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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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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가 명실공히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나타났을 때 유럽은 여러모로 루터에게 유리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당시 유럽의 중심은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였다.

 

다시 말하자면 전 유럽의 막대한 권력과 부는 이들 몇몇 소수의 나라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림잡아 인구 4백만의 영국, 인구 8백만의 스페인, 1천 6백만의 프랑스 시민, 1천 2백만의 이탈리아인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대략 2천만의 독일 시민들에게는 종교의 문제가 곧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 나라 중 유독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인 독일인들만이 아직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지 못하여

도저히 단합되고 통일된 힘의 집중을 형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압도적으로 많은 시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군대 하나 제대고 유지하지 못했다.

이러한 힘의 약세는 어쩔 수 없이 분열된 봉건 영주의 권력구조를 형성시킬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는 고통까지 수반하였다.

 

약삭빠른 로마 교황청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열망 속에서 강력한 통치기반을 확보한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보다는 당연히 분열된 독일에서 더욱 더 엄청난 재정적 착취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가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이신칭의(i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grace)

교리를 주전 이미'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과연 적법한가?'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독일인들은 전적으로 루터를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환호 속에는 단순히 교황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그 동안 쌓여왔던 반항뿐만이 아니라 독일인의 민족적

자부심에 먹칠한 교황청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정치 경제적인 요소 이상의 더 절박한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세 말기 이후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감을 하나의 집약된

 혁명적 세력으로써 나타낸 결정적인 것이다.

 

 루터는 이 혁명적인 세력을 종교개혁 초기에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부터 그리고 종교개혁 진행 중에는 대부분

독일 귀족들로부터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루터는 죄와 죽음과 심판의 심연에서 시달리는 수많은 영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상처받은 영혼들은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세 원리 곧,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만으로

(sola gratia),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중세의 한 제도 교회와 그 제도 교회에 기초한

신앙의 교리체계를 붕괴시키는 철퇴를 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들을 염두해 두고서 이 글에서 루터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함으로 종교개혁에 강하게 흐르는 핵심적 신앙을

살피고자 한다.




1. 시대배경


15세기말과 16세기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 영국의 토마스 모어 같은 정치사상가가 배출되었고 미켈란젤로나 라파엘과

 같은 탁월하고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들이 선보였으며 한쪽에서는 신세계를 발견하여 전 유럽인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우뚝 서있었으며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여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지구는 태양을 돈다는

 혁명적인 신이론을 체계화한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였다. 시대의 대세는 이미 변화와 창조적 활동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변화만으로 그 동안 묶여있던 중세사회 체제를 단숨에 모두 바꾸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발전적 인간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사산이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인간의 통제 밖에서 해결할 수 없어 내버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생활의 터전을 땅위에 두었기에 기근이나 홍수로 인한 식량의 감소가 생기면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의 영주들은 매년 군사를 동원하여 이 거지 떼들을 자기의 영지에서 쫓아내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업무가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람들은 무정해졌고 강퍅해졌으며 폭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적으로

16세기 초엽의 유럽인들은 영적으로 신앙심이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날마다 죽음의 기로 앞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전쟁, 기아와 홍수, 한 번 걸렸다 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마는 저주의 흑사병, 어린아이들의 조기사산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산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화가나 조각가들이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잘 묘사한것이 있으니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구세주인 대신 무지개 위에 앉아 죄인을 하나 하나 정죄하는 무서운 심판자로 그려졌다.

 

 그림 속 그리스도의 오른쪽 귀에는 백합, 왼쪽에는 칼이 있었다.

칼은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백합화는 부활하여 천국을 향해 가는 구원을 상징하였다. 이런 그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두려운 심판을 피해 구원받는 길을 찾고자 했다.

 

교회는 이러한 절박한 심령으로 무거운 짐을 메고 찾아오는 자들에게 오히려 "최선을 다하라" 곧 행동으로 백합화를

얻으라고 말해 무거운 짐을 더 언지는 것을 조장했다.

 

그 당시에 구원이란 개인의 최선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그래서 순례, 구걸, 성자와 성물 숭배와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이들의 영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술 더 떠 성인의 뼈나 머리털을 수집하여 진열하기까지 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하였다.

