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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Auld Lang Syne

 

 

 

 

 

 

 

 

 

 

 

 

 

 

 

 

 

 

 

 

 

 

 


Auld lang syne(올드랭 사인)


 

 

 

 

 

 

 

스코틀랜드의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

 

 

 

 

 

 

Auld Lang Syne
  Robert Burns

 
  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never brought to mind?
  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auld lang syne!
 
  For auld lang sy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Well tak a cup okindness yet,
  For auld lang syne.
 
  And surely yell be your pint stowp!
  And surely Ill be mine!
  And well tak a cup okindness yet,
  For auld lang syne.
 
  We twa hae run about the braes,
  And poud the gowan fine;
  But weve wanderd mony a weary fit,
  Sinauld lang syne.
 
  We twa hae paidld in the burn,
  Frae morning sun till dine;
  But seas between us braid hae roard
  Sinauld lang syne.
 
  Chorus
 
  And theres a hand, my trusty fiere!
  And gies a hand othine!
  And well tak a right gude-willie waught,
  For auld lang syne.

 




[패스커굴라=AP/뉴시스]성탄절인 25(현지시간) 미 미시시피주 패스커굴라 해변에

 해가 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2019.12.26.

 

 


올드사인

올드 랭 사인은 스코틀랜드의 전통민요이다.
1788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번스가 작사했고 영국의 작곡가 윌리엄 실드가 그의 오페라 로시나의 서곡에 이 곡의
 멜로디를 가져다 쓴 것이 최초의 레코딩으로 알려져 있다.
 
올드 랭 사인은 영어로는 Old rong since오래 전부터라는 뜻이 된다.
전래돼 온 원곡의 멜로디는 빠른 춤곡이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 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네.하면서 다시 만 날 수 있게 되기를 빌며
헤어질 때 부르고 있다.

3·1운동 당시 대한 독립 만세!구호와 함께 가장 많이 울려 퍼진 노래는 애국가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가사는 지금과 거의 같지만 선율은 달랐다. 스코틀랜드의 민요 겸 찬송가인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붙여 만든 노래이다. 애국가3·1운동 때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한제국(1897~1910) 당시 이미 수 많은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가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애국가100여 편에 이르며 실제 악보가 있는 것도 수십 편에 달한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대한제국은 애국가의 나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듯하다.
그런데 수 많은 애국가중에서 우리 민족은 유난히 대한제국 시대인 1907년에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라는 찬송가집에 수록된 애국가를 많이 불렀다. 바로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를 붙여 만든 애국가.

누가 정한 것도 아니고 누가 부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우리 민족의 국가(國歌)처럼 불렀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한마음이 돼 3·1운동의 현장에서도 이 애국가를 목 놓아 불렀던 것이다.
 실제로 3·1운동 전인 1914년 만주의 민족학교에서 발간한 음악 교과서에 이 노래가 국가(國歌)라는 제목으로
수록돼 있다.
 
이 노래가 여러 애국가중 하나가 아니라 국가처럼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3·1운동의 현장에서도 단순히 하나의 노래가 아니라 국가로 불렸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가 범 민족적으로 사랑을 받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애국가를 새로 만들지 않고 이 노래를 임시정부의
 국가처럼 활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노래는 더욱 더 사랑을 받게 되는데 우리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집약시킬 수 있는 정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곧 잘 쓰이곤 한다.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지금도 이 노래를 대한민국 국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한 민족의 노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 해가 떠나간다. 눈 오는 연말 겨울날 올드 랭 사인을 흥얼댔던 기억이 난다.
 애환도 있었을 테고 안타까운 일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정다운 친구끼리 막걸리 한잔 하면서 조용히 올드 랭 사인을 부르며 송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인생은 그리움이니까.
 
 
 
 좋은 연말이 되기를 기대하며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저작권자 © 제주일보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가 출연한 영화 애수의 주제곡으로 올드 랭 사인이 쓰였다.

 
 

  스코틀랜드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1759~1796)가 쓴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은 스코트어로

오랜 옛날부터(영어 old long since)라는 뜻이다.

영미권에서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부르는 축가로 불렸다.

 

 한국에서는 옛날’ ‘석별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1900년대 초 애국가를 이 이별 곡조에 붙여 민중이 불렀다. 3·1운동 때도 올드 랭 사인멜로디로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1948년 대통령령()에 따라 안익태가 작곡한 한국환상곡이 애국가 멜로디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올드 랭 사인

이 애국가의 멜로디로 사용되었다.
 
