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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 그의 작품세계

 
제임스 조이스 / 그의 작품세계
 

 

 

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년 2월 2일 ~ 1941년 1월 13일)

아일랜드더블린 출신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은 율리시즈(1922)와 매우 논쟁적인 후속작 피네간의 경야(1939), 단편인 더블린 사람들(1914),

그이 반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등이 있다.

 

성인이 되어서 대부분의 삶을 아일랜드 밖에서 보냈지만, 그의 정신적 가상적 세계는 그의 고향인 더블린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더블린은 그의 소설의 주제와 설정의 많은 부분을 제공해 주었다.

 

생애

제임스 조이스는 1882년 더블린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라스가(Rathgar)의 브라이턴 서부 스퀘어

41번지에서 아버지 존 스태니스라우스 조이스(John Stanislaus Joyce)와 어머니 매리 제인 머래이

(Mary Jane Murray) 사이에서 첫번째 아들로 태어나다.

 

아버지는 정치에 관심이 높았으나 직업적으로 거의 사회 밑바닥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매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제임스를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들을 낳아 가톨릭 신앙에 따라 키우고자 노력하였다고

 전한다.

 

20세기 문학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예수회 계통의 학교에서 교육받고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그리스·라틴·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 각국어에 통달하였고, 일찍부터 입센, 셰익스피어, 단테, 엘리자베스왕조 시인,

플로베르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 T.아퀴나스, 비코 등의 철학을 흡수하였다.

아일랜드의 문예부흥 기운에 반발하여 학교 졸업과 동시에 파리로 갔으며, 1904년 벌리츠학원의 영어교사로 러시아의

폴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등지에서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취리히로 피난, 1920년부터 파리로 옮겨 새로운 문학의 핵심적 존재가 되어, 주변에

각국의 시인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침입을 받자 다시 취리히로 가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그는 고향 더블린을 버리고 37년간이나 망명인으로서 국외를 방랑하였다. 빈곤과 고독 속에서 눈병에 시달리면서,

전인미답의 문학작품을 계속 집필하였는데, 작품의 대부분이 아일랜드 ·더블린 ·더블린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젊었을 때 한때 신문발행과 영화관 경영을 계획한 적도 있었지만 둘 다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7년 고전적 아취를 지닌 연애시를 모은 시집 《실내악 Chamber Music》을 발표하고, 1914년에는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을 출간하였다.

 

그 대부분은 이미 1905년경 이전 탈고로 발표된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 후 1914∼1916년에 《에고이스트》지(誌)에 연재된 자서전적 요소가 많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1917)은 ‘의식의 흐름’을 따른 청신한 심리묘사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어 3막의 희곡 《유인(流人)》(1918)을 간행하는 한편, 1918년부터 《율리시스 Ulysses》(1922) 일부를 미국의

잡지 《리틀리뷰》에 발표하여 풍기상 유해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하기도 하였으나, 조이스라는 이색작가의 존재를

널리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1922년 파리에서 대본업을 하던 미국인 여성 실비아 비치의 희생적 노력으로 《율리시스》가 간행되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엇갈렸으나, 출중한 문학적 재능에는 한결같이 경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연구 해설서도 잇달아 출간되었다.

마지막 작품 《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1939)는 진일보한 실험적 작품으로서 《율리시스》에서 사용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종횡으로 구사되었다.

오늘날의 소설은 매스컴에 용해되어 있으나, 조이스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최후의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인적 작가였다.

 

문학세계

더블린 사람들〉에서는 20세기 초의 더블린 사람들의 냉소적이고 우울한 모습과 당시의 각박했던 사회상을 그려냈다.

 

저서

<위키백과>

 

 

 

 

Winds of May

             / James Joyce

 

Winds of May, that dance on the sea,

Dancing a ring-around in glee

From furrow, while overhead

The foam flies up be garlanded,

In silvery arches spanning the air,

Saw you my true love anywhere?

Welladay! Welladay!

For the winds of May!

Love is unhappy when love is away!

 

 

5월의 바람

 

5월의 바람, 바다 위에 춤을 춘다,

환희에 넘쳐 이랑에서 이랑으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거품이 날아 머리 위로 화환 이루고,

은빛 아취 공중에 다리를 놓는다.

나의 진실한 사랑을 어디에서 보았는가 ?

 

아! 아!

5월의 바람이여!

사랑은 멀어지면 불행한 것! 

 

(실내악 chamber music 의 1연)

 

 

 

 

 

조이스, <율리시즈>

 

1918∼1920년에 뉴욕의 문예잡지 《리틀 리뷰 Little Review》에 연재중 게재금지를 당하여 1922년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출판하였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의식의 흐름과 내면의 독백을 종횡으로 활용하였다.

 신문의 제목, 음악적 요소, 영화·극 중의 대화, 고전작품의 패러디 등을 종합적으로 채택한 작품이다.

 종래의 소설 형식을 근본적으로 뒤엎은 획기적인 작품으로서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작자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무대로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일어난 일을

734면에 서술하였다.

 

 중요한 등장인물은 3명으로 유대계의 광고업자 레오폴드 블룸, 그의 부인 마리온, 학생이며 시인 기질이 있는

 스티븐 디달러스이다.

 1904년 6월 16일은 그후 조이스의 팬들이 블룸의 날(Bloomsday)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 구성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모방하였고 블룸은 오디세우스, 마리온은 페넬로페, 디달러스는

 텔레마코스에 해당한다.

또한 《오디세이아》와 마찬가지로 모두 18삽화의 결합으로 구성하였고 각 삽화도 《오디세이아》의 그것과

 대조되게 하였다.

그의 솔직한 묘사를 외설·부도덕이라 하여 영국과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발행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프랑스어·독일어 등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 끼친 영향이 컸고 연구서적도 많다.

1967년 영국에서 영화화되었다. 한국에서는 1968년 김종건(金鍾健) 번역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되었다.

 

 

 나는 『율리시스 』 속에 굉장히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추어 두었기에, 앞으로 수 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 제임스 조이스

I. 등장인물(전체 105명)


(1) 블룸, 리오폴드 - 1866년, 어버지 루돌프 비러그와어머니 엘렌 히긴즈 사이에서 출생.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블룸으로 개명('bloom'은 꽃을 의미함)하고 1886년 자살함.

 

리오폴드는 1888년 브라이언 트위디 소령과 스페인계 유대인인 루니타 라레도의 딸 마리언(몰리)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지브롤터에서 자라남.

그들의 딸 밀리가 1889년 탄생하였으며, 아들 루디는 유아 때 죽음. 리오폴드는 광고 외무원이고 몰리는 유명한 가수임. 오디세우스의 분신.

(2) 디덜러스, 스티븐 - 1882년, 재치있고 친절하지만 주정뱅이인 사이먼 디덜러스와 1903년 죽은 메리 디덜러스의 아들로 출생. 가톨릭 학교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교육받음. 학교 선생이며, 훌륭한 가수의 자질과 문학적 야망을 지닌 학식 있는 젊은이로 알려져 있음.

 

 사이먼은 매우 궁핍하여 그의 딸들인 딜리, 케이티, 매기, 부디 등과 함께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서 애쓰고 있음.

텔레마코스의 분신.

(3) 블룸, 마리언 - 1870년 출생.

양친은 트위디 소령과 루니타 라레도. 1888년 리오폴드 블룸과 결혼하고, 현재는다정다감한 육체파 소프라노 가수.

애칭은 몰리. 많은 남성들과 관계했으나,

 현재는 보일런과 연애하고 있음. 페넬로페의 분신.

(4) 보일런, 클리퍼드 등등

(5) 전체 개요
작자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무대로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일어난 일을

 734면에 서술하였다.

 

 중요한 등장인물은 3명으로 유대계의 광고업자 레오폴드 블룸, 그의 부인 마리온, 학생이며 시인 기질이 있는 스티븐 디달러스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성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모방하였고 블룸은 오디세우스, 마리온은 페넬로페, 디달러스는

 텔레마코스에 해당한다.

또한 《오디세이아》와 마찬가지로 모두 18삽화의 결합으로 구성하였고 각 삽화도 《오디세이아》의 그것과

 대조되게 하였다.

 

 (두산백과)

II. 『율리시스 』의 줄거리

1. 탑/텔레마코스, 오전 8시

멀리건이 마텔로 탑의 난간에서 면도를 하고 있다.

그는 스티븐더러 좀 명랑하도록 타이른다. 스티븐은 종교 문제로 인한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멀리건의 태도 역시 그에겐 못마땅하다.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멀리건이 아침식사를 마련하여 스티븐, 헤인즈와 함께 먹는다.

 우유를 배달하는 노파가 방문한다.

 

스티븐은 탑의 세를 지불한다.

 이어 세 사람은 탑을 떠난다.

멀리건은 더블린 만에서 수영을 하고, 헤인즈는 곁에 앉아 도시를 향하여 출발하기 전에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스티븐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달키 소학교로 향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스티븐이 많은 정복잗르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목격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도의 거절에서 오는 죄의식과 좌절감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멀리건은 스티븐을 딜레마 속에 빠뜨리려고 하는, 더블린의 대표적인 마귀의 양상을 띠고 있다.

2. 달키의 초등학교/네스토르, 오전 10시

스티븐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역사와 시를 가르치며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몇 가지 비평을 가하지만 학생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의 주변 상황이 스티븐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킨다.
소년들이 하키 연습을 떠난 뒤에 스티븐은 학교 교장인 가레트 디지에게서 월급을 받고, 두 일간신문의 편집자에게

소의 아구창(鴉口瘡)에 관한 편지를 전해 줄 것을 그에게서 부탁받는디.

 

이 장에서 우리는 스티븐의 탑 밖에서 사람들과 접촉함을 본다. 권위를 자유로이 행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딜레마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의 자유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3. 샌디마운트 해변/프로테우스, 오전 11시


스티븐이 신문사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볼일을 본 다음 그는 쉽(Ship) 주점에서 멀리건과 헤인즈를 만나기로 되어 있으며 <햄릿>에 관한 이론을

 전개할 참이다.

 

도중에 그는 얼마간 길을 빗나가 약 반 시간쯤에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 에피소드는 전적으로 스티븐의 현재와 과거으 딜레마에관한 자신의 명상과 그를 둘러싼 외부 세계의 관찰로 점령된다.

 

 이제 그는 자신과 자기 개인적 신분이 신과 우주의 영역에 적응되어 가는지를 형이상학적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는 이제 이전보다 더욱 분명히 그의 인생의 실패를 느끼며 이러한 실패가 자기 자신의 책임임을 통감한다.

4. 이클레스가(街)/칼립소, 오전 8시


리오폴드 블룸은 스티븐과 마찬가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신과 아내를 위하여 아침식사를 마련한다.

 아내인 몰리는 침대에 누운 채 식사를 하고 남편이 가져온 편지를 읽는다.

 

그런 다음 블룸은 자신의 아침거리를 위하여 모퉁이를 돌아 돼지콩팥을 사 가지고 돌아와서, 고양이에게도 먹이를 주고

 딸 밀리로부터 온 편지를 읽는다.

 

그는 보일런이 오후에 아내를 방문해 올 것을 알게 된다.

 오전에 그는 옛날 친구인 패디 디그넘의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클레스가 7번지에는 공중 목욕탕이 없기 때문에 그는 더블린시의 다른 지역에 있는 대중탕을 찾아갈 작정이다.

 

블룸은 집 밖 화장실을 사용하며 근처의 조지 성당에서 들려 오는 8시 45분의 종소리를 듣는다.

이 장에서 블룸은 스티븐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에 봉착해 있다.

그는 아내에게 사로잡힌 격이다.

이는 마치 스티븐이 그의 어머니의 영(靈)에 의하여 심적 고통을 받고 있는 것과 같다.

5. 목욕탕/로터스-이터즈, 오전 10시

블룸이 목욕탕으로 가기 위해 더블린의 부둣가에 갑자기 나타난다.

 그는 길을 한 바퀴 돌아 공중탕으로 향하는데 그 이유는 웨스틀랜드 로우 기차 정거장으 한 우체국에서 자신에게 온

편지를 찾기 위해서다.

 

그는 마사클리퍼드라는 아름다운 아가씨와 염문을 교환하고 있으며 자신은 헨리 플라우어(Henry Flower)라는 익명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편지를 찾아 읽은 후 그가 아는 C.멕코이를 만나고 바누를 하나 사서 가게에서 나오다가 뜻하지 않게

 밴텀 라이언즈라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에게 이날 행하는 애스콧 골든컵 경마에 관한 귀띔(팁)을 하는 듯하지만 실은 라이언즈에게 신문을 주며 그것을

 ' 버릴 (throw it away)' 계획이라고 말한다.

 

드로우어웨이(Throwaway)호(號)는 경마의 이름이다.

블룸은 마침내 트리니티대학의 뒷문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다다른다.

이 상에서 블룸은 스티븐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집을 나와 외부적 경험과 부딪치게 된다.

6. 더블린 거리와 묘지/하데스, 오전 11시

스티븐이 아침으 명상을 위하여 샌디마운트 해변에 도착하기 직전에 블룸은 죽은 친구인 디그넘의 장례 행렬이 출발할

같은 샌디마운트 해변의 부브리지가(街) 9번지에 당도한다.

 

블룸은 다른 세 친구인 마틴 커닝엄, 잭 파우어그리고 사이먼 디덜러스(스티븐의 아버지)함께 장례마차를 타고 더블린시를 가로질러 대각선 방향으로 북동쪽에 있는 글래스네빈 묘지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묘지 교회으 예배에 뒤이어 무덤가를 향해 애도자들을 뒤따른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신문사 사무실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난다.

 

이 장에서는 더블린 거리가 한층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블룸은 이 장에서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며 자신의 사적 문제들은 그의 의식에서 점차 사라진다.

 특히 이 장에서는 그의 동료들로부터의 구박이 한층 더 심각하지만, 블룸은 여전히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7. 신문사/아이올로스, 정오


블룸과 스티븐은 하루가 시작될 즈음에 도시의 서로 반대편에 있지만, 정오가 될 즈음에는 거의 도시의 한복판에 있다.

신문사에서 블룸은《프리먼즈 저널》지(誌)의 편집장과 주류 도매상인 알렉산더 키즈를 위한 광고 갱신에 관하여

 서로 의논한다.

 

 그리고 같은 사무실에서 스티븐은 디지의 편지 한 통을 인계한다.

신문사에서는 소설에 나오는 군소 인물들이 수사학, 민족주의 그리고 저널리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블룸으 ㄴ키즈 광고의 정확한 도안을 복사하기 위하여 그 도안이 실린 지방신문을 찾아 국립도서관으로 떠난다.

이 에피소드가 거의 끝날 무렵 스티븐과 군소 인물은 무니 주점으로 향한다.

 

더블린시는 이 장에서 스티븐과 블룸에게 각기 다른 반응을 제시한다.

이러한 반응은 이 장면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처음으로 스티븐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본다.

한편 블룸은 그의 동료들로부터 소외당한 채, 스티븐과는 달리 그의 동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습관적으로

희망하고 있다.

8. 더블린시 한복판/레스트리고니언즈, 오후 1시

 

블룸이 도서관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

 신문사에서 리피강을 건너 걸어서 가기에 알맞은 거리다.

그는 거리에서 젊은 YMCA 청년으로부터 한 선교사의 방문을 알리는 전단을 받는다.

 

이 전단을 그는 강에 떨어뜨린다.

 도중에서 그는 한때 자신이 열렬한 애정을 품었던 브린 부인을 만난다.

 

그는 약간 정신이 나간 그녀의 남편에 관하여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도서관이 가까워지자 그는 버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생각을 하나 그곳이 너무 불결하여 근처의 데이비 번이라는

 깨끗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그곳을 떠나면서 그는 한 풋내기 장님 소년이 길을 건너는 것을 도아 주며, 도서관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또 한번

 보일런을 목격한다.

 

 그와 만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블룸은 방향을 바꾸어 맞은 편 국립박물관으로 들어선다.

블룸은 이 장에서 앞으 잘들에 비해 그다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지만 많은 의식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사고로 되돌아간다.



9. 국립도서관/스킬라와 카립디스, 오후 2시


스티븐은 한 시간 전에 신문사에서 나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12시 반에 헤인즈와 멀리건에게 <햄릿>에 관한 이론을 말해 주기롤 되어 있지만 그럴 수 없다고 전보를 친 바 있다.

 

이제 그는 국립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서 몇며치 문인 그룹에게 그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은 조지 러셀과 매기(존 이글링턴), 그리고 관장인 리스터를 위시하여 조시운 베스트이다.