 만약 고해성사를 게을리 하면 결국 연옥으로 떨어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다고 으스름을 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십자군 전쟁시에 고안된 면죄부는 16세기 초에 대단히 유행되었다.

 

얼마나 죽음과 심판의 공포가 컸던지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이 절망의 깊은 나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값비싼 면죄부를

 사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사진

 

2. 루터의 생애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광산촌 만스펠트 지역에 속한 조그마한 아이스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지글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을 체험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경험하면서 자랐다. 그는 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면제받았지만

교회의 성가대에서 의무적으로 노래해야만 했다.

 

루터는 3년간의 아이제나하의 생활을 마치고 에르푸르트 대학 시절을 맞이하였다.

 이 대학은 후기 스콜라학문에 속하는 스코투스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오캄과 가브리엘 비엘로 이어지는 유명론의

전통에 서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출세를 보장하는 법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또한 자격을 가졌다.

그러던 그가 주위의 부러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오히려

 루터를 모독하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영혼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으로부터 죄사면의 확신을 받기를 원했다.

그의 이런 자세가 수도원 문을 두드리게 하였다.

 

루터가 문을 두드린 수도원은 어거스틴파 운둔수도회였다. 이 수도원은 당시에 가장 신선한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여기에는 후기 유명론에 입각한 스승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교황의 절대성, 양심의 가책, 교황의 면죄부의 효력 등을 엄격하게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런 유명론 신학에 서서 혼자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고 스승들의 글을 읽도록 하였다.

 루터는 성경 읽는 것이 금지 당한 채 자신의 죄를 찾아서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고해 성사는 수도원의 가벼운 규율을 어긴 데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를 찾아서 고백하고 또 고백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백해야 할 죄를 찾지 못한 듯한 자책감 속에 있었다.

 

이러한 루터의 고뇌를 알아차린 사람은 당시 교황청 대리인으로서 교황청을 방문했던 요한 스타우피츠였다.

그는 루터의 고민을 듣고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대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무능이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될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슈타우피츠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서 서로 교제할 수 있으므로 믿음이야말로 의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이었다.

루터가 이런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후기 유용론적인 참회제도를 벗어나는데는 무려 2년이란 고뇌의 기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런 깨달음이 중세의 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의 문을 열었으며, 종교개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것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은 소리와 함께 중세인들의

 귀에 울려 퍼져 나갔던 것이다.


 

3. 비텐베르크의 루터


후기 중세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유능한 교수를 초빙하고 도시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선제 후 프레데릭도 챨스 5세의 삼촌으로서 자신의 영지 내에 대학을 세움으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비텐베르크 마을에 대학을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고 교수를 모집했다.

 

그러나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자 프레데릭은 새로운 교수진을 초청하기를 원했는데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추천을 받아

에르푸르트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옮겼다.

 

루터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했으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를 요청 받고 어거스틴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설교도 하였으며 1511년에는 교단의업무 차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의 공적인 업무를 마치고 거룩한 계단에 이르러서 전통에 따라서 무릎으로 오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떠올라서 계단을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토록 거룩했다는 로마의 부정과 부패를 보고서 중세적인 제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중세적인 스콜라 강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실천적인 힘이 있는 강의를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

신앙이란 그리스도 역사적 사역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러한 사면에 대한

깨달음이 성화의 시작이다.

 

루터는 1515년과 1516년에 어거스틴과 중세의 신비주의를 더욱 연구하였으며, 이때부터 중세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비텐베르크 대학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은 상호유익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즉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삼촌인 프레데릭의 신변보호가 필요하였고 프레데릭은 자신이 세운 대학을

명문대학으로서 성장시켜주는 명교수이며, 명 설교자인 루터가 필요하였다.

 

 


4. 95개 논제를 못박기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였다.

 중세의 참회제도에 의해서 사람은 완전하게 죄를 고백할 수 없으며, 사제가 부과한 보속행위도 완전하게 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리적으로 누구든지 영세를 받았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국에도 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누구든지 연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연옥에서의 고통의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키느냐가

관심거리였다. 그래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서 면죄부를 사는 것은 중세의 미덕이었다.

