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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Beniamino Gigli - Non Ti Scordar Di Me

 

 

 

 

 

 

 

 

 

<size=4> Beniamino Gigli - Non Ti Scordar Di Me</size=4>

 

 

 

 

                                                                               

 

Beniamino Gigli (베니아미노 질리, 이탈리아, 1890-1957)                                                                                                                                                                           

1935년                                                                                                                                                                                                                                                                                                                                    

 

 

 

 

 

Ernesto de Curtis (1875 ~ 1937)

 

 

Non ti scordar mai di me (Never Forget About Me)'돌아오라 소렌토로'를 작곡한 <에르네수토 데 쿠르티스 형제>1935년경에 <도메니코 푸르노>라는 이탈리아 시인의 시에 곡을 만들었고, 테너가수가 '질리(B. Gigli)'

처음 불렀다.

 

 

 

파일:GigliGioconda1914.jpg

 

 

 

20세기 최고의 테너로 불린 엔리코 카루소의 시대가 저물 즈음, 그러니까 1920년을 전후해 이탈리아 오페라의 차세대 주자들이 한꺼번에 국제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오늘날까지 역사적 테너로 손꼽히는 명가수들이 조반니 마르티넬리, 아우렐리아노 페르틸레, 티토 스키파,

베냐미노 질리, 자코모 라우리-볼피의 오인방이다. 나는 이들을 장난스런 표현으로 '오대천왕(五大天王)'이라 부르곤 한다.

 

그렇다면 오대천왕의 '왕중왕'은 누구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베냐미노 질리다. 한때 '드라마티코(dramatico)는

마르티넬리, 리리코(lirico)는 질리'라는 등식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질리는 연륜을 쌓으면서 《오텔로》를

제외한 마르티넬리의 거의 모든 영역까지 정복해버렸다.

 

또한 '음색의 아름다움은 스키파가 최고'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레퍼토리의 범위와 발성의 정통성면에서 질리보다 결코 나을 수는 없었다.

 

오페라 마니아 중 이 완벽한 테너에 대해 "질리가 곧 진리(眞理)다."라는 재치 있는 표현으로 찬미하는 이가 있는데,

질리가 이룩한 음악적 성과를 생각하면 과연 어울리는 말이다.

온갖 군웅이 할거한 오대천왕 시대를 제패한 최고의 테너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엔리코 카루소에서 베냐미노 질리,

그리고 나중에 다룰 유시 비욜링으로 이어지는 라인이야말로 테너의 골든 에이지인 1950년대를 성공적으로 준비한

황금 계보였다.

 

 

 

Beniamino Gigli at Franco-Corelli.com

 

가난한 '종루의 카나리아'에서 세계적 테너로

 

베냐미노 질리는 1890년 3월 20일 이탈리아의 레카나티(Recanati)에서 태어났다.

우연하게도 탄생일이 덴마크 출신의 헬덴테너(heldentenor) 라우리츠 멜히요르와 같다.

7세 때부터 지방 성당 합창단에서 노래했는데 '종루의 카나리아'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그 미성을 인정받았다.

 

종루(鐘樓)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원래 구두수선공이었던 부친이 대량 생산 시대의 도래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지자 성당 종치기로 전직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온 가족이 종탑 옆 단칸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질리는 인복(人福)이 무척 많았다. 노래 공부를 위해 17세 때 무작정 로마로 향했는데 아그네제 보누치(Agnese

 Bonucci)라는 선생이 그를 무료로 가르쳤다.

생활비를 위해 뛰어다닌 질리를 심부름꾼으로 부린 스파노키 백작부인(Countess Spanocchi)은 특별히 그에게

 매일 2시간씩 성악 레슨 시간을 배려해주기도 했다.