 

 토론 도중에 멀리건이 도착하여 스티븐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하여 냉소적인 말을 퍼붓는다.

블룸이 마침내 도서관에 도착한다. <햄릿>에 관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광고를 복사한다.

 

스티븐과 멀리건이 3시쯤 도서관을 떠라려 할 때 블룸이 그들 두사람 사이를 빠져 나간다.

이 장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여기에서 전개되는 스티븐의 <햄릿>에 관한

 이론 그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 전반에걸친 등장인물들에게 미친 이론의 함축성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의 예술론이 그 이론 자체로서 중요하기보다는 스티븐 자신에 대한 예술가적 성장에

 크게 이용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장면의 <햄릿>이론 또한 셰익스피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보다는 스티븐의 통찰력을 마련하는 데 한층 값진 것이다.

10. 거리/배회하는 바위들, 오후 3시


19개의 단편적인 장면이 더블린시의 여러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군소 인물들을 동시에 묘사하고 있다.

이들 장면 속에는 블룸과 스티븐도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소설 전반에 걸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큰 사건들은 아니다.

도서관을 떠났던 블룸과 스티븐이 노점의 책들을 살핀다.

 

이들 이야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첫째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첫째 장면에서 우리는 스티븐이 다녔던 초등학교인 클론고우즈 우드의 전 교장인 존 콘미 신부에 관해 읽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도시의 남부에서 개최되는 바자에 참가하기 위한 아일랜드 총독의 마차 행렬이 지나가는

 장면을 읊은 긴 서술을 우리는 또한 읽는다.

11. 오먼드 주점/세이렌, 오후 4시


블룸은 염문을 교환하고 있는 젊은 아가씨인 마사에게 답장을 쓰기로 작정한다.

문방구에서 필기구를 사고 있는 동안 보일런을 보자 블룸은 그를 뒤따르기로 마음먹지만 오먼드 주점에서 스티븐의

 숙부인 리치 고울딩을 만나 간이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곳에 남아 그를 더 이상 추적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곁의 주점에서 들려 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데, 그곳에는 스티븐의 0 부친인 사이먼 디덜러스가 그이 몇몇

 친구들과 함게 와 있다.

 

블룸은 마사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이 장이 거의 끝날 무렵 그는 보일런이 자기의 아내인 몰리에게 거의 도착한 것을 의식하고 몹시 불안해하며

 그곳을 떠난다.

 

그는 법원과 또 다른 주점에서 몇몇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갖고 있는데, 그들과 함께 오늘 오전에 장례를 치른 디그넘 상가(喪家)를 방문할 참이다.

 

 블룸은 이 장에서 그의 아내의 정사(情事)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하지만, 이러한 마음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의

결심에 따라 그는 이 일에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와 분투하려고 노력한다.

12. 바니 키어넌 주점/키클롭스, 오후 5시


블룸은 디그넘의 상가에 동행할 커닝엄과 파우어를 만나기 위하여 키어넌 주점으로 향하고 있다.

그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대단히

 다변적이고 과격하며 반영(反英) 아마추어 정치가인 이른 바 '시민'이라는 우두머리가 앉아 잏ㅆ다.

 

 블룸은 그곳에 들어가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일련의 논쟁에 말려든다.

논쟁은 대단히 과격하게 되는데 첫째로 '시민'은 블룸이 유대계 조상을 갖고 있는 것을 크게 못마땅히 여긴다.

'시민'은 과격한 민족주의자로서 아일랜드의 빈곤을 유대인의 경제적 약탈 때문으로 간주한다.

 

 블룸은 골든컵 경마에서 이긴 말에 내기를 걸어 돈을 딴 것으로 예상되어 한 차례 술을 사도록 기대되어지지만

 그는 한 잔도 사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앞서의 논쟁으로 '시민'을 크게 분노하게 함으로써 이를 피하기 위하여 블룸은 주점에서 도주하고 '시민'이

그에게 비스킷 상자를 내던진다.

 

블룸은 막 그곳에 파우어를 대동하고 도착한 커닝엄에 의하여 구조된다.

이 장에서는 블룸의 성적 고통과 불만스러운 봉사의 주제가 한층 두드러진다.

블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부정한 아내 때문에 한층 곤욕을 치러야 한다.

 

 '시민'과 같은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에게, 블룸은 같은 무리는 아일랜드의 파멸의 원인이며 블룸의 성격은 아일랜드의

현재의 수치라고 공격받는다.

13. 샌디마운트 해변/나우시카, 저녁 8시


두 시간이 경과했다.

그동안 블룸은 커닝엄 및 파우어와 함께 디그넘의 상가에 있었다.

그는 이제 해변으로 걸어나와 그곳에 앉아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곳에서 그는 세 소녀가 몇몇 꼬마 아기들과 함께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거키 맥도웰이라는 아가씨로서 블룸이 자기를 엿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다.

총독이 베푼 바자에서 솟아오르는 불꽃놀이를 기회로 삼아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고 속옷을 드러냄으로써 블룸의

 시선을 끈다.

 

블룸은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자위 행위를 한다.

이 에피소드의 후반부에서 블룸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하루의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하여 내적 독백 형식으로 오랜 명상을

 갖는다.

 

마침내 그는 성적 만족에 뒤따르는 졸림에 굴복한 나머지 그곳에서 얼마간 존다.

 블룸이 자위 행위를 하고 난 뒤에 갖는 나른한 행복감과 센티멜털리즘은 꿈의 언어로 된 환상적 경험과 함께 의식의 흐름의 문체로 씌어 있다.

14. 홀레스가(街)의 산부인과 병원/태양신의 황소들, 밤 10시


블룸은 해번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서 홀레스가(街)의 산부인과 병원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는 그곳에 들러 3일 동안이나 신고를 치르고 있는, 그가 잘 아는 퓨어포이 부인의 문병을 한다.

 

그는 그곳에서 몇몇 의과 대학생들과 술을 마시며 앉아 있는 스티븐 디덜러스를 발견하고 그를 살피기 위하여 잠시

그곳에 머무른다.

얼마 후에 멀리건이 밴넌이란 친구와 함께 그곳에 들어오는데 밴넌은 블룸의 딸인 밀리의 애인이기도 하다.

 

11시 직전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모퉁이의 한 주점에서 마지막 술을 마시기 위해 그룹 전체가 떠난다.

그런 다음에 스티븐과 그의 친구 린치 그리고 블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기차역으로 향한다.

 

스티븐과 린치는 밤의 거리를 방문하기로 작정한다.

이 장에서 보듯이 블룸은 처음으로 《율리시즈》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과시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그의 부부 관계에 대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부성(父性)을 확인하는 행동으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15. 밤의 거리/키르케, 한밤중

이 에피소드는 분량으로 보아 매우 길지만 그 내용은 극히 간단하다.

블룸은 밤의 거리로 스티븐과 린치를 뒤따른다.

얼마 동안 그는 그들을 놓치지만 마침내 코헨 창가(娼街)에서 그들을 만난다.

 

스티븐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춤을 추지만 어느 창녀와도 성적 관계는 갖지 않는다.

춤이 절정에 달하자 그는 자신의 죽은 어머니의 환영을 보며 그녀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거리로 뛰쳐나간다.

 

여포주가 그를 추적한다. 거리에서 그는 한 수병(水兵)의 애인을 희롱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는 수병에 의하여 거리에 때려 눕혀지지만 블룸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지막에 쓰러진 스티븐의 모습은 블룸으로 하여금 그의 죽은 자식 루디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고무적 장면이다.

 

 



16. 역마차의 오두막/에우마이오스, 새벽 1시


블룸은 스티븐을 일으켜 세워 강가의 커피숍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그는 커피와 빵 한 조각을 시켜 스티븐에게 대접하지만 그는먹지 않는다.

두 사람은 한 노수부(老水夫)의 긴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다음 블룸은 스티븐에게 자신의 집으로 갈 것을 제의한다.

 

그는 자기의 아내인 몰리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그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준다.

몹시 지친 두 사람은 약 1마일 떨어진 블룸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블룸은 스티븐의 안정을 위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 중 하나는 풍만한 육체를 가진 자기 아내의 사진을

 스티븐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를 반(半)의식적으로 자극한다.

그러나 스티븐으 태도는 소극적이며, 결국 블룸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이는 단순히 갈 곳이 없다는 실질적 이유 때문이다.

17. 이클레스가 7번지/이타카, 새벽 2시


블룸과 스티븐은 집에 당도하지만 블룸이 아침에 열쇠를 갖고 나오는 것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지하 식당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 그는 스티븐을 부엌으로 데리고 가 코코아를 대접하며 여러 가지 공동의 관심사에 대하여 환담한다.

 

그 후 스티븐은 잠자리의 제공을 거절하고 그곳을 떠난다.

블룸은 잠자리를 마련하고 잠에서 깨어 있는 몰리 곁에 거꾸로 누워 그날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그는 잠에 떨어진다.

18. 침실/페넬로페, 새벽 2시 30분


블룸이 잠이 들어 있는 동안 몰리는 생각에 잠긴 채 잠에서 깨어 있다.

이 에피소드의 유일한 사건은 몰리의 월경(月經) 시작으로,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잠시 침대에서 일어나게 한다.

 

 몰리와 블룸의 화해를 예상케 하는 마지막 서술은 이 소설을 결론짓는 최후의 구절인데, 여기에서 그녀는 지브롤터에서

 가진 처녀 시절의 사랑과 호우드 언덕에서의 블룸의 청혼에 대한 숨막히는 회상으로 고조된다.

그녀의 마지막 의식은 블룸을 감수하려는 상상적 재확인과 힘찬 인생의 서정적 구가(謳歌)로써 마무리된다.

III. 각 장에 대한 해설

1. 제1장


표제 : 텔레마코스(Telemachus)


《오디세이아(Odysseia)》제1권에서 오디세우스(Odysseus : 그리스명. 율리시즈(Ulysses) : 라틴명)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이타카(Ithaca)의 자기 집에 머무르고 있다.

 

그는, 부왕(父王)의 부재 동안에 궁전을 약탈하고 그의 어머니 페넬로페(Penelope)에게 구혼을 강요하는 무리들 때문에 위협을 받는다.

이들 무리 가운데 주모자는 안티노우스(Antinous)다. 멘토르(Mentor)로 분장한 아테나(Athena)가 텔레마코스에게

나타나, 파괴적이고 오만한 구혼자들을 부왕의 궁전에서 몰아내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본토로 가 부왕을 찾도록

 충고한다.


시간 : 1904년 6월 16일, 목요일, 오전 8시
장면 : 더블린 중심부에서 남동쪽 7마일에 위치한 더블린 만의 샌디코브(Sandycove) 해번에 위치한 마텔로(Martello) 탑.

2. 제2장


표제 : 네스토르(Nestor)
《오디세이아》제2권에서 텔레마코스 완자는 아테나의 지시에 따라 부왕의 소식을 찾아 배를 타고 본토로 향한다.

 제3권에서 텔레마코스는 본토에 도착하여 충고를 얻고자 '우두머리 전사'인 네스토르에게 접근한다.

네스토르의 막내아들 피시스트라토스(Pisistratus)가 텔레마코스를 맞는다.

 

네스토르는, 오디세우스 장군의 귀향이 어려운 운명에 처해 있기는 하나 심신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도록 텔레마코스를

타이르며 그리스 영웅들의 귀향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5권에서 피시스트라토스는 텔레마코스를 메넬라오스(Menelaus)의 궁전으로 안내하고, 그곳에서 텔레마코스는

 헬렌(Helen)을 만나 메넬라오스의 귀향 이야기를 듣는다.
시간 : 오전 10시
장면 : 달키(마텔로 탑 남동쪽 약 1마일 지점. 더블린 만 남동쪽의 불쑥 나온 곶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3. 제3장


표제 : 프로테우스(Proteus)

  《오디세이아》제4권에서 텔레마코스가 메넬라오스의 궁전에 있는 동안,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트로이 여행담을

그에게 들려준다. 메넬라오스는 이집트에서 그곳 규칙을 위반한 죄로 신들에 의하여 감금되어 있다.

 

그는 어느 신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어떻게 배를 타고 귀향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한 가지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해변에서 '바다의 선조'라는 프로테우스 해신과 겨룬다.

 

프로테우스는 자신의 몸을 짐승, 물, 불 등으로 변용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메넬라오스가 그의 계속되는변용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프로테우스는 메넬라오스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그 일은 결국 상공한다.

그 결과 프로테우스는 메넬라오스에게 이집트가 그를 속박하고 있는 마력을 파괴하는 벙법을 알려 주며 칼립소

(Calypso) 섬에 고립되어 있는 오디세우스의 행방을 알려 준다.
시간 : 오전 11시


장면 : 샌디마운트 해변(Sandymount Strand, 던 레어리 항구와 리피 강구의남쪽 및 피전하우스 방파제 사이의

약 2마일에 달하는, 더블린 만의 해안. 산책로로 유명함.) 스티븐은 달키에서 대중 교통 수단으로 이곳에 도착하여,

12시 30분에 만나기로 한 벅 멀리건을 보기 전에 약 1시간 30분 동안 이곳 해변에서 빈둥거린다.

 그는 멀리건과의 약속을 어긴다.

4. 제4장
《오디세이아》제5권에서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요정 칼립소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자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구하기 위하여 제우스에게 중재를 부탁한다.

제우스는 헤르메스(Hermes)를 칼립소에게 보내어 오디세우스를 해방케 하고 그의 안전한 귀향을 권한다.

 

 오디세우스는 지난 7년 동안 이 섬에 감금된 채 해방과 귀향을 동경해 왔다.

 칼랍소는 제우스의 지시에 응하고 오디세우스는 자유의 몸이 되어 항해를 준비하지만, '소나기 먹구름'의 형태를 지닌

 포세이돈(Poseidon)의 반감으로 폭풍우에 휘말린다.

 

그러자 아테나가 다시 중재에 나서고 오디세우스에게 '침착의 선물'을 주어 폭풍우를 이겨 내게 한다.
시간 : 1904년 6월 16일, 목요일, 오전 8시
장면 : 더블린 북서쪽에 있는 이클레스(Iccles) 가(街) 7번지, 리오폴드 블룸의 집.

5. 제5장
표제 : 로터스-이터즈(Lotus-Eaters)


오디세우스 장군은 칼립소의 섬과 바다로부터 도피한 후에 파이아키아인(phaeacian)의 나라 스케리아(Scheria)에

상륙하여(제6권) 알키노오스(Alcinous) 궁전에서 대접을 받고(제7, 8권), 알키노오스왕에게 자신의 수년간에 걸친

항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제9권).

 

그의 항해 초기에 그와 그의 부하들은 폭풍우로 로터스-이터즈(로터스 꽃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섬에 떼밀리게 된다.

그러자 오디세우스의 몇몇 부하들은 로터스를 먹고 고국을 잊어 버린 채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기를 바란다.

오디세우스는 그들을 설득해 다시 배에 태워 출항한다.


시간 : 오전 10시
장면 : 블룸은 이클레스가의 자기 집으로부터 리피 강구 근처의 남쪽 둑의 서 존 로저슨 부두까지 약 1.25마일을 여행한다. 그는 웨스틀랜드 로우 정거장을 향해 남쪽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레인서터(Leinster) 가의 목욕탕까지

배회한다.

6. 제6장
표제 : 하데스(Hades)

《오디세이아》제10권에서 키르케(Circe)는 오디세우스에게 죽음의 세계인 황천(Hades)을 방문하도록, 그리고 여행을 계속하기 전에 맹인 예언자인 티레시아스(Tiresias)의 영혼과 상의하도록 충고한다.

 

제11권에서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황천에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옛날 키르케 홀에서 술에 취해 죽은 그의 부하 엘페노르(Elpenor), 제우스신의 아들로 엄청난 힘을 소유했던 헤르쿨레스(Hercules), 메넬라오스의 형으로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군을 인솔했으며 전쟁터에서 귀국하자 그의 아내에게 살해된 아가멤논(Agamemnon) 등, 생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유명한 사람들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이 황천의 여행 도중 오디세우스는 네 개의 강을 건너게 된다.


시간 : 오전 11시
장면 : 더블린 북부 그래스네빈(Glasnevin)에 있는 프로스펙트(Prospect) 공동묘지. 이 장에서 블룸은 더블린시 남동 해안에 있는 샌디마운트 해변의 디그넘 상가에서 더블린 중심부를 지나 글래스네빈까지의 장례행렬과 동행하며 묘지에서 장례식에 참가한다. 그는 도너(Dodder)강, 그랜드 운하(Grand Canal), 리피강 그리고 로열 운하(Royal Canal)를 차례로 건넌다.