  1953년 무렵 영화 애수가 상영되면서 이 노래가 다시 소개되었고, 이후 졸업식 환송곡으로 많이 불렸다.
 비공식 기록이지만 올드 랭 사인을 최초 완역(完譯)한 이가 한흑구(韓黑鷗).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親日)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를 넘어 시 한 줄에도 나라를

 생각했던 시인이었다.

 

올해 들어 시단(詩壇)에서 민족시인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한명수씨는 최근 그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흑구전집 1: 시전집(마중문학사 )을 펴냈다.

 

 

 

 

 

 

 

 


 

 

 



한해를 보내며 되돌아보는 얼룩진 뒤안길

 

 

 

달랑 한 장 남은 12월 달력을 보니 생각나는 게 정말로 많다.
먼저 올해 새날 아침에 경건하게 빈 소원이 먼저 떠오른다.
 
본란에서 이태극 시조시인의 ‘올해는 복 많으라 뜻대로 살고지라/ 남북에 나뉜 형제 얼싸안고 일어서라…’ 영신부
(迎新賦) 첫 구절을 인용하면서 국민 개인과 이웃, 국가․사회 모두가 강녕(康寧)을 누리는 것을 빌었던바, 한해가
 지나는 세밑에서 되돌아보니 그 간절했던 소원은 깡그리 부도가 났다.
 
 그 모든 원인이 국민운동장이라 할 수 있는 정치의 마당에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인들의 구태정치로 올 한해가 얼룩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치가 국민을 무시한 탓이다. 오늘날 민주주의하에서 대의(代議)제도가 성행한 이후 선거에서 뽑힌 소위
 선량(善良)들이 그 주인인 국민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고, 최선을 다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단연코 노(NO)인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가 더욱 그렇다.
 
기득권에 맛들인 소수 정치인들이 정국을 좌지우지하면서 국민이익보다는 자신과 자기 정당의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국민들에게 불편을 주었던 2019년이라 단정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 머슴임을 자처해온 정치인 스스로 주인을 업신여기는 이율배반이 우리사회에서는 흔한 일이니 새삼 놀란 일은 아니다.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발전된 나라에서도 비일비재했다. 우리에게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명언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일찍이 정치인들에 대해 형편없이 평가했다.
 
그는 민주주의, 대의정치제도가 잘 발달된 영국에 대해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일 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버린다”고 설파한 적이 있는바, 이 말은 선량들의 이중성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올해는 우리사회에서 못난 정치로 인해 나라안이 시끄러웠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워진 마당에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국민이익을 위해 나서줘야 하건만 정치권에서는 온통 내년 총선에 매달려 있다.
 
 국민들이 유권자의 표심에 따른 좋은 선거제도를 마련해 선진정치를 실현해달라고 해도 자기 밥그릇을 뺏기지 않으려 안달하고 있으니 선거제도에서 기형물로 변질될 수 있는 ‘연동형 캡’이 나오고, 느닷없이 ‘비례한국당’ 창당설까지
쏟아지는 등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나오고 12월 임시국회에서도 갈등을 보이니 다른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는 연말이다.


정치권이 엉망진창이면 정부라도 정신 차려 각종 정책을 잘 계획하고 추진해야 하건만 정치논란에 휩싸여 납작 엎드려 눈치만 살핀다. 복지부동이 아니라 복지안동(伏地眼動)이다. 문재인 정부 임기의 반이 더 지났지만 제대로 된 게 없다.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초에 기대를 걸었던 남북관계 개선도 지금은 악화일로 상태다.
그러면 국민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정책이나 주택정책에서 잘 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국민들에게, 수요자들에게 부담만 주고 있는 실정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부터 교육 개혁에 팔을 걷어붙이겠노라 나섰지만 개혁된 게 별로 없는데다가, 특히 조국 정국에서 불거진 특혜 대학입시 의혹 등 우리사회의 불공정성 문제는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정책적 불신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주택문제 등 부동산 대책은 수요자들을 더 피곤하게 만들며 가진 자들의 부(富) 증가 수단으로 역이용당하는 우스운
꼴이 반복되고 있다.
 ‘부동산문제는 해결하겠다’ 장담했던 문재인 정부 들어 부동산 대책이 18번이나 나왔지만 대책이 나올 때 그 때만 잠깐이지 시간이 지나면 유야무야(有耶無耶)되고 만다.
 
오히려 ‘풍선효과’가 확산되면서 집 없는 사람들이 더 어려움에 처해지고 서울지역의 주택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상승
하는 요인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지난 12월초에 분양된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 청약에서 78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보였는바, 불과 1년 반 사이에
 청약률이 무려 7배나 치솟은 과열 현상이 나타났으니 서민들은 고달프다.