 

151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는 전임자 율리오스 2세가 남겨놓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르네상스 교황으로서 그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교황청의 재산을 탕진해버린 그로서는 면죄부를 다시금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레오 10세가 선포하고 브란덴부르크의 알버트와 마인쯔의 대주교가 징수를 맡고 도미니크파 수도자 요한 테첼이

판매하였던 면죄부는 루터를 그대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입성한 면죄부 판매인 요한 테첼은 "하늘 문이 열리노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다행히 비텐베르크는 프레데릭의 명령에 따라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주민들이 인근 부근에까지 가서 면죄부를

사오는 것을 보고 루터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매년11월1일 모든 성자의 날을 기해서 프레데릭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에 보관 중이던 유물을 무료로 개방하였으며

 그날이 되면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유물에 보관되어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교회당 정문에 95개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 논제를 못박아 게시하였다.


 

 

 

5. 라이프찌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이 개최되었다.

이것은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을 게제한 후 엑크는 "오벨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또다시 루터는 "아리테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하였다.

 

이렇게 시작되었던 대결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자결국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노련한 논쟁사 엑크의 승리로 끝났다.

 루터 스스로 이단을 좋게 말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이단에 속한다고 인정케 하였다.

 

 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더욱 명확하게 간파하였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하게 면죄부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 교회의 존재 그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터는 힘이 있었다.

젊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를 도와주었으며, 도시민들도 독일이 로마로부터 독립해야 된다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로마교회의 존재를 뒤엎어 버리고 동시에 종교개혁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3개의 논문을

발표 하였다.


 

 

6. 종교개혁 3대 논문


1519년 라이프찌히 신학 논쟁 이후로 엑크는 로마로 돌아가서 교황청 법원회의를 개최하였다.

일련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1520년 6월15일 출교교서는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루터가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과 때를 맞추어서 출교교서는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이어서 루터는 같은 해 8월에 기독인의 자유를 발표하였으며, 또 다시 10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서 루터는 1520년 12월10일 교황의 출교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움으로서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출교교서 :주여 일어나소서

교황청 출교 교서는 시편 74:22절을 인용하면서 작성되었다.

 여기서 루터는 41개조의 정죄문과 더불어서 루터의 모든 책을 소각할 것을 명하였으며,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동조를 취소할 것을 명하였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먼저 교회의 3가지 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첫째는 교회가 지닌 영적인 권한으로 인해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권, 둘째는 교황의 성경 해석권으로서

어느 누구도 성경을 통해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한 특권, 세째는 회의 소집권을 오로지 교황에게만 국한시킴으로서 어느 누구도 회의로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게 한 특권.

 

이상의 3가지 담이 지금까지 로마교회를 세속화 시켜 왔으며, 교회를 지켜주는 특권이었는데 이제는 교회가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대원리 가운데 하나인

"만인제사직"이론을 주창하였다.

 

루터는 사제의 중재라는 중세의 대 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상과 같은 루터의 만인제사직 이론은 중세인들을 사제의

공포와 전횡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와 의미를 되찾게 해 주었다.


 

 

 

7. 보름스회의


1520년 12월 10일 루터가 교황청의 출교교서를 소각하였다는 소식을 곧바로 독일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

이제 독일인들은 루터가 독일을 대변하는 사람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즈음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이 죽고 그의 손자인 찰스 5세를 선출했다 그의 대관식을 갖고

첫 번째로 주재한 회의가 1521년 1월 22일에 개최한 보름스회의였다.

 

 교황청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루터의 범법성을 밝히려고 하였다.

루터는 보름스회의에 두 번 출두하였으며, 무오하다고 믿는 교황과 성경에 입각한다고 주장하는 루터 사이에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를 윔스로부터 비텐베르크에 되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설교는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갑자기 루터가 사라졌다.

 

프레데릭은 협상이 결렬된 이후 루터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킬 것을 슈팔라틴에게 명령하였으며, 루터는

바르크부르트에 피신해서 융거 게오르그라는 이름을 가진 귀공자로 변장해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고전에 속하는 교부들을 더욱 열심히 연구했으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영적으로 무장하였으며, 어떤 의미에서 제2의 영적 고뇌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이 기간은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여 동안 영적인 고뇌의 기간을 가졌던 것과 동일한 준비의

기간이었다.

