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시사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 10일 별세, 향년 97세

도토리 깍지 2019. 6. 11. 09:41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19982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내외가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0711일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이희호 여사.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사진제공 : 김대중평화센터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 10일 별세, 향년 97

우리는 사적으로는 가족 관계지만 정신적으로는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동행자
김대중의 삶이 곧 이희호의 삶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둘도 없는 '동지'이기도 했다



 지난 3월부터 투병 끝 DJ 서거 10주기 두달여 앞두고 타계각계 조의


김대중평화센터는 이희호여사가 10일 오후 1137분 소천했다"고 밝혔다.

 올해 3월부터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수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지만 최근 앓고 있던 간암 등이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주부터는 혈압이 크게 떨어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위중한 상황이 이어졌다.

 

1922년생으로 김 전 대통령보다 두 살 많은 이 여사는 1950년대 초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캐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당대 엘리트 여성이었다.


귀국 후에는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초대 대한YWCA 총무 등을 역임하며 여권 신장에 기여한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다.

1962년 상처한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한 뒤에는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1976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사흘 만에 풀려난 이 여사는 다른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양심수 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석방 운동에 앞장섰다.

 1978년 연말 석방된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반복된 가택 연금으로 '동교동 교도소'라고 불리던 자택에 발이 묶였다가

 1980517일 또다시 연행됐다. 신군부의 5·18 광주 학살과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서막이었다.

 

이어진 1987년과 1992년의 쓰라린 대선 패배,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1997년 대선 승리 등 고비마다

이 여사의 지극한 내조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던 무렵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고, 지독한 관절염

까지 얻었다.

 

그런 와중에도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했다. 김 전 대통령이 총선과 대선에 출마했을 때 찬조연설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조력자 역할을 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구금됐을 때는 양심수 석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4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70대를 넘어선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로서 활발한

 내조를 벌였다.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과 납치 사건,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 가택연금 등 군사정권 내 이어진 감시와 탄압을 감내

했고, 1980년 내란음모 사건 당시에는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82년 말 미국으로 망명한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학과 교회 등에서 전두환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김 전 대통령은 또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강연에서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됐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회고했다.

 

2년여 만에 귀국한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장기 연금과 도청, 감청에 시달리다가 1987년 전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고 난 뒤에야 마침내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외환위기 직후 사회봉사 단체 '사랑의 친구들''여성재단'을 직접 설립, 마지막까지 고문직을 맡는 등 아동과

 여성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인 2001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첫 여성부가 출범하는 데에도 이 여사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

으로 알려졌다.

이희호여사는 김 전 대통령 재임 시 여성의 공직 진출 확대를 비롯해 여성계 인사들의 정계 진출의 문호를 넓힌 당사자기도 하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미경 한국국제협력재단 이사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등이 김 전 대통령 발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 전 대통령을 동행해 영부인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 재직 시절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까지 잇달아 구속되는 등 시련도 겪어야 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재야와 동교동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중심을 잡아왔고, 마지막까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자리를 지키며 의욕적으로 대북 사업을 뒷받침해 왔다.

미국 교회여성연합외 '용감한 여성상', 미국 캘리포니아주 '이 해의 탁월한 여성상', 무궁화대훈장, 펄벅 인터내셔널 '올해의 여성상' 등 인권과 여성문제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특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이며, 당일 오전 7시 고인이 장로를 지낸 신촌 창천교회에서 장례 예배가 열린다.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02-2227-7550

 

김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두달 여 앞둔 이 여사는 가족 측의 의사에 따라 사회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이 여사의 장례를 주관할 장례위원회가 구성된 가운데 장상 전 국무총리서리와 평화당 권노갑 고문이 위원장을

맡고, 5당 대표가 장례위원회 고문으로는 참여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김기준 기자




망중한 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의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설거지를 함께 하며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당시 <피플>에 실린 사진이다.


 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의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설거지를 함께 하며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당시 <피플>에 실린 사진이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영원한 동지 김대중 곁으로... 이희호 이사장


민주화운동가로 한국사에 발자취 남겨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민주화운동 동지, 여성운동가였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0일 오후 11
3797세로 별세했다.

이 이사장은 서울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오늘(10) 별세했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올해 들어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투병 중인 간암 때문에 위중설도 나왔다.
 420일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했을 때에는 주변에서 그에게 이 소식도 알리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후 6·15 남북정상회담 17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휠체어를 밀며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입장하고 있다.

