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형 선생(위 사진)의 손자 최발렌틴이 지난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서
열린 기념비 제막식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홍진수 기자·최재형 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제공
북에는 진묘, 남에는 허묘...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묘
▲ 애국지사묘역에 있는 양세봉 장군의 묘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는 양세봉 장군의
묘가 허묘로 조성되어 있다.
ⓒ 김학규
▲ 애국열사릉의 "량세봉 선생"의 묘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
"량세봉 선생"의 묘. 1961년 북한은 만주에서 양세봉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평양
으로 이장하였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아니라 "독립군 사령"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 정창현
중국 요령성 신빈 만족자치현 왕청문진 강남촌 대협피골 골짜기에 서른여덟 살에 죽은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석상이 서 있다. 민족주의자 양세봉은 일본 밀정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박종인 기자
[동작민주올레 50] 동작지역 독립운동·민주화운동 역사탐방-
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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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의 애국열사릉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던 임정계열의 민족주의 인사들이나 다른 계열의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다수 포괄하고 있다.
남과 북이 동시에 인정하는 독립운동가도 25명이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의 남북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남과 북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호 다양성을 존중하는 접근과 아울러 남과 북의 공통점을 넓혀나가는 노력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이때 남과 북이 동시에 인정하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하고 확산시켜 나가는 일 역시 남과 북의
상호 공통점을 넓혀나가야 할 주요 분야의 하나일 것이다.
그중에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돼 있는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1896~1934)을 주목할 만하다.
양세봉 장군은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로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해 수많은 국내진공작전과 만주에서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었다. 그는 북한의 애국열사릉과 남한의 애국지사묘역에 동시에 안장돼 있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어렸을 때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크게 감명받은 양세봉은 1919년 3.1혁명 시기 만주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양세봉은 이후 대한통의부와 참의부를 거쳐
정의부에서 1중대장을 맡았다.
1929년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삼부통합을 위한 노력 과정에서 형성된 국민부를 지지하는 조선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에 참여했다. 1932년에는 총사령에 취임해 일제의 만주침략에 맞서 조중연합군을 형성해 영릉가 전투를
비롯한 200여 차례의 크고작은 전투를 치르며 맹활약했다.
북한의 김일성도 독립해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형성하기 이전에는 양세봉 부대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세봉은 김일성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오동진 등과 함께 적극 도와준 인물 중 한 명이
었다. 일제에 맞서는 반일연합전선의 형성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양세봉 장군은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였음에도 1961년 북에서는 환인현에 묻혀 있던 양세봉의 시신을
모셔갔고, 지금은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남에서는 196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고, 1974년 애국지사묘역에 허묘 형태로 묘를 조성했다.
이렇게 해서 양세봉 장군은 최초로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동시에 안장돼 있는 독립운동가의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중국 요녕성 신빈현에는 1995년 항일명장 양세봉장군 석상이 설치되는 등 만주 지역에서 한족과 조선족 모두에게 높이 존경받고 있기도 하다.
남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장재성과 김원봉
▲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의 공판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30. 2. 15)
원 안의 인물이 장재성이고, 왼편 사진 속 인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또다른 주역 장석천이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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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묘역의 조길룡(1909~1991)은 일제강점기 3.1혁명,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대중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광주농업학교 4학년생으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던 조길룡은 이후 체포, 대구복심번원에서 2년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는 농민운동에 관여하다 1933년에 다시 체포돼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으로
8개월의 감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그런데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언론에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지목되면서 대구
복심법원에서 가장 높은 형량인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던 장재성(1908~1950)은 국립현충원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장재성 역시 4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온 이후에도 1939년 '적색교원 사건'으로 일경에 다시 체포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기도 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사실 장재성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3.1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대대적인 표창을 시작한 1962년 당시, 처음에는 표창대상자 208명의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서훈 취소가 발표됐다. 결국 최종 표창대상자 명단(205명)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이후 장재성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장재성은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광주청년동맹 의장,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전남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분단에 반대하여 세 차례에 걸쳐 남과 북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분단 현실은 장재성을 그냥 두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직후 검거된 장재성은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법적 근거도 없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총살당해야 했다.
막상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3대 대중운동의 하나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그 운동의 최고 지도자는 독립
유공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모순적 현실은 해방 74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장재성은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기념사를 계기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의열단의 김원봉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내내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의열단 단원들은 안장돼 있는데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을 찾을 길이 없듯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동료들은 독립운동가 묘역에 안장돼 있는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장재성은 찾을 길이 없다.
국립서울현충원의 독립운동가 묘역은 우리 분단의 현실을 하루바삐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한다.
