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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Dvorak Symphon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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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넬라호제베스에 있는 드보르자크의 생가. 현재는 이 고장이 낳은 대작곡가를 기리는 기념관이 되었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이야기

최은규 l 음악평론가

작곡가 드보르자크의 이름은 특히 그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곡의 산뜻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은 ‘교향곡은 심각하고 재미없는 음악’이란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신대륙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4악장의 멜로디는 응원가로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있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2악장의 멜로디 또한 합창곡으로 편곡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아마도 드보르자크란 작곡가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그의 대중적인 인기 덕분일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인기 때문에 드보르자크는 가볍고 친근한 곡만 작곡한 대중적인 작곡가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드보르자크는 단지 선율의 아름다움만으로 인기를 모은 작곡가가 아닙니다. 9곡의 교향곡과 <첼로 협주곡>, <카니발 서곡> 그리고 관현악으로 편곡된 2권의 <슬라브 무곡집>에 이르는 그의 모든 작품들은 선율의 풍부함과 넘치는 악상, 경쾌한 리듬으로 빛날 뿐만 아니라 통일감 있는 형식과 빈틈없는 구성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의 매혹적인 선율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그 짜임새 있는 구성은 음악 작품의 형식을 완성해내지요. 드보르자크만큼 감성적 표현과 충실한 구성을 잘 조화시킨 작곡가도 드뭅니다.

슬라브 무곡으로 얻은 명성

그러나 체코 출신의 드보르자크가 당대 음악계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교향곡 작곡가로서 완전히 인정받기까지 그 여정은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본래 드보르자크의 집안은 음악과는 무관한 정육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드보르자크는 그 어떤 배경도 없이 단지 재능 하나로 음악 경력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라하의 음악학교를 거쳐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로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드보르자크는 30대 초반에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거쳐 서서히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 드보르자크는 당대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 브람스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업자 짐로크를 소개받아 그의 작품을 출간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지요. 풍부한 선율과 깊은 감정 표현의 작곡가 드보르자크.

짐로크 사를 통해 출판된 드보르자크의 작품들 중 <슬라브 무곡> 작품집은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작곡가 드보르자크의 명성 국제적으로 퍼져나갔고 드보르자크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본래 피아노 연탄곡으로 작곡된 <슬라브 무곡집>은 드보르자크 음악 특유의 선율적 매력과 활기찬 리듬의 매력을 담은 작품입니다. 후에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오늘날 관현악 연주회의 앙코르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요. 그 중 작품 46의 제8번은 체코 춤곡 ‘퓨리안트’의 활기찬 리듬이 돋보여 인기가 있습니다. 퓨리안트는 3박자와 2박자라 교대되거나 동시에 진행되는 특징이 있는데, 이 곡을 잘 들어보면 이런 박자의 변화가 그대로 느껴져 재미있습니다.

유럽 음악계 중심에 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슬라브 무곡으로 명성을 얻은 드보르자크는 1879년에 다시금 큰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해 11월,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광시곡 3번>을 빈 필하모닉 콘서트의 레퍼토리로 올렸습니다. 이는 드보르자크에겐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당시 리히터는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지휘자이자 빈 국립오페라 극장과 빈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로서 유럽 음악계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음악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체코 출신의 작곡가 드보르자크의 작품을 빈 필하모닉의 연주회에 선보인 것은 드보르자크를 유럽 음악계의 주류로 인정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연주회 다음날 드보르자크는 리히터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필하모닉의 다음 시즌에 연주할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약속했습니다. 드보르자크는 곧바로 새로운 교향곡을 완성해 리히터에게 보냈고, <바이올린 협주곡>의 개정판을 비롯한 몇 곡의 악보도 함께 보냈습니다. 리히터는 드보르자크가 보내온 악보를 보고 매우 기뻐했으며 교향곡 6번에 대해서도 호평했습니다. 마치 찬란한 햇빛이 비치듯 밝은 분위기로 가득한 이 교향곡은 리히터의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입니다. 오늘날 이 교향곡은 그다지 자주 연주되지는 않지만, 체코 춤곡인 퓨리안트 특유의 리듬이 살아 있는 3악장을 들어본다면 누구라도 이 음악을 좋아하게 될 겁니다. 체코의 토속적 색채와 음악은 드보르자크의 주요 음악적 재료였다.

