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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Jose Carreras "En Aranjuez con tu Amor, Hymne a l'amour (사랑의 찬가)

 

 

 

 

 

 

 

 

 

 

 

 

 

쓰리 테너 콘서트.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Jose Carreras sings a version of 'En Aranjuez contu Amor' in the studio;
The Angel of Orchestra of London conducted by Micheal Reed;

 

 

 

 
 
 
 
 
 
 

En Aranjuez con tu 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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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anjuez, un lugar de ensuenos y de amor,
    donde un rumor de fuentes de cristal
    en el jardin parece hablar
    en voz baja a las rosas
     
    아랑훼즈, 사랑과 꿈의 장소
    정원에서 놀고 있는
    크리스탈 분수가
    장미에게 낮게 속삭이는 곳

    Aranjuez, hoy las hojas secas sin color
    que barre el viento
    son recuerdos del romance
    que una vez juntos empezamos tu y yo
    y sin razon olvidamos

    아랑훼즈, 바싹 마르고 색 바랜 잎사귀들이
    이제 바람에 휩쓸려 나간..
    그대와 내게 한때 시작한 �
    아무 이유없이 잊혀진 로망스의 기억들..

    Quiza ese amor escondido este
    en un atardecer
    en la brisa o en la flor
    esperando tu regreso

    아마도 그 사랑은 여명의 그늘에
    산들 바람에 혹은 꽃 속에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숨어 있나보다

    Aranjuez, hoy las hojas secas sin color, etc
    Aranjuez, amor
    tu y yo

    아랑훼즈, 바싹 마르고 색 바랜 잎사귀들이
    아랑훼즈, 내사랑
    그대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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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mne A L'Amour (사랑의  찬가)


Le ciel bleu sur nous peut s'effrondrer
Et la terre peut bien s'ecrouler.
Peu m'import!!!!!!!!!e si tu m'aimes.
Je me fous du monde entier.

Tant que l'amour inondera mes matins,
Tant que mon corps fremira sous tes mains,
Peu m'import!!!!!!!!!ent les grands problemes,
Mon amour, puisque tu m'aimes...

J'irais jusqu'au bout du monde.
Je me ferais teindre en blonde
Si tu me le demandais...
J'irais decrocher la lune.

 

J'irais voler la fortune Si tu me le demandais...
Je renierais ma patrie. Je renierais mes amis
Si tu me le demandais... On peut bien rire
de moi, Je ferais n'import!!!!!!!!!e quoi
Si tu me le demandais...

Si un jour, la vie t'arrache a moi,
Si tu meurs, que tu sois loin de moi,
Peu m'import!!!!!!!!!e, si tu m'aimes Car moi, je mourrai aussi...

Nous aurons pour nous l'eternite Dans le bleu de toute l'immensite.
Dans le ciel, plus de problemes. Mon amour, crois-tu qu'on s'aime ?......
Dieu reunit ceux qui s'aiment !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쳐흐르고
내 몸이 당신의 손 아래서 떨고있는 한
세상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의 사랑이 있는 한
내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나를 원하신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금발로 머리를 물들이기라도 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하늘의 달을 따러, 보물을 훔치러 가겠어요.
 
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겠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는다 해도
나는 무엇이건 해 내겠어요.
 
만약 어느날 갑자기
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고 해도
만약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 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르름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에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속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호세 카레라스는 6세 때 마리오 란자가 출연한 이탈리아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전기영화 <위대한 카루소>를 보고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아리아를 배우고 연습했다.

 

2년 후 스페인 국립 라디오방송에 출연해서 베르디의 <리골레토>에 나오는 아리아 ‘여자의 마음’을 부름으로써

 대중들 앞에서 처음 노래를 하게 된다.

 

카레라스는 열 한 살 때 바르셀로나의 유명 오페라 하우스인 리세우 대극장에서 마누엘 드 파야의 <페드로 주인의

 인형극>에 출연하면서 오페라 무대에 첫 데뷔를 했다.

 카레라스는 소년 해설자 엘 트루지만 역을 맡았고, 이 역할은 당시 보이 소프라노가 소화하기엔 너무 어려워서 주로

 성인 메조 소프라노들이 부르던 배역이었다.
 
카레라스는 처음엔 프란시스코 푸이(Francisco Puig)로부터 성악을 배웠고, 나중엔 후안 루악스(Juan Ruax)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카레라스는 루악스를 ‘나의 예술적인 아버지’라고 이야기한다.

변성기가 지나면서 그는 성악 공부를 계속하며 오페라 무대의 작은 배역들을 맡아 활동하던 중 당대의 유명 성악가

 몽세라 카바예의 눈에 띄게 된다.

 카바예는 이 젊은 테너를 자신의 매니지먼트사에 추천했고, 카레라스는 매니지먼트에 발탁되면서 몽세라 카바예가

 출연하기로 되어 있던 도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서 카바예의 상대역인 제나로 역을 맡게 된다.