이들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을 우리의 역사에서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이들 덕분에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서
살고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후선열제단의 납북인사들
▲ 무후선열제단의 납북인사 16인의 위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부주석 김규식
(1881-1950), 3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에 있어서의 균등)를 제창하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핵심정신의 기초를 마련한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조소앙
(1887-1958), 영화 <박열>로 유명한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이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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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 왼편 끝에는 김규식, 조소앙, 유동열, 오화영, 조완구, 윤기섭, 김붕준, 안재홍, 박열, 명제세, 원세훈, 최동오, 정인보, 정광호, 고창일 등 납북인사 16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할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에 있던 중 인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납북된 인사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부주석 김규식(1881~1950), 3균주의(정치·경제·교육에 있어서의 균등)를 제창해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핵심정신의 기초를 마련한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조소앙(1887~1958), 영화 <박열>로 유명한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이다.
납북 직후 전쟁 중에 사망한 김규식과 유동열 등을 제외하고는 이들은 북한에서 1956년에 결성된 재북평통(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활동을 활발히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소앙·안재홍 등이 주도한 재북평통은 결성대회에서 "남북정권당국과 국회, 모든 정당·사회단체 대표 및 애국인사들은 평화적인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상설기관을 수립할 것" "남북총선거에 따라서 통일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제의했다.
재북평통은 북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남북한 중립노선을 견지하면서 중립화통일방안에 기반한 평화통일 실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활동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지향적인 공통분모를 만들어내고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경험과 역할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고, 올바른 자리매김 역시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납북인사 중에 최동오(1892~1963)도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는 독립운동가이다. 정의부와 조선혁명당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최동오 집안의 역사는 한반도 분단이 한 집안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1914~1989)도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이후 한국군 창설과정에 참여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외무부장관까지 역임했다. 그런 최덕신이 박정희와 갈등을 빚다가 1970년대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1983년에는 아버지 최동오가 묻혀있는 북으로 들어가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의 부인 류미영(1921~2016)도 아버지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무후선열제단의 납북인사 유동열(1879~1950)인데, 남편에 이어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역임해 북한에서 고위인사로 장기간 활동했다.
이들 최덕신-류미영 부부의 둘째 아들 최인국도 지난 2019년 7월초 돌연 북한으로 망명했다.
납북인사는 아니지만,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인물 중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이었던 오동진 장군
(1889~1944)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동진 역시 북한의 애국열사릉에도 묘가 조성돼 있어 남과 북에서 동시에 인정하는 독립운동가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는데,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여러 차례 언급된다고
한다. 1926년 김형직이 사망한 이후 어린 김일성을 정의부가 운영하던 화성의숙에 입학시킨 것도 오동진과 최동오였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손정도 목사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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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6대 담임 목사를 지내기도 한 손정도 목사(1882~1931)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시의정원
부의장이었고, 이어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그런 손정도 목사가 북한의 김일성과 각별한 관계를 맺은 것은 만주 길림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1920년대 말이었다.
1926년 사망 직전 김형직은 "어머니를 모시고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고 유언을 남겼고, 1926년 김일성은 길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를 찾아갔다.
손정도 목사는 이미 평양 숭실 출신의 졸업생과 재학생을 중심으로 조선국민회를 조직했다가 옥사한 장일환
(1886~1918)으로부터 김형직을 소개받아 알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숭실중학 후배 김형직의 아들 김일성이 찾아오자 손정도 목사는 친자식처럼 돌봤다. 더구나 김일성이
만주 군벌에 의해 감옥에 갇혔을 때 힘써 석방시킨 까닭에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그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 생명의 은인"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손 목사 자녀들과 김일성은 형제처럼 지냈는데, 큰아들 손원일은 해외에 유학 중이었던 관계로 두 살 어린 둘째 아들
손원태가 함께 육문중학을 다니며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해방 이후 미국에 살면서 의사로 지낸 손원태는 팔순 잔치를 평양에서 치렀고, 2005년에는 북한의 국립묘지인 애국
열사릉에 안장됐다.
2003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를 비롯해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독립기념관의 학자들이 북조선 학자들과 손정도 목사를 기념하는 학술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돼 있는 손정도 목사, 장군 제2묘역에 안장돼 있는 큰아들 손원일 제독,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는 둘째아들 손원태 박사로 구성된 손정도 목사 집안의 역사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밝혀내는 일 역시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주역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
▲ 6.15 남북공동선언의 주역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남북관계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남과 북의 주체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주변 환경을 극복하면서
점차 구체화될 것이다.
ⓒ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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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00년 방북을 성사시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성공리에 개최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승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공동선언'을 발표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여정에 한 단계 진전을 이뤄냈지만, 이후 남북관계는 한동안 경색국면에 접어들었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지금 한반도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촛불혁명의 결과 탄생한 문재인 정부 하에서 지난 2018년부터 남북 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되고 북·미 정상회담까지
성사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가 다시 높아졌다.