 지난 2017615일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 17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연합뉴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이사장은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2년 만에 강제 졸업한 뒤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시 입학, 1950년 졸업했다.
 그는 1954년 미국으로 떠나 테네시주 램버스대학과 스캐릿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을 밟은 뒤 돌아왔다.

정치인 김대중을 만나기 전부터 그는 '여성운동가 이희호'였다.
 이 이사장은 오랜 세월 YWCA과 여성단체협의회에 몸담았고, 여성문제연구회 등에서 활동했다.
1964년 회장이 된 첫 해에는 여성노동자들의 근로실태 조사 보고서로 만들고, 1967년에는 여성정치의식 조사를 진행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14일 평양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공연을 마친 학생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격려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이사장이 지난 2000614일 평양 만경대 학생소년
궁전에서 공연을 마친 학생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격려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결혼은 그의 인생에 큰 변곡점이었다.
1962520, 결혼한 지 열흘째에 이희호 이사장은 남편이 '민주당 반혁명 음모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에도 의문의 교통사고납치, 가택연금내란사건 등에 휘말려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이 이사장은 아내이면서 민주화운동가로서 그의 곁을 지켰고, 각계에 지지를 호소했다.

마침내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이사장은 7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도 아동과 여성인권에 적극 관심을 보였고,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가 만들어지고 여성 공직 진출이 늘어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또 영부인으로서 거의 매년 1회 이상 단독 해외 순방에 나섰고, 20025월에는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했다.




 23일 오후 여의도 국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을 마친 뒤 이희호씨가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 모여 있는 시민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

 지난 2009823일 오후 여의도 국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 당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 모여 있는 시민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2009년 그런 동반자를 잃은 뒤에도 이 이사장은 햇볕정책을 강조하고 김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축하행사를 여는 등 남편의 뜻을 이어가고자 힘썼다. 201112월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평양을 찾았고, 20157월에는 취약계층 의료 지원을 위해 방북했으나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만나진 못했다.

김 대통령은 이듬해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에 새로 얻은 집에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새긴 문패 2개를 나란히 걸었다.
 생전에 김 대통령은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고 회고했다.
이 이사장도 자서전 <동행>에서 "참 길고도 매서운 세월을 함께 걸어왔다"고 했다.
이 책의 부제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는 김 대통령이 손수 지은 것이었다.










 







'DJ 인생의 조언자' 이희호 여사


정치인 김대중 흔들릴때마다 버팀목 역할
1971년 대선 찬조연설때
"남편이 대통령돼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 타도하겠다"
핀란드 방문중인 대통령
"여성위해 평생 헌신" 추모



이희호 여사는 '이희호' 자신보다 '김대중의 부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기 전에도 이 여사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 나라 여성인권운동 성장의 중심에는 이 여사가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해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 기독운동도 이끌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삶의 궤적을 바꿨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차용애 씨는 1959년 병사했다.

 이 여사가 두 살 연하인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할 때 여성계 선배들은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최고의 엘리트 여성운동가 이희호가 너무 아깝다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운명은 두 사람을 현대사의 지난한 '민주화' 투쟁으로 밀어 넣었다.

아내가 남편을 마냥 뒤따르는 길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일생을 '동행자' '동지'로 살았다.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존재할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망명 시절인 198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을 하면서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동교동 자택에서 1993년 8월 12일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택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동교동 자택에서 1993812일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택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독재자들의 핍박을 받던 시절 이 여사는 남편의 안위가 걱정돼 기도로 밤을 새우면서도 결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그 단호한 태도가 김 전 대통령의 양심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남편을 대신해 찬조연사로 전국을 돌 때 이희호 여사는 연단에 서서 시민들에게 말했다.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의 양심을 지키고 키웠다는 사실을 김 전 대통령은 아내에 관해 쓴 글에서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한순간 흔들리던 나의 마음은 아내를 생각하며 올곧게 바로잡혔다.

아내는 결코 나의 배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아내의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게는 곧 목숨을 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사랑을 택했다"고 적었다.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과 함께 걸은 민주화의 궤적은 핍박으로 가득했지만 그 시절 내내 그녀의 신념을 다잡게 한 것은 신앙이었다.


이 여사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의 무기였다.

이 여사는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직후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사랑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라며 깊은 신앙심에서 '용서'를 말했다.


이 여사의 여성운동가로서 철학은 김 전 대통령 정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녀는 "여성 권익 향상은 내 오랜 소망이었어요.

