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동상
)

그리그 [Edvard Hagerup Grieg, 1843 ~1907]
노르웨이 피아니스트·작곡가. 베르겐 출생. 6살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2살 때 이미 작곡을 시도하였다.
15살 때 라이프치히와 코펜하겐에서 수학하여 독일 낭만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1864년에는 노르웨이 작곡가
R. 노르들라크의 영향을 받아, 남성적인 장엄성과 힘찬 저력에서만이 참다운 스칸디나비아의 음악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뒤의 작풍에 결정적인 방향을 잡게 되었다.
71년 크리스차니아(현재의 오슬로)에 음악협회를 수립하고, 지휘자로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31살 때
정부로부터 종신연금 지불이 결정되어 경제적인 여유를 갖고 음악활동에 정진하게 되었다.
80년 크리스차니아음악협회에서 손을 뗀 그는, 베르겐 근교에 살면서 오직 창작에 몰두하는 한편,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를 순회연주하면서 예술적으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또 독일 낭만파 음악의 기초 위에 노르웨이 민요·민속무용의 요소를 넣어 노르웨이 국민음악을 수립하였다.
그의 대작 중에는 3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비롯하여 피아노 소나타·첼로 소나타·현악 4중주곡 등의 실내악작품도
포함되어 있는데, 알려진 것으로는 a단조의 피아노 협주곡(op.16)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페르 귄트 모음곡
(Peer Gynt Suite)》 따위가 있으며, 모음곡 《홀베르그시대(Holberg Suite;op.40)》도 역작이다.
또한 《2개의 슬픈 선율(Elegiac melodies;op.34)》도 매력이 넘쳐 흐르는 관현악 작품이다.
유명한 작품으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868)》 《가을에》 《노르웨이 무곡(舞曲)》 등이 있으며
곡상(曲想)은 고아(古雅)하고 우미하며 노르웨이의 민족적 특색이 풍부하다.


Edvard Hagerup Grieg (1843.6.15~1907.9.4)
아버지는 북해로 새우잡이 나왔다가 노르웨이에 주저 앉은 스코틀랜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노르웨이 여성이었다.
12세부터 변주곡 등을 작곡할 정도
로 악재를 보였다고는 하나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가를 지망한 것은 15세 무렵 노르웨이 태생의 명바이올리니스트 불의
주선으로 라이프찌히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부터였다.
4년간 유학 중 그는 독일 음악의 전통을 마스터 했고 그것은 그의 음악의 핵심이 되었다. 졸업 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노르드라크라는 노르웨이 청년과 친교를 맺으면서 그리그는 철저한 민족주의로 방향을 정했다.
민족주의적 음악에 대한 그리그의 집념은 그로하여금 사실상 조국의 민요와 춤곡의 편곡인 여러 작품을 쓰게끔 했다.
북국의 쇼팽이라 불리는 그리그는 북유럽의 어두운 면과 서정적인 멜로디를 통해 고전적인 구성으로 국민 음악을 위해
전생애를 바친 노르웨이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났는데 , 그는 독일에 유학하여 19세 때, 라이프치히 음악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고국으로 돌아가 노르웨이의 서울 오슬로에 있는 음악 협회에서 지휘자로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자우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에 가깝지만 그는 향토색을 강하게
나타냄으로써누구보다도 노르웨이의 국민성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북유럽의 음악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교육가로서의 비중 또한 크다고 하겠다.
그의 멜로디가 극히 향토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가 취급했던 하모니는 해당된 작품에 알맞은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조바꿈에 있어서도 이를 대담하게 취급하여 색체적인 효과를 높였다. 그의 작품은 그가 대피아니스트인 만큼
피아노곡을 비롯하여 가곡, 실내악 등 비교적 작은 형식의 작품에 뛰어났었다.
1877년부터는 피오르드 근처의 경치좋은 곳에서 작곡을 전념했다. 그 무렵 작곡한 많은 피아노 소품과 성악곡 등에는
피오르드의 아름다운 풍경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외국에서 초청도 여러번 받았으나 건강이 악화돼 실현에 옮기지 못하고 겨우 영국의 초청에 의해 피오르드를 떠나
베르겐에 다다랐을 때 그만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그리그는 기구하게도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곳 베르겐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 졌고 유해는 그가 사랑했던 피오르드의 바위동굴에 안치되었다.