지난 2월 말 개최된 하노이 북-미정상회회담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난
6월말 판문점에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극적으로 만난 사건은 일시적으로 얼어붙어 있던 북미 관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남북관계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남과
북의 주체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주변 환경을 극복하면서 점차 구체화될 것이다.
이때 국립서울현충원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복무하는 새로운 시대의 현충시설로 거듭나는 길에 2009년에 자리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는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최재형 선생(위 사진)의 손자 최발렌틴이 지난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서
열린 기념비 제막식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홍진수 기자·최재형 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제공
안중근 의거’ 도운 최재형 선생, 순국 99년 만에 ‘항일 상징’으로 부활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기념관 열고 ‘기념비 제막식’도
군납사업하며 독립운동 지원·학교 설립 주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1920년 일본군에 처형…추모위 “일 경제침략 상황서 애국 되새길 계기”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60~1920)이 99년 만에 항일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다.
이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일본군 총탄에 순국한 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최근 활발하게 이뤄지면서다.
특히 대법원의 강제징용공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극점으로 치닫는 상황과 맞물려 주목
받고 있다.
우선 지난 3월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의 고택(옛집)이 기념관으로 조성돼 문을 열었다.
2018년 2월 발간된 평전 <페치카 최재형>(도서출판 선인)은 2쇄를 올 초 찍었다.
이달 말에는 최재형의 딸 올가와 아들 발렌틴이 쓴 회고록 <나의 아버지 최재형>(도서출판 상상)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2일 최재형 기념관에서 열린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은 ‘항일과 필승을 다짐하는 자리’가 됐다.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추모위) 공동대표인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축사에서 “최재형 선생이
부활하는 오늘날 일본은 경제침략을 자행하고 있다”며 “100년 전 우리는 힘이 없어 당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최재형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셨고 독립운동가를 지원하셨던 이곳 연해주에서 우리는 한·일 경제전쟁에서 꼭 이기겠다는 다짐을 함께한다”고 말했다.
오성환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 역시 “이런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100년 전 애국지사들이 그랬듯이 애국심과 도전정신을 새롭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며 “지금의 대한민국은 100년 전의 대한민국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추모위는 최재형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그의 후손들과 함께 순국 100주년 기념식과 추모음악회, 국제 심포
지엄, 다큐멘터리·출판 기념회, 사진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최재형의 삶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순국하기 전까지 살았던 우수리스크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는 표지판조차 없었다.
한·소 수교(1990년) 이후 러시아 지역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최재형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2010년 한국과 러시아 정부가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최재형의 집’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최재형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다. 그러나 집주인은 따로 있었기에 관광객은 물론 학자들도 그 집으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2
014년 우수리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최재형의 집을 매입해 기념관을 준비하면서 그의 흔적을 직접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최재형은 1860년 8월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9년 함경도 일대에 홍수가 나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그의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조선보다는 삶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자녀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최재형은 러시아 학교를 택했다.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첫 한국인이었다.
조국을 떠났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수원대 박환 교수가 쓴 <페치카 최재형>에는 ‘한겨울에도 양말과 신이 없어 짚단을 가지고 눈위를 걸어다니다가 잠시 그 짚단을 펴고 발을 녹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난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서 열린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에서 김재윤
최재형추모위원회 상임위원장, 정병천 국가보훈처 현충시설과장, 오성환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발렌틴,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이 블라디미르 우수리스크 시의원
(왼쪽부터)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진수 기자
최재형은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뒤 12살에 집을 나왔다. 한 러시아 상선에 일자리를 구했는데 선장 부부가
최재형을 자식처럼 거둬줬다. 인
텔리였던 선장의 아내는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유럽 문화를 가르쳤다. 최재형은 선장을 따라 6년 동안 배를 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
최재형은 17살이 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이후 군납사업을 하며 부를 쌓았고, 이렇게 번 돈을 항일 독립운동과 동포 지원에 사용했다. 연해주에만 학교 30여개를 세웠다. ‘페치카’(러시아어로 난로)란 별명은 이 때문에 생겼다.
최근에는 그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배후’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최재형은 1908년에는 의병 유격대인 동의회를 조직해 안중근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준 사람도 최재형이었다고 한다.
딸 올가는 회고록에 “우리가 살고 있던 노보키예프스크에 어느 때인가 안응칠(안중근 의사의 어릴 때 이름)이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안인사라고 불렀다.