7. 제7장
표제 : 아이올로스(Aeolus)


《오디세이아》제10권에서 오디세우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가 지배하는 아이올리아(Aeolia)에 도착한다.

아이올로스는 자루 속에 모든 불길한 바람을 가둠으로써 오디세우스를 도우려고 애쓴다.

 

오디세우스는 이 자루를 배에 싣고 항해를 한다.

그러나 그의 조국 이타카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부하들이, 오시디세우스가 그 자루 속에 어떤 굉장한 보물을 감추어

 둔 게 아닌가 의심하여 그것을 열어 버리자 바람이 마구 새어 나온다.

 

그러자 배는 도로 아이올리아로 돌아가게 되고, 그곳의 아이올로스는 오디세우스에게 더 이상의 도움을 거절한다.
시간 : 12시 정오
장면 : 《프리먼즈 저널》신문사의 사무실(중앙우체국과 넬슨기념탑 근처, 더블린 중심부에서 북쪽 프린스가

4~8번지 소재).

8. 제8장
표제 : 레스트리고니언즈(Lestrygonians)


《오디세이아》제10장에서 바람의 왕 아이올로스에게 퇴짜를 맞은 오디세우스 장군과 그의 부하들은 다시 한 번

 바다로 출항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을 마치 물고기처럼 마구 씹어 먹는 거대한 식인종들인 레스트리고니언즈의 위협에 봉착한다.

 이 식인종들의 왕은 거인 안티파테스(Antiphates)로서 오디세우스의 모든 부하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묘하게

 이 위기를 모면하고 도피한다.

 

여기서 바닷가에 정박한 오디세우스와 그 부하들을 안티파테스의 집으로 유혹하는 것은 안티파테스의 딸인 '건강한

 젊은 처녀'이다.
시간 : 오후 1시


장면 : 데이비 번(Davy Byrne) 경양식집(듀크가 21번지 소재). 블룸은 오코넬교 근처에서 남쪽으로 움직여 리피강

 →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가 → 그래프턴(Grafton)가 → 듀크(Duke)가 → 도우슨(Dawson)가

→ 몰리스워드(Molesworth)가 → 킬데어(Kildare)가 → 국립박물관 정문까지 간다.

 도중에 그는 진열장에 진열된 여성들의 실크 옷자락에서 유혹을 느낀다.

 

내용출처 : www.sunslife.com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여러 작품 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일반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이자 현대 성장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소설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유년기와 대학시절을 보낸 뒤 예술가의

 꿈을 안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가정과 조국을 떠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성장소설과 달리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지 않다.

대신 주인공의 ‘의식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갖가지 심리적 생리적 사회적 자극을 어떻게 수용하고 저항하며 또는 소화해 내는지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여기에 매 상황에 가장 적합한 언어선택을 통해 이를 설명,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과정에

개입해 독특한 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찬사에 걸맞게 이런 정교하고 치밀한 언어체험을 감수성이 예민한 식민지 청년인 주인공의 비장한 성장과정에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스티븐 디달러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작가 자신이 잠시 사용한 적 있는 필명이었다.

‘스티븐’은 신약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 이름이고 ‘디달러스’는 손수 날개를 만들어 달고 하늘로 날아올라 역경을 탈출한

그리스 신화 속의 예인(藝人)이다.

 

이처럼 목숨을 거는 비장함과 비상하는 경쾌함은 실제로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적스타일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옛날 옛적 아주 좋았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신화는 이렇게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소양가치는 무엇인가.

 

첫째는 그가 여러모로 20세기 서구문학의 정점이었으며 21세기에도 각광받는 현대고전작가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그의 위상이다.

 

둘째는 그의 책이 그가 성취한 인간탐구가 유례없이 풍부하고 진솔하며 철저하면서도 문제의식이 강해 매우 각별한

 독서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가 오랜 유랑생활을 하며 단련시킨 자전적 상상력이 도시와 시민, 언어와 의식, 역사-신화-정치 등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도시 더블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인문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셋째는 그 체험내용이 우리나라 독자에게 다분히 친숙한 주제와 정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아일랜드도 한국처럼 한때 이웃나라에 종속되는 비슷한 처지의 식민지 약소국의 갈등을 겪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는 것처럼 남의 사정을 내 일인 것처럼 몰입해 볼 수 있다.

 

사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 문학의 가장 핵심인 ‘율리시스’를 읽기 위한 입문서라고도 볼 수이 책은 김종건,

 이상옥, 나영균 교수의 번역본 등 10여 종이 나와 있다.

 작가에 관한 전기로는 리처드 엘먼의 책 ‘제임스 조이스’가 탁월하다. 이 역시 최근 전은경 교수의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글: 김길중 /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 

1914년 런던에서 출판. 작자가 23세인 1905년경에 이미 대부분 완성하였으나 출판사와의 분쟁으로 출판이 늦어졌다.

 수록된 작품은 모두 15편으로, 작자의 고향인 더블린의 환경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감정 ·지성 ·종교 ·정치에

있어서의 마비상태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냉엄한 자연주의적인 필치로 묘사하였다.

 

그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죽은 사람들》이 손꼽히며, 그 끝부분에서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시도되었다.

 

 조이스가 젊었을 때 쓴 습작이라고 하는데, 20대의 청년이 쓴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교실에서 흘린 눈물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도 저렇게 가련한 몰골을 한 음악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이렇게 말하면서 이른바 천분이란 것이 천재의 본질적 부분은 아니라고 바그너에게 의탁해서 니체는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른 나이에 유감 없이 천분을 발휘한 재능들이 많다.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 속의 작품 모두를 완성한 제임스 조이스도 그런 사람이다.

출판사의 과도한 조심성 때문에 책은 작가의 나이 32세 때인 1914년에야 나왔다.

 

 ‘대담한 눈짓을 보내며 두 다리의 위치를 자꾸 바꾸어 포개었다’는 등의 여인 묘사가 외설스럽고 온당치 못하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니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더블린 사람들’은 유년기, 사춘기, 성년기, 공중생활의 국면을 다룬 15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블린의

 정신적·도덕적 마비가 주제라는 작가의 말은 독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또 작가가 모든 것을 다 들려주는 모파상의 경우와는 달리 조이스가 한결 우회적이어서 독자편의 해석적 작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가령 ‘진흙’과 같은 짤막한 단편이 지닌, 치밀하게 구상된 상징이나 숨은 뜻은 꼼꼼히 읽어야 터득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가해설이나 분석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주눅이 들어 읽는 재미가 줄어든다.

우선 작품 속으로 처들어가 작품을 선입견 없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첫머리에 실린 ‘자매’는 어린이의 첫 번째 죽음 경험으로 읽으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어린이에게 죽음은 불가사의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 죽음의 첫 경험을 다룬 것이다.

어린이들은 또 집 밖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간헐적 가출 충동은 불량소년만의 것이 아니다.

 

 학교의 지겨운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어떤 만남’은 집과 학교를 벗어나 들판으로 나간 어린이들이 만난 노인을 다루고 있다.

 일종의 세계 상봉이다.

 

 별난 노인이지만 우리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노인이다.

이렇게 읽을 때 작품들은 어느덧 생소한 외국작품임을 그치고 우리 자신의 얘기가 되어버린다.

 

 

그런 맥락에서 작자 자신이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작품이 적절한 향도가 되기도 한다.

조이스는 ‘가슴 아픈 사건’과 ‘경주가 끝난 뒤’가 단편집 가운데서 가장 빈약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우회적이지 않고 직접성이 두드러진 탓인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초보 독자에게는 호소력이 크다.

 은행원 제임스 더피씨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의심에 찬 곁눈질로 보면서 자기 육체로부터 약간 떨어져 살았다.

 

종종 속으로 주어를 3인칭으로 또 술어를 과거로 해서 자신에 대한 짧은 문장을 쓰는 묘한 자서전적인 버릇이

있는’ 위인이다.

연주회에서 우연히 알게 된 선장의 아내 씨니코 부인과 담백하나 깊은 교제를 계속하다가 부인의 성적 접근에 기겁을 하고 절교하게 된다.

 

마지막 날 밤 ‘인연이란 하나같이 슬픔으로 가는 인연’이라는 말을 건넨 그는 4년 후 부인이 건널목에서 역사했다는

보도를 접한다. 정황으로 보아 취중의 사고사거나 자살이었다.

 

자신의 품위마저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며 그는 그녀를 책망한다.

 일종의 자기 면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술집에서 나와 그녀와 동행했던 길을 걸으며 그는 자책한다.

 

“왜 그녀에게 죽음을 선고했던가?

그는 자신의 도덕적인 본성이 산산조각나는 느낌이 들었다.

” 이윽고 전개되는 밤 언덕과 공원 기슭의 장면은 일품이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매매는 그를 절망감으로 채운다.

 

 “그는 자기 삶의 방정(方正)함을 쓰리게 되씹어 보았다.

그러자 삶의 잔치로부터 쫓겨난 몸이란 느낌이 들었다.”

‘더블린 사람들’의 압권은 단연 ‘죽은 사람들’이다.

 

 전반의 익살스러운 작품 정서가 끝자락에서 숭고하고 감동적인 시로 바뀐다.

주인공은 유아독존의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놀라운 신세계와 마주치게 된다.

 

조지 슈타이너는 비공식 세미나에서 이 작품을 강독하던 중 노(老)학생 몇몇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자신도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는 시카고 대학원생 때의 경험을 회고록 ‘정오표(正誤表)’에 적고 있다.

 

 그때부터 해석하고 가르치는 데 자신을 얻었다 한다.

번역본(김정환, 성은애 역)을 읽은 학생들은 직접 원본과 대결하는 것이 좋다.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나온 2000년도판에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 </유종호>

 


자매들

...밤마다 창을 눈여겨 볼 때마다 나는 중풍이라는 말을 혼자 나직이 중얼거려 보았다.

 이 말은 언제나 유클리드 기하학에 나오는 노우먼(평행사변형의 한 각을 포함하여 그 닮은 꼴을 끊어낸 나머지 꼴)이라는 말이나, 교리문답서 속의 성직 매매죄(聖職賣賣罪)란 말과 같이 내 귀엔 신기하게만 들렸다.

 

 그 말에 나는 공포에 가득차면서도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위력을 눈여겨 보고 싶었다.

...그 창백한 얼굴은 여전히 나에게서 물러가지 않았다.그것은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고해하려는 생각인가보다 하는 것을 알았다.

 

내 영혼이 무슨 즐거운 사악한 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 싶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역시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알았다.

그 얼굴이 나를 보자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고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왜 자꾸만 날 보고 미소를 짓고 있으며, 왜 입술이 저렇게 촉촉해 있을까,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애러비

 

노쓰 리치몬드가는 막다른 길이라서 기독형제학교가 학생들을 풀어놓는 시간말고는 고요한 거리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층집 한 채가 광장 터의 이웃들과 따로 떨어져서 막다른 길의 끝에 서 있었다.


거리의 다른 집들은 그 내부의 고상한 살림을 의식하여 갈색의 침착한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우리집에 전에 세들어살던 사람은 사제였는데 뒤편 거실에서 죽었다.
오랫동안 닫혀 있어서 곰팡내가 나는 공기가 방안에 온통 떠돌아다녔고, 부엌 뒤쪽의 다용도실은 낡고 쓸모없는 종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종이들 사이에서 나는 낱장들이 말려 올라가고 축축한 종이 표지의 책 몇권을 찾아냈다.
월터 스코트가 지은 『대수도원장』, 『독실한 성체배령자』, 그리고 『비도크의 회고록』이었다.
나는 책종이가 노란색이라서 맨 마지막 것이 제일 좋았다.


집 쥐의 가꾸지 않은 뜰에는 한 가운데에 사과나무 한 그루 그리고 관목 몇개가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 한 그루 밑에서

 나는 죽은 세입자의 녹슨 자전거 펌프를 찾아냈다.
그는 매우 자비로운 사제였다.
유언장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돈을 기관에 물려주었고 그의 집 가구들을 여동생에게 남겨주었다.

낮이 짧은 겨울이 오면, 우리가 저녁을 다 먹기도 전에 땅거미가 졌다.
우리가 거리에서 만날 즈음이면 집들은 우중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 위에 열린 하늘은 변덕스러운 보랏빛이었고 그 하늘을 향해 거리의 가로등들은 각자의 희미한 등잔을 받들어올렸다.
찬 공기가 우리를 파고들었고 우리는 몸이 후끈해질 때까지 놀았다.
우리들의 고함소리가 고요한 거리에 메아리쳤다.


우리들의 노는 경로는 허름한 오둠막에 사는 거친 아이들에게서 모진 곤욕을 치뤄야 했던, 집들 뒤의 검은 진흙창

 샛길부터, 난로 잿구멍에서 악취가 올라오는 어둡고 질척거리는 정원 뒷문까지, 마부가 말갈리글 퍼주고 빗질해주거나

 죔쇠 달린 마구를 흔들어 음악소리를 내는 그 컴컴한 악취투성이 마구간에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거리로 돌아올 때면, 부엌 창문에서 나오는 불빛이 그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의 아저씨가 골목길을 돌아오는 것이 보이면, 우리는 그가 안전하게 집안에 들어갈 때까지 그늘 속에 숨어 있었다.


아니면 망간의 누나가 현관 층층대로 나와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고 남동생을 부를 때면, 우리는 그늘에 숨어 그녀가

 거리 위 아래로 자세히 찾아보는 모습을 살폈다.
우리는 기다리며 그녀가 그냥 거기 서 있는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계속 버티면, 우리는 포기하고 숨어 있던 그늘에서 나와 망간네 집 층층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반쯤 열려진 문에서 나오는 불빛에 몸의 윤관을 드러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남동생은 항상 누나를 한참 애타게 하고 나서야 말을 들었고,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난간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몸이 움직이면서 그녀의 옷도 따라 흔들렸고,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타래가 이쪽저쪽으로 살랑거렸다.

매일 아침 나는 길 쪽의 응접실 마루에 누워 그녀의 집 문을 살폈다.
차일이 창틀에서 1인치 정도 남겨놓고 내려져 있어서 내가 보일 리는 없었다.


그녀가 현관 층층대로 나올 때면 나는 가슴이 뛰었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서 책을 집어들고 그녀 뒤를 따랐다.
나는 그녀의 갈색 모습을 내내 눈에서 놓지 않았고 그러다가 갈 길이 각자 갈라지는 지점이 가까워졌을 때 걸음을

빨리하여 그녀를 지나쳤다.


이런 일이 매일 아침마다 되풀이되었다.
나는 무심결에 주고받은 몇마디말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름은 나의 모든 어리석은 피를 한군데로 솟구쳐 솔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연애에 가장 적대적인 장소에서조차 그녀의 영상은 나를 따라다녔다.
토요일 저녁 아줌마가 장보러 갈 때는 내가 따라가서 꾸러미를 몇개 날라줘야 했다.
노무자들의 욕설과, 즐비한 돼지 엉덩잇살을 지키며 서 있는 상점 사환아이의 새된 장광설과,

오도노반 롯사(1931-1915. 아일랜드)의 급진주의적 독립운동가)에 관한 '모두 모여라' 어쩌고 하는 노래나  우리 조국의 수난을 다룬 가요를 부르는 길거리 가수들의 단조로운 코맹맹이 소리 한가운데서, 술취한 사내와 물건 사라는 여인네들에게 떼밀리며, 우리는 그 번지르르한 거리를 지나갔다.


이러한 소음들이 내게는 삶에 대한 하나의 느낌으로 한데 모아졌다.
나는 내가 적의 무리 사이로 나의 성례를 안전히 모셔가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녀의 이름이 순간순간 나 자신도 이해 못할 낯선 기도와 예찬이 되어 내 입술로 솟아났다.

내 눈엔 종종 눈물이 가득 괴었고(이유는 알 수 없었다.)
때때로 홍수가 내 심장으로부터 가슴으로 쏟아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의 일을 거의 생각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녀에게 도대체 말을 걸기는 걸 것인지 아닌지,
혹은 그녀에게 말을 건다 해도 어떻게 내가 그녀에게 나의 혼란스런 연모의 정을 얘기해줄지를 몰랐다.
그러나 나의 몸은 하프와 같았고 그녀의 말과 몸짓은 그 줄을 퉁기는 손가락 같았다.