피아노 음악의 특징
그리그의 작곡스타일은 쇼팽의 스타일 만큼 심오하지는 못하나 이에 못지 않게 독특하다.
번번이 그리그의 선율은 두마디 밖에 안되는 짧은 프레이즈나 모티프로 분해되고 민요에서 연유된 방식임 - 그런 후
이 선율 단편(melodic fragment)들은 변형되거나 동형반복적으로 다시 진술된다.
그의 화성구조가 지극히 관습적일 때도 있으나 상호 관련성이 희박한 코드를 멋있고 재치있게 사용하기도 한다.
반음계성은 그리그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단순히 장식적인 것에 불과할 수 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어떤
곡의 기본구성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요소의 경우가 더 많다.
그리그는 아주 통상적인 기법의 참신한 의미를 부여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리그집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국민주의 음악가,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때(185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그는 완전히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1865년에 로마로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1868)을 연주한 리스트
는 그를 매우 극찬하였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으며,
여류 성악가 니나 하게루프를 사랑하게 되어, 안데르센의 시에곡을 붙인 가곡 《나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하여
유명해졌고, 그들은 결혼해서 오슬로에서 생활했다.
또 1867년에 오슬로 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 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 후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했다. 1885년부터는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면서 전원 생활을 즐겼다.
이 사이에 가끔 라이프찌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내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직접 불러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리그는 1907년에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배를 타기도 전에 병이 무거워져 베르겐의 병원에서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1877년부터는 로프트휘스에 틀어박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서정 모음곡》《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1876 초연)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

그리그집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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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민족주의 음악가 그리그. <출처: Wikipedia> |
에르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는 1843년 6월 15일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키르 조약(1814년)을 맺고 동맹관계에 있었지만 주도권은 스웨덴이 잡고
있었다.
그리그의 생애 대부분에 걸쳐 노르웨이는 이러한 체제하에 있었으나, 그의 만년인 1905년에 간신히 스웨덴과의
연합체제를 해소하고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
그리그 가(家)는 18세기 중엽에 스코틀랜드 계인 증조부 알레산더 그리그(1739~1803)가 노르웨이로 이주해와서
노르웨인과 결혼하고 해산물 무역으로 성공한 후 베르겐의 영국 영사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2대손이 그리그의 아버지
알렉산더(증조부와 동명, 1806~1875)이다.
그리그의 아버지는 조부와 마찬가지로 가업인 해산물 무역에도 수완이 있었으며, 그 역시 영국영사에 임명받은 교양 높은 명사였다.
그가 결혼한 노르웨이 여성 게시네(1814~1875)는 명문가 출신으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독일과 영국에 유학하여 익힌 피아노 실력은 공개 콘서트에도 종종 출연할 만큼 수준급이었다.
그녀는 특히 모차르트, 베버, 쇼팽을 애호했는데, 그러한 기호는 아들인 그리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그는 다섯 형제 중의 넷재로, 위로는 누이 둘과 형이 있고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었으며, 형제 모두가 음악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첼로를 좋아한 형은 욘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수준급 기교를 익혔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 음악은 취미로만 즐겼다.
에드바르드 그리그는 5세 무렵부터 피아노에 관심을 보여 이듬해부터는 어머니가 기초를 가르쳤다.
그리그 일가는 그리그가 9쎄 때인 1852년에 베르겐 교외로 이주하였고, 다음 해부터 그리그는 베르겐 시내에 있는
탕크스 스콜레(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윽고 12세 되던 해에 작곡을 시도했는데 그의 친구들은 놀라워했지만, 그가 다니던 일반학교의 교사들에게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15세 때인 1858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베르겐 동쪽의 산악지방으로 여행했다. 이것이 후에 그가 큰 관심을 갖게 된
산악지방 사람들의 생활과 예술에 대한 최초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이 해의 더욱 중요한 사건은 같은 베르겐 출신의 세계적 바이올린 연주자인 올레 불(1810~1880)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이미 유명한 인물이 되어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던 불은 소년 그리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명문교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할 것을 권했다.
이 권고에 따라 그리그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하여 1862년 졸업하기까지 3년 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트롤드하우겐의 그리그하우스베르겐에서 약 10km떨어진 호수 같은 표르드의 언덕에 그리그의 집이 있다.
이름하여 「트롤드하우겐」(메르헨의 언덕). 이 집은 이 고장이 부부의 마음에 들어 1885년에 세운 것으로서, 그 이후
22년을 여기서 살다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트롤드하우겐은 이 고장의 지명이 되어 있다.