 

부인은 질리가 징집 영장을 받자 델피노 대령(Colonel Delfino)이란 군인을 소개해주었고, 대령은 질리를 통신병으로 빼내 성악을 계속하게끔 도와주며 음악원에서 제대로 배우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덕분에 질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성악가 중 드물게 명문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1914년 졸업 연주회에서도 최고상을 받았고, 파르마에서 열린 국제 콩쿠르에서도 우승했는데 당대의 명테너

알레산드로 본치(Alessandro Bonci)로부터 "이제 우리는 진정한 테너를 찾았다."는 격찬을 받았다.

이런 행운에 힘입어 바로 그해에 베니스 근교의 로비고(Rovigo)에서 《라 조콘다》의 엔초 그리말도 역으로 정식

데뷔했다.

 

적어도 오페라의 영역에서 카루소와 질리의 세대는 정말이지 완벽한 혜택을 입은 행운아들이다.

보이토,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푸치니, 칠레아, 조르다노, 몬테메치, 볼프-페라리, 잔도나이 등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의 마지막 전성기를 꽃피운 수많은 작곡가들은 물론 토스카니니, 세라핀 등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명지휘자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질리는 처음에는 세라핀, 그 다음에는 토스카니니로부터 인정을 받아 순탄한 가수 생활을 이어나갔는데, 특히 27년이나 연배 차이가 있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질리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후 수십 년간 절친한 친구 사이로 지냈다.

 

《아를의 여인》,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를 작곡한 칠레아와도 오랜 친분이 시작되었다. 푸치니는 신작 오페라 《제비》의 이탈리아 초연에서 질리의 풍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티토 스키파를 선택했지만, 일단 질리의

노래를 들어본 후에는 크게 만족해하면서 다음 로마 공연에 그를 캐스팅했다.

 

1918년은 질리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었다. EMI의 전신인 HMV와 빅터 그라모폰(Victor Gramophone)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가 질리에게 카루소의 레코드를 들려주었는데, 이것이 질리에게 경탄과 시샘이 뒤섞인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덕분에 가이스버그는 질리와 10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같은 해에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부격이었던 아리고 보이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에 그의 대표작 《메피스토펠레》를 긴급 편성했다.

 

질리는 이 오페라로 동가극장에 데뷔해 일대격찬을 얻어냈다.

이것이 영광의 정점은 아니었다. 당시 카루소가 장악하고 있어 다른 오페라 가수들은 군침만 흘려야 했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배인 줄리오 가티 카사차(Giulio Gatti Casazza)가 질리에게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1920년 메트와의 계약이 성사되었는데, 메트에서의 첫 무대 역시 《메피스토펠레》였다. 질리는 무려 34번의 커튼콜을 기록했다. 운도 따랐다. 난공불락의 카루소가 늑막염 때문에 메트 무대에 서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카루소는 자기 대신 성공을 거둔 한참 후배에게 축전을 보냈다. 게다가 이듬해 8월, 카루소는 나폴리 요양 중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메트로폴리탄의 간판 테너라는 영광스런 지위는 질리와 조반니 마르티넬리가 양분하게 되었다.

 

 

 

 

 

 



 

질리 가 곧 진리다!

베냐미노 질리는 성악적으로 완벽한 테너로 불린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톤을 지녔으며 특히 그의 메차 보체(mezza voce, 약음의 테크닉)는 역사상 최고의 절륜(絶倫)

이라 할 만하다.

 

의도적인 달콤한 음색이나 흐느끼는 듯한 표현 방식으로 통속성을 가미하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풍부한 성량과 극적인 힘을 드러내며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면을 충분히 살리기도 한다.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부터 베르디의 중후한 역, 베리즈모 오페라의 처절한 배역까지 온갖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너무나 편안하고 안정된 발성은 어떤 음역에서도 빛나는 음색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또한 곡에 대한 접근 방식도 다양했다. 면밀하게 가사를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는 짐짓 서두르는 모습으로, 어떤 때는 자유자재로 늘어지는 방식을 취하면서 나름대로 대가만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어느새 관객들은 카루소의 부재를 의식하거나 탓할 필요가 없었다.

 

질리는 1920년부터 12년간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영어는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걸 트집 잡는 사람도 없었고, 카루소에 비해 감정이 실린 연기력에서 크게

열세였지만 그럭저럭 넘어갔다.

