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 장군은 19일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나 "백선엽은 조작된 가짜 영웅이어서 용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백선엽은 조작된 전쟁영웅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박경석(88) 예비역 준장은 단호했다. 육사생도 2기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야전을 두루 거친 노병인 그는 백선엽씨가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했다. 19일 오전 대전 유성 자택에서 만난 박 장군은 “백선엽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
백선엽 가족은 그의 주검을 가족묘지로 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백선엽이 일본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고,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장이었으니 공적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장군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죠.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장군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그는 “백 장군이 예편 뒤 자청해 30여년 동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과 채병덕 총참모장 등 일본군 출신 군인들 중심으로 한국전쟁사를 미화했다”며 그 예로 백씨를 전쟁영웅으로 만든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를 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의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해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낙동강 전선은 월턴 워커 중장이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등 8개 사단을 지휘해 워커 라인으로 불렸다. 백선엽의 제1사단은 8개 사단 가운데 하나였는데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했다. 일부를 전체로 과장했다는 얘기다.
박경석 장군이 대대장 시절 당시 강재구 대위 등 중대장, 소대장 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강 대위는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날 순직했고 이 부대는 재구대대로 명명됐다.
또 개전 초기 전투 상황도 왜곡됐다고 했다. 제1사단은 개성에 주둔했는데 북한군은 개전 5시간 만에 개성을 점령하고 남하했다. 당시 백선엽은 경기도 시흥 보병학교에서 교육받다가 참모의 연락을 받고 즉시 귀대해 부대를 지휘했으나 전차 등 장비에 밀려 후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설명은 다르다.
6월24일은 육군구락부(현 육군회관) 준공 기념 파티가 열린 날로, 춘천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친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포함해 전방 사단장은 모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백선엽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임진강 남쪽에서 후퇴하던 사단에 합류했다.
그도 사단장으로서 당연히 이 파티에 참석했을 것”이라며 “부대를 비운 이유로 든 교육은 의무가 아니라 출석을 임의로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술판을 벌이고 있어 남침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개전 과정에서 북한군의 전차를 몸으로 막고 산화한 것으로 알려진 ‘제1사단 육탄 10용사’는 뒷날 10용사 가운데 몇몇이 북한방송에 출연해 ‘조작’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사건 외에 제6사단의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도 조작 무용담이죠. 모두 일제 강점기에 조작된 ‘일본군 육탄 3용사’를 베끼기 해 지휘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그는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 군사고문단을 극진히 대접해 맺은 인연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막아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앞장서 반대했다.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 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 결국 무산됐다.
박경석 장군은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장교로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고,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화 했다고 주장했다.
진짜 한국전쟁의 영웅은 누구일까? 그는 주저
하지 않고 1984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선정한 4대 영웅인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이라고 밝혔다. 김홍일 장군은 개전 초기 국군 패잔병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3일을 버텼고, 김종오 장군(당시 대령)은 제6사단장으로 3일 동안 춘천을 방어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해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으로 전황을 뒤집는 인천상륙작전 등을 이끌었고 워커 장군은 낙동강을 사수했다. 당시 정부는 김홍일, 김종오 장군의 일대기를 펴내고 맥아더와 워커 장군의 다큐멘터리도 제작해 방송했다.
“나는 강재구 당시 대위가 참 군인 정신을 지킨 재구대대의 첫 대대장입니다. 영원한 재구대대장으로서 전사를 왜곡해 진짜를 밀어내고 영웅이 된 가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시절 반공 투사였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800명 단위의 간도특설대는 중국 팔로군과 전투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전투부대가 아니라 공작부대로 봐야 합니다.” 강재구 대위는 1965년 10월4일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 훈련 중 부대원이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에 몸을 던져 부대원의 생명을 구하고 본인은 장렬히 산화한 인물이다. 순직 후 1계급 특진이 이뤄졌다.
그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반민족 주의자 문제는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가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했잖아요?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나쁜 짓 했으면 사후라도 그 죗값을 물어야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여생을 왜곡된 군사를 바로 잡는데 바치겠습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사진 이은덕 사진가 제공
ⓒ 한겨레신문사,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시민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2013년 판문점 인근 주한미군의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미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된 백선엽 전 육군 대장.
/연합뉴스
'대장' 백선엽을 '중장급' 으로.. 미군의 이중성[한국군 코멘터리
국립대전현충원에 지난 15일 안장된 백선엽 전 육군대장에게는 생전에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었다. ‘미군도 존경하는’이 그것이다. 거기에 어울리게 전현직 주한미군사령관들은 백 전 대장의 사망에 대해 애도사 및 추도사를 쏟아냈다.