어느날 저녁 나는 사제가 죽었던 뒤편 거실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하고 비 내리는 저녁이었고 집안은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부서진 창 하나를 통해서 나는 빗줄기가 땅에 내려 꽂히는 소리를 들었다.


가느다랗게 끊임없이 내리는 바늘 같은 물줄기들이 흠뻑 젖은 화단에서 뛰놀고 있었다.
저 멀리 아물거리는 등잔이나 불켜진 창 같은 것이 내 아래쪽에서 빛났다.
눈에 보이는 게 거의 없다는 것에 대해 나는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나의 모든 감각들은 스스로 베일에 가려지기를 갈망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제 막 그 감각들로부터 빠져나오려 한다는 것을 느기면서, 나는 내 양 손바닥을 부르르 떨 정도로

 서로 꽉 맞잡았다.


몇번씩이고 이렇게 중얼대면서.
"오 사랑! 오 사랑이여!"

마침내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내게 첫마디를 건넸을 때 나는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녀는 애러비에 갈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는지 아니라고 했는지 나는 잊어버렸다.
굉장한 바자회일 거라했다.


그녀는 거기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못 가요?"
내가 물었다.

말하는 동안 그녀는 손목에 낀 은팔찌를 뱅글뱅글 돌렸다.
그녀가 갈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주에 그녀의 수도회에서 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남동생과 다른 두 사내아이가 자기들의 모자를 놓고 싸우고 있었고, 나는 난간에 혼자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내 쪽으로 굽힌 채 난간의 쇠못 하나를 쥐고 있었다.

우리집 문 반대편 등잔에서 나오는 불빛이 그녀 목의 하이얀 곡선을 드러내고, 그 위에 얹힌 그녀의 머리칼을 밝히고는,

 아래로 내려가 난간 위의 손을 밝혔다.

불빛은 그녀의 옷 한쪽 편으로 내려와, 그녀가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 순간 보일락말락하는 속치마의 그 새하얀 가장자리를 비춰주었다.
"넌 좋겠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가게 되면,"
하고 난 말했다.
"뭘 사다 줄게요."

그날 저녁 이후 얼마나 숱하디 숱한 어리석음들이 자나깨나 나의 생각을 휩쓸고 지나갔던가!
나는 그 중간에 끼어든 그 지루한 날들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학교 공부는 짜증이 났다.
밤이면 침대에서, 낮이면 교실에서 그녀의 영상이 나와 책 사이에 나타나 책읽기를 방해했다.


애러비라는 단어의 음절은 내 영혼이 탐닉하던 그 침묵 속에서 내게로 불려나와 어떤 동양적인 마법을 내게 걸어놓았다.
나는 토요일 밤 바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아줌마는 깜짝 놀랐고, 무슨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결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교실에서 나는 묻는 말에 별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의 얼굴 표정이 온화함에서 험한 쪽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내가 게을러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나는 오락가락하는 나의 생각들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나는 진지한 일상사를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고, 그것이 이제는 나와 내 욕망 사이를 가로막고 섰는 이상,

 내게는 어린애 장난, 그것도 보기싫고 단조로운 어린애 장난처럼 보였던 것이다.

토요일 아침 나는 아저씨한테 저녁에 바자회에 가고 싶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거울 달린 옷걸이 앞에서 모자솔을 찾으며 법석을 떨고 있는 중이었고, 그래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얘야, 안다."

그가 현관 마루에 있었으므로 앞 응접실로 가서 창가에 누울 수도 없었다.
나는 집안이 저기압인 것을 느끼며 느릿느릿 걸어서 학교를 향해 갔다.
공기가 무자비하게 구절맞고 추워서 벌써 걱정이 됐다.

저녁을 먹으러 집에 왔을 때 아저씨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일렀다.
나는 앉아서 얼마동안 시계를 물그러미 쳐다보다가 째깍 소리가 짜증나기 시작할 때에 방에서 나왔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집 윗부분을 차지했다.
높고, 차갑고, 텅빈, 우울한 방들이 해방감을 주었고, 나는 노래를 부르며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앞 창문을 통해서 나는 내 친구들이 저 아래 길가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고함소리는 희미하고 불분명해진 상태로 내게 들려왔다.


나는 이마를 시원한 유리에 기대고 그녀가 사는 어두운 집을 건너다보았다.
아마 한시간 가량 서 있었으리라.
내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그 갈색 옷을 입은 모습, 등잔불이 그 목덜미의 곡선을, 난간의 쥔 손을, 그리고 옷자락 아래 속치맛단을 살며시 비추는 그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머써 부인이 난롯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이 들고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전당포를 하던 남편과 사별했는데, 사용한 우표를 어떤 경건한 목적 때문에 모으고 있었다
(우표수집상에 판 돈을 모금하여 국외의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보내주는 것).
나는 차탁자에서의 가납사니를 견뎌야 했다.


저녁이 한 시간 넘게 미뤄졌는데도 아직 아저씨는 오지 않았다.
머써 부인이 가려고 일어났다.
더 기다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지만 여덟시가 넘었고 늦게까지 나와 있기가 뭐하다고,

밤공기는 그녀한테 나쁘다고 말했다.


그녀가 가고 나서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방 안을 왔다갔다 했다.
아줌마가 말했다.
"오늘밤 바자회 가는 건 연기해야 되겠구나."

아홉시에 아저씨의 현관문 열쇠소리가 들렸다.
그가 혼자서 뭐라뭐라 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고
현관의 옷걸이가 그의 오바코트 무게를 받고 흔들흔들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러한 조짐들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가 한참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나는 바자회에 가게 돈을 좀 달라고 말했다.
그는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 벌써 지금쯤은 한잠 자고 난 다음일게다."
그가 말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아줌마가 그에게 힘주어 말했다.
"돈 줘서 보내주지 그래요? 당신 때문에 벌써 한참 늦었잖아요."

아저시가 깜빡 잊어서 아주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속담을 신봉한다고 말했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애들은 멍청해진다.'


그는 어딜 갈 거냐고 내게 물었고, 내가 두번째로 다시 그에게 얘기를 했더니,

『아랍인이 자기 말에게 보내는 작별인사』라는 작품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부엌에서 나올 때에 그는 그 작품의 첫 연을 아줌마한테 막 읊으려는 참이었다.

나는 2실링짜리 은화 한닢을 손에 꼬옥 쥐고 버킹엄가를 내려가 역으로 향했다.
물건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가스등 번쩍이는 거리 풍경이 내 나들이 목적을 일개워주었다.
나는 승객이 없는 열차 삼등칸에 몸을 실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늑장을 부리던 끝에 열차가 천천히 역을 빠져나갔다.
열차는 황폐한 집들 사이로 또 반작이는 강을 건너 기어갔다.
웨스트랜드 오우역에서 한떼의 사람들이 객차 문으로 몰려들었다.


역무원이 이 열차는 바자회행 특별열차라면서 그들을 밀쳐냈다.
나는 그 텅빈 객차칸에 내내 혼자였다.
몇분 안되어 열차가 나무로 급조된 플랫폼에 도착했다.


나는 길 쪽으로 나갔고 불켜진 시계판을 보고 열시 십분 전임을 알았다.
내 앞에는 커다란 빌딩이 그 마법적인 이름을 내보이며 서 있었다.

나는 입장료가 6페니인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고, 바자회 문을 닫을가봐 겁이 난 나머지 지쳐보이는

표정의 남자에게 1실링을 내고는 회전물을 통해 잽싸게 들어갔다.
나는 높이의 반쯤 되는 부분에 빙 둘러 회랑이 설치된 거대한 홀 안으로 들어섰다.


거의 모든 진열대가 닫혀 있었고 홀 대부분이 어둠에 덮여 있었다.
나는 마치 예배 후 교회에 감도는 그런 정적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주춤주춤 바자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 갔다.


아직 열려 있는 판매대 주변에 몇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까페 샹땅(노래,춤,희가극 등을 공연하는 찻집)이라는 단어가 색전구로 씌어져 있는 그 휘장 앞에서 두 사내가 쟁반 위의 돈을 세고 있었다.
나는 동전이 짤그락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왜 거기까지 갔는지를 어렵사리 상기하고, 어떤 질열대로 가서 도자기 꽃병과 꽃무늬 찻잔 세트를 살펴보았다.
판매대 입구에서는 젊은 여자 한 명이 두 명의 젊은 신사와 얘기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영국식 억양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어렴풋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오, 난 그런 얘기 한 적 없는데 !"
"오, 그랬잖아 !"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
"맞아. 나도 들었는데 뭘."
"오, 이런 .....엉터리 !"

그 젊은 여자는 나를 보자 다가와서 내게 뭘 사려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별로 물건을 팔려는 어조가 아니었다.
그녀는 의무감에서 내게 말을 건 것 같았다.
나는 판매대의 어두운 입구 양쪽에 동방의 보초처럼 서 있는 거대한 항아리들을 초라하게 쳐다보고 중얼거렸다.
"아뇨, 됐어요.

젊은 여자는 꽃병 하나의 위치를 바꾸어놓고는 두 사내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같은 얘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 젊은 여자는 한두 번 어개 너머로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더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마치 내가 그녀의 물건을 정말로 살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녀의 진열대 앞에서 꾸물댔다.
그런 다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바자회장의 한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나는 호주머니 속에서 1페니짜리 동전 두 개를 6펜스짜리 동전 위에 떨어뜨렸다.
회랑의 한쪽 끝에서 불을 끈다는 소리가 들렸다.
홀 윗부분은 이제 완전히 깜깜했다.

그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나는 허영심에 내몰리고 조롱당한 짐승같은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눈은 고뇌와 분노로 이글거렸다.


구름 한 점

...늦가을의 석양의 햇빛이 잔디밭과 산책로를 덮고 있었다.

벤취위에서 졸고 있는 옷맵시가 단정치 못한 유모들이며,

 늙어빠진 노인들 위로 석양이 정다운 금빛의 소낙비를 뿌리고 있었다.

 

석양의 금빛은 또한 모든 움직이는 물건---자갈길을 따라 소리를 지르면서 달리는 아이들이며 공원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 위에서도 반짝였다.

 

그는 이런 전경을 지켜 보며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인생을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슬퍼졌다.

 야릇한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운명이란 오랜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지혜의 무거운 짐이라, 그에게는 운명에 거슬려 싸운다는 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일만 같았다.

...그리고 밤에 늦게 시내에 나올때에는 언제나 걱정스러운 듯이 흥분해서 빨리 걸었다.

그러나 때로는 자청해서 공포의 원인을 찾는 때도 있었다.

 가장 컴컴하고 가장 좁은 길을 일부러 택했다.

 

그리고 대담하게 앞으로 걸어갈 때 자기 발자국 주위에 퍼져 있는 정적이 무서웠다.

또 어슬렁어슬렁 소리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무서웠고, 때로는 지나가는 낮은 웃음소리에 온몸이 나뭇잎처럼 떨리기도

 했다.

...한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자기의 딱딱한, 예술이 없는 생활로부터 벗어나 런던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는 것만 같았다. 한 줄기의 광선이 그의 마음의 지평선 위에서 아롱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나이가 과히 많지는 않다---서른 둘이다.

 

나의 기질은 지금 딱 무르익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시에서 나타내고 싶은 기분과 인상은 하나 둘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그것을 느꼈다.

자기의 정신이 시인의 그것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그는 그것을 측정해 보려고 애썼다.

 

우울증이 내 기질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그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념과 체념과 단순한

 기쁨이 반복해 일어나서 누그러진 우울증이었다.

만일 내가 한 권의 시집을 내어 거기에 그것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해주겠지.

 

대중의 인기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뻔한 일이다.

대중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비슷한 마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할 수는 있으리라.

 

 



사자

...유리창을 서너 너덧번 가볍게 치는 소리에 그는 창 쪽을 돌아다보았다. 눈이 또 다시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졸린 눈으로 그는 은빛과 검은 빛의 눈송이가 가로등불을 등지고 비스듬이 내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나도 서쪽으로 나그네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

그렇다, 신문이 맞았다.

애란 전역에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검은 중부 평야의 구석구석과 나무 없는 언덕에 내리고, 또 앨린의 늪 위에도 소리없이 내리고, 또 좀더 멀리 서쪽편, 샤논 강의 검고도 거치른 물결 위로도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눈은 또한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쓸쓸한 묘지의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다.

삐뚫어진 십자가와 묘석들 위에도, 조그만 대문의 뾰족한 문설주 위에도, 마른 쑥덩굴 위에도 눈이 바람에 불려와

두껍게 쌓였다.

 

온 세상에 사뿐히 내리는 눈 소리, 그와 아내에게 내리는 죽음처럼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게 사뿐히 내리는 눈 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영혼은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부부사이든 애인사이든 친구사이든 모녀사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고 갈등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독사처럼 혀를 날름거린다. 이러한 모든 관계의 비극은 바로 나와 당신이

서로 ‘타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개인성의 발현이 극대화될수록 자의식이 명료해져야 마땅할 듯 보이는데, 현대의 개인주의는 자신의 명료한 정체성을

나타내주기는커녕 타자와의 이해 및 소통을 더욱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의 외로움은 아마 여기에 그 이유가 있으리라.

 

 이유야 어찌됐건, 자신의 모든 정체성은 타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결국 자아의 실체를 뚜렷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소통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20세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버린, 아일랜드의 위대한 작가 제임스 조이스. 그는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의「사자(The Dead)」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타자와의 이해, 나아가 죽은 자와의 이해로까지

이르는 지식인의 의식을 다뤘다.

 

마비된 도시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이 비단 이들만의 모습은 아니리라.

모컨의 자매가 해마다 여는 댄스파티는 언제나 큰 행사였다. 파티에는 그녀들을 아는 모든 사람들, 즉 일가친척들, 집안의 오랜 친구들, 줄리아가 지휘하는 합창단원들, 케이트의 제자 중에서 성인이 다 된 사람들 전부와 메리 제인의 제자들 중

 몇 명도 왔다.

 

작품의 80% 가까이를 지배하고 있는 배경은 모컨 자매의 댄스파티다.

작가는 주인공인 가브리엘과 그의 아내가 이 파티 장에 참석해 사람들과 어울리며 얘기를 주고받는 것 하나 하나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너무나 일상적인 얘기들, 전혀 아무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대화와 생각, 그리고 장면 묘사들이 계속된다.

 저명한 문학가인 가브리엘이 연설의 서두에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를 인용하려고 하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모습에서부터 줄리아 이모가 노래를 부르고, 칠면조 고기를 잘라서 나눠 먹는 장면까지, 작가는

 담담하게 파티 장의 모습을 묘사한다.

 

 작가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묘사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며 사는 일상생활의 모습 그 자체이며, 어떤 스토리도

이 묘사들의 행진에 끼어들지 못한다.

 

아무런 스토리가 없는 묘사의 연속이기에 자칫 지루해지기 싶지만, 그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책장을 덮어 버린 독자가

있다면 조이스는 저 하늘나라에서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지루한 일상의 묘사는 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모든 욕망과 깨달음 역시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럴 것도 없는 일상에서 삐져나오는 것이었음을.

아내는 자기 앞을 어찌나 사뿐히, 그리고 어찌나 다소곳이 걷고 있던지, 그 뒤를 소리 없이 뛰어가서, 아내의 어깨를

 덥석 껴안고서, 그 귀에다 대고 그 무슨 어리석고 다정스러운 말을 속삭여주고 싶었다.

 

(중략) 아직도 더 다정스러운 기쁨의 파동이 그의 심장으로부터 뿜어 나와 뜨거운 홍수처럼 그의 동맥 속을 굽이쳐

 달렸다.

파티가 끝나고 가브리엘과 그의 아내는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과정에서 가브리엘은 아내를 보면서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우아하고 신비스러운 그녀의 모습에서 새로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자신이 화가라면 저런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방에 도착한 후 가브리엘은 자신의 아내에게서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낀다.

맵시가 우아하고 몸가짐이 아내다운 자신의 아내가 견딜 수 없이 자랑스럽다.

 그는 아내를 불쑥 껴안고만 싶지만 아직 아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가브리엘은 계속 망설이고,

 아무렇지도않는 얘기만 건넨다.

 

그러다 갑자기 아내가 그에게 키스를 한다.

가브리엘은 아내도 자신처럼 욕정에 불타고 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지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아내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녀는 파티 장에서 들었던 '오그림의 처녀'를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는 옛날 어떤 소년이 자신에게 불러줬던

 노래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 소년을 회상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아내의 말을 들은 가브리엘은 토라져서 아내에게 빈정거린다.

