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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고 논란도 많다.

형이상학의 역사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모색의 역사였으며 또한 그에 대한 논란의 역사이기도 했다.

 

 형이상학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의 장은 형이상학에 대한 자기 이해의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전시장을 방불케한다. 최고의 학문, 제 1철학으로서 신학과 동일시되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모든 학문의 기초 학문으로서 만학의 여왕으로서 추앙받던 시대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회의의 시대, 비판의 시대에서는 학문으로서의 지위마저 의심받고 자연(현실)에서 추방되어 초자연, 논리,

 심리, 정신, 영혼, 원칙, 삶, 역사, 문화 등에서 새로운 생존의 터전을 찾으려고 발버둥쳐야 했다.

 

기술과 과학의 시대에 들어서서 형이상학은 의미 있는 언표의 영역을 벗어난, 언어의 규칙을 멋대로 어긴 잘못된 언어

 놀이의 산물로 간주되어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해소되어야 할 허구의 물음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현대에서 형이상학은 해체되어 말끔히 쓸어 버려야 할, 시대에 뒤떨어진 계몽의 마지막 대상이 되어 버린 듯싶다.

 현실을 "넘어선" 것은 어떠한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철두철미하게 현실적인 인간들에게, 경험을 "넘어선"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못하는 과학 만능주의의 인식 태도에, 확인되고 통제될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자를 "넘어서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관심갖기를 꺼려하는 실용적·경제적인 생활 방식에, "형이상학"은 현대인이 한시 바삐 "넘어서야 할"

 극복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달라진 시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절박하게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것을 요구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을 잘못 이해해 왔으며 이제라도 우리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한 분과도 아니요, 임의적인 착상의 한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인간) 현존재 자체이다.

 " 하이데거는 그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러한 획기적인 새로운 이해를 1929년 7월 4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대강당에서

 행한 그의 교수 취임 강연에서 발표하여 학문 세계에 충격을 던진다.

 

 모교이기도 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교수로 취임하게 된 것은 하이데거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가 일생 동안 프라이부르크를 떠나지 않고 그 대학교를 고집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1923년 마이부르크 대학교에 부교수로 초빙되어 그곳에서 다시 프라이부르크로 초빙되어 가기까지

 처음으로 교수로서 생활하던 5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고향을 노래하고 대지를 찬양하며 들길과 숲길을 좋아했던 그는, 그에게 최적의 철학함의 근본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프라이부르크를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생애의 최고의 행사이기도 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의 교수 취임 강연에 그가 여러 가지로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는 그 강연 원고에 자기 사상의 핵심을 담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얼마만한 열성으로 그 강연을 준비하였는지는 같은 해에 개설한 그의 강의의 강의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1929년 겨울 학기에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

 

세계 -유한성 -고독"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가졌는데, 이 강의는 그 내용면에서 볼 때 명강의 중의 명강의였다고 한다.

전집 (제 29/30권)으로 출간된 지금 우리는 그 강의가 풍겼던 파토스를 글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어쨌거나 강연집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는 이렇게 1929년 빛을 보게 된다. 하이데거가 이 강연집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히 여겼는가는 그가 이 강연집에 보여준 애정어린 관심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1943년 제 4판을 내면서 "보탬말"을 추가하여, 항간에 떠도는 이 강연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철학이 "무(無)의 철학" 또는 "허무주의"라든가, 비겁자와 겁많은 자를 위한 "불안의 철학"이라든가, 논리를 무시하는 "순전한 감정의 철학"이라든가 하며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그로서는 아주 드문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그는 1949년 제 5판을 낼 때에 강연의 분량에 해당되는 내용의

 "머리말"을 추가한다.

 

이 머리말을 통해 그는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토대와 사상적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이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형태의 소책자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 사유의 길을 글의 발생 연도를 따라 좇아가면서 읽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먼저 본문을 읽고 그 다음

 "보탬말"을, 그리고 나서 "머리말"을 읽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의도를 따르기를 바란다면-이러한 발생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책의 구성을 따라가면서 하이데거의

사유와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형이상학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형이상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관계 방식의 폭

역시 형이상학의 비판, 형이상학의 복원, 형이상학의 극복 변형 등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며 넓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끊임없이 형이상학과 더불어 형이상학을 거슬러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이해를 마련하기 위해

형이상학과 벌이는 싸움의 연속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여기 이 책의 핵심 내용을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하이데거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75년에 이 책의 제 11판을 발간하고.) 판본 하나를

그의 제자인막스 뮐러(Max Muller)에게 보내면서 써넣은 다음과 같은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없다.

 

그렇지만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

 " 형이상학이 강단 철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 인간 현존재에서 일어나는 근본 사건이라고 외친 그의 주장은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발언이었기에 그 당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과학과 기술이 제시하는 위대한 발전과 번영이라는 약속에 혼을 빼앗긴 그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

대한 주장 역시 또 하나의 다른 "형이상학적" 언표에 불과했다.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워낙 형이상학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아무도 "형이상학적" 연표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성 중심, 과학 중심의 사유 방식이 몰고 온 전(全)지구적인 폐해를 목도하고 있는 현재에 이르러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는 이성 중심의 서구적 철학 이해에서 벗어나, 범지구적인 문화 형태와 사유 양식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적 철학에 대한 모색의 필요성을 많은 지성인들이 절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이해는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고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입이라는 "형이상학적 사건"이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오로지 서구적 이성과 합리의 척도 아래 포착하여 "철학"이라는 전시품으로 제시하면서 그것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이라도 입증하려는 듯 우쭐해서는 안 된다.

 

이성 중심의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건"에 의해 각인된 현대가 지구상 곳곳에서 "탈"이나 이성의 "탈"을 벗어 던지고

진보와 정복으로 일관된 현대성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외치는 "탈현대"의 와중에서 대안적 사유 형태를 찾기 위해서도

 다른 형태의 "형이상학적 근본 사건"에 대한 조사 연구가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텍스트들을 많이 읽고 번역도 많이 한 옮긴이이긴 하지만 하이데거의 "논문"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낱말

선택의 엄밀성과 표현의 정교함, 의미의 함축성 앞에서 번역의 불가능함만을 거듭 확인하곤 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원전만큼 좋은 안내자가 없기에 원전의 번역을 포기할 수도 없

는 실정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해설을 곁들인 독한 대역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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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착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