이 시절 그리그가 작곡한 곡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다.
이 라이프치히 음악원 시절 일시적으로 건강을 해치기도 했지만, 1861년에는 18세의 나이로 스웨된의 카를르스함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인 데뷔는음악원 졸업 후인 1862년 5월 21일 베르겐에서 열린 콘서트로 볼 수 있다.
이 콘서트에서 그리그는 자작곡을 선보이며 고향 사람들 앞에 피아니스트로서 등장한 것이다.
다음 해인 1863년부터는 음악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베르겐은 음악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었으므로 1863년 5월에 가장 가까운 문화와 예술의 도시인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옮겨서 약 3년을 보냈다.
여기서 저명한 덴마크인 작곡가 가데(Niels Vilhelm Gade, 1817~1890)에게 사사를 원했지만, 조언과 격려를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가데의 권유로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과 같은 체계적인 작품이 작곡되었다는 것에
깊은 의의가 있다.
코펜하겐 시절에 생긴 중요한 일 중 하나로는, 그리그와 거의 같은 세대인 신진 작곡가인 노르트로크(Rikard Nordraak,1842~1866) 등이 결성한 민족적 음악 창조를 지향하는 그룹 「오이테르페(Euterpe) 협회」에 참가하게 된 것을들 수 있다.
이 운동은 1864년에 결성되어 1866년 3월에 노르로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1863년코펜하겐에서 후에 부인이 된 성악가 니나(Nina Hagerup, 1845~1935)와 만나게 되었다.
니나에 대한 연정은 명가곡집<마음의 멜로디>(1865)로 결실을 맺었다.
두 사람은 1867년 6월 11일에 결혼했다.
두사람이 결혼한 1867년에 그리그는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 필하모니협회의 지휘자이자 음악원 부원장으로
취임하고, 1874년까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867년에는
《바이올린 소타나 제2번》외에 후에 제10집까지 이어지게 되는 피아노곡《서정 소곡집》제1집이 출판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훗날 유명해진 《피아노 협주곡》의 초고가 작곡되었는데, 이 곡은 대부분 덴마크의 소렐레드에 있는
전원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코페하겐 시절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1870년 크리스티아니아 시절에 리스트이 초대로 재방문했다.
이미 그리그의 작품을 보고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있던 리스트와의 우호적인 만남을 통해 그리그는 큰 격려를 받았다.
이 무렵 그리그는 노르웨이 민요 수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린네만(Lindeman, 1812~1887)을 알게 되었고
(1869년), 노르웨이의 위대한 시인 뵈른손(Bjornson, 1832~1910) 공동제작을 시작했다(1870년).
린네만에게서 받은 영향은 만년의 명곡《4개의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고, 뵈른손과의 만남은 여러 편의 성악곡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외에 1872년《십자군 병사 지구르트》라는 극음악과 오페라의 공동제작 계획까지 뵈른손과 함께 했다.
◀니나 부인(처녀때 성 하게루프)은 1867년 그리그와 결혼하여 평생 동안 좋은 아내였고 내조를 잘 한 반려자였다.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지만 그녀는 뛰어난 성악가로서
연주회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리그의 반주로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니나 부인은 예술적 센스가 있던 여성으로서 그리그의 예술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트롤드하우겐에 그들의 집을 짓게 된 것도 이 니나 부인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처음에 트롤드다르(메르헨의 골짜기)라고 하는 호반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그리그는 거기서 즐겨 작곡을 하고
있었는데, 1885년에 그 언덕 위에 현재의 집을 짓고 「트롤드하우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부인의 발안(發案)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친밀했던 뵈른손과의 사이는, 1874년 그리그가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이 의뢰한《페르 권트》라는 음악을 작곡함으로써 끝이 나게 되었다.
이 해부터 그리그는 연금을 받고 베르겐을 본거지로 하는 생활에 들어갔다. 그 다음 해인 1875년에는 피아노용 주요
작품《노르웨이 민요에 의한 변주곡 형식의 발라드》를 작곡했으나, 부모가 연이어 사망하는 바람에 공개석상에서
연주되지는 않았다.