하지만 아내는 그 소년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얘기한 후, 그와의 추억을 얘기하고 그를 가엾게 생각해

 흐느껴 울기시작한다.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가브리엘은 깨달음을 얻는다.

 타자에 대한 그의 이해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한 시간 전에 복받쳐 오르던 자기의 격정이 이제 생각해보니 이상하기만 했다.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이모댁의 만찬에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연설에서, 포도주와 춤에서, 현관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에

 하던 농담에서,강을 따라 눈 속을 걷던 기쁨에서 온 것이리라.

 

 

그는 아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자신의 아내이기 이전에, 하나의 생명을 지닌 개체이며 자신이 모르는 아내의 사정이 분명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내의 로맨스를 이해하고 자신이 아내의 인생에서 얼마나 미약한 역할을 했는지도 깨닫는다.

 

아내에 대한 이해는 복받쳐 오르던 자신의 욕정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의 반문으로 이어진다.

 그는 파티 장의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에서 자신의 욕정이 온 것임을 깨닫고 이어서 죽은 자와 앞으로 죽을 자에 대한

이해에 까지 나아간다.

 

나이가 많은 자신의 이모들이 죽을 앞날을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 어떤 위로도 효과가 없음을 깨닫는다.

관용의 눈물이 가브리엘의 눈에 가득 어리었다. (중략)

그의 영혼은 무수히 많은 죽은 사람들이 사는 영역으로 벌써 다가갔다.

 

 걷잡을 수 없이 어른거리는 사자들의 존재를 그는 의식하면서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시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가브리엘의 일상은 아내에 대한 자신의 격정으로 이어졌고, 그 격정은 아내의 로맨스로 사라지고 동시에 아내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아내에 대한 이해는 아내 때문에 죽은 아내를 사랑하던 옛 청년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앞으로 죽을 자신의

 이모들을 비롯한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잠을 자기 위해 누워 있는 가브리엘의 깨달음은 무수히 많은 죽은 자들의 영혼과 마주하게 됐고, 그는 그렇게 의식을 잃고 잠이 든다.

창 밖에는 흰 눈이 소복이 쌓인다. 자기 또한 모든 것을 다 이해나 한다는 듯이. </윤성훈기자>

 

 

 

 

 

 

조이스, <피네간의 경야>

 

"언어의 천재 조이스의 소설입니다. 60여개의 언어로 쓰여진 만큼 원문으로 읽는다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김종건 교수가 번역한 것을 읽는다는 것이 좀더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이 책은 번역본이나 원본이나 이해불능이죠 전 이 책 사놓고 2페이지도 못읽고 덮어버렸습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세계에 이책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1930년대말 극작가 사무엘 베켓에게 "나는언어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조이스가 17년에 걸쳐 집필한 「피네간의 경야(經夜)」(Finnegans Wake)는 언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은 최대의 노작(勞作)이자 난해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경야'는 밤을 지샌다는 뜻. 이 작품이 프랑스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완역됐다.

[피네간의 경야]는 저녁에 시작해 새벽에 끝나는 더블린의 한 밤의 이야기로, 더블린 외곽에서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어위커(Earwicker)의 잠재의식 또는 꿈의 무의식을 그린 작품이다. 역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 작품의 명확한 개요나 줄거리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의 난해함은 조이스가 구사하는 언어적 복잡성과 다차원적인 서술전략에 기인한다.

조이스는 「피네간의 경야」에서 영어를 기본으로 하면서, 동시에 65개의 언어를 사용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조차 해설없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문장이 말장난, 어형변화, 신조어 등으로 사전에서 조차 찾을 수 없는 단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전기 「제임스 조이스-언어의 연금술사」를 쓴 리처드 앨먼은 "조이스 이전까지의 문학이 사물을 통해 언어에 이르렀다면 조이스는 언어를 통해 사물에 닿는다"고 말했다. 특히 「피네간의 경야」는 가능한 모든 문체, 기법과 단어를 사용해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1988년부터 13년 동안 번역 작업에 매달렸던 김종건 전 고려대 영문과 교수는 "이 작품의 '번역 사업'을 위해서는 우선 용기가 필요했다"며 "과연 인내로 천재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시험이나 하듯 작업에 임해 왔다"고 번역을 마친 뒤의 소회(所懷)를 밝혔다.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난해작 「피네간의 경야(經夜)」가 김종건(68) 전 고려대 교수에 의해 국내 최초로 번역 출간됐다. 이로써 한국은 프랑스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 4번째 「피네건의 경야」의 번역국이 됐다.

조이스가 작고 2년 전인 1939년에 파리에서 완성한 소설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외곽에서 주점을 경영하는 이어위커가 꾼 하룻밤 꿈 속에 서구의 수천년 역사를 압축한 조이스 최후의 걸작이자 난해의 극치를 달리는 세계적인 문제작이다.‘경야’는 밤을 지샌다는 의미.저녁에 시작해 새벽에 끝나는 더블린의 한밤중 이야기로 한 낮의 더블린 이야기인 ‘율리시즈’(1922)와 대조적이다.

조이스가 20여년에 걸쳐 공을 들인 이 작품은 60여개 언어가 동원되고 가능한 모든 기법과 문체, 신조어가 실험된 장대한 드라마로 인류의 언어를 경신했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다. 세계의 언어들이 인련의 은유적인 메아리와 함께 작품의 기본적인 영어 문법과 음의 구조를 강화하는 의성어적 반향과 암시를 위해 변전된다. 바로 이 점만으로도 번역자의 의욕은 수없이 꺽이고 만다. 특히 본질적으로 언어 구조가 다른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치부되어 왔다. 역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데클린 카이버드 국립더블린대학 영문학과 교수는 “역자는 저자를 외부로 노출시킴에 있어 또한 내부로 해방시키는지라 조이스는 김교수로 인해 놀랍도록 운이 좋았음에 틀림없다”는 찬사를 보냈다.

김 교수는 서문에서 “빽빽한 언어의 대삼림 속을 허우적거리며 헤매온 기분이다… 독자에게 이 미완(?)의 작품을 선사하기에 죄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오, 행복한 죄여”라고 썼다. 김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 미국 털사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조이스 연구의 권위자로 현재 한국 제임스 조이스학회 고문을 맡고 있다.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1882~1941)의 최대 노작(勞作)이라는 「피네간의 경야(經夜)」(Finnegans Wake)가 완역됐다. 전 고려대 영문과 교수 김종건(金鍾健·68) 씨는 “지난 1973년 이 책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88년부터 번역에 매달린 이래 13년만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조이스는 ‘무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작법에 따라 대표작 「율리시즈」,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으로 아일랜드문학 뿐 아니라 세계 모더니즘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번에 번역된 「피네간의 경야」는 조이스의 작품 가운데 해독이 너무 어려워 대부분 학자들은 한국어 번역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던 작품이다.

「율리시즈」가 낮 동안 한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간 것이라면, 「피네간의 경야」는 이어위커(Earwicker)라는 한 주점 주인이 하룻밤에 꾼 꿈의 무의식을 그려낸 작품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꿈 이야기와 함께, 주막 손님 12명의 세속적 농담, 그가 공원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가책, 아내와의 성과 사랑, 부자(父子)의 대결, 형제의 갈등과 해소, 딸에 대한 친족상간적 애정 등이 전개된다. 인간의 원죄와 추락, 탄생, 결혼, 죽음, 부활을 다룬 대(大)알레고리로서 단테의 ‘신곡’(神曲)에 견줄 ‘인간곡’(人間曲·Human Comedy)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언어의 천재인 조이스는 이 작품에서 무려 65개의 언어를 쓰고 있다. 물론 절반 이상은 영어지만, 대부분 문장이 말장난, 어형변화, 신조어, 연달아쓰기, 복합어 등으로,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 단어가 대부분이다.

조이스도 이 작품을 쓰는데 17년이 걸렸다. 그는 “어휘 안에 모든 문명을 담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피네간의 경야」는 그 현현인 셈이다.

김교수는 “한번 읽는데 보통 2년 걸렸습니다. 얼추 세어 보니 10번쯤 읽은 것 같군요”라고 말했다.

한 단어를 꼭 한 단어로 번역했고, 행의 글자수를 조절, 원서와 페이지까지 똑같이 맞추었다.

그가 번역을 위해 읽은 관련 비평서만 50여권이고, 또 페이지마다 주석을 붙인 ‘얼루전(allusion)(인유·引喩사전)’을

낱낱이 대조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한 페이지 당 사전을 100번은 들추었을 겁니다.”

김교수는 조이스가 새로운 복합어를 만들어 함축한 뜻을, 똑같이 한 단어로 전달하기 위해 번역어도 신조어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cropse’는 ‘crop’(곡물)과 ‘corpse’(시체)가 합해져 죽음과 부활을 상징했는데, 역자는 이를 ‘시곡체’(屍穀體)라고 옮기고 있다. 또 ‘chaos’와 ‘cosmos’를 합친 ‘chaosmos’는 ‘혼질서’(混秩序)로 번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단어 이상으로 풀어서 번역하는 순간, 원래의 리듬과 함축미 그리고 맛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김교수의 시도는 또 있다. “난마처럼 얽혀 복잡하고 헷갈리기 일쑤인 작품이지만 그 실 끄트머리만 잡으면 잘 풀린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각 페이지마다 그 실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내용을 별도로 묶어 ‘경야의 평설(評說) 개요’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수줍은 듯, “세계에서 이게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교수는 “때로 너무 지겹고 징그러울 때가 있었다”면서

“이런 번역은 그래서 나같은 바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번역의 또다른 의미는 이로써 조이스의 한국어 전집이 완료됐다는 점이다.

「피네간의 경야」만 본다면 한국어번역이 “세계에서 4번째”다.

아일랜드문학교환원이 3000파운드를 지원했다.

 

조이스 매니어, 조이스 연구가, 장서가 그리고 조이스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놓칠 수 없는 책이다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이 있는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석. 율리시즈에서 한 귀절을 뽑아서 새김)

<사진출처: 지은이의 신비로운 세상>

 

조이스, <하숙집>

 

무우니 부인은 푸줏집 딸이었다.

그녀는 일을 혼자서 척척 할 수 있는 여자로, 말하자면 결단성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부리는 큰 머슴과 결혼하여 스프링 공원 근처에 푸줏집을 냈다.

그런데 무우니는 장인이 세상을 떠나자 놀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술꾼이 되었고 돈궤에서 돈을 훔쳐 내며 분별 없이 마구 빚을 졌다.

 그에게는 금주(禁酒)의 맹세를 시켜도 소용이 없었다.

이삼 일 후에는 이 맹세가 틀림없이 깨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손님들 앞에서 아내와 싸우기도 하고, 나쁜 고기를 사들이고 해서 장사를 망쳐 놓았다.

어느 날 밤에는 그가 식칼을 들고 아내에게 달려들어서 그녀는 이웃집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그들은 헤어졌다.

 

그녀는 신부를 찾아가서 별거의 허락을 얻었고, 아이들은 자기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에게 돈이나 음식이나 거처할 곳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우니는 할 수 없이 군수(郡守)의 하인이 되었다.

 그는 등이 굽고 체구가 작은 보잘것없는 술주정꾼이었다.

 

그는 얼굴이 희었고 콧수염도 희었으며, 붉은 핏줄이 선 불그죽죽한 눈 위에 연필로 그린 듯한 눈썹도 희었다.

그는 온종일 집달리실(執達吏室)에 앉아서 위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우니 부인은 고기 장사에서 남은 돈을 챙겨 가지고 하아드윅 가에서 하숙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몸집이 크고 위풍이 당당한 여자였다.

 

이 하숙집에 주로 드나드는 손님들은 리버풀 시나 맨 섬에서 오는 관광객들이며, 때로는 뮤직홀의 연예인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러 생활하고 있는 하숙인들은 더블린 시에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무원들이었다. 


그녀는 약삭빠르고 착실하게 하숙을 경영했으며, 외상을 줄 경우와 엄격히 따질 경우, 적당히 봐 줄 경우 등을 잘 분간하고 있었다.

하숙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그녀를 '마담'이라고 불렀다.
무우니 부인 집의 젊은이들은 식비와 숙박비로 한 주일에 십오 실링을 지불했다

(저녁 식사 때의 맥주나 흑맥주는 별도로 하고).

그들은 취미와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서로 대단히 친밀하게 지냈다. 그들은 경마에서 인기가 있는 말과 인기가 없는 말의 승산을 서로 따지곤 하였다.

마담의 아들 잭 무우니는 플리트 가에 있는 어느 중간 도매상의 점원이었는데, 잡놈이라는 평판이었다.

 

그는 군인들이 입에 담는 음탕한 말을 즐겨 사용하고, 보통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근사한 음담을 즐겨 말하였고, 또 근사한 일에- 즉, 승산이 있는 말이라든가 유명한

 연예인이라든가, 그러한 일에 정통하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또한 권투를 잘하고, 코믹 송도 잘 불렀다.

일요일 밤이면 무우니 부인의 현관 응접실에서 가끔 친목회가 있곤 하였는데, 뮤직홀의 연예인들도 참례하곤 했다. 
쉐리던은 왈츠와 폴카를 연주하고 즉석 반주도 했다. 

마담의 딸 폴리 무우니도 역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녀는 이런 노래를 곧잘 불렀다.

   난...... 바람둥이 계집애예요.
   당신은 시치미를 떼지 말아요.


   당신은 알고 있죠, 내가 그런 줄.

폴리는 열아홉 살의 날씬한 소녀였다.

그녀는 밝은 빛깔의 부드러운 머리와 조그마하고 봉긋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녹색을 엷게 띤 잿빛 눈동자는 누구와 말할 때는 위쪽으로 흘기는 버릇이 있어서, 이것은 그녀를 고집 센 귀여운

마돈나로 보이게 했다.

 

무우니 부인은 처음에 자기 딸을 곡물 대리상 사무소에 타이피스트로 보냈지만, 평판이 나쁜 집행관의 하인이 하루 건너큼 사무소로 찾아와서 자기 딸에게 말 한 마디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자, 그녀는 딸을 다시 집으로 끌어들여

집안 일을 보게 하였다.

 

폴리는 대단히 쾌활한 성격이었으므로 무우니 부인은 그녀를 젊은 사람들과 자유롭게 놀게 해 주고 싶은 의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은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젊은 여자가 있다고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폴리는 물론 젊은 사람들과 시시덕거렸다. 


그러나 영리한 판단가인 무우니 부인은 젊은 사람들이 다만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한 사람도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 계속되다가 무우니 부인은 폴리와 젊은이 중의 한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자, 그녀를 다시 타이피스트로 보낼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감시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내지 않고 있었다.


폴리는 자기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변함 없는 침묵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모녀 사이에 공공연한 공모 관계나 공공연한 양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 있는 사람들이 이 연애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해도 무우니 부인은 여전히 참견하지 않았다. 


폴리의 거동이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고, 청년의 마음이 몹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무우니 부인은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고 참견을 하려고 나섰다. 
그녀는 도덕적인 문제를 마치 식칼로 고기를 자르듯이 처리했다.

 이번 경우에 있어서도 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초여름의 어느 맑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이제부터 더워질 것 같았지만 상쾌한 미풍이 불고 있었다. 
하숙집의 모든 창문이 열리고, 올린 창틀 밑에서 레이스 커튼이 거리를 향하여 풍선처럼 부드럽게 부풀었다.

 

조지 교회의 종루에서 그칠 새 없이 종소리가 울려나오고, 예배자들은 혼자서 혹은 떼를 지어 교회 앞의 조그마한 원형광장을 건너는데, 그들의 장갑 낀 손에는 조그마한 책도 쥐어져 있었지만 그들의 묵묵한 태도로 보아 그들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하숙집에서는 아침 식사가 끝나고 식당의 식탁에는 베이컨의 비계나 껍질 부스러기와 함께 달걀의 노란 줄이 붙어 있는

 접시가 가득 흩어져 있었다.

무우니 부인은 밀짚 안락의자에 앉아서 식모 메리가 아침을 치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요일의 브레드 푸딩을 만드는 데 보태 쓰려고 메리에게 흩어진 빵 껍질과 부스러기를 모으게 했다. 
식탁을 치우고, 흩어진 빵을 주워 모으고, 설탕과 버터를 자물쇠를 채워 안전히 간수하고 나서 그녀는 전날 밤 폴리와

가졌던 대담을 다시 되뇌어 보기 시작했다.

