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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산사 음악

주지스님의 깊은 뜻

 

주지스님의 깊은 뜻


산중턱에 자리잡은 어느 절에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 귀중한 범종을 훔쳐갔다. 그 종은 110킬로그램 정도 되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지만, 천년 전에 만들어진 국보급 문화재였다.


주지스님은 범종이 없어진 것을 보고서도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묵묵히 서 있다가 부엌으로 갔다. 종을 치듯 절구공이로 부뚜막의 쇠절구를 3~4초 간격으로 쳐 소리가 울려나오게 했다.


"이 소리도 쇳소리요 종소리도 쇳소리인 것, 쇠절구를 엎어놓으면 종처럼 볼록이 되고, 종을 엎어놓으면 절구처럼 오목이 되는 것, 울림이 크고 작을 뿐, 이 쇠절구도 종과 다름없는 것을······,"


주지스님은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침 수행 중이던 한 스님이 말했다.


"스님, 종은 종이고 절구는 절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종이니라."

"스님, 어찌 쇠절구를 종이라 하십니까?"

"어허, 어리석긴... 물구나무를 서서 걷는 사람들의 세상이 있다면, 두 발로 걷는 우리에게는 그들이 거꾸로 걷는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두 발로 걷는 우리가 오히려 거꾸로 걷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쇠절구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매달려 있는 종이 엎어진 채 매달려 있는 것이고, 종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놓여 있는 절구가 엎어진 채 놓여 있는 것이니라. 나는 절구의 입장에서 엎어져 있는 종을 바로 놓고 치는 셈이니라."


그날 오후, 주지스님은 그 쇠절구를 종각에다 거꾸로 매달아놓았다. 그리고 새벽마다 예의 범종을 치듯 그 쇠절구를 쳤다. 사람들은 그것을 '절구종'이라 일컬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경찰이 범종을 훔쳐간 도둑을 찾았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주지스님은 지체없이 경찰서로 달려갔다. 도둑을 취조하고 있는 수사관 옆 자리에 범종이 놓여 있었다. 사연을 들어본즉, 그 도둑은 지긋지긋하도록 가난한 중생이었다.


하나뿐인 어린 자식이 난치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지만, 너무 가난해 병원에도 못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치료비를 마련하기위해 범종을 훔쳐 고물상에게 팔려다가 붙잡히고 만 것이었다.


주지스님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경찰에게 말했다.

"수사관 선생, 이 딱한 중생을 풀어주시오."

수사관은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스님, 도둑을 풀어주라니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것도 천년이나 된 국보급 문화재를 훔친 대도인데, 더더욱 풀어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주지스님이 느닷없이 짚고 있던 나무 지팡이로 옆에 있는 범종을 마구 쿡쿡 찔러대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까짓 게 무슨 국보급 문화재란 말이오? 이것은 범종이 아니라 쇠절구올시다!"

수사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주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님, 종은 위가 막혀 있고 아래는 뚫려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쇠절구는 위가 뚫려 있고 아래는 막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종은 볼록이요 절구는 오목인 것입니다."

"볼록이 오목이고 오목이 볼록이지. 뒤집으면 그게 그거지 대체 무슨 차이기 있단 말이오?"


주지스님은 범종을 뒤집어 아가리를 위로 향하게 한 뒤, 나무지팡이를 절구공 삼아 그 속에 넣고 절구방아를 찧듯 쿵쿵쿵쿵 찧기 시작했다.


"보시오, 난 지금 절구방아를 찧고 있소이다. 이래도 이것이 쇠절구가 아니란 말이오?"

수사관은 주지스님의 엉뚱한 행동에 가볍게 웃어버렸다.

"어쨌든 이놈은 문화재를 훔친 절도범입니다.

수사관은 수사관답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중생이 이 종의 가치를 알고 골동품상에 팔려고 했다면 문화재를 훔친 것이 틀림없소. 하지만 이것을 고물상에게 팔려다가 붙잡혔지 않소이까. 때문에 국보급 문화재를 훔친 것이 아니라 낡아빠진 쇠절구를 훔친 것에 지나지 않다 이 말이오. 우리 절에는 쇠절구가 하나 더 있소이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쇠절구를 두 개나 갖고 있었소, 하나를 남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중생이 하나를 가져간 것뿐이오. 그러니 어서 집으로 돌려보내시오."

"안 됩니다. 도둑을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수사관은 업무적인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소이다. 이 쇠절구는 쇠절구도 아니고 고철덩어리일 뿐이오, 천년 동안 한 번도 무엇을 넣고 찧은 적이 없으니,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고철덩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아무튼 이 중생에게 고철덩어리 하나 훔친 죄값만이 주어지기를 바라겠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더 하겠소이다. 이것을 돈 많은 돈구렁이에게 제값을 받고 팔아주시오. 그 돈으로 이 중생의 어린자식을 치료하는 데 써주시오. 그러고도 돈이 남으면 그 나머지도 어려운 이웃에게 전해주시오.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이까짓 것을 종각에 매달아두는 것이야말로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노릇이겠소."


이렇게 말한 다음 주지스님은 경찰서를 나왔다. 그리고 산길을 타고 절로 돌아가던 중, 스님은 산기슭에서 뒷다리가 부러져 피를 흘리는 산노루 한 마리를 발견했다. 스님은 얼른 승복의 옷깃을 찢어 노루의 상처 부위를 감싼 다음 긴 염주를 끊어 마련한 실로 단단히 동여매어 주었다. 주지스님은 산마루 고갯길에 오르자 바랑을 풀어 불경 책을 꺼내더니 대뜸 불살라버렸다.


"내 마음이 불경이거늘 이까짓 종이뭉치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때 갑자기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굵은 우박이 후드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주지스님은 이번엔 바랑 속에서 목탁을 꺼내더니 산골짜기로 휘익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내 머리통이 목탁이거늘 저까짓 나무토막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주지스님은 꼿꼿하게 서서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우박 속을 태연하게 걸어갔다. 삭발한 둥근 머리가 우박에 맞아, 마치 목탁소리가 나듯 통통통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절의 종각에 매달아놓았던 쇠절구는 부뚜막의 제자리를 찾아가 있었고, 종각에는 감자방울만한 작은 요령이 매달려 있었다. 주지스님은 새벽마다 범종을 치듯 그 요령을 쳤다.


그 요령 소리가 범종 소리처럼 멀리 퍼져가지는 않겠지만, 그 요령을 치는 주지스님의 참뜻만큼은 더 멀리 퍼져나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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