온통 열광뿐이었다.

 

그러나 1932년에 이르자 메트와의 계약이 갑자기 종료되었다.

대공황을 이유로 극장측이 일률적으로 모든 가수에게 출연료 25퍼센트 삭감을 원했으나 질리의 자존심이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유럽 무대에 복귀했으며 토스카니니의 절대적 총애를 받은 아우렐리아노 페르틸레가 버티고 있던 라 스칼라보다 베를린과 런던을 주무대로 삼아 활동했다.

 

이 시기의 흥미로운 사실은 질리가 여러 편의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만 해도 독일에서 11편, 이탈리아에서 6편을 찍었으니 마치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었다.

질리는 1939년 1월 메트로폴리탄에 돌아왔으며 얼마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는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회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코 의례적인 박수는 아니었다.

1940년 이후 녹음한 질리의 음성을 들어보라.

50세가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소릿결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한층 힘이 더해져 그를 감싼 원숙한 풍모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1940년대 이후 질리의 극장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는 별로 없다.

라이벌인 '오대천왕'의 다른 테너들도 대략 1940년 이전에 전성기를 마쳤다.

대신 1938년 메트에 데뷔했던 스웨덴의 유시 비욜링이 조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45년 메트에 컴백했는데,

이탈리아 테너가 아니면서도 오대천왕을 제치고 새롭게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적어도 레코딩에 있어서 만큼은 질리의 황금기가 계속되었다.

비록 모노지만 기술적으로 큰 향상이 이루어진 시기였던 1918년부터 36년간 무려 370여 차례에 달하는 레코딩

 작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특히 딸인 리나 질리(Rina Gigli, 1916∼2000)가 훌륭한 소프라노로 성장한 덕에 1943년 이후부터 함께 공연하거나 레코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인데도 공연할 때는 보통 연인 관계로 등장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광경이었으리라. 질리의 마지막 녹음은 1954년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순회 공연을 계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별 공연은 1955년이었고 2년 뒤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나는 부친이 세상을 뜬 다음에도 활동을 계속했고

음반도 제법 남겼다.

리나의 바이오그래피에서 한국 공연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1971년에 은퇴했으니 그 이전일 것이다.

 

질리는 카루소의 후계자로 불리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제2의 카루소가 아니라 질리 그 자체로서

평가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의 큰 흐름 속에서, 또 청중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카루소의 미덕을 여러 형태로 계승했음은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녹음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에 절대적 인기를 누린 데 힘입어 제대로 된 오페라 전곡 음반을 풍부하게

 남긴 최초의 명테너에 속한다.

한때 그 소중한 자료들은 스테레오 녹음에 밀려 거의 사라졌지만 최근에 다시 복각되는 추세다.

적어도 12종 이상의 전곡 오페라를 현재 구할 수 있다.

 

 

 

 

우리는 테너를 찾았다’.
1914년 파르마 국제 콩쿨의 결과에 따라 이제 갓 24살이 된 베냐미노 질리에게 그 1등상이 수여되자
마침내 유럽은 진정한 테너를 갖을 수 있었다.
카루소가 전성기를 미국에서 보내는 동안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뛰어난 테너를 이태리는 필요로 했던 것이다.

 

구두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질리는 로마의 유서깊은 산타 세실리아 리세오 음악원에서 장학생으로 음악공부를 했다.
파르마 콩쿨의 우승은 질리로 하여금 몇 년안에 오페라 세계의 정상에 진입하도록 하는 직선계단 역할을 했다.
1914년 11월 5일 이태리 로비고에서 라 지오코다 La Gioconda의 엔조역으로 프로 데뷔를 한 이래
이태리의 모든 극장이 그의 출연을 원했다.