 

일은 그녀가 짐작한 대로였다. 그녀는 터놓고 물어 보고 폴리도 숨김없이 대답했었다.

물론 둘이 다 좀 어색하기는 했다.

 그녀를 어색하게 한 것은 그 소식을 너무 태연한 태도로 받아들이거나, 지금까지 보고도 못 본 체해 온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폴리를 어색하게 한 것은 단순히 이런 종류의 말이 그녀를 어색하게 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관대한 마음 속에 숨은 의향을 영리한 순진성으로 자기가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무우니 부인은 생각에 잠겼다가 조지 교회의 종소리가 끝난 것을 깨닫자마자, 본능적으로 맨틀피이스 위에 놓인 조그마한 도금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열한 시 십칠 분이었다.

도오런 씨와 그 문제를 해결해 버리고 나서 열두 시 전까지 모르버러 가에 갈 시간은 충분하다.

 

 그녀는 자기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첫째 사회적인 여론이 모두 그녀 편으로 기울어질 것이 뻔했다.

그녀는 학대를 당한  어머니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그가 체면을 아끼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한 지붕 밑에서 살게 한 것이었는데, 그는 다만 그녀의 친절한 대접을 악용한 셈이다.

 

 그는 서른넷이 아니면 서른다섯이다. 

그러니까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그의 변명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리고 또 그는 어느 정도는 세상을 아는 사람이니까, 몰랐다는 것도 그의 변명이 될 수가 없다.

그는 오직 폴리의 어리고 경험이 없음을 이용해서 유혹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문제는 그가 어떠한 보상을 하느냐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어야 한다.

 남녀 교제에 있어 남자에게는 하나도 밑질 것이 없다. 

남자는 한때 재미를 보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그 비난의 화살을 정면으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어머니들은 그러한 일에 대해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얼마간의 돈을 받고 만족해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예를 수없이 보고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딸의 손상된 체면에 대한 보상이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즉 결혼이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전하도록 메리를 도오런 씨의 방으로 올려 보내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자기의

 모든 계획을 따져 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틀림없이 이길 것 같았다.

 그는 본시 독실한 젊은이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방탕하지도 않거니와 떠들어대지도 않았다.

 

 만일 이것이 쉐리던 씨나 미이드 씨나 밴텀 라이언즈 씨였더라면 일은 훨씬 더 곤란했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그가 태연히 방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집의 모든 숙박인들은 그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자세한 점에 이르기까지도 꾸며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어느 큰 카톨릭 신자의 주류상(酒類商) 사무실에서 13년을 근무해 오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아마 그에게 있어서는 직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동의를 한다면 만사는 순조로울 것이다.

한 가지 이유로는 그가 상당한 급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며, 또 그에게 얼마간의 저축이 있다는 것도

 그녀는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30분이 지났다.

그녀는 일어서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크고 혈색 좋은 얼굴에 떠오른 단호한 표정에 그녀는 스스로 만족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아는 어머니들 중에서 딸을 시집보내지 못한 몇몇 어머니들을 머리속에 떠올려 보았다.
도오런 씨로 말하면 그도 이 일요일 아침에는 정말 걱정이 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면도를 하려고 해 보았지만 손이 몹시 떨려서 중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자란 불그레한 턱수염이 턱 가장자리에 소복이 나 있었다.

그리고 2, 3분 만에 안경에 물기가 끼기 때문에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날 밤의 자기의 참회에 대한 회상은 그에게 격렬한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그에게서 참회를 받은 신부는 이번 사건의 망측스러운 세세한 점까지 들추어 이야기하도록 해 놓고서는, 결국에 가서

 그의 죄를 어떻게나 과장해서 말하였던지, 보상이라는 빠져나갈 구멍을 제공해 준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죄는 이미 저질러 놓았다. 이제는 그녀와 결혼을 하거나 도망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언제까지나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사건은 틀림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게 되고, 그의 주인 귀에까지들어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더블린은 조그마한 도시다.

그러므로 누구나 남의 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레너드 영감이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도오런 씨를 이리로 보내 주게' 하고 부르는 소리를 흥분된 상상 속에서

들었을 때, 목구멍이 화끈 달도록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오랜 세월의 근무가 모두 허사가 된다.

 근면하고 부지런했던 것도 모두 헛수고가 된다.

물론 그도 젊었을 때는 방탕도 했다.

 그는 자기의 자유사상을 자랑하고 술집에서 친구들에게 신의 존재를 부정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의 일이고, 거의 끝이 났다.

 그는 아직도 매주 <레이놀즈> 신문을 사 보기는 하지만 종교적 의무에는 열성이 있었고, 일 년 중의 십중 팔구는

 규율 있는 생활을 했다.


그에게 집을 지니고 생활할 만한 돈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가족들은 그녀를 멸시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평판이 나쁜 그녀의 아버지가 있고, 다음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경영하는 하숙집에도 어떤 풍문이 돌기

 시작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조소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확실히 폴리는 교양이 없었다. 이따금 폴리는 '내가 봤어요' 또는 '내가 봤더라면' 하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정말 그녀를 사랑한다면 말씨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는 폴리가 한 일에 대해서 그녀를 좋아해야 할지, 멸시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기도 함께 그 일을 저질렀다.

그의 본능은 결혼을 하지 말고 자유로운 몸 그대로 있으라고 자꾸 타일렀다.

 한 번 결혼하면 그만이야, 하고 본능은 말했다.

그가 셔츠와 바지 바람으로 침대 한편에 맥없이 앉아 있을 때, 폴리가 가볍게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그녀는 어머니한테 그 일을 터놓고 말했다는 것과 자기 어머니가 오늘 아침 그와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것을 그에게

모두 일러주었다. 


그녀는 울며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말했다.
"아, 보브! 보브! 난 어쩌면 좋아요? 도대체 난 어쩌면 좋아요?"
그녀는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울지 말라고 타이르며 아무 일도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맥없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는 셔츠 위로 그녀의 젖가슴이 벌럭이는 것을 느꼈다.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그는 호기심이 센, 끈기있는 독신자의 기억으로 그녀의 의복과 숨결과 애무하던 손가락의 촉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늦게 그가 자려고 옷을 벗고 있을 때, 그녀가 주저주저하며 그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녀는 자기의 촛불이 갑자기 부는 바람에 꺼졌으니 이 방의 촛불에서 불을 붙여가고 싶다고 했다.

그날 밤은 그녀가 목욕한 밤이었다. 

그녀는 무늬 박힌 플란넬의 펑퍼짐한, 가슴팍이 파인 화장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발등이 털 슬리퍼 틈에서 빛나고 향기를 풍기는 살결 밑에서 피가 따뜻하게 끓고 있었다.

촛불을 켜서 촛대에 꽂고 있을 때 그녀의 손과 팔목에서도 역시 가냘픈 향기가 
풍겨왔다.


그가 매우 늦게 돌아오는 밤이면 그의 저녁을 따끈하게 데워 주는 사람은 폴리였다.

밤중에 모두들 잠이 든 집안에서그녀가 자기 곁에 홀로 있음을 느낄 때 그는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도

 거의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정 어린 마음씨! 날씨가차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밤이면

반드시 한 잔의 펀치가 그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 그들이 한 쌍을 이루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초를 들고 살그머니 이층으로 올라가서 세째번 층계참에 이르면 서로가 마지못해 하면서 안녕히 주무세요,

라는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그들은 늘 키스를 했다.

 

그는 그녀의 눈과 그녀 손의 감촉과, 자기의 황홀했던 느낌...... 등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황홀감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것을 적용하면서,
"나는 어쩌면 좋아?"

하고 그녀가 하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독신자의 본능은 결혼은 그만두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죄가 있었다.

그의 도의감까지도 이러한 죄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에게 타일렀다.


그가 침대 한쪽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을 때 메리가 문에 와서 아줌마가 응접실에서 그를 만나고자 한다고 전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맥없이 일어서서 윗옷과 조끼를 입었다.

옷을 입었을 때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염려 말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울며 "아이구 죽겠네!"  하고 나직이 신음하는 그녀를 남겨 두고 나갔다.
층계를 내려가면서 그는 안경이 몹시 습기로 흐려지는 까닭에 그것을 벗어서 닦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지붕을 뚫고 올라가서, 다시는 이 괴로운 일에 대한 말을 듣지 않을 딴 나라로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어떠한 힘이 그를 한 걸음, 한 걸음 아래층으로 끌어내렸다.

그의 고용주와 마담의 냉혹한 얼굴들이 그의 낭패한 꼴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에서 그는 배스 맥주 두 병을 안고 찬방에서 올라오는 잭 무우니와 마주쳤다. 

 

그들은 냉담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연애 중에 있는 이 남자의 눈은 잠깐 불독과 같이 두터운 얼굴과 굵고 짤막한 두 팔에 머물렀다.

 그가 층계의 최하부에 이르렀을 때 힐끗 쳐다보니 잭이 옆방 문에서 그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뮤직홀의 연예인의 한 사람인, 몸체가 작은 런던 사람이 폴리에게 좀 함부로 말을 건네던 날 밤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의 친목회는 잭의 포학한 행위 때문에 거의 깨어져 버렸었다. 모두들 그를 달래려고 했었다.

 뮤직홀의 연예인은 보통 때보다도 좀 창백한 얼굴로 연방 미소를 지으며 악의가 있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잭은 어떤 놈이고 자기 누이에게 그 따위 수작을 건다면 그 놈의 모가지를 꽉 물어뜯어 놓겠다고 그에게

연방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는 아마 그렇게라도 했을 것이다.
폴리는 잠시 동안 침대 한편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눈물을 닦고 거울이 있는 데로 갔다. 
그녀는 수건 끝을 물주전자에 담그고 시원한 물로 눈을 씻었다.

 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비춰 보고 귀 위에 있는 머리핀을 고쳐 꽂았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아래쪽에 앉았다. 오랫동안 베개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 속의 남 모르는 정다운 여러 가지 회상이 떠올랐다.

그녀는 차가운 쇠침대의 가름대에 목덜미를 대고 몽상에 잠겼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거의 유쾌한 마음으로 걱정도 없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회상은 미래의 희망과 환상에 점차로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희망과 환상이 하도 얽혀져 있었으므로 그녀는 벌써 자기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하얀 베개도 보이지 않았고, 자기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난간의 손잡이가 있는 데로 뛰어갔다.
"폴리! 폴리!"
"뭐예요, 어머니?"
"얘야, 이리 내려 오너라. 도오런 씨가 네게 이야기가 있단다."
그때 폴리는 자기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더블린 외곽 샌디코브 해변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  이 탑에서 조이스는 글을 썼다고 한다)

<사진출처:'지은이의 신비로운 세상'>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론 연구

               / 오 길 영1)

 

1. 현실, 삶, 의식


모더니즘을 둘러싸고 벌어진 버먼(Marshall Berman)과 앤더슨(Perry Anderson)의 논쟁은 한가지 쟁점을 제기한다.1) 모더니즘은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내포성을 지닌 개념이 아니며 단일한 공통점으로 묶기 곤란한 다양한 예술적 경향의 느슨한 연합체일 수 있다.

 

 따라서 “20세기 초의 문학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모더니즘’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통일성”2)을 루카치(Georg Lukács) 같은 모더니즘 비판자들이 사후적으로 구성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단일한 ‘모더니즘의 이념’을 거부하는 이런 입장은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루카치와는 대비된다.

 이 글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문학론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를 규정하려는 태도가 지닌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이런 점검은 조이스의 ‘이론적’ 발언만이 아니라 그가 쓴 작품의 구체적인 분석, 더 나아가 당대 모더니즘의 대표적 작가들의 포괄적 연구가 있을 때 그 타당성이 검증될 일이다.

 

 이 글은 좀더 심도 깊은 모더니즘 논의를 위한 시론이다.

1)2)

얼마 전 간행된 주목할 만한 영미문학 개설서에서 모더니즘을 다룬 대목을 읽어보면 모더니즘 평가가 여전히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모더니즘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당대 삶의 문제와 모순을 특정 시대의 역사적 산물로 보기보다는 초역사적이고 영원한 인간조건으로 보는 경향”이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사고”3)라는 신랄한 비판이 있다.

 

 또한 “현실을 도외시한 ‘의식의 자유’라는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ꡔ길잡이ꡕ, 184면)라는 비판도 눈에 띈다.

다른 평가도 있다.

 

 가령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작품에는 남부방언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리얼리티를 더해줄 뿐 아니라

 남부의 토속적인 구술전통과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서술기법이 어우러져서 모더니즘적 주체를 성공적으로 담아낸다”

(같은 책 274면)는 평가가 그렇다.

 

모더니즘은 때로는 퇴폐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예술로 폄하되며, 때로는 당대의 리얼리티를 포착한 예술적 성취로 평가된다. 극단적인 평가의 대립이 있다.

 

이런 평가의 대립은 “현실을 도외시한 ‘의식의 자유’라는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라는 식의 접근법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의 주요 문제의식이다.

루카치는 모더니즘이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손쉬운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모더니즘 형식은 다른 문학형식들과마찬가지로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현실들을 반영한다.

 

 비록 그 반영이 왜곡되고 또 왜곡하는 방식이지만.”4) 모더니즘도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현실들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왜 “왜곡된 방식”을 통한 반영인가.

 

루카치가 보기에 모더니즘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퇴행성은 현실의 표피적 묘사에 집착해서 현실의 ‘총체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작가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는 것과 현실 자체를 동일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현실의 왜곡된 그림을 제시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 극단적인 예이다)”(루카치 51면).

 

 루카치의 비판은 대상/현실과 주체/의식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서구 근대철학의 해묵은 난제를 제기한다.

루카치는 ‘유물론자’답게 “현실 자체”와 작가의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루카치가 혹독하게 비판하는 조이스도 이런 구분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현실 자체의 의미를 누누이 강조한다.

 


“당신은 아일랜드 사람이므로 당신 자신의 전통에 따라서 글을 써야 합니다.

 모방한 문체는 좋지 않아요.

 당신의 피 속에 있는 것을 써야지 머릿속에 있는 것을 써서는 안 됩니다”라고 조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파워(Arthur Power)가 민족주의에는 진저리가 났고 모든 위대한 작가들처럼 국제적이고 싶다며 한때 조이스 자신도 말했을 법한 반대 의견을 내세우자 조이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뚜르게네프(Turgenev)가 예증하듯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국제적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 지닌 민족주의의

 강렬성입니다. …

 

 내 경우에 나는 언제나 더블린을 쓰고 있는데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수성에는 보편성이 들어 있습니다.”5)

 


“더블린의 핵심”을 올곧게 재현하려는 조이스의 욕망은 자연주의적인 세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ꡔ더블린 사람들

ꡕ(Dubliners)만이 아니라 ꡔ율리씨즈ꡕ(Ulysses)나 ꡔ피네건즈 웨이크ꡕ(Finnegans Wake)에서도 확인된다.

 

조이스는 그의 현실 자체였던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조이스 작품의 인물은 “현실을 도외시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이스의 작품에서도 루카치가 딱지 붙이려는 것과는 달리 어떤 무시간적인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극히 역사적인

인간이 기반을 이룬다. 비록 아일랜드의 민속적인 요인들을 훌륭하게 보여주기는 해도 조이스는 자기가 묘사한 세계의

피안에 존재하는 어떤 신화를 꾸며놓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 자체를, 오늘날의 루카치가 경시하는 문체의 기교를 통해 신화화함으로써 그 세계의 본질 혹은 나쁜 본질을 보여주려고 한다.”6)

 

루카치가 훈계하지 않더라도 뛰어난 작가는 현실 자체와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혼동하지 않는다.

루카치가 혹독하게 비판하는 울프의 답변을 들어보자.


속을 들여다보면 인생은 ‘이렇다’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한 평범한 날의 한 평범한 마음속을 한순간 조사해보라.

 그 마음은 무수히 많은 인상들을 받아들인다.

 

그 인상들은 하찮은 것, 놀라운 것, 덧없는 것 또는 강철의 날카로움으로 새긴 것들이다. …

 인생은 균형있게 열을 맞추어 늘어선 일련의 마차의 등이 아니다.

 인생은 희미한 광채요, 우리 의식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의 봉투이다.7)

 

루카치는 현실 자체에 관해 작가나 비평가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그 판단이 작품의 성취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울프는 다르게 생각한다.

 

울프에게 현실 자체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술은 현실 자체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인물들의 “무수히 많은 인상”을 다룬다.

모더니즘 소설의 다양한 기법과 형식 실험은 “무수히 많은 인상”을 가능한 한 정확히 전달하려는 예술적 고투의 산물이다.

