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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하이네 시인

 

 

하이네 시인

 

 

 

가장 깊은 진리는 가장 깊은 사랑에 의해서만 열린다. - 하인리히 하이네 - 독일 시인 : 1797-1856) - 그리워하니까 청춘이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괴테와 함께 셰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독일 시인이다.

그러나 하이네만큼 문학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하이네는 흔히 소녀를 위한 감상적 서정시를 쓴 미남 시인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일반적 오해는 대개 하이네의 양면적 시정신과 그의 작품세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하이네는 낭만적 서정시인인 동시에 이상적 혁명주의자였다.

 

굼과 같은 환상의 세계, 강렬한 주관적 색채, 민요풍의 4행시, 그리고 시적 분위기의 풍자적 파괴 등은 그를 낭만적 서정시인으로 규정하게 한다.

 

(「로렐라이」참조) 그러나 그의 정치적·사회적 관심은 초시대적 이상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 현실에 집착하였다.

 도한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적의 구현과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한 청년 독일파의 기수였다.

이러한 양면적 성격은 그가 태어난 과도기적 시대상황과도 관련된다.


하이네는 1797년 뒤셀도르프에서 출생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18세기의 스려져가는 달빛과 19세기의 아침 햇빛 사이에서 어제와 내일의 아들>로 프로엔과

프랑스의 중간 지대 라인란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출생환경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배불주의적 경향이 있었고(「두 근위병」참조)

유대인으로서 기독교 세계에서 살아야 했으며, 정치적 시대시를 쓰면서도 반동적 낭망시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파리에서 본의아닌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조국 독일을 애타게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외지에서」, 「서기 1839년」참조)


처음에 그는 상인 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본 대학에서 슐레겔의 강의를 듣고 낭만주의의 세계를 받았다.

1825년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개업을 위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1825-1830년에 함부르크, 북해, 영구, 이탈리아 등지를 여향하고 주관적인 시대 비평 단상을 모은 『여행화첩』과

『]노래의 시집』을 출간, 이를 통하여 그의 문명은 일약 독일을 석권하였다.

 

특히 『노래의 시집』은 이후 독일어로 씌어진 시집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시집으로 곱혀 오늘날까지 하이네를 낭만적

서정시인으로 단정해 버리는 고정관념을 낳게 하였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녀 1817-1819년 함부르크에서 적성에 맞지 않는 상업실무를 견습하는 동안 그는 주변의 세계와

삶에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상의 현실을 떠나 환상과 감정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낭만적 경향이 당시의

 시대사조와 결합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 그의 초기 성정시 세계를 특징짓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5월」, 「연꽃」,「노래의 날개를 타고」)참조.

그러나 그의 자유분방한 개성과 비판적 현실감각은 감미로운 환상과 낭만적 도피에 오래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나의 마음 우울해지면」참조) 날카로운 풍장와 위트에 가득찬 그의 시정신은 이러한 작품에 대한 반동으로 시의 낭만적 분위기를 파괴하고 현실을 도입하는 아이러니의 수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울한 날씨」,「바다의 망령」,「처녀가 바닷각에 서서」, 「벽난로가의 옛 이야기」참조) 물론 낭만파 시인들이

 이미 아이러니를 현실도피의 방법으로 사용한 바 있지만, 하이네는 이것을 현실도입의 방법으로 역이용하여 낭만주의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 서정시와 민요풍의 담시 형태로 (「케플라 순례」참조) 이미 하나의 완벽한 시세계를 구축한 그의 천부적

<노래>의 재능은 숨길 수 없는 그의 본질로서 그의 생애를 일괄하여 리얼리스틱한 시대비평의 산문으로부터 만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3월 전기의 복고반동체제 아래 신음하는 독일을 떠나 1813년 신문사 특파원으로 파리에 간 하이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프랑스의 정치 , 사회 상황을 독일에 중계하며, 그곳의 문인들(발자크, 위, 뮈세, 뒤마,

메리메, 생트 뵈브, 조르주 상드등)과 교유하여 독일문학을 프랑스에 소개하는 등 독일과 프랑스 문화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835년 독일연방의회는 절대적 국가 체제와 권위주의적 교회, 재래의 윤리적, 사회적 인습에 반기를 든 청년독일파 작가의 저작활등을 금지하였다.

 

 

하이네 [Heine, Heinrich] - 독일 시인

 

 

 

그러나 개인의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주장하는 하이네의 의지는 변함이 없어, 정신적 고독과 물질적 빈곤 속에서도 억압받는 대중의 인간적 해방과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싸웠다.

 

그는 무산계급의 비참한 생활현실을 이해하고 낡은 사회제도의 개혁을 역설하였지만, 획일적 평준화를 표방하고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예술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의 대두에는 반대하였다.