 

이로써 카레라스는 명실상부한 테너로서의 첫 주역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로도 몽세라 카바예는 카레라스의 ‘예술적인 어머니’ 역할을 하며 그를 이끌어주었다.

두 사람은 많은 공연을 함께 했고, 15개가 넘는 오페라 레코딩에서 함께 주역을 맡았다.

카레라스는 1972년에 미국 무대에 데뷔했는데 뉴욕 시티 오페라가 공연한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핑커톤 역을

 맡았다.

또한 74년에는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영국 코벤트 가든에 데뷔했고, 빈 국립 오페라 무대에는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으로 데뷔했다.

 

같은 해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토스카>의 카바라도시로 출연했고, 75년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가면무도회>의 리카르도 역으로 출연하면서 세계 4대 주요 오페라 극장 무대를 차례로 밟았다

 

 

많은 오페라 가수들이 겨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쯤인 스물 여덟 살 때까지 카레라스는 24개의 서로 다른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고, 세계 4대 오페라 하우스에 모두 데뷔하는 기록을 세웠다. 1976년에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르디의 <레퀴엠>에 출연해 명성을 더했으며, 이어서 레너드 번스타인, 주빈 메타 등

 

당대의 명지휘자들과 함께 <돈 카를로스> <라 보엠> <운명의 힘>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82년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와 함께 비제의

<카르멘>을 공연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7년 카레라스는 파리에서 <라 보엠> 영상촬영을 하다가 백혈병으로 쓰러졌다.

살아날 확률이 10%도 안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완쾌하고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ㆍ폐회식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1990년 로마 월드컵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세계 3대 테너 콘서트’를 시작해 전세계 수억 인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카레라스는 50개가 넘는 오페라 전곡 레코딩을 비롯해서 수많은 콘서트 음반, 오페라 아리아 음반, 다양한 스타일의

크로스 오버 음반, 비디오 등을 녹음했으며, 비디오로 제작된 그의 전기 ‘라이프 스토리(A Life Story)’는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에 그는 오페라 출연을 1년에 한두 작품으로 줄이고, 콘서트와 리사이틀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상당 부분을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The Jose Carreras International

Leukeamia Foundation)’에 쓰고 있다.

월드컵 때의 ‘쓰리 테너’ 공연, 200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정책 철폐 5주년 기념 공연, 6?25 전쟁 발발 50주년

2001년 한국공연 등 세계 각국을 무대로 규모 큰 공연들과 독창회 등을 의욕적으로 펼치고 있다. 유시 비욜링,

 주제페 디 스테파노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음색과 섬세한 표현으로 세계 최정상의 리릭 테너로 손꼽히며, 파바로티, 도밍고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리고 있다.

 

(펌)

 

 

 

 

 

 

 

 

 

 

어려서부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다

 

 

 

194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호세 카레라스는 전설적인 ‘쓰리 테너(Three Tenors)’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족들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6살 때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카루소에 대한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나오는 모든 아리아들을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8살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스페인 국영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베르디 〈리골레토〉에 나오는

 “La donna è mobile”를 불렀다.

이것은 그가 대중 앞에서 한 최초의 공연이었다.

 

 그는 11살에 마뉴엘 드 파야의 오페라에 나오는 보이 소프라노 역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데뷔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역은 소년들이 부르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성인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카레라스는 어린 나이에 이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한다.

 

변성기를 지난 이후 그는 프란치스코 푸이그(Jaime Francisco Puig)와 후안 루악스(Juan Ruax)와 성악 공부를

 하였는데, 카레라스는 루악스를 자신의 ‘예술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였다.

 카레라스는 루악스의 권유에 못 이겨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 오디션을 통해 벨리니 〈노르마〉의 플라비오

 역을 맡게 됨으로써,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수많은 연주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 중에 그 당시 유명했던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e)를 알게 되었다.

카바예는 카레라스의 목소리에 반해서 그를 자신의 제작사로 영입하는데, 곧이어 카바예의 상대역으로 도니체티의

 〈루크레치아 보르기아〉에 제나로 역으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호세 카레라스와 몽세라 카바예

 

이미 유명했던 카바예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자신의 제작사로 영입한다

 

         

 

계속되는 공연과 비난, 뒤늦게 알게 된 병

 

 

이후 카레라스는 1972년에 미국에, 1974년 영국 코벤트 가든에 데뷔하였으며, 뒤이어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과 협연하였으며, 빈 국립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 유명 오페라단에 줄줄이 데뷔하게 되었다.