 

그래서 이제 “‘저것’으로만 그[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구성해야만 한다.

현대인들의 ‘저것’, 즉 관심의 대상은 심리학이라는 어두운 장소에 놓여 있기 쉽다.

그러므로 강조점은 약간 다르게 놓여진다.

 

 이제까지 무시되던 그 무엇이 강조된다.

우리가 파악하기 어렵고 우리 선배작가들에게는 이해 불가능했던 것, 이제까지와는 다른 윤곽이 필요하다”

(울프 90면).

 

작가가 포착해야 하는 “무수히 많은 인상”은 우리의 의식에 새겨진다.

 따라서 작가의 “관심의 대상”은 “우리의 행동과 사유가 기대고 있는 병리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내적 구성”8)의 세계가

 된다.

 

 그 세계는 “삶의 비밀스러운 흐름들”이 물결치는 곳이고 “겉으로 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표면 밑을 흐르는 숨겨져 있는

흐름들”(파워 74면)이 있는 곳이다.

 

“비밀스러운 흐름들”은 단숨에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더니즘 문학은 현실 자체를 판단하지 않는다.

조이스는 ꡔ더블린 사람들ꡕ의 스타일의 특징을 “불편할 정도로 사실에 정밀하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 자체는 작품에 그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아니, 주어질 수 없다.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에서도 인물의 세밀한 묘사는 인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삶의 비밀스러운 흐름들”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예컨대 「이블린」(Eveline)의 장면 묘사를 보자.

그녀는 노쓰 윌 선착장의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가 그녀 손을 잡고 있었고, 그녀는 그가 항해에 대한 무슨 얘기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착장은 갈색의 행낭을 든 군인들로 만원이었다. …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뺨이 창백하고 차게 느껴졌다.

번민 속에서 헤매며 그녀는 자기를 인도해달라고, 어느쪽이 자기의 도리인지 보여달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안개 속으로 배가 길고 애처로운 경적을 울렸다.

 

 만약 간다면 내일 그녀는 빠른 속도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가는 배 위에 프랭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배표는 이미 끊어놓았다.

그가 그녀를 위해 해준 모든 것을 그녀가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녀의 번민이 몸에 구토를 일으켰고 그녀는 계속 입술을 움직이며 소리없이 열렬히 기도를 드렸다. …

그녀는 힘없는 짐승처럼 순순하게, 창백한 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를 향한 그녀의 눈빛엔 사랑이나 이별 혹은 그를 알아보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9)


서술자는 이블린의 삶을 억압하는 식민지 현실 자체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다.

이블린을 둘러싼 “갈색의 행낭을 든 군인들”의 존재는 식민지 현실 자체의 살벌함을 선명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조이스의 관심은 현실 자체라기보다는 이블린의 고통이다.

 

이블린은 “그녀의 번민이” 어디서 오는지, 자신의 “삶의 비밀스러운 흐름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래서 떠나지 못한다.

이블린의 고통이 서술자의 정밀한 묘사에 담긴다.

 

ꡔ율리씨즈ꡕ나 ꡔ피네건즈 웨이크ꡕ 같은 혁신적인 작품도 ꡔ더블린 사람들ꡕ에서도 드러나는, “삶의 비밀스러운

 흐름들”의 탐색의 심화로 볼 수 있다.

 

 

조이스는 ‘리얼리스트’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리얼리티’는 루카치와는 다르다.

조이스나 울프는 묻는다.

 

무엇이 리얼리티인가?

 현실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이 제공한 이미지와 인상을 재료로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내면에 세우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리얼리티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의식/무의식에 새겨진 리얼리티이다.

예술의 세계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경험하는 인물들의 기억, 죄의식 그리고 인상의 세계이다.

 

혹은 현실 자체로 인해 왜곡되고 기형화되는 현대인들의 의식/무의식의 세계이다.

조이스가 보기에 “현대의 주제는 우리의 의식 밑에 깔려 있는 힘들, 그 숨겨진 흐름들인데 이것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며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의식의 흐름에 거슬러 인간을 움직이게 만든다”(파워 54면).

 

표피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밑에 깔려 있는 힘들, 그 숨겨진 흐름들”이 중요하다.

 현실 자체는 이 “흐름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현실 자체 혹은 라깡(Jacques Lacan)의 ‘현실계’(the Real)는 언제나 표현되지 못한 잉여로 남는다.

루카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완강하게 현실 자체 혹은 ‘객관적 현실’에 집착한다.

 

 

 “이와 유사한 현실의 희박화는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에 기초를 이룬다.

물론 의식의 흐름이 그것을 통해 현실이 표현되는 매체 자체일 경우에 현실의 희박화는 강화된다. …

 

 그러므로 현실의 희박화와 성격의 해체는 상호의존적이다”(루카치 26면).

 “현실의 희박화”란 무슨 뜻일까? 현실이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전지적 시점의 작가나 서술자가 조망하는 총체적 인식이 아니라 각 인물의 ‘의식의 흐름’10)에는 현실 자체가

파편화되어 나타난다는 말인가? 물론 루카치도 지적하듯이 현실 자체는 죽어 있는 물리적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경험하는 주체의 운동에 따라 변화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루카치도 인정하듯이 현실 자체는 언제나 예술작품에서 해석된 현실, 인간화된 현실이다.

 이 지점까지 루카치의 견해는 온당하다.

그러나 그는 예술작품의 해석된 현실을 작가나 비평가가 ‘총체적으로’ 파악한 현실 자체와 견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모더니즘 문학에서 “현실의 희박화는 강화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 지점이 문제다.

루카치는 불만을 터뜨린다.

 “물론 의식의 흐름이 그것을 통해 현실이 표현되는 매체 자체일 경우에 현실의 희박화는 강화된다”라고.

 

그러나 과연 각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통하지 않고 “현실이 표현되는 매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언제나 현실을 경험하는 우리의 의식/무의식은 파편적이다.

분열된 현실에서 “서술의 유기적 통일성은 경험의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서술 문장들을

만드는 형식적 한계 장치로도 기능하지 못한다”.11)

 

 

ꡔ율리씨즈ꡕ에서 블룸(Bloom)의 의식에는 채 소화되지 않은 말과 인상들이 어지럽게 출몰한다.

블룸을 비롯한 ꡔ율리씨즈ꡕ의 인물들은 분열된 자아를 지닌 채 외롭게 더블린 거리를 헤맨다.

이 분열된 자아들 사이에 의견의 소통은 쉽지 않다. 블룸과 스티븐(Stephen)은 작품에서 내내 고립되어 있다.

파편화된 자아를 지닌 사람들의 세계는 사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서커」(Ithaca) 에피쏘드의 한 대목을 보자.


물을 사랑하는 자, 물을 긷는 자, 물을 나르는 자인 블룸은 취사용 스토브로 돌아오면서, 물의 어떤 속성에 대해

감탄했는가?


물의 보편성, 물이 지닌 민주적 평등성과 자신의 수평면을 견지하려는 타고난 성질, 메르카토르 투영도에서 나타나는

 물의 광대함, 태평양 썬댐 해구의 8천 길이 넘는 거의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이, 해안의 모든 지점을 순차적으로

 방문하는 물의 파도 및 수면의 미립자의 끊임없는 운동. …

 

12)

「이서커」 에피쏘드는 위와 같은 잡다한 사실에 집착하는 블룸의 의식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아마 루카치라면 이런 묘사를 자연주의적인 표피성의 집착이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읽기도 가능하다.

 

 

시시콜콜한 세부 사실이 블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물화된 현실 자체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닐까.

 

ꡔ율리씨즈ꡕ에는 공적 영역의 언어가 없다.

어떤 대화나 공동의 모색도 거부당한다.

ꡔ율리씨즈ꡕ의 인간관계는 사물화된 관계이다.

 

 사람은 사라지고 사물만이 남는다.

 인물들은 고립되고 그들의 의식은 분열된다.

 내적 독백 기법은 분열된 의식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루카치는 “서술의 유기적 통일성”이 깨진 작품은 현실의 총체적 재현에 실패한 결과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형식 자체의 급진적인 역사화는 독특하고 복잡한 텍스트 구성과 읽기를 위한 역사적

필연성”(제임슨 128면)이다.

 

내적 독백의 탄생도 “역사적 필연성”의 산물이다.

 

블룸의 고독과 내적 독백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다.

내적 독백의 기법은 고독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이다.

 루카치는 “조이스에게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교는 단지 스타일상의 장치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서술방식이나

인물 형상화를 지배하는 구성원리”라고 비판한다.

 

물론 조이스가 “감각에 주어진 자료들의 상세한 기록에 과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소홀히

 한 것을 두고 예술적 실패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그의 예술적 야망과 명백한 능력을 고려할 때 우스꽝스러운

평가”(루카치 18면)가 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유보사항을 루카치는 단다. 조이스의 작품은 그의 의도를 훌륭하게

구현한다.

 

만(Thomas Mann)과 비교하면서 루카치는 조이스 작품의 의도를 비판한다.

조이스의 현실관은 고정되고 굳어진 현실관이다.

따라서 조이스 작품에서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이 소홀하게 취급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것이 루카치 비판의 요점이다.

그렇다면 “인물들의 감각에 주어진 자료들의 상세한 기록”과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은 어떻게 관련되는가? “감각에

주어진 자료”보다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강조하는 루카치의 시각에는 근대 미학의 기본 전제, 이성적으로

 판단되고 형상화된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만이 중요하지 “감각에 주어진 자료들”의 생생함은 천시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13) 루카치에게는 명확한 평가의 기준이 있다.

 

“서술방식”이나 “인물 형상화를 지배하는 구성원리”가 중요하다.

서술방식 자체를 내적 독백이 지배하는 조이스의 작품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의식의 흐름 가운데 하나는 서정적인 것으로 위장되어 있고 다른 것은 플롯에 종속되어 있다.

두 경우 모두 새로운 장치는 아주 중요한 뭔가를 얻는다.

그것은 기능, 즉 의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자유의 포기이다”(모레띠 179면, 원문 강).

기법은 의미의 종속물이 아니다.

 “ꡔ율리씨즈ꡕ가 정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의 의식의 흐름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

이것은 통속적이고 조야한 것, 무가치한 것도 받아들인다.

이것은 고상하게 되려고 하지 않으며 따라서 타락을 피할 수 있었다”(같은 책 180면). 내적 독백의 기법은

 “감각을 통해 몸에 주어진 리얼리티”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의식의 흐름은 인물에게 주어지는 미세한 감각을 기록한다.

중요한 것은 의식에 새겨진 감각 자체이지 거기에 들어간 의미내용이 아니다.

 내적 독백의 기법은 의미 자체가 된다. 조이스의 “독백에서 시대의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아도르노 166면).14)

 

2. 진실, 에피퍼니, 재현


모더니즘 문학이 현실을 올바로 재현하거나 반영하지 않는다는 루카치의 비판은 작가나 비평가가 작품이 반영하는

 현실 자체를 알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작품의 인식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루카치의 ‘인식론주의’는 이 전제에 뿌리를 둔다. 모더니즘 문학은 바로 이 전제를

문제삼는다.

 

 모더니즘 문학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개입하는 언어의 의미와 불충분성에 대해 강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언어를 통한 재현의 불충분성 혹은 불가능성의 물음이 제기된다.

작품은 현실 자체를 투명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식이 과연 대상과 일치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상은 주체가 대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이 전통적인 소설 쓰기의 방식에 제기된다.

19세기까지의 전통적인 리얼리즘 소설의 인과적 서술은 현실이 수미일관하며 통일적이고 파악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구성법이다.

 

루카치가 비판하는 “현실의 희박화”에는 오히려 현실을 인식한다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되묻는 자의식적 질문이

깔려 있다.

 이 자의식을 약하게 드러낸 것이 ꡔ더블린 사람들ꡕ이나 ꡔ젊은 예술가의 초상ꡕ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자유간접화법이고, 그것이 강하게 표현된

기법이 ꡔ율리씨즈ꡕ에서 두드러지는 내적 독백이다.

 

 내적 독백에서 현실은 각 인물이 느끼고 해석하는 현실로만 존재한다.

하나의 통일적인 현실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자신만의 현실을 내면에 지닌 인물들 사이에 의사소통은 가능한가?

 

조이스 작품의 힘은 이 질문에서 나온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해석한, 인식한 세계만을 안다.

 우리가 인식한다고 믿는 대상의 ‘본질’은 언제나 우리의 인식에 의해 구성된 현실이다.

 

라깡의 표현을 빌리면 상징계를 벗어나 현실을 직접 알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석되고 인식된 세계 저편의 ‘객관적 세계’ 자체를 알 수 있는가?

 예술의 기능은 재현이나 반영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위상을 지니는가?

이 질문이 모더니즘 작가들에게는 중요하다.

 

 

예술작품의 내용은 실제 사회와 같은 의미에서 현실적이지 않다.

 “예술은 실제 세계에 대한 부정적 지식이다”(아도르노 160면).

“작품의 진실 내용”(같은 글 172면)은 현실 자체와는 관련을 가지면서도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예술은 현실 자체의 반영이 아니며 그런 완벽한 반영은 이루어질 수 없다.

 

아도르노는 루카치의 반영론을 과녁으로 삼고 “한 예술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이 실제로 ‘객관적 현실의 단순한 반영’과

 동일한가라는 철학적 문제”(같은 글 153면)를 제기한다.

 

 아도르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 자체가 아니다.

 

 현실 자체가 어떻게 “작품의 진실 내용”으로 변화되었는가?

이 물음이 중요하다.

작품의 세계는 객관적 현실에서 분리되었다.

 이 분리로 작품의 세계는 현실 자체를 재현하려고 할 때도 언제나 하나의 이미지 혹은 가상으로 남는다.

 

라깡에 다시 기대면, 그 가상에서 현실 자체는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현실은 언제나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잉여로 남는다.

15) 따라서 작가는 불완전한 재현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한다.

이 지점이 모더니즘 문학의 자의식이다.

 

그것은 “실재의 불가능성”(라깡)을 인정하는 겸허함의 표현이다.

 “실재는 인간의 사유가 상징계를 매개로 현실을 구성한 후에도 항상 자투리로 남아 그 현실을 위태롭게 만드는

 낯선 현실”(홍준기 73면)이다. 현실은 자신의 본 모습을 작품의 세계에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말하는 존재인 유한한 우리 인간은 결코 실재나 사물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같은 글 69면).

 따라서 작품의 현실은 언제나 현실 자체의 이미지요 가상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이런 가상적 예술은 현실 자체를 성찰한다.

 

예술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의 이름으로 현실 자체를 판단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것을 반영의 정확성이나 충실성으로만 이해할 때 루카치의 인식론주의가 싹튼다.

물론 예술은 현실을 인식한다. 조이스도 이 점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상주의가 인류의 무덤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

우리는 사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았기에 오늘날 우리가 원시인들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현실에 뿌리박은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언제나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파워 98~99면).


그러나 “사실에 충실한 삶”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는 만만치 않다.

여기서 조이스는 루카치와 갈라진다.


사실 입센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인생이란 입센이 재현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

 나에게 청춘과 모성이란 …

 

우리 옆에 있는 저 두 사람 [조이스의 옆에 앉아 있던 어느 젊은 노동자와 그의 어머니를 가리키며]이다.

나는 저 젊은 친구의 마음속에 있는 천가지의 복잡한 생각들을 쓰고 싶다.절대적 리얼리즘이란 물론 불가능하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엘먼 266면)


조이스는 현실을 ‘총체적으로’16) 재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절대적 리얼리즘은 물론 불가능하다.”

언제나 잉여로 남는 현실 자체를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

 모더니즘 문학의 복합시점이나 내적 독백은 이 질문의 답변이다.

 

통일적이고 명확한 판단력을 지닌 서술자나 작중 인물은 없다.

“여기[울프의 ꡔ등대로ꡕ(To the Lighthouse)]에서는아무도 아무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보지 못하며,

따라서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하고,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 거듭 던지는 의문의 눈길과도 흡사한

 것이었다.”

 

17) 모더니즘 소설에서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하다.

모더니즘 문학에서는 인물이나 사건에 내리는 ‘객관적’ 판단의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현실의 완벽한 재현이라는 신화는 무너진다.

 이제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화자라는 자격의 저자가 완전히 사라졌다”(아우어바흐 250면).

 

따라서 필요한 것은 현실 자체의 성격을 섣불리 판단하거나 판단의 기준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판단의 적합성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모색의 과정이 중요하다.