남편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을 많이 했지요.

 정부 출범 때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특별위원회를 발전시켜 여성부를 세웠어요.


남편은 양성평등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을 앞서 갔어요.

내가 뭐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요"라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 임기 중인 1998년에는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됐고 1999년에는 남녀차별금지법이 시행됐다.


2001129일 정부조직법이 바뀌고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여성부가 들어서 한명숙 새천년민주당 의원이 장관

으로 임명됐다.

 국민의 정부 이전에는 청와대에 여성 비서관이 단 한 명밖에 배출된 바 없다면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그 수가 열 명

으로 불었고 여성 장관도 네 명이 배출됐다.


이 여사는 20025월 김 전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기도 한다.

 1990년 아동을 위한 세계정상회의에서 결의한 아동의 생존·보호·발달에 관한 세계선언과 행동계획에 대한 지난 10년의 실적을 평가하고 향후 10년의 행동 방안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여성으로서 처음 아동특별총회 기조연설을 맡은 이 여사는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곧 평화롭고 번영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빈곤과 학대, 영양실조와 에이즈에 희생되고 있다""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나서자"고 촉구했다.


김 전 대통령이 임기 중 노벨평화상을 받는 등 이 여사는 지난 고행에 따른 영광을 누릴 수 있었지만 주단길이 계속해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에는 '아들 문제'가 불거졌다.

 '노무현 돌풍'이 거세게 불던 2002년 무렵 둘째아들 홍업 씨와 셋째아들 홍걸 씨의 비리 연루 의혹이 터져 나왔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56일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두 아들이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했다. 이 여사는 "신문 읽기가 힘들었어요.

국민 앞에 고개를 들기 어려웠지요.

 남편은 일정이 많은데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아 괴로웠지요"라고 회고했다.

김홍업·홍걸 씨의 '구속' 사태로 번지며 김 전 대통령은 건강 악화로 입원하고 이 여사는 정신적 충격으로 구토까지

한다.


한편 핀란드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이희호 여사님께서 김대중 대통령님을 만나러 가셨다""여사님은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 영부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다.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

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고 고인을 애도했다. 이어 "순방을 마치고 바로

뵙겠다.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평화를 위해 두 분께서 늘 응원해 주시리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백상경 기자 / 윤지원 기자]




   
   
   
  
  이희호 여사가 2018년 1월 1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이희호 여사가 201811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신년하례식

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문패 나란히 달았던 '이희호'·'김대중' 부부DJ에게 이희호란






부인 뛰어넘은 정치적 동반자 관계

이화여대·서울대 졸업한 '1세대 여성운동가' 엘리트






이 여사는 국내 여성운동 1세대 활동가라도 분류된다. 1950년대에는 초에는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원 등의
창설을 주도했다.
미국 유학 직후인 1950년대 말에는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총무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한국 여성운동계 지도자로 성장한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첫 인연은 맺은 것은 1951년이다. 둘은 학술모임에서 만나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았고,
관계를 이어가던 중 1962년 이 여사가 YWCA 총무로 있던 때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5수 끝에 국회의원이 됐지만 5·16 쿠데타로 정치 낭인이 된 상태였다.
이때부터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지가 됐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이어지던 시기, 이 여사는 항상 남편과 함께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열흘 만에 이 여사는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것을 봤다. 7
6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후 반복된 김 전 대통령의 옥살이에 이 여사는 석방 운동과 옥바라지를 했다.

특히 이 여사가 유학 시절 쌓은 영어 실력과 영문 타자 솜씨, 서구식 매너 등이 큰 자산이 됐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세계 각지의 유력인사들에게 유려하고 호소력 짙은 편지를 보내 구명
 운동을 펼쳤다. 이는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생활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97년 김 전 대통령의 취임식 이후 이 여사는 영부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앞장섰다.
결식아동을 위한 봉사단체 사랑의 친구들, 저소득층 여성을 돕는 한국여성재단등에서 활동했다.
 여성가족부의 모태가 되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도 출범시켰다.