리히터는 드보르자크가 새로 보내온 교향곡 6번의 초연 날짜를 1880년 12월 말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요청으로 연주를 이듬해 3월로 미뤄졌습니다. 연기된 연주 날짜가 다가오자 ‘반 체코’ 성향이 있는 몇몇 단원들이 다시금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체코 음악가의 작품을 너무 많이 연주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결국 교향곡 6번의 초연은 빈 필하모닉이 아닌 프라하 필하모닉이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드보르자크는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준 리히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예정대로 그의 교향곡 6번을 리히터에게 헌정했습니다. 이후 드보르자크와 리히터 사이의 우정은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리히터는 빈과 런던에서 드보르자크의 작품을 꾸준히 연주하여 드보르자크의 음악을 널리 알렸습니다.

1883년에는 머나먼 영국에서도 드보르자크의 음악이 주목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 언론은 드보르자크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성공을 대서특필했고, 그 영향으로 영국 합창 페스티벌에서 드보르자크의 음악은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884년에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이 드보르자크를 영국으로 초청했고, 드보르자크는 직접 지휘봉을 잡고 그의 교향곡 6번을 선보였습니다. 연주회 후에 로열 필하모닉 협회는 드보르자크에게 그들을 위해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작품이 바로 교향곡 7번입니다. 이 교향곡은 진지하고 우수에 찬 분위기로 가득해, 드보르자크에게 ‘보헤미아의 브람스’라는 별명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교향곡의 3악장만큼은 체코 민속 춤곡의 리듬과 드보르자크 특유의 경쾌함이 살아있습니다.

음악학자 토비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7번을 가리켜 “베토벤 이후 교향곡이라는 예술 형식을 가장 위대하고 순수하게 구현해낸 것”이라 극찬했지만 오늘날 드보르자크의 명성은 진지하고 엄숙한 교향곡 7번보다는 친근한 선율로 가득한 ‘신세계 교향곡’에 힘입은 바 큽니다. 아마도 드보르자크가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유명한 ‘신세계’의 멜로디를 영영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신대륙 미국으로의 여행

1892년, 뉴욕 음악원의 창립자 자네트 서버가 드보르자크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초청한 것은 드보르자크의 음악 경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드보르자크는 뉴욕 음악원을 설립한 백만장자 자네트 서버 부인의 초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당시 그녀는 연봉 3만 굴덴을 제안했는데, 이는 당시 드보르자크가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던 연봉의 2배도 훨씬 넘는 액수였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드보르자크에게는 결코 뿌리칠 수 없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물론 그를 아메리카로 이끈 더 중요한 원인은 신대륙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겁니다. 인디언 음악과 흑인영가 등 새로운 음악으로 가득한 아메리카 대륙은 드보르자크에게 새로운 음악어법을 익힐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결국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음악원에 휴가 신청을 내고 아메리카로 향했습니다.

근면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던 드보르자크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6시부터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가톨릭 신자로서 아침 미사도 거르지 않았지요. 그 와중에도 그는 아메리카의 흑인영가와 인디언 음악을 열심히 연구하며 점차 미국 음악 특유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흑인 영가야말로 미국 음악의 중추가 될 것이고 모든 음악작품의 기본이 되어야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그 바람에 백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드보르자크는 주변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음악의 원천인 인디언의 노래와 민속음악의 음계나 리듬의 특성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의 작곡에 착수했습니다. 

드보르자크는 이미 ‘신세계 교향곡’의 구상 단계부터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작품에서 미국의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미국 음악의 영향이 곳곳에 보입니다. 특히 1악장에서 플루트가 낮은 음역으로 연주하는 주제는 흑인영가 ‘swing low, sweet chariot’와 매우 비슷합니다. 이 주제는 1악장의 중간 부분에서 리듬이 축소된 형태로 여러 번 반복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가지로 변형시키고 자유자재로 엮어내며 음악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드보르자크의 작곡기법은 그야말로 달인의 경지라 할 만합니다.

드보르자크는 아메리카 시대에 작곡한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비롯한 걸작들을 내놓으며 마치 팝 스타처럼 인기를 얻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착용하던 보헤미안 스타일의 산책용 지팡이와 모자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할 정도였으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드보르자크의 음악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신세계 교향곡’을 비롯한 몇몇 관현악곡들은 오늘날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가 가장 자주 연주하는 주요 레퍼토리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드보르자크가 세상에 남기고 간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몇몇 작품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드보르자크가 단지 ‘신세계 교향곡’의 작곡가로만 기억되기에는 그가 남긴 걸작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향곡 9곡을 비롯해 여러 오페라와 교향시, 성악곡과 실내악곡의 양은 실로 방대합니다. 그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단지 손에 꼽을만한 몇몇 작품들만이 연주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많은 드보르자크의 작품들이 음악회의 인기 레퍼토리로 정착되길 바라면서 오늘도 그의 초기 교향곡에 귀 기울여 봅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클래식입문 ABC 2012.04.06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7&contents_id=7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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