나폴리(1915년 메피스토펠레의 파우스트, Faust in Mefistofele), 로마(1917년 마스카니의 새로운 로도레타의

플라멘, Flammen in Mascagni's new Lodoletta), 밀라노(1918년 토스카니니의 지휘하래 다시한번 파우스트)

그리고 1919년 처음의 투어를 남미로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 카루소에게는 황혼의 커튼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성탄전일, 질리의 데뷔 4주만에 카루소는 마지막 공연을 하고 있었고 공연 직후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 다음해 5월에 이태리로 돌아가 사망했다.


카루소의 사망이후 질리에게 드리워졌을 법한 카루소의 그림자 영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위대한 테너의 낭만적 역할을 잇는다는 부담감 없이, 질리는 몇 절기안에 스타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다.

 

질리의 뉴욕 데뷔(보이토Boito의 메피스토펠레)에 대해 미국인들의 입장을 대변한 막스 스미스(Max Smith)는 “질리의 목소리는 특별한 따스함과 달콤함을 지닌 서정적 테너의 바로 그것이며, 힘과 중량감이 느껴진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음색자체의 아름다움이 주목할 만하다.

 

낮은 음에서의 탄력과, 정교함도 매력이지만 고음역에서 일반적으로 차분한 감에 비춰볼때 힘차게 내질러야 할 때의 관능미는 특히 두드러진다. 그의 목소리 자체는 오히려 뉴욕 시민들이 일찍이 카루소에서 듣던 드라마틱한 강렬함이나, 감각적인 생동감이나 표현력등에서 오히려 더 두드러진다"라고 평했다.


스미스의 이러한 인지적인 요약은 미국에서의 그의 활동과 최소한 그 이후의 십여년간의 질리의 목소리의 성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러한 이 평가는 지오바니 마르티넬리(Giovanni Martinelli)나 후의 지아코모 라우리-볼피

(Giacomo Lauri-Volpi)의 굳건한 보이스나 나중의 메트로폴리탄 가수들이 터득한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고음역과

날카로운 음의 선정력은 질리가 아니였으면 전수되지 않았을 테크닉이었다.


질리는 미국에서 상륙하여 자신의 레파투와속에서 19개의 배역을 소화했고,
메트로폴리탄 시즌에는 더 많은 역을 소화해야만 했다.
질리는 1932년 한 언론과의 시비로 인해 간간한 두통과 이어지는 우울증으로 메트로폴리탄을 떠났고 만다.

질리는 1939년에 몇 차례의 공연 때문에 다시 컴백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이태리로 돌아가 1940년대의 자신의 경력을 쌓는다.
이 시기에 질리는 주로 자신을 주역으로 하는 전곡 오페라 레코딩에 참여했다.
질리를 잃었던 미국인들은 1955년에야 그의 마지막 작별 공연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질리는 자신을 ‘국민 가수’라 여겼다.
그는 확실한 열정으로 대다수의 대중을 즐겁게 하려고 애썼고,
실제로 그들을 위해 많은 연가와 대중적인 레파토와를 자신의 공연과 음반에 담았다.


이와 관련하여 질리의 목소리가 이 세기에 어느누구나가 인정하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중 하나였다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그의 테크닉이 60대에서도 확실하게 증명되는 강인한 체력에 기인한다.


그가 연기할 때 항상 좋은 면만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 그의 연기력은 그의 노래에 비해서 조금은 약하다는 평가 -

그가 청중과의 교감에서는 독특한 기질을 발휘한데서 그의 은막으로의 진출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질리는 다른 여타의 테너들에 비해 레코딩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편으로
1918년을 시작으로 40여년 동안 총 370여차례의 레코딩을 남겼다.


레코딩의 잦은 녹음은 그의 인기 비결을 가늠케 하는데 동시에 영화출연에서도 1935년부터 41년사이 그의 15편의 영화중에서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최고의 전성기 시절을 보냈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 선보이는 두장의 앨범역시 수많은 질리의 녹음중에서 이태리와 독일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전성기의

 질리의 모습을 엿볼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젊은 시절의 영광을 담은 최고의 몇 안남은 녹음만을 뒤로 한 채 그의 전설은 우리시대의 감각에 호소하는

마지막 아름다운 미성의 테너는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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