 

크게 움츠릴수록 더 높이 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종교개혁에도 적용될 수 있었으며, 아마도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이 기간을 허용해 주셨는지도 모른다.


 

 

8. 농민소요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랑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는 농민들의 권리회복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개혁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 가장 강력한 지지를

 입고 있는 푸레데릭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선제후와 농민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농민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 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사태는 북독일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은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 줌으로서 원하는 독일의 개혁이 달성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운동을 자제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개혁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레데릭이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떼를 반대하여"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말하였다.

물론 루터의 고민을 충분하게 이해 할 수 있으나 그는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설교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소요는 루터의 개혁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9. 루터의 죽음


루터적인 개신교를 지지하는 슈말칼트 동맹은 헤세의 필립이 이중 결혼으로 인해서 심각한 타격을 입기는 했어도

개신교측은 꿋꿋하게 버티어 나갔다.

 

 그러나 찰스 황제가 1544년 프랑스와의 평화를 마무리 지음으로 이제부터는 독일문제를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트렌트에서 총회를 개최하도록 명하였다.

 

그렇지만 개신교들은 여기에 따르지 않으려 하였으며, 총회는 생각보다 지루하게 지속됨으로서 황제는 무력을

사용해서 개신교도들을 무찌르려 하였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루터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평가해 보자면 다른 일반역사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신약성경(특히 바울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이 이미 주장했던 믿음으로 칭의되는

 원리의 재발견이다.

 

둘째,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권위를 제도 교회나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인정하여 중세 천년 동안이나

가두어둔 말씀에 얽혀있는 사슬을 풀어 모든 사람이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모든 개개인이 제도나 의식의 중개 없이 하나님께 단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넷째,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성속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중세의 성속이원론을 배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제나 수사가 평신도 보다 더 고귀하다는 성직우위론의 주장이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섯째,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영국인 틴 데일의 영어성경이 좋은 예이다.

 여섯째, 루터는 화목하고 따뜻하며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몸소 이룸으로써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곱째,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한편으로는 부패했던 카톨릭 교회에 직, 간접 영향을 줌으로써

카톨릭 내부의 갱신과 개혁을 이루게 했다(counterreformation)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점을 찾아본다면, 첫째, 카톨릭 교회의 핵심적인 기반이 되었던 수도원의 폐쇄를 주장함으로

 중세 내내 문화의 보존, 빈민구제, 교육 등과 같이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준교회격인 수도원들이 더 이상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게 길을 차단하였다.

 

이는 수도원의 선교영역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매우 애석한 일이다. 둘째,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포함되었다

(The Word of God contain in the Bible)고 함으로써 성경의 총체적 권위와 절대 무오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성경의

선별적, 차등적 권위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성경의 권위를 축소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두 왕국론을 주장함으로써 성소가 정치압제자나 독재자에 대한 과감한 저항을 할 수 없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루터 파의 신학적 유산은 결국 나치 히틀러의 독재를 허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넷째, 독일 농민봉기시 항쟁하는 농민들에게 과격한 진압을 허용함으로써 많은 농민 사상자를 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어떻게 가난한 벽촌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가진 것도 없이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성공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다.

 

그렇지만 루터에게는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철저하게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루터의 가장 큰 꾀는 꾀를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바로 그 꾀였다.

 

루터는 말씀의 사람이었으며,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경건의 사람이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믿으면서 모든 것을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끝을 맺었던 사람이었다.

 

루터는 또한 자신의 개혁을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계획표를 짜고서 밀고 가지 않았다.

루터는 일이 되어지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갔으며, 억지로 일이 되게끔 몰고 가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루터가 단 하나 머리를 써서 세밀하게 이끌어갔던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절대로 개인자격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터는 자신의 의견을 언제나 공중적인 전체 회의나 집회를 통해서 발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인 회의 중심적 개혁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루터의 개혁은 철저하게 복음 중심적인 원칙적인 싸움이었지 무력이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힘이 있으며,

또한 동시에 지식인들과 지도층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루터는 개인의 인기를 편승해서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본인이 몸소 터득한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심어 줌으로서 중세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야 된다는 강한 사명감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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