 

그는 28살의 나이에 이미 유럽과 미국의 일류 오페라단에서 24개의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이런 바쁜 일정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비평가들은 종종 그의 목소리가 긴장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그가 너무 많은 출연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피로함은 사실은 백혈병이 원인이었는데, 카레라스 자신도 1987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자신이 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쓰리 테너에 힘입어 백혈병을 이겨 내다 

 

백혈병과 투병하는 동안 그는 ‘쓰리 테너’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원래 카레라스는 도밍고(Plácido Domingo),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와 함께 세계 오페라단의 왕좌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이 기간을 통해 그들은 진정한 우정을 쌓게 되었다.

 

 그들은 카레라스가 투병하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아끼지 않고 후원을 해주었으며, 실제로 그들의 첫 번째 연주회는

당시 성립된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José Carreras Leukaemia Foundation)을 위한 기금모음 행사였다.

이 행사는 수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았으며, 세계적으로 방송됨으로써 엄청난 금전적인 수입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이 연주실황을 담은 음반과 영상물은 날게 달린 듯이 팔려 나갔다.

 

카레라스는 수많은 오페라 음반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실내악,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장르의 음반을 남겼다.

그의 백혈병 투병기를 담고 있는 자서전적인 영상물인 〈A Life Story〉는 미국의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8년 백혈병에서 완전히 회복한 카레라스는 현재 자신이 세운 백혈병 재단을 운영하며, 수많은 자선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그는 이 재단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도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90년대를 화려하게 누빈 3테너의 가운데 자리에 항상 모습을 보인 '천상의 목소리' 호세 카레라스 (1946~ 스페인).

 30대 초에 디 스테파노의 재래(再來)라는 평가를 받은 깔끔한 미성의 전형적인 리리코 테너.

 

전성기인 41세때 치명적인 백혈병으로 쓰러지지만 재기에 성공, 월드컵 3테너 공연을 거듭하며 부와 명성을 거머쥔

 불패신화 - 그가 1990년 로마 카라칼라 목욕장 유적지에서 부른 노래 'Core 'Ngrato' (Salvatore Cardillo 곡

 1874~1947)는 '무정한 마음'(薄情)으로도 알려진 100년이 다 되어가는 나폴레나타이다.

 

카타리 카타리 (Catari Catari)로 시작되는 애절하고 드라마틱한 이 명곡은 시대를 넘어 모든 이의 심금을 울려주면서 많은 남성 성악가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1951년 이탈리아 영화 '순애' (Core 'Ngrato)의 주제곡으로도 불려졌다

 

 

1900 년대 초기에, 이탈리에서는 미국으로 대량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뉴욕으로 떠나는 이탈리아 이민자들 중에는 작곡가 살바토레 카르딜로(S.Cardillo)와 이민자들의 고통을

 고발하는 주간지를 발행하는  출판인이자 시인이었던 리카르도 코르디페로(R.Cordiferro)도 있었는데, 그들은

1911년에 "무정한 마음 (Core ’ngrato)"이란 노래를 함께 발표했다.

 

 이 노래는 , “카타리, 카타리, 왜 이렇게 쓰디쓴 말을 하는지….”라고 시작하는데, ‘카타리’는 카타리나(Catarina)라는 이름을 나폴리식으로 축약해버린 것이다.
카르딜로는 나폴리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하던 중 이 노래를 발표했지만 
저속하다는 평을 받자 고향 땅에서는 유명해질 수 없음을 깨닫고 1903년 미국 이민길에 올랐던 것이다.

 

가슴을 찡하게 울려주는 "무정한 마음"은 뉴욕에서 다시 태어나 이민자들 사이에 최고 인기곡으로 자리잡게 되자 곧바로 나폴리로 ‘역수출’되기에 이르렀다.
카르딜로는 연주가 및 영화 음악가로 이름이 있었는데 그의 노래는 엔리코 카루소와 같은 대가들이 즐겨 불렀다. 

 

카르딜로는 죽기1년 전에 여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래 이탈리아에서는 내가 작곡한 ‘저속한 노래’를

 모두 즐겨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노래로 유명해졌다고? 나는 말야 평생 진정한 음악만을 써왔을 뿐이야.”
이 글을 쓰면서 작곡가 카르딜로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고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50권이 넘는 방대한 ‘이탈리아인

 인명 대백과사전’을 샅샅이 뒤져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은 아예 없으니, 카르딜로는 고인이 되어서도 후세 사람들의 ‘무정한 마음’에 섭섭해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의 노래는 이제 테너라면 한 번쯤 속 시원하게 불러보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음악’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17회 호세 카레라스 갈라 쇼 무대 리허설 중인 호세 카레라스(오른쪽)

백혈병에서 회복한 그는 매년 백혈병 환자를 위한 자선모금행사(콘서트)를 통해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시금 베풀고 있다.

 

 

 

 

 

뮌헨에서 열린 20주년 ‘호세 카레라스 재단’ 기념행사에 참석한 모습(2015) 

 

                        

 

 

호세 카레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