《공산주의 사회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무지한 손으로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것이고, 나의 시집은 찢겨 소매상인들이 커피나 담배를 싸주는 봉타조각이 되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무죄한 사람들이 파락하고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이 썩어 문드러진 사회체제는

변혁되어야 한다.》

현존 체제와 유혈혁명을 똑같이 부정하는 하이네의 일견 모순된 사회혁명관은 그의 저작에 일관하여 나타나는 신념,

즉 <삶이란 목적도 수단도 아니며 오직 하나의 권리>라는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충족이 선행되고 정신적 발전이 뒤따라야 하는데 양자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될 때

인간의 권리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주의와 관념주의를 다같이 배격하는 이상적 혁명주의자 하아네가 비교적 경도한 것은 정신적 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 생시모니즘이었다.

 

그의 이러한 혁명관은 일상어에 음악적 요소를 배합하여 시대현실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시대시편에 잘 나타나있다.

예술의 현실 참여에 대하여도 하이네는 근데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적 사고방식을 대표하고 있다.

<시대현실을 외면한 예술은 생과 예술 자체에 똑같이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책임을 지고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이지 현실이 아니다.>
1844년 하이네는 함부르크에 사는 어머니를 방문하기 위하여 생애 마지막으로 독일 여행을 하였다.

아직도 전근대의 봉건적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조국의 암담한 정치 사회형세는 <겨울 동화>처럼 그를 우울하게 하였고,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1848년부터 그는 불치의 척추 결핵 때문에 외출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이른바<이불의 동굴생활>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원숙한 만녕의 시를 쓰고『로만체로』를 간행하였다.

 

그의 만년의 시는 초기작품의 주관적 노래의 세계를 탈피하였다.

 해학과 아이러니, 서정적 음조와 풍자적 요소, 내면세계와 외부현실, 과거와 현재, 다채로운 테마와 수많은 형상들,

그리고 심오한 의미가 우주적으로 결합된 거장의 모자이크로서 <나는 낡은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제왕이며,

또한 새로운 독일시의 첫 번째 시인>이라는 말이 결코 과대망상이 아님을 입증해 준다.

1856년 오랜 병고 끝에 하이네는 이역 파리에서 불우하고 고독한 삶을 끝냈다.

 낭만주의의 사양과 사실주의의 여명 속에서 온갖 시대적 고뇌와 모순을 한몸에 지니고 꿈과 현실을 노래한 하이네는

 니체의 말대로 <독일언어의 첫 번째 예술사>였다.



출처는 민음사에서 나온 로렐라이라는 시집에서 발췌했습니다..
글은 현재 한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김광규교수님의 글입니다.....(뒤에 해설 부분에서 옮긴거에요^^)




12. 하이네 : 서정 시인이자 혁명적 저널리스트

 

 

정식 이름은 Christian Johann Heinrich Heine. 본명은 Harry Heine(~1825).

 

1797. 12. 13 프로이센 뒤셀도르프~ 1856. 2. 17 파리.

독일의 시인.

개요

〈노래책 Buch der Lieder〉(1827)으로 국제적인 명성과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곡이 붙여진 것은 주로

이 노래들이지만 만년에 쓴 음울한 시들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초기생애 및 작품

부모가 유대인이었는데, 아버지는 잘생기고 친절하지만 다소 무능한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당시 교육을 잘 받은

여성으로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하이네는 초년에 숙부 잘로몬 하이네의 재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함부르크 은행가로서 백만장자였던 숙부는 관대한반면 복종을 요구했으며, 하이네는 이 숙부와 오랫동안 불편하고

불안정한 관계였었다.

 뒤셀도르프의 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그를 상인(처음에는 은행업, 나중에는 소매업)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숙부가 학비를 대주게 되어 하이네는 본·괴팅겐·베를린 대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괴팅겐대학교로 옮겼고 1825년

최하위의 성적으로 법학학위를 땄다.

 

같은 해 유대인에게는 닫혀 있던 공직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변호사로 개업도 하지 않았고 공직을 맡지도 않았다.

 그는 대학시절 동안 학업에 전념한 것이 아니라 시·문학·역사 공부에 몰두했다.

 

하이네의 대학 이전 생활은 상당히 불분명하다.

이 시기에 숙부의 두 딸 또는 그중 한 사람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둘 중 누구도 이 몽상적이고 무능한 사촌에게 미래를 맡기겠다는 의향은 없었다.

이런 경험 뒤 외로운 감정들이 세월이 몇 년 흐른 다음이지만 〈노래책〉으로 묶여 나왔다.