1867년《페르 권트》의 음악이 완성되어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음악을 동반한 시극(詩劇)이 상연되었을 때 그리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 음악도 초고와 후의 수정고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해에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초연을 보러 바이로트에 가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77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베르겐 동쪽의 하르당겔 피요르드의 오지인 로프트퓨스에서 여름이나 때로는 겨울을
보냈는데, 도시화되어 있지 않은 산악지에 사는 소박한 주민들의 언어와 민요, 피들, 피리 등의 악기, 민속 춤곡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 해에는 방언적인 노르웨이어 시를 토대로, 걸작 《12선율》op.33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1880년에완성하였다.
이어 명곡《현악 4중주》,《남성 합창 앨범》,《산의 트롤》등 참다운 민족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걸작들이 쏱아졌다.
1880년부터 2년간은 베르겐의 오케스트라인 '하모니엔' 의 지휘를 맡았다. 후에 대중화된 현악 합주용 명곡
《슬픈 선율》은 1881년에 《12선율》의 가곡을 토대로 완성되었는데, 이 해에는 또한 대중화된《노르웨이 춤곡》
이 피아노 연탄곡으로서 완성되었다.
1883년에는 바이로트에 바그너의 《파르지팔》초연을 보러 간 것 외에는 주로 독일 각지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또한 이 무렵에 중년 이후의 친구가 될 네덜란드 작곡가 렌트헨(1855~1932)과 서로 알게 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서정 소곡집 제2집》, 그리고 형 욘에 대한 사랑이 담긴 《첼로 소나타》가 모두 이 해에 나왔다.
다음 해인 1884년에는 베르겐 근교의 트롤드하우젠에 영주할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1885년 이후부터는 이곳을
생활의 본거지로 삼았다.
또한 1884년에는 베르겐이 낳은 위대한 극작가 홀베르그(1684~1754)의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칸타타와
피아노용 모음곡을 작곡했는데, 피아노용 모음곡은 곧 현악 합주용으로 편곡되어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되어 콘서트와 축하모임을 갖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86년에는 덴마크의 시인이자 화가인 드라크만(1846~1908)과 알게 되어 함께 베르겐 동쪽의 비경인
요툰헤임 산지로 여행하며, 민족적 요구에 큰 자극을 받고 연작 가곡으로 이루어진 대걸작 《산과 피요르드》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또 《서정 소곡집 제3집》도 이 무렵 완성되었다.
◀그리스하우스의 거실그리그가 살던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1886년에는 독일 연주여행에서 만난 러시아의 유명한바이올린 연주자인 브로즈카(1851~1929)와 친교를
맺은 외에, 영국의 작곡가 딜리아스(1862~1934)와도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었다.
브로즈키는 명곡《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초연자로서도 이름이 남아 있다.
다음 해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차이코프스키와 만났고, 브람스와의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
1887년부터 2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영국, 파리, 독일, 등의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나녔지만, 건강의 악화로
작곡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서정 소곡집 제4,5집》(1888~1891), 드라크만의 시를 토대로 한 가곡집 《6개의 시》Op.49(1889),
《변주를 동반한 옛 노르웨이 선율》(1891)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인데 이들 중에서 《서정 소곡집 제5집》은 1893년에 작곡된 것이다.
1894년과 그 이듬해에는 부인을 위해 많은 가곡을 작곡했고, 외국으로 연주여행도 많이 다녔다.
1895년 여름에는 하르당겔과 오지인 포스리로 갔는데, 이때 더욱 민요적 작풍에 치우치게 된다.
한편 소곡집 《서정 소곡집 제7,8,9집》은 1895년부터 1898년에 걸쳐 발표되었다.
1896년에는 빈에서 투병 중인 브람스와 만났다.
1898년에는 베르겐에서 열린 첫 음악제의 중심인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나 1895년부터 작곡에 착수했던 역작 가곡집 《산의 요정 》이라는 명곡을 완성시켰고 그 외에 《교향적 가곡집》
도 이 해에 나왔다.
민요적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성과로서는 1901년에 독창적인 피아노곡집인 《스롯텔》의 완성을 들 수 있다.
1903년 프라하에 갔을 때는 드보르작크와 만났으며, 이 해에는 60세 축하 행사도 있었지만,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같은 해에 나온 《서정 소곡집 제10집》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되었다.
1906년에는 병을 무릅쓰고 각지에서 콘서트를 열었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이 해의 종교 합창곡 《4개의 시편》은 마치 자신의 영혼을 위한 음률과도 같은 결실이었다.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인 1907년에도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다음 여행지로 떠나기 직전인 1907년
9월 4일 베르겐에서 64세의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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