등 80년 5월을 피해자가 아닌 입장에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의 구술 등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당시 사망자들을 암매장한 장소 등을 알아내는 것도 시급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많은 것들을 기억하는데 증언 이후 보호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증인들을 봤다” 며 “정부가 이들을 보호해주면 증언자가 더 늘어날 것인데 40년이나 흘렀으니 다들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나만 해도 그렇게 생생하던 80년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소멸되더라. 시간이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