하이네의 낭만주의적 신념, 즉 삶과 세계를 시화(詩化)하여 혁명, 소외, 시대의 불안을 극복하자는 희망은 그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위기에서 주요대표자가 되었다.

이 시기는 괴테, 실러, 낭만주의자들의 놀라운 업적에 가리워져 있었으나, 이들의 전통이 뒷세대의 새로운 긴장과 격변에

 대응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된 때였다.

 

문학활동 전체를 통틀어 하이네의 사상과 글에서 일관된 특징은 그가 예술적 감수성이라 부른 '시'와 현실 사이에 드리워진 팽팽하고 불명료한 긴장이다.

 

그의 연애시들은 낭만주의적 소재를 이용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것들을 의심하며 또 그 시들이 드러내고자 한 감정을

 의문시한다.

 

 그것들은 씁쓸하고도 달콤하고 자기풍자적이며, 시적 기교를 보여주는 동시에 시적 진실에 대한 회의를드러낸다.

이 시들이 지닌 운율은 흐르는 듯하다가 불협화음을 이루기도 하는데, 시집 전체를 보면 감상성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시인이 자신의 예술적 천재성을 자각하면서 자존의 감정이 새로이 통합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1820년대 끊임없이 올라가던 하이네의 명성은 일련의 실험적 산문들로 가속화되었다.

 1824년 가을 괴팅겐에서 공부를 하다가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하르츠 산악지방을 도보 여행했을 때 작은 책을

 쓰게 되었다.

 

 수수한 모험을 소설화하면서 시적 상상력과 예리한 사회 단평들을 짜넣은 〈하르츠 여행 Die Harzreise〉은 나중에

 〈여행기 Reisebilder〉(4권, 1826~31)의 첫번째 수록작품이 되었다.

 

사실과 허구, 자전적 이야기와 사회비판, 문학 논쟁이 종횡무진으로 혼합되어 있는 이 〈여행기〉는 이후 다른 작가들에

 의해 널리 모방되었다.

 

〈여행기〉에 수록된 어떤 단편들은 1827년의 영국 여행과 1828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이념들. 위인의 책 Ideen. Das Buch Le Grand〉(1827)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을 담은 것으로

어린시절의 기억, 나폴레옹에 대한 열광, 불행한 사랑에 대한 풍자적 슬픔, 정치 풍자들로 재치 있게 구성되어 있다.

후기생애 및 작품

1830년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하이네는 당대의 많은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처럼 당장 파리로 가지 않고 독일에서 돈벌이가 되는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831년 봄 마침내 파리로 가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원래 새로운 생시몽주의(국가가 모든 부를 소유해야 하며, 노동자는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분배받을 자격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생시몽주의에서 과거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자신이 영혼주의·감각주의, 또는 나자렛주의

(유대-그리스도교 이상의 고수)·헬레니즘(고대 그리스 이상의 고수)이라고 다양하게 이름 붙인 것들에 새로운 균형을

 부여하여 더욱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게 할 현대적인 원리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보았다.

 

시민왕 루이 필리프 치하의 프랑스에서 제한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질서가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심은 커졌다.

 

 그는 프랑스의 새로운 질서에 관해 일련의 예리한 신문 논설을 썼는데, 이 글들을 모아

〈프랑스의 정황 Französische Zustände〉(1832)이라는 책자로 펴냈다.

 

이어서 독일 문화에 관한 연구논문집 〈낭만파 Die Romantische Schule〉(1833~35)·

〈독일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1834~35)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의 현재와 바로 이전 시대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개혁, 계몽주의, 근대 비판철학 등 독일

 유산이 지닌 폭넓은 혁명적 잠재력을 논했다.

 

이 저서들은 프랑스 독자를 염두에 둔 것으로 프랑스어로 첫 출판되었다. 1840~43년에는 프랑스의 생활·문화·정치에 관해 또다른 일련의 신문 논설들을 썼으며, 이 글들을 재편집하여 1854년 파리의 고대 로마 시대 이름인 〈루테치아 Lutezia〉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색인 : 언론).

 

이 시절 하이네는 '시'에서 당대의 사회문제로 주의를 돌렸다.

 2번째 시집 〈신시집 Neue Gedichte〉(1844)에서 그 변화가 분명히 드러난다.

 

 대부분 1830(또는 1831)년에 쓴 〈새 봄 Neuer Frühling〉에 수록된 첫번째 계열의 시들은

〈노래책〉의 연애시들을 더욱 개성 있게 재현한 것들이며, 또 하이네가 일생 동안 쓴 장르인 발라드 시들도 들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것들 Verschiedene〉에 실린 2번째 계열의 시는 파리의 쾌활한 소녀들과의 변덕스러운 관계를

그린 빈약하고 짧은 연작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들이 보여주는 환멸의 분위기는 널리 오해를 샀고 그에게 불리한 평판을 받았다.