“백 장군은 영웅이자 국보로, 한미동맹의 ‘심장’이자 ‘영혼’“(로버트 에이브럼스 현 사령관), “나는 수십 년 동안 백 장군을 존경해왔고, 한미동맹에 깊은 손실”(빈센트 브룩스 전 사령관), “백 대장은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과 같은 한국군의 아버지”(버웰 벨 전 사령관), ”백 장군은 한미동맹의 위대한 ‘롤모델’이었다“(월터 샤프 전 사령관)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도 트위터 계정을 통해 애도를 표했고, 미 국무부 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애도 성명을 내놓았다.
■3성장군 부대 명예사령관으로 임명된 4성장군
앞서 미국은 2013년 판문점 인근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백 전 대장을 미8군 사령부가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해 그를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당시 미 8군사령부는 “백 전 대장이 대한민국 육군 역사상 최초의 4성 장군이고 한국전쟁 당시 탁월한 전공을 달성해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기상악화를 이유로 임명식에 불참한 샴포우 미8군 사령관을 대신해 골든 미8군 작전부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정전협정 이후 한미 장병의 ‘멘토’ 역할을 해왔다”고 축하했다. 이에 백 전 대장은 “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한반도를 지키고 있는 한미우호에 큰 감격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미 8군은 미 육군 중장(별 셋)이 지휘하는 부대다. 비록 미군이 그에게 입혀준 미군복에는 ‘별 넷’이 새겨져 있었지만, 4성 장군 출신인 백 전 대장를 중장급 부대의 명예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한국군으로 치면 별넷을 달고 군단장(별 셋)에 명예직으로 임명된 셈인데, 아무래도 어색하다. 4성 장군 출신을 명예지휘관으로 임명한다고 하면 적어도 대장 계급이 지휘하는 부대의 사령관으로 해야 마땅할 것이다.
나아가 백 전 대장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현역 시절 계급보다 별을 하나 더 얹어 5성 장군인 원수로 명예 진급시켜 추서하는 것도 예우 차원에서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군은 ‘그토록 존경한다’는 4성 장군을 3성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의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또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대한민군 육군을 총 지휘했고, 합참의장까지 지낸 당사자는 이를 ‘무한한 영광’으로 받아 들였다.
■‘백선엽 전 대장은 일본 헌병 병사 출신’
미군이 그토록 존경한다고 하는 백 전 대장에 대한 미국 정부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과거로 돌아가보자.
신동아는 2010년 기밀이 해제된 주한 미국 대사관 문건 ‘한국 군부 내 주요 파벌 분석 구성원 명단’(1962년)을 2010년 보도했다. 1962년 8월, 주한 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이던 필립 하비브가 본국에 송신한 한국 군부의 핵심 실력자들과 주요 파벌을 해부한 36쪽의 기밀전문이다.
이 문건에서 미국은 14년간 군 복무 후 전역한 백선엽 전 대장을 ‘부정부패와 파벌에 찌들은 군인’으로 묘사한다. 그는 또 처음부터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일본군 헌병대 사병 출신임이 드러난다.
평양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2년간 사병으로 근무하다 일본 관동군의 목단사관후보학교(OCS) 단기 과정을 이수해 장교가 됐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당시 백선엽의 동생인 백인엽 예비역 중장은 ”최대의 불법축재사건으로 현재 수감 중“이라고 전한다.
문건은 또 ”한국군의 첫 4성 장군이자 한국군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 직을 보유했던 백선엽 장군은 정일권의 파벌에 필적할 수준으로 한국군 안에서 거대한 파벌을 이끌고 있다“며 ”그의 주요 경쟁자인 정 장군과 같이, 백선엽은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고 그를 분석했다.
그러면서 ”부패는 어느 경우에서도 팽배해 있었지만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자질은 그의 파벌 성원들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들 중 다수는 송요찬이 1959년 추방되었을 때, 혹은 직접적으로는 혁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부패사건으로 인해 함께 숙청되었다“고 썼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면 백선엽 전 대장을 극찬하는 미국의 공식 태도는 8·15 해방 이후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무고한 민간인 학살, 박정희 군부 등에 취했던 미국의 입장과 괘를 같이 한다고 유추할 수 있다. 당연히 미국 역대 정부가 취해왔던 한국에 대한 정책 속에서 백선엽 전 대장의 친일행각이나 한국전쟁 당시 백야사의 양민 학살은 부정적으로 평가할 대상이 아닐 수밖에 없다.