이 외에도 국민의 정부에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된 데 대해 "이희호 여사의 역할이 컸다"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김 전 대통령도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 부부가 동교동 자택에 '이희호'·'김대중' 문패를 나란히 단 것도 김 전 대통령이 이 여사에
 보이는 존경심과 애정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결혼 1년 뒤쯤인 1963년 4월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때만 해도 변두리였던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작은 국민주택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전세였던 집을 사들인 뒤 김대중은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새긴 문패 2개를 나란히 내걸며 동교동 시대를 열었다. 사진은 1982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부모를 대신해 동교동을 지키던 맏아들 김홍일의 문패까지 3개가 걸려 있던 시절이다. /사진=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결혼 1년 뒤쯤인 19634월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때만 해도 변두리였던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작은 국민주택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전세였던 집을 사들인 뒤

김대중은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새긴 문패 2개를 나란히 내걸며 동교동 시대를

열었다. 사진은 1982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부모를 대신해 동교동을 지키던

맏아들 김홍일의 문패까지 3개가 걸려 있던 시절이다.


 /사진=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퇴임 이후엔 대북송금 사건 수사, 세 아들의 비리 연루로 또 한 번 힘든 시기를 겪었다.
20098월에는 남편 김 전 대통령을, 지난 4월에는 첫째 아들 김홍일 전 의원을 먼저 보냈다. 
이 여사는 생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고 소원했다.  

한편 이 여사는 올해 봄부터 노환으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이 여사의 분향소는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에 마련될 예정이다. 김대중평화센터에 따르면 조문은 11일 오후
 2시부터 가능하다. 

발인은 14일 오전 6시다.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장례예배는 14일 오전 7시 신촌 창천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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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향년97)10일 별세했다. 사진은 2016

97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서 이희호 여사.


(뉴스1 DB)2019.6.10/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








'백수' DJ 데이트 비용 부담했던 '평생 동지' 이희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의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이희호 여사는 1951년 부산에서 '면우회'라는 대학생 모임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1950년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이 여사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한국전쟁을 맞아 부산에 피난 중이었고 함께 여성

운동을 하던 친구 김정례씨의 소개로 이 모임에서 김 전 대통령을 알게 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해운업으로 성공한 청년 실업가로 대학생들과 어울렸다. 김 전 대통령은

 "여성청년단을 한다면서 곧잘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고 다녔다""나에게는 그 차림이 오히려 여성스럽게 보였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때 그 웃음이 참 예뻤다"고 회고하곤 했다.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은 다시 만난 것은 1959년 늦여름. 서울 종로 거리에서 김 전 대통령을 우연히 보게 됐다.

앞서 이 여사는 1954년부터 미국에서 유학하며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58년 귀국했다. 1954년과 58, 59년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했던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백수'였고 때문에 "데이트 경비는 이 여사가

거의 부담했다"고 김 전 대통령은 밝힌 바 있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기억하는 이 여사는 "이지적이고 활달했지만 교만하지 않았다.

미래가 보장된 여성 지도자였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겸손했다. 자기주장에는 언제나 당당했지만 마음을 열어 남을 배려했다.


 진보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고, 시국을 보는 눈이 정확했다.

" 이 여사는 62녀 중 장녀였고, 아버지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였다.

이 여사는 1962510일 김 전 대통령을 남편으로 맞았다.

결혼 두 달 전 쯤 서울 탑골공원에서 김 전 대통령의 청혼을 받았는데 주변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건강이 안좋은 어머니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여동생과 함께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사는 "인품이 훌륭한 사람, 내가 꼭 도와야 할 사람"이라며 흔들리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린 지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이라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것은 이 부부의 고난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이 여사와 김 전 대통령의 고난은 1972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쿠데타에서 첫 번째 분수령을 이룬다.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망명을 선택했고 이 여사는 국내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반유신투쟁을 적극 지원·

독려했다.


이 여사는 검열을 피해 인편으로 보낸 편지에서 "박정희씨만이 이 나라에 존재해 있고 그의 명만이 법이요,

모두 죽은 자의 묘지가 돼있는 이 곳에서 숨이라도 크게 쉬면 무슨 소리인가 놀라서 벌을 내릴까 두려워하는 심정

입니다.


 특히 미워하는 대상은 당신이므로 그리 아시고 더 강한 투쟁을 하시고, 국민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호흡을 크

쉴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급히 서두리지 마세요"라고 김 전 대통령을 격려했다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김후보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지원 연설을 하며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1987.12.1 (사진=연합뉴스)




1976년 독재자 박정희를 비판한 3·1구국선언에 김 전 대통령이 참여한 뒤부터 이 여사는 옥바라지에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이 이 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이 여사는 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유독 추위를 잘 타는 남편이 감옥에서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하면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됐지만 가까이 있으면 위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진주에 자주 머물렀고, 교도관을 만나면

 부탁하려고 빵이나 과자를 사서 교도소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 여사는 "당신 때문에 특히 겪고 계신 그 어려움 때문에 내 생이 더 값지고 더 뜻 있으며, 많은 사람을 참된 사랑으로 대할 수 있으며, 긍지와 소망으로 내일의 새 빛을 바라보면서 심의(深意)의 가시밭길을 뒤따라 나갈 수 있는 행복마저 느낍니다"라고 옥중의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박정희가 심복의 손에 암살된 뒤에도 시련을 그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 일당이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조작해 김 전 대통령을 사형수로 엮은 것이다.