아이들 장래와 직결되는 교육문제, 청·중년들의 최대 현안인 주택문제에 대한 정부정책이 종합적 처방이 아니라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임시 처방하는 땜질식이다. 또 청년실업 문제 해결이나 고용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경제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삶이 퍅퍅한데, 우리사회에서는 정치적 혼란에다가 한반도 불안감마저 겹치고
있으니 한 마디로 내우외환이다.

비록 우리사회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국민을 위해 정부가 선정을 펼치고 정치권이 희망을 준다면 그 난관은 쉽게 헤쳐 나갈 수 있겠지만 우리 앞에 닥쳐진 현실은 그게 아니다.
 이념으로 갈라지고 빈부는 심화되며 난국을 극복할 지도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수범을 보여야 할 고위층 인사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숫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류였으니 정초에 가졌던 기대가 사라지고 갈등과 혼란만 부추긴 2019년이었으니 많은 국민들이 고달프
 힘든 한해였다.
 얼룩진 세월의 뒤안길을 되돌아보는 마음조차 어두운 한해 끝 무렵이다.




[정라곤의 아침평론]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응답하라, 2019

 

 

 

 

 

 

 어느덧 세밑이다.

그러나 한 해를 마감하는 푸근한 성취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렵게 지내 왔다는 푸념소리뿐이다.

 

움츠러든 사회 분위기로 미뤄 단순한 엄살만은 아닐 것이다.

예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겠으나 올해는 유독 더한 것 같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도 그 흔한 징글벨 캐럴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초겨울치고 바람이 그렇게 차가운 것도 아니련만 가슴속은 허전하고 썰렁하기만 하다.

한 해를 지내는 동안 우리 구성원들이 겪은 혼란과 고통은 작지 않았다.

무엇보다 권력층 주변 인물들의 위선적인 처신이 사회 분열을 초래했다.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원칙과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행태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러고도 자기들끼리 서로 감싸고 두둔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분노와 절망감을 토해냈다.

정치 지도자들이 민심을 다독이기보다 내 편, 네 편을 부추긴 꼴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권력 핵심부에서부터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 송두리째 깨진 것이다.

 

지난 정권의 적폐를 도려내겠다고 하면서도 비슷한 적폐를 쌓아가는 흔적도 드러나고 있다. 스스로 권력 위에 군림하려는 태세이니, 이른바 정의의 불평등이다. 주말마다 도심을 메운 군중들이 이게 나라냐라고 아우성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먹고사는 문제로 눈길을 돌린다면 더욱 심각하다.

 조만간 살아날 것이라던 경기가 계속 내리막길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우선 목표로 설정한 일자리 창출에서부터

어긋나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연달아 문을 닫아거는 판국이니 대학을 졸업하고도 번들번들 놀고 지내는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는 어렵다. 기존 40~50대 직장인들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깨띠를 두르고 동네 공터에서 시간을 때우며 보조금을 받는 노인들만 예외에 속한다.

사회적 활력이 꺾여버린 것이 그런 결과다.

열심히만 노력하면 큰 부자는 못 될지언정 자기 앞가림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져 버린 탓이다.

정부가 대주는 각종 지원금을 기웃거리는 약삭빠른 부류만 늘어났을 뿐이다

 

.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통에 내집마련의 꿈에서 멀어진 서민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집이 있는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세금 걱정이다.

이래저래 연말이 심드렁할 수밖에 없다.

정책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태도가 더 우려스럽다.

부동산 해법만이 아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기업들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으나 수수료 부담을 덜어주는 제로페이나 일자리안정자금으로 해결하겠다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나마 주52시간제 확대 시행을 앞두고 유예기간을 설정한 조치에 겨우 한숨을 돌리는 분위기다.

 내년에는 노인 일자리를 더 늘리겠다는 방안도 다르지 않다.

기본 취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계속 늘어나는 재원을 어떻게 충당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이 들기 마련이다.

 

이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의 앞날을 장담하기도 쉽지가 않다.

 5년 뒤, 10년 뒤라고 저절로 형편이 나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내년에도 수많은 현안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국무총리나 장관이 바뀐다고 한들 처방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총선이 실시돼 국회의원들이 교체된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니다.

지금껏 온갖 약속과 다짐이 이어졌으면서도 실현된 것이 거의 없는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사람보다는 국가 운영의 틀과 제도를 먼저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틈새가 새는 곳마다 세금을 쏟아부어 땜질하는 것이 고작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다시금 생각한다.

세월이 흐른 다음 우리 역사는 지난 한 해를 또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미 이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연말의 허공을 떠돌고 있다.

 

 

응답하라, 2019년의 세월이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