대신 미측은 1940년대 말경의 국군 내 좌익 숙군 과정과 여수·순천 및 제주도 4·3 사건 진압 과정에서의 백선엽 전 대장의 노력과 기여, 한국전쟁 이후 냉전 때 아태지역에서의 미국의 패권 입지 구축 측면에서 도움이 됐던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연히 미군의 ‘백선엽 추앙’은 미국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미국이 백 전 대장을 미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좀 ‘짜게’ 대우한 것 같다. 미군도 자신들이 ‘부정부패와 파벌주의자’로 간주했던 한국군 대장을 미군 명예대장급으로 하기에는 ‘거시기’ 했는지모르겠다. 그래도 백 전 대장이 미국을 위해 기여한 것들을 생각하면 명예 주한미군사령관(미 육군 대장) 정도는 임명해 주는 게 도리가 아니었나 싶다.
미8군 사령부가 2019년 백선엽 전 육군 대장의 99세 생일을 맞아 열어준 깜짝 생일파티 에서 정경두 국방장관이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연합뉴스
■백선엽 장군의 삶은 ‘청빈’ 그 자체라고 광고한 성우회
백선엽 전 대장은 가족 명의로 서울 강남역 앞 2000억원대 건물을 소유했던 자산가였고, 이 재산을 놓고 수년에 걸쳐 가족 사이 송사가 벌어졌다. 백 전 대장이 장남 명의로 해놓았던 건물은 나중에 재산다툼이 벌어져 대법원까지 간 결과 장남과 백 전 대장의 부인이 절반씩 소유하게 됐고, 2012년 부인이 지분을 350억원에 장남에게 매각하면서 지금은 온전히 장남 소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인천 ‘선인학원 사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백 전 대장의 삶은 그의 6·25때 공적과는 별개로 ‘청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비역 및 퇴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는 “오늘의 국군과 한·미동맹의 기틀을 다졌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삶을 사신 영웅으로 ‘참군인’, ‘청빈 삶’ 그 자체로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멘토인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또 전 국군장병들이 보는 국방일보 1면에도 이같은 내용의 추모 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그러나 ’청빈 삶 그 자체로 후배들에게 정신적 지주인 영웅‘이라고 표현한 데 대해서는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집 없는 장교들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성우회는 “한미동맹의 상징인 백 전 대장을 주한미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해달라”고 미군에게 호소하는 광고를 국방일보 1면에 게재하는 게 나을 뻔 했다.
백 전 대장이 미군이 말하는 ‘한미동맹의 상징’이라는 점에서는 지휘관이 미군 대장인 한미연합군사령부의 명예사령관도 잘 어울린다. 의전과 서열을 중요시하는 ‘군인의 세계’에서 한국군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4성 장군이 미군 3성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의 명예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한국군 장군들이라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않는가.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 부산시청 광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부산시민 추모분향소를 둘러싸고 16일 진보 단체가 규탄 기자회견을 열자 한 보수단체 회원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부산시민단체 구국의 영웅 백선엽장군 추모행사 성대히 개최
학교바로세우기 전국연합, 정치개혁 부산연합,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부산연합은 지난 15일부터 18일 까지 부산시청광장에 백선엽장군 추모관을 설치하여 부·울·경 시민들의 추모객 맞이와 함께 백선엽장군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전개하였다.
백선엽장군의 사진전시, 대형화면을 통한 ‘다부동전투’를 비롯한 백장군의 전승기록영화 상영, 16일~18일 3일 동안 현악4중주, 색소폰연주, 윤주영 전교수의 가야금 병창, 유명가수를 초청하여 전선야곡을 비롯한대중가요 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다소 시민홍보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쳤다. 서울과 경북 칠곡, 대구를 제외하고 타 지방 자치단체에서 백선엽장군 추모행사가 지지부진 한데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이렇게 큰 규모로 추모행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균태 함안군향우회 회장의 물심양면의 지원과 조금세 학교바로세우기 전국연합 회장, 강도용 정치개혁 부산연합 상임대표, 나영수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집행위원장의 적극적인 지원활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런 큰 행사를 추진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조금세 회장은 “지금 대한민국은 올바른 역사교육과 역사인식이 실종되었고 현 정부가 구국의 영웅인 백선엽장군 장례식은 당연히 국장을 실시하던지 최소한 국민의 장을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이를 외면하고 오히려 부도덕하고 위선적이며 서울시정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박원순 서울시장의
장례식은 막대한 혈세를 낭비하며 서울시장장을 치룬 것은 천만부당한 일로 사료 된다며”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좌파 성향의 독립운동가 등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고 있고 반면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주역인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 백선엽장군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냉대 받고 있는 잘못된 역사 평가와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번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 16일 한 시민이 부산시청 광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부산시민 추모분향소를 찾아 추모하고 있다.
