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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Fritz Wunderlich 슈베르트 가곡 모음

 


 

 

 

Wunderlich

 

1930~1966

독일의 테너가수.

 

     감미롭고 서정성(抒情性)에 넘친                     

   목소리와 표현으로 짧은 기간에                      

   당대 제1의 리릭테너라는 명성을 획득하였다.

   36번째 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

      많은 음악팬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죽어서 전설이 된 성악가가 있다. 한번 들으면 지울 수 없는 마력의 목소리는 청취자를 평생 그의 신봉자로 전환시킨다.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프리츠 분더리히(Fritz Wunderlich,

 1930년 9월26일~1966년 9월17일)는 불과 10여년의 짧은 음악인생으로 거장이 된 가수다.

 필자는 그가 부른 베토벤의 가곡에 매료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신봉자가 됐다.

 

이해할 수 없는 독일어의 시를 피아노 반주만으로 부르는 독일가곡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장르.

 그러나 그가 무엇을 노래하는지까지는 몰라도 그의 미성으로 듣는 독일가곡은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흔들림 없는 음정과 동시에 부드러우면서도 그윽한 서정성은 독일가곡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분더리히의 음역은 분명 테너였다. 그러나 바리톤 가수의 영역이었던 독일가곡과 모차르트 오페라 주역에 도전하였고,

 생전에는 어떤 바리톤보다 더 잘 부르는 가곡가수로 명성을 떨쳤다.

 사망 후에는 독일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테너 중 한 사람으로 승격했다.

 

그는 1930년 독일 쿠젤의 조그만 마을 팔라틴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어머니와 합창지휘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경제공황으로 그가 5살 때 아버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때부터 어머니 힘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으니 음악교육은 고사하고 일반교육조차도 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집안살림을 열심히 도왔다.

 

제과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그는 늘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를 들은 극장 관계자는 그에게 성악공부를 권했다.

 그는 이웃과 신부그룹의 도움으로 프라이부르크의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니면서 처음에는 호른 연주자를 꿈꾸었다.

 큰 폐활량을 가졌기 때문인데 이때 호른을 불며 늘린 긴 호흡이 훗날 그의 초인적인 호흡조절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람은 이 학교의 성악교수 빈터벨트였다.

 

맹인인 그녀는 그의 성악소질을 발견하고 성악가의 길을 걷도록 권유했고 그녀의 헌신적이고 세세한 보살핌 속에서 그는

 밀도있는 성악교육을 받았다.


그의 빛나는 미성은 비로소 완성됐다. 그녀와의 만남은 청년에게 큰 행운이었으며 행복한 결합이었다.
5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1955년(25세) 음악학교를 졸업한 분더리히는 뷔르템베르크 국립오페라극장과 계약하면서

 성악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너무나 일찍 찾아온 행운의 기회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타미노역을 맡고 있던 당대의 명가수 트락셀이 갑자기 병에 걸리자

 대신 출연, 하룻밤 사이에 주목받는 스타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모차르트 전문가수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공연마다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었다. 현대 작곡가 엑크의 ‘총검열관’과 오르프의 ‘폭군 오이디푸스’의 초연에

 출연하였고, 로시니의 오페라 ‘이탈리아의 터키인’에서 뛰어난 역량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가 세계적인 가수로 확고하게 자리한 것은 1958년부터 1966년까지 꾸준히 참여했던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통해서였다.

그는 해마다 출연하여 뵘과 미트로풀로스, 카일베르트, 카라얀 등의 지휘 아래 모차르트나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및

 종교음악 등을 불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에는(30세)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의 멤버로 영입되어 이곳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 오페라극장들의

객연·콘서트가수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그의 싱싱한 목소리와 풍부한 음악성은 전 유럽에 퍼졌다.
어려서 습성대로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성실하게 일했다. 모차르트 오페라의 전문 가수였을 뿐 아니라 바흐의 수난곡과

 모차르트 ‘레퀴엠’, 브루크너의 ‘테 데움’과 하이든의 ‘천지창조’ 같은 종교음악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행운은 피아노 반주자 후베르트 기센과의 결합이었다.

 그의 미성에 반했던 바리톤 가수 헤르만 프레이는 가곡전문 반주자였던 기센을 소개하였고,

 독일가곡에 정통했던 30살 연상의 기센은 분더리히가 독일가곡을 정확히 소화하도록 창법을 가르쳤다.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R. 슈트라우스, 볼프 등이 독일 정통파 가곡은 두 사람의 결합으로 서정적 찬란함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음과 영혼이 교차하는 듯 두 사람의 연주는 무언가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음악의 마력이 흘러넘쳤다.

 

청중은 그들 앞에서는 완전 무장해제 됐다. 정확한 딕션(오페라나 가곡을 부를 때의 발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음정처리, 그리고 온화하고 지적인 분더리히의 음색은 기센의 차분한 반주로 빛을 발했다.
그는 연주와 레코딩을 반복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가수라고 극찬을 받았던 그의 죽음은 허무했다.

 

평소 스피드를 즐기는 자동차광이며 사냥을 좋아했던 그는 잠깐 휴식을 하면서 고성(古城)을 찾았다가

 돌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두개골 파열로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1966년 9월17일의 일이었다.

 


그는 그해 10월8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가극장에서 오페라 ‘돈조반니’의 주인공 돈 옥타비오로 데뷔할 계획이었다.

 테너 피셔-디스카우는 그의 음악을 “녹을 것 같은 유연성과 찬연한 힘”이라고 표현했고,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의 총감독 하르트만은 “독일 오페라 사상 가장 큰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짧은 생애로 국제적 스타가 되긴 시간이 부족했으나 그가 남긴 음반을 통해 그의 명성은 지금도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카라얀과 녹음 중이었던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그의 마지막 음반이 되어 카라얀에게 명성을 안겨 주었으며,

 1966년 8월 기센과 함께했던 개인 연주회는 그의 마지막 연주회였다.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의 가곡을 그보다 더 잘 노래하는 가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그러면서도 깊은 정감을 간직한 미성을 다른 가수들에게서 들을 수는 없다.

 이러한 매력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6년이 됐어도 그를 계속 거장으로 만든다.

 


캐나다 한국일보
발행일 : 2013.07.02

 

 

 

 

 

 

 

               

 

 

 

 

 

 

 

 

 

 

 

 

 

 

 

 

 

 

 

 

 

 

 

Dietrich Fritz

Wunderlich

 

1930~1966

독일의 테너가수.

 

     감미롭고 서정성(抒情性)에 넘친                     

   목소리와 표현으로 짧은 기간에                      

   당대 제1의 리릭테너라는 명성을 획득하였다.

   36번째 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

      많은 음악팬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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