또다른 계열은 〈시대시 Zeitgedichte〉라는 제목으로 묶인 거친 정치적 풍자시들이다.

이들 중 몇 편은 카를 마르크스의 신문 〈전진 Vorwärts〉을 위해 쓴 것이었다.

 

 하이네는 1843년말 젊은 마르크스와 알게 되었으며, 바로 그무렵에 그는 독일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한 후 보수반동적인 독일 상황을 통렬히 공격한 장편 풍자시 〈독일, 겨울동화 Deutschland, Ein Wintermärchen〉(1844)를 썼다.

 

 이후 하이네는 마르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공산주의에 결코 경도되지는 않았다.

공산주의는 환희와 관능의 혁명이라는 그의 이상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를 만날 무렵 그는 또다른 장시 〈아타 트롤, 한여름밤의 꿈 Atta Troll, Ein Sommernachtstraum〉

(1843~45)을 썼는데, 이것은 급진적인 호언장담과 서투른 당대 정치시들을 익살스럽게 흉내낸 작품이다.

파리에서 보낸 처음 몇 년 간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부유한 숙부의 상류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그는 지도적인 문인으로 변신하여 당대의 많은 저명인사들과 사귀게 되었다. 1834년 교육받지 못한 여점원 크레센스 유제니 미라를 알게 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녀를 '마틸데'라고

불렀다.

 하이네는 까다롭기는 해도 충실한 애인이었던 그녀와 1841년 결혼했다.

 

그러나 곧 심한 난관에 부딪쳤다.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글들로 인해 그는 독일 검열당국과 험악한 관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1835년말에는 독일 연방의회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전국적 금지령을 시행하고자 했다.

 

그는 정치 스파이에 에워싸였고, 자발적 망명이 강요된 망명이 되었다.

1840년 하이네는 파리의 독일 급진주의자 지도자였던 고(故) 루트비히 뵈르네(1786~1837)에 관해 재치 있지만

 경솔한 책을 썼다.

 

여기서 하이네는 천박한 정치적 행동주의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 자신의 더욱 미묘한 입장을 옹호하려고 했으나,

이 책에서 보인 거만하고 무자비한 태도로 인해 모든 동료들로부터 소외되었다.

 

하이네는 궁핍하지 않았음에도 늘 돈이 없었다.

하이네의 상속권을 박탈한 채 1844년 숙부가 죽었을 때 유산 상속에서 제외되어버리자 그는 전유럽의 주목하에 격렬한

 상속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 싸움은 그의 글에 대한 검열권이 숙부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분명 하이네의 회고록은 태반이 후세의 수중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비밀 연금을 받아 왔다는, 1848년 프랑스 혁명 후 폭로된 정보는 그를 더욱 난처하게 했다.

 

그렇지만 가장 심한 고통은 건강악화에서 비롯되었다.

성병으로 보이는 병이 신경계통을 서서히 침범해 1848년 봄부터 '침대 무덤'에 갇히게 되었고 척추경련으로 말미암아

 마비되고 사지가 뒤틀렸으며 부분적으로 눈이 멀게 되었다.

 

하이네는 다시 '시'로 돌아갔다. 냉소적으로 얼버무리면서 그는 인간의 신성(神性)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을 불공평하게 지배하는 데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인격신을 인정했다.

3번째 시집인 〈로만체로 Romanzero〉(1851)는 인간 조건에 관한 통절한 비탄과 음울한 해석들로 가득하다.

이 가운데 많은 시가 오늘날 가장 훌륭한 시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시집 〈1853년과 1854년의 시 Gedichte 1853 und 1854〉도 비슷한 종류의 것이다.

하이네는 거의 8년 동안 고통을 겪다가 죽어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평가

사람을 격분하게 하는 하이네의 힘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감동시키는 힘만큼 컸으며, 이토록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인은

드물었다.

 공격적인 풍자, 급진적 태도, 남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국심이 없고 파괴적인 악당으로 보였으며, 점증하는 반유대주의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여러 독일 도시에서 그의 기념비를 세우려던 노력은 폭동을 유발하고 정부를 동요하게 했다.

그의 많은 시가는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치가 이 시가들을 명시선집에 포함시켰지만, '작자 미상'의 시가로 표기했다.

 

수십 년 동안 그의 문학적 명성은 국외, 특히 프랑스·영국·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

오늘날 하이네의 정치적 역할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에 대한 평가는 동서간 논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그의 명성의 역사가 많은 부분에서 이처럼 비참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실로 유럽적인 시인이자 작가로서의 지속적인

 영향이 남긴 증거이기도 하다.

J. L. Sammon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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