ⓒ 김보성
현재 많은 좌파정치인들과 좌파지식인들이 백선엽장군을 폄하하고 있으나 백선엽장군은 ‘다부동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공으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살려난 구국의 영웅으로 후세의 역사가 들은 고구려 을지문덕장군, 고려의 강감찬장군, 조선의 이순신장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장으로 추앙받고 평가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 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에서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안장식"이 엄수됐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백선엽 죄인 만들기' 배후에 대한민국 부정하는 세력 있다
[김태훈의 이슈&북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해낸 고(故) 백선엽 장군에 대한 폄훼와 모욕이 도를 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5일 국립현충원 대전묘지에 안장된 백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16일 홈페이지에 명시했다. 6·25 전쟁 영웅이자 창군이 주역임에도 백 장군의 묘를 파헤쳐 현충원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백선엽 장군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23세 청년 때 간도특설대에 들어가 2년여 복무한 것이 친일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표방하는 이유일 뿐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백 장군의 도덕성을 흠집 냄으로써 이 나라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데 있다. 1920년생인 백 장군은 조선의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와 무관하다. 경술국치의 장본인은 무능한 조선 군주 고종과 그의 부패한 신하들이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지난 15일 열린 고 백선엽 장군 안장식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참배 후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신현종 기자
백선엽 장군은 스물 다섯살에 해방을 맞았다. 이후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김일성이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해 일으킨 무력 도발을 좌절시킨 주인공이다.
그런 백 장군이 타계했는데, 국군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조문하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당은 애도 성명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동맹국인 미국이 백악관국가안전보장회의 명의로 애도성명을 냈고, 수많은 장성이 경쟁하듯이 애도한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친일 시비를 일으켜 나라를 지킨 전쟁영웅의 업적을 훼손하는 행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다. 임정 내무장관을 지낸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은 8·15 광복 이후 귀국해 임정 산하에 행정연구위원회란 조직을 만들었다. 행정연구위원회 위원들은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고위 관료로 일하던 친일파다. 해공은 그들에게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연설했다.
"왜놈잡이 하겠다고 천방지축 돌아다닌 사람들, 그러니까 나부터도 행정에 대한 능력이나 수완이라고는 터럭 끝만치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비록 여러분은 일제의 폭정 아래서 자신의 명맥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조금 친절을 왜인에게 표시했다 하더라도, 해방된 조국에 헌신 노력하여 건국의 기초와 공로를 세움으로써 지난날의 약간의 과오는 속죄되는 것이니, 여러분은 각 분야에서 응수노력하길 부탁드립니다."(‘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106쪽) 그 누구보다도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지사가 과거를 딛고 단합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이 나라에는 대한민국을 의롭지 못한 나라, 태어나선 안 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허물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려 든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이를 기념한다며 지난해 4월 서울 광화문 도심에 주요 독립운동가의 대형 초상화를 내걸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안중근 김구 유관순 윤봉길 이봉창 안창호 이회영 여운형·남자현·김상옥이다. 정작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훗날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는 제외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만 지워진 게 아니다. 임정의 가치를 격하하는 시도도 함께 벌어지고 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국내 일부 학자들은 “임정은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임정의 정통성을 강조하면 남북관계에 장애물이 된다”고 한다.
북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패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집단’이라고 폄훼한다. 그런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과 임정을 부정하는 행태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북한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백선엽 장군이 타계하자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백선엽 장군과 같은 영웅 덕분에 한국은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백 장군의 20대 초반 행적을 들어 그의 나머지 인생마저 부정하는 우리의 행태와 너무도 대조된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은 이 나라를 만든 이승만 대통령과, 이 나라를 지킨 백선엽 장군과, 가난에서 이 나라를 구출한 박정희 대통령을 모두 부정한다.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과, 국가중흥의 영웅들이 이룬 업적을 폄훼하고, 심지어 현충원에서 쫓아내려고 한 다.