 

“여러 사람의 관점을 제시했다는 것은 작가가, 하나의 객관적 현실, 즉 여기에서는 램지 부인(Mrs. Ramsey)의 실체라는 현실적 과제를 놓고, 거기에 대한 답을 열심히 연구 조사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같은 책 253면).

 

램지 부인, 혹은 조이스 작품의 인물들의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모호한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시점과 내적 독백이 구사된다.

 모더니즘 문학은 전지적 작가나 서술자의 손으로 이음매 없이 매끈하게 칠해진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브리꼴라쥬와 재기능화”(모레띠 189면)의 작품이다.

 

18)하지만 이런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조물들[조이스와 T. S. 엘리어트의 작품들]은 동시에 한 세기 동안이나 서구 모더니즘의 주요한 정전이었다.

 이것들을 생산한 브리꼴라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바로 그것이 브리꼴라쥬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문학이 도대체 완전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 사회 또한 거의 절대적으로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링보다는 브리꼴라쥬가 훨씬 더 낫다.

 

브리꼴라쥬는 도달할 수 없는 (때로는 더 나쁜) 최종 해결책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세계 체제에 내재하는 이질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190~91면)


현실 자체에 관한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작가는 “도달할 수 없는 최종 해결책”을 꿈꾼다.

 그러나 조이스로 대표되는 브리꼴라쥬의 작가는 현실의 이미지와 다양한 의식의 흐름을 재료로 현실 자체의 정체를

탐구한다.

 

판단이 아니라 모색이 중요하다. 현실의 가상으로서의 이미지와 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세부 사실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세부 사실의 정확한 관찰이 요구된다.

자연주의처럼 모더니즘은 일상성의 문학이다.

의식이 포착하지 못한 사소한 일상의 인상과 기억에 진실이 숨어 있다.

 

프루스뜨(Marcel Proust)의 ‘의도하지 않은 기억’(involuntary memory), 조이스의 ‘에피퍼니’(epiphany),

 울프의 ‘존재의 순간’(the moment of being) 등의 개념은 이 진실을 탐구하려는 모색의 표현이다.

진실은 명료하게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진실은 기억, 인상, 그리고 “감각을 통해 몸에 주어진 리얼리티”를 통해서 나타난다.

 

조이스의 에피퍼니 개념은 일상성의 미학의 표현이다. 에피퍼니는 “말이나 행동의 조야함이나 마음의 기억할 만한 순간들에 나타나는 정신의 갑작스러운 계시”19)이다.

에피퍼니의 순간은 미묘하고 쉽게 사라지기에 그 계시의 순간을 극도로 세심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 미묘한 순간에 현실 자체가 잠깐 모습을 나타낸다.

 에피퍼니는 “생생한 현실감과 인생의 심오한 진실로 가득한 매순간의 구현이 갖는 가치”(아우어바흐 273면)를

탐구한다.

 

 일상적 사실은 단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의 장소이다.

그런 이유로 조이스는 “사실에 충실한 삶”을 거듭 주장한다.

 일상적 사실과 그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놓은 인상과 기억에 충실할 때 사실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종교적 각성의 순간에 비견된다.

 

조이스의 초기 예술론의 핵심적 개념인 에피퍼니를 ꡔ율리씨즈ꡕ에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조이스는 일상성의 미학을 더 멀리 밀고 간다.

 “일상의 존재는 이것을 고상한 것으로 변형시키려는 젊은 예술가에게 저항한다.

 일상은 굼뜨고 불투명하게―

 

무의미하게 남아 있다”(모레띠 180면, 원문 강조).

에피퍼니는 일상의 비루함에서 “사물의 영혼”이나 “사물의 참된 성격”을 발견하려는 통로이다.

이런 시각은 일상성을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와는 선을 긋는다. 하지만 여전히 일상성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다른 “고상한 것”으로 변형시키려는 욕망이 작용한다.

 

 ꡔ율리씨즈ꡕ가 보여주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세계는 예술적 재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굼뜨고

 불투명하게” 남아 있음을 예증한다.


3. 자연주의, 모더니즘, 일상성의 미학


일상성의 미학을 강조하는 조이스의 예술론은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의 연속성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루카치는 자연주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단절의 벽을 세우는 문학사적 입장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보인다.

 

전통적인 문학사적 평가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종래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적 현실 이해, 사실성의 과도한 집착을

 비판하면서 혁신적인 문학기법, 스타일의 끊임없는 개발, 인간과 현실의 새로운 이해를 도모한다.

루카치는 양자 사이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주목한다.

 

 이것이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의 연속성을 통찰하는 루카치 문학사론의 미덕이다.

“모더니즘 문학의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성격”은 “한 예술작품에서 표현된 상황과 인물들의 중요성의 위계체계”

(루카치 34면)가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선별의 원칙이 없기에 세부 사항에

집착하게 된다.


그것만 떼어놓고 보자면 설명적 세부 묘사는 충분히 현실의 진정한 반영일 것이다. 문제의 작가가 재능만 있다면. 그러나 이야기 서술의 전후관련과 구성이 객관적 현실의 적절한 이미지에 합당한가라는 문제는 전체로서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이 태도가 개별적 세부 묘사가 전체의 맥락 속에서 부여받는 기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세부 묘사가 무비판적으로 취급된다면 따라오는 결과는 자의적인 자연주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의미있는 세부 사항과 별로 중요치 않은 세부 사항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조이스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글 51~52면)


루카치에게 핵심적인 것은 “예술작품에서 표현된 상황과 인물들의 중요성의 위계체계”이다.

 그리고 “중요성의 위계체계”를 세우려면 현실 자체를 판단해야 한다.

 “전체로서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중요해진다.

“전체로서의 현실”은 어떻게 “작품의 진실 내용”(아도르노)으로 온전히 반영되는가?

 

이 질문은 루카치의 조이스 비판에서 해결된 질문으로 전제된다.

이 전제 위에서 루카치는 “의미있는 세부 사항과 별로 중요치 않은 세부 사항”을 선명하게 구분한다.

루카치에게는 사실주의적 묘사의 충실성 자체가 아니라 재현된 사실들 사이의 “중요성의 위계체계”가 관건이 된다.

 

루카치는 조이스가 “의미있는 세부 사항과 별로 중요치 않은 세부 사항을 구분”하지 못하고 “개별적 세부 묘사”에 집착한다고 비판하다.

 

 그런데 자연주의의 특징으로 흔히 거론되는 이런 비판은 과연 온당한가? 루카치가 비판하는 것처럼 자연주의는 사실의

 수동적인 모사론에 그치면서 통속적이고 “별로 중요치 않은 세부 사항”을 시시콜콜히 묘사하는 문학에 불과한가?

 

사실 이런 자연주의 비판은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자연주의 문학이 “병적이고 음란한 것에 탐닉하며 무분별하고 맹목적으로 현실을 모방한다는 비난을 이미 1850년대의

 보수주의 비평가들이 했다”.

 

20) 그러나 이런 비판은 자연주의가 지닌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성격, “인생을 아무 편견이나 거리낌없이 그리는 모든 예술은 그것 자체로서 혁명적인 예술”(하우저 85면)이라는 자연주의의 모토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어떤 이상주의도 배격하면서 당대의 일상적 현실의 가치를 표나게 강조하면서 사실을 정확히 관찰하고 과학적 탐구정신으로 묘파할 것을 요구하는 자연주의가 거둔 성취는 쉽게 무시될 수 없다.

 

21) 자연주의 작품이 “너무 예술적으로 완벽한 구성을 회피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언제나 미완성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하우저 82면)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떤 “완벽한 구성”도 현실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

예술적 재현은 “언제나 미완성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태도는 예술적 재현의 한계, 그리고 작가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겸허함의 표현이다.

 따라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잘것없는 사실에서 드러나는 현실 자체의 순간적 포착이다.

이런 태도는 모더니즘 문학에서도 반복된다.

 

“모든 현대소설은 결국 구체적인 정신적 현실의 정확하고도 상세한 묘사”(같은 책 217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현실은 외적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 현실”이다.

모더니즘 문학은 현실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을 각 인물이 서로 다르게 혹은 같이 경험하는 인상과 감각으로 새겨진 “정신적 현실”로서 파악한다.

 

내적 독백은 “정신적 현실”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기법이다.

물론 내적 독백이 전하는 “정신적 현실”의 진실은 부진실이다.

모더니즘 문학은 이런 부분적 진실이 모인 현실 자체의 브리꼴라쥬이다.

조이스가 좋은 글쓰기의 요건으로 꼽은 것은 “자연주의적인 정확성, 목적의 정직함 그리고 스타일”(엘먼 233면)이다.

 

22) 조이스에게 “의미있는 세부 사항과 별로 중요치 않은 세부 사항”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세부 사항의 묘사가 현실 자체를 재현하는 데 어떻게 관여하는가?

조이스의 관심은 여기에 있다.

 

루카치의 오해와는 달리, 세부 사항에 조이스가 기울인 관심은 즉물적으로 그런 사항들에 집착한 결과가 아니다.

조이스에게 “자연의 진부해 보이는 세부 사항들은 경이로운 것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자연이 보여주는 놀라운 드러냄에는 평범한 것이 스며 있다”(같은 책 550면).

 

자연은 단지 외적 자연만이 아니라 내적 자연, 우리의 “정신적 현실”도 아우른다.

한 인물의 의식의 흐름에는 세계의 경이로운 진실이 스며 있다.

더욱이 아일랜드의 식민 현실에서 일상성은 께느른한 단조로움의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지배와 그에 대한 저항이 각축하는 곳이었다.

 

조이스는 현실에서 도망간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일상과 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에 현실 자체가 어떻게 각인되는가,

그 재현의 메커니즘을 자신의 방식으로 탐색한 작가였다.

 

물론 조이스가 토로하듯이 그의 고유한 방식은 많은 오해를 낳았다.

루카치는 그런 오해의 대표자격인 셈이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상황에 대하여 썼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회적 수준의 특정한 도시적 유형을 내 작품 안에 재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본 것을 숨기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원망하는 자들도 있었고,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표현 방식 때문에 화를 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요컨대 어떤 사람은 사실적인 묘사 때문에 격분했고, 어떤 사람은 문체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그들 모두가 내게 복수를 했습니다. (같은 책 689면)


그러나 조이스의 작품은 지금도 문학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유도하고 있으니 그는 유쾌한 “복수”를 한 셈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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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shall Berma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New York: Penguin

1988); 페리 앤더슨 「근대성과 혁명」, ꡔ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ꡕ(이론과실천 1993) 참조.

 

2) Franco Moretti, Modern Epic: The World System from Goethe to Garcia Marquez

 (New York: Verso 1982) 201면, 원문 강조.

 

3) 영미문학연구회 엮음 ꡔ영미문학의 길잡이ꡕ 하권(창작과비평사 2001) 181면. 이하 ꡔ길잡이ꡕ로 약칭함.

 ꡔ영미문학의 길잡이ꡕ의 성취와 한계를 평가한 글로는 졸고 「새로운 영미문학사 쓰기의 가능성과 한계: ꡔ영미문학의

 길잡이ꡕ의 비판적 읽기」, ꡔSESK 영미문학연구ꡕ 2호(2002년 상반기) 55~79면 참조.

 

4) Georg Lukács, Realism in Our Time (New York: Harper Torchbooks 1964) 49면.

 

5) Richard Ellmann, James Joyce, Revised Edition (New York and Oxford: Oxford UP 1982) 505면.

 

6) Theodor Adorno, “Reconciliation under Duress,” Aesthetics and Politics, trans. and ed.

Ronal Taylor (London: Verso 1977) 159면.

 

7) Virginia Woolf, “Modern Fiction”[1919], 20th Century Literary Criticism, ed. David Lodge (London: Longman 1972) 88면.

 

8) Arthur Power, Conversations with James Joyce, ed. Clive Hart (London: Millington 1974) 56면.

 

9) James Joyce, Dubliners[1914] (New York: Penguin Books 1992) 33~34면.

 

10)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은 종종 혼용된다. ‘의식의 흐름’은 소설 장르의 하부 장르로서 ‘의식의 흐름’을 다루는

 현대적 심리소설을 지칭한다.

 

‘내적 독백’은 의식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법이다.

Robert Humphrey, Stream of Consciousness in the Modern Novel (Berkeley: U of California P 1954) 참조.

 

11) Fredric Jameson, “‘Ulysses’ in History,” James Joyce and Modern Literature, eds. W. J.

McCormack and Alistair Stead (London: Routeldge & Kegan Paul 1982) 131면.

 

12) James Joyce, Ulysses[1922], eds. Hans Walter Gabler et al. (New York: Vintage 1986) 549면.

 

13) “근대의 리얼리즘 미학이 의식철학의 에피스테메 위에서 의식과 대상의 이분법을 설정하고, 예술과 세계 사이에

 반영의 관계를 설정했다. …

 

리얼리즘은 새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리얼리티’에 대한 재정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신의 눈을 통해 의식에 주어진 리얼리티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몸에 주어진 리얼리티가 있을 수 있다.

 

이 두 리얼리티의 차이를 표상하려면 보통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 속의 세계와 열 감지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하나는 데까르뜨가 말한 연장의 세계, 즉 공간적으로 조화롭게 배열된 실루엣의 세계이지만, 다른 하나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역동적인 에네르기의 세계이다”(진중권 「미학에서 감각론으로」, ꡔ창작과비평ꡕ 116호,

 2002년 여름, 창작과비평사 2002, 341면. 인용자의 강조). 이 지적은 ‘이성적’으로 파악된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만을 강조하는 근대 미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미학의 새로운 대상은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의식화되기 이전의 감각이나 인상일 수 있다.

 

14) 또한 Mark Shechner, Joyce in Nighttown: A Psychoanalytic Inquiry into Ulysses

 (Berkeley: U of California P 1974) 246면 참조.

 

15) 라깡의 실재, 상징계 개념에 대해서는 홍준기 「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 김상환․홍준기 엮음 ꡔ라깡의

 재탄생ꡕ(창작과비평사 2002) 참조.

 

16) 루카치는 외연적 총체성과 내포적 총체성을 구분하면서 예술적 총체성이 후자임을 지적한다.

 “예술작품의 총체성은 오히려 내포적이다. 묘사된 삶의 부분에서 객관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면서 그 삶의 부분의 존재와 운동, 그리고 그것이 전체적 삶의 과정에서 지니는 특수한 성격과 위치를 규정하는 요인들을 제한된 범위에서

 자족적이게끔 정렬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짧은 노래도 가장 거대한 서사시만큼이나 내포적 총체성에 해당한다”

(Georg Lukács, “Art and Objective Truth,” Writer and Critic, ed. and trans. Arthur Kahn

 (London: Merlin Press 1978, 38면). 그러나 이런 내포적 총체성론에도 이미 어떤 것이 작가가 재현하려는 현실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그것을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의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판단이 전제된다.

 

17)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ꡔ미메시스: 근대편ꡕ(민음사 1999) 246~47면.

 

18) 조이스의 지적은 흥미롭다.

“제 머리에는 거의 모든 장소에서 주워 모은 조약돌, 잡동사니, 부러진 성냥,유리 조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의 동료 작가들은 알지도, 발견하지도 못한 열여덟개의 상이한 관점과 그만큼 다양한 문체로 소설을 쓴다는 것,

그리고 이 책에 끌어온 전설의 성격은 사람들의 정신적 균형을 뒤집기에 충분할 것입니다”(엘먼 512면).

 

19) James Joyce, Stephen Hero, eds. John J. Slocum and Herbert Cahoon

 (New York: New Direction 1963) 211면.

 

20)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염무웅 옮김 ꡔ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영화의 시대ꡕ 개정판(창작과비평사 1999) 86면.

 

 

21) 작가가 지녀야 할 자연주의적 솔직성을 조이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작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꾸밈없이 솔직하게 쓰는 일입니다.

오늘날에조차 몇몇 도덕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불쾌한 현상 자체보다는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을 증오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을 충실히 기록하면서 입을 다물지 않는 작가를 부도덕하다고 합니다.

 부도덕하다고요!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최대의 희생을 감수하고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

 

이런 것이 도덕인 것이지요.

내가 입센을 존경하는 것은 이런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의 도덕성은 자신의 윤리적 견해의 강한 표명에서만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을 위한 그의 치열한 노력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엘먼 688면).

22) 작품의 장면 묘사를 위한 세부 사항의 정확성에 조이스는 놀라울 정도의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에 대해서는 엘먼 439, 473, 501면 등을 참조.

 

<자료출처: 니체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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