하지만 이 때도 이 여사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연행되고 사형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보낸 편지에서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형제들이 철야기도, 산 기도, 골방 기도, 금식기도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힌 일인지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꼭 가지세요"라고 당부했다.  

19811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직후 면회에서 이 여사는 세 아들과 함께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때를 돌아보며 "아내가 그렇게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 없었다.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20년을 넘게 지속된 고난을 결코 이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수감됐던 2년 동안 모두 649통의 편지를 썼다.  

이 여사는 1997년 김 전 대통령의 당선 뒤에도 사회적 약자를 잊지 않았으며 특히 여성의 권리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국민의정부에서 여성가족부가 신설됐고 여성장관과 청와대 여성비서관이 증가하는 등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됐다. 1998년 가정폭력방지법과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도 이 여사의 노력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년 쯤 지나 출판된 '김대중 자서전'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온 47년의 생애를 매일같이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내 생이 다하는 그 날까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2017년 10월 28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함께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사랑나누기바자회 한마당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 사진 = 연합


. 사진은 20171028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함께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사랑

나누기바자회 한마당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 사진 = 연합






與野, 이희호 여사 별세에 애도... "민주주의·인권운동의 거목"




여야(與野)10일 고()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별세에 한목소리로 애도를 나타내고 추모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11일 새벽 논평을 내고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비판
자로서, 독재세력과 싸우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로서, 매섭고 엄혹한 격정의 세월을 함께 헤쳐 왔다"면서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의 삶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였다"고 했다.

 그는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 평화운동가였던 이 여사는 새 시대의 희망을 밝히는 거인이었다""여성지도자로서 항상 역사의 중심에 서서 끊임없이 더 좋은 세상의 등불을 밝혔던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퍼스트레이디
였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은 논평에서 "고인께서 민주주의, 여성 그리고 장애인 인권운동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리며,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민 대변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이희호 여사는 민주주의를 위해 한 평생을

살아왔다"면서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사회운동에도 헌신했고, 영부인이 된 후에는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명예대회 회장 등을 맡으며 장애인 인권운동에도 힘썼다"고 했다.
 이어 "유가족 및 친지 분들께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하며,국민과 함께 슬픔을 나눈다"고 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도 논평에서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을 만나 47년간 내조한 배우자이자, 민주화 동지를 넘어 스스로가 민주화의 큰 나무로 무성히 잎을 피워낸 민주화 운동가"라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 대변인은 "김 전 대통령이라는 거목을 키우고 꽃 피워낸 건 역사였지만, 국제적 구명운동과 석방운동 등
김 전 대통령을 지켜낸건 여사의 존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대변인은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한 후에는 김 전 대통령의 옥바라지는 물론 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가택연금등 갖은 고초와 탄압을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온몸으로 겪으며 이겨냈다"면서 "대한민국 민주화 역경의 산증인이자 대통령의 영부인으로서 김 전 대통령 못지않게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민주평화당 박주현 수석대변인은 "이 여사의 여성 리더적인 면모는 김 전 대통령의 인생의 반려자를 넘어, 독재 속에서 국민과 역사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낸 정치적 동지로 자리했다.
정치적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김 전 대통령의 삶에 이 여사가 계셨던 것을 국민들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박 대변인은 "여성·사회운동가와 퍼스트레이디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겨 한국정책학회에서 발표된 논문에 '가장 훌륭한 영부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면서 "우리 모두는 여사님이 걸었던 여성, 민주주의, 인권, 사랑의 길을 따라 전진하겠다. '이희호'라는 이름은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11/2019061100668.html









DJ 추도식 참석하는 이희호 여사와 박지원 의원


DJ 추도식 참석하는 이희호 여사와 박지원 의원(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 2016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뒤에는
박지원 의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식장에서 입장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젊은 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젊은 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197912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출처 : S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