많은 국민이 이런 행태를 비판하며 지난주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백선엽 장군 시민분향소가 설치된 광화문에 나와 고인이 평생 품어온 호국의 뜻을 기리고 참배했다. 이 참배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에게 보내는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결코 이 나라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양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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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안장식이 1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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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백선엽 장군 추모하는 시민들 1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시민분향소에서 추모객이 헌화하고 있다.
백선엽이 다시 논란이다. 지난 10일, 100세를 일기로 그가 죽자 군은 부고를 내고 육군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이며 장지는 대전현충원이라고 밝혔다. 미래통합당은 논평에서 그를 대한민국을 지켜낸 전설이라 평가하며 민주당이 입장을 내놓지 않은 것과 관련해 "전설을 지우려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백 장군을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라고 물으며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식민지에서 태어난 청년이 만주군에 가서 일했던 짧은 기간을 '친일'로 몰아 백 장군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좌파들의 준동"이라고까지 언급했다.
백선엽의 친일행각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고 본인도 인정한 사실을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나아가 좌파의 준동이라 말하는 인식의 일천함과 편향은 새삼 놀랍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미래통합당이 '전설'이라 칭하는 백선엽의 한국전쟁 당시의 범죄와 관련된 것이다.
백선엽의 죽음을 계기로 그가 남긴 회고록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는 꽤 여러 권의 회고록을 남겼는데 <실록 지리산 - 백선엽 육필증언록>(1992, 고려원)에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몇 건의 사건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1951년 말, 미군 주도로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빨치산 토벌작전이 기획되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에는 백선엽 본인의 이름을 딴 사령부가 차려진다. 이른바 '백선엽 야전사령부(백야사)'. 그는 임무를 받으며 "사령관의 성을 부대명에 넣는 것은 전례없던 일로 개인적 영광에 앞서 책임감이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고 적었다(17~18p).
4개 사단 규모의 토벌대는 지리산 일대를 포위하며 토벌작전을 진행했는데 작전명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에서 보여지듯 산 속의 모든 사람들을 빨치산으로 간주하고 죽이거나 무차별적으로 체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참모들이 무리한 작전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그 역시 자신의 부대가 체포한 사람들 중 민간인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은 다수의 비무장 병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장게릴라화 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며 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양민으로 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빨치산과 함께 있다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수용소를 거친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각 부대간의 전과 경쟁 때문에 양민들이 빨치산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34p)
백선엽이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사실을 인지한 것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49년 가을 5사단장 당시 광주에 주둔하며 공비토벌을 하던 중 백운산 지역에서 300호 정도의 마을이 불 타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 사실을 확인해 본 결과 통비부락이라는 이유로 15연대가 저지른 것임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52~53p). 그는 이 일과 관련해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사단의 공금을 가져다 마을 재건에 지원했다고 부연했다.
전역 후 자신의 부대원이었던 사람의 제보를 통해 백야사 작전 과정에서 8사단 소속 부대가 백아산 인근의 마을주민들을 학살했으며 그중에는 노인과 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적었다. 또 뱀사골에서는 체포된 여자 빨치산을 여러 부대원들이 돌아가며 성폭행한 후 사살해버렸다는 사실을 들었다고도 적었다(76~78p).
백야사 토벌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작전과정에만 있지 않았다. 언급한대로 지리산 토벌작전 지역 내 민간인은 빨치산으로 간주되었고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체포돼 광주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의 참모였던 공국진의 증언처럼 광주포로수용소에 보내진 수많은 사람들은 추위와 질병으로 죽어갔다. ("백선엽, 이 양반은 지리산 안은 모두가 적이다 이래서…", 미디어오늘 2011년 6월 29일자 보도)
백선엽은 회고록 곳곳에서 자신의 부대원들에게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 것을 누누이 강조했으며 그 이유로 "일제 말기 만군에 몸 담았던 시절에 '죽이지 말라, 태우지 말라, 능욕하지 말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게릴라 토벌은 민심을 얻어야만 성공한다는 점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52p).
'6⸳25 전쟁 영웅' - 백선엽의 죽음을 다룬 많은 기사에서 붙인 미사여구다. '지혜롭고 재능이 뛰어나며 용맹한 사람', 국어사전에서 영웅을 규정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진정으로 사과하고 책임질 수 있는 용기'를 추가할 순 없을까. 그의 회고록을 읽으며 그걸 찾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지휘했던 부대의 잘못을 언급하면서도 그는 본인 스스로의 참회와 책임에는 인색했다. 전역 후에도 그는 자신의 부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피해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백야사 회고의 말미에는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적었다.
백선엽은 죽었다. 죽었다고 모든 것이 미화되진 않는다. 잘한 것과 잘 못한 것은 구별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린 삶과 역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 전쟁영웅이라 불리는 한 사람의 죽음이 던지는 질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박석진님은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8월, 자신의 막사 앞에서 포즈를 잡은 백선엽 육군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오승훈 ㅣ 전국팀장
전쟁영웅 백선엽은 없다 / 오승훈
1945년 2월, 일본 도쿄 남동쪽에 위치한 이오섬(이오지마)은 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장 중 하나가 됐다. 이오섬에 상륙한 미군 3만여명 중 2천여명이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고 마지막에는 2만4800여명이 전사했다. 5일이면 함락 가능하다는 미군 수뇌부의 오판이 낳은 처참한 결과였다. 미 군부는 분위기를 역전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6명의 미군이 이오섬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사진을 애국주의 상징으로 활용한 이유다. 미 정부는 사진 속 군인 중 전사하지 않은 3명을 전쟁기금 마련을 위한 홍보활동에 동원한다. 성조기를 꽂는 사진은 신문, 잡지, 역사서, 영화, 티브이 쇼 그리고 동상으로 재생산됐다. 군부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영웅주의 프로파간다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은 영웅으로 불리는 것을 괴로워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내용이다. 한국전쟁의 영웅 만들기는 어땠을까.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전쟁영웅이 되는 과정은, 살아남은 자가 스스로를 영웅화한 한편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실제 참전 장성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백씨의 한국전쟁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지적한다. 육사생도 2기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야전을 두루 거친 노병 박경석 장군(88·예비역 육군 준장)이 대표적이다.
19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6·25 전쟁사를 모르는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은 마치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인민군을 다 막아 대한민국이 구출된 것처럼 얘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240㎞나 되는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즉 8개 사단이 합심해서 방어해낸 것인데 그중 일부분이었던 백선엽이 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개탄했다.
박 준장은 다부동 전투 승리에는 미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미 공군이 B29 폭격기로 융단폭격을 퍼부은데다, 한미연합군 8개 사단을 지휘한 미군 워커 중장의 불퇴전 결의가 승리를 낳았다는 것이다. 당시 워커 장군은 “사수하느냐 죽느냐의 선택밖에 없다. 여기서 밀리면 수많은 전우가 죽게 된다”고 후퇴를 용납하지 않았다.
워커 중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이후 ‘워커힐 호텔’을 만들었다.“ 훗날 일각에서 백선엽이 낙동강 전선을 혼자 사수한 것처럼 과장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지적한 박 준장은, 백씨를 영웅화한 이는 백씨 자신이라고 했다.
“그는 군복을 벗은 뒤 박정희 정부 때부터 30년간 전쟁기념관에 사무실을 두고 출근하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을 자원해 맡았다.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고, 백선엽 장군이 내신 6·25 관련 책이니까’라며 덮어놓고 찬양했다. 그러나 참전 장군들은 다 안다.
그분들은 백선엽 장군을 영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셀프 영웅화였다는 얘기다. 개전 당시 개성 1사단을 지휘한 백선엽이 제대로 응전도 못 하고 패주하는 바람에 서울이 조기에 함락됐다고도 한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막아낸 주역이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어기차게 반대했다.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 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 결국 없던 일이 됐다.결과적으로 셀프 영웅화에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언론의 역사 만들기 장기 프로젝트가 결합해 전쟁영웅 백선엽을 창조해낸 셈이다.
친일 전력에 동양 최대 사학비리인 선인학원 연루, 아들 명의로 서울 강남역 초역세권에 시가 2천억원 상당 빌딩 소유, 부인 명의로 시가 200억원의 이태원 자택 소유. 이런 흠결을 눈감게 만든 것이 그의 한국전쟁 공적이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믿기 어렵게 됐다. 그가 영웅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부끄러움 없이 그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지 모른다. 영웅 백선엽은 없다.
지난 12일 경북 칠곡군 왜관지구전적기념관에 마련된 고(故) 백선엽 장군의 분향소에서 학생들이 헌화하고 있다. 14일까지 사흘간 추모객 7000여명이 전적기념관과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찾아 추모했다. 왼쪽 사진은 15일부터 부산시청 2층에 분향소를 차린다고 알리는 홍보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