그는 의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벽에 3명의 인물을 그렸고 그들을 향해 사격연습을 했다. (…) 그의 아이들과 두 명의
아내가 남게 되었다. 엄마는 안응칠의 남은 식구들을 잘 대접하려고 노력했다”고 썼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이 저지른 ‘신한촌 참변’ 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처형됐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묘도 쓸 수 없었다. 1
962년 한국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했지만, 곧 다시 잊혀졌다.
제막식에는 한국에서 ‘역사탐방’을 온 일반인 참석자들도 있었다.
친자매인 서혜란씨(31)와 희연씨(29)는 오로지 최재형 기념관을 보기 위해 우수리스크에 왔다고 했다.
그 길에 기념비 제막식까지 함께하는 행운을 얻었다.
희연씨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 뒤에 최재형이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며 “예전에는
이곳이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을 텐데, 맨몸으로 와 마을을 일구고 같은 민족을 이끌었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언니 혜란씨는 “제막식에서 (최재형 선생의 손자인) 최 발렌틴 선생(82)이 러시아 국가는 따라부르시던데, 애국가는
잘 못하시는 것이 참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기념관 관계자 요청으로 ‘인증샷’용으로 서울에서 가져온 태극기도 기증하고 떠났다.
최재형은 실상 러시아에서도 한동안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제막식에서 만난 손자 최 발렌틴은 “할아버지 성함을
함부로 말할 수가 없고 말하면 안되는 시절이 있었다”며 “자녀들도 피해를 많이 받았다”고 떠올렸다. 최재형 사후
그의 가족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최 발렌틴은 최근 10년간 할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 덕분에 최재형 선생이
유명 인사가 됐다.
많이 노력해준 분들에게, 대한민국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178인중 유일한 생존자
백운호 선생이 14일 충남 천안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있다
조효석 기자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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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8월15일은 기쁨과 고통이 엇갈리는 날이다.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기쁨과 이데올로기로 남북이 분단됐다는 고통이 함께 찾아온다.
광복 74주년인 2019년 8월15일엔 아픔이 더해졌다.
사과를 모르는 일본이 ‘기해왜란’이라는 경제침략을 도발했고 한국이 응전에 나섬으로써 한일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군자는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권리를 침해하고 평화를 깨뜨리려고 침입할 때는 싸워야 하고 일단 싸우기 시작했으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적은 수로 많은 적군을 이길 수 없다는 중과부적을 우습게 만들고 당태종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양만춘 장군, 23전23승으로 넬슨 제독의 존경을 받은 이순신 장군,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뜨거운 피를 헛되게 하지 않고 광복군으로 해방을
쟁취한 김구 주석 등이 그러했다.
기해왜란을 쳐부수고 한국 경제와 국력을 몇 단계 끌어올릴 그 사람은 누구일까. 또 그 사람이 내놓을 묘책은 무엇일까.
◆봉오동전투의 유인섬멸작전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영화 <봉오동전투>(감독 원신연)가 지난 7일 개봉했다. 1920년 6월7일 지린성 왕청현 봉오동에서 있었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첫 대승을 100년 만에 다룬 영화다.
홍범도·안무·최진동이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들은 야스카와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 19사단 소속 월강추격대를 봉오동으로 유인해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됐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독립군은 장교 1명과 사병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만 냈다.
봉오동전투의 대승 비결은 간단하다.
‘강한 적을 험한 지형으로 유인해 섬멸한다’는 것이다.
독립군이 장졸 수는 물론 무기 및 장비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일본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인섬멸
작전이었고 황해철(유해진 분), 이장하(류준열 분), 마병구(조우진 분) 등은 친동생을 일본군에 잃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을 유인하는 데 목숨을 내놨다.
1919년 3월1일 전국에서 일시에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뒤 1년3개월 만에 거둔 봉오동에서의 대승은 독립군의 사기를 한층 높였다.
특히 4개월 뒤인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에서 대첩을 거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항일독립전쟁의 주춧돌이 됐다.
◆맥아더의 ‘공간 내주고 시간 벌기’
맥아더는 김일성이 남침한 직후 파죽지세로 밀릴 때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작전을 펼쳤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필요한 병력과 장비를 한국에 들여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국군과 유엔(UN)군은
낙동강전선을 지켜냄으로써 ‘시간벌기’에 성공했다.
맥아더는 1950년 9월15일에 이뤄진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모든 사람의 반대를 홀로 이겨냈다.
그는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야말로 승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며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많아 상륙작전 하기에 최악의 조건이라서 적도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영국의 제임스 울프 장군이 1759년 캐나다 퀘벡에서 프랑스 몽캄 자작을 무찌른 사례도 꺼냈다.
당시 몽캄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퀘벡시 남쪽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무장한 군대가 절대 기어오를 수 없다고 믿고
방어전력을 취약하다고 생각한 북쪽 강둑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울프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그 절벽을 기어올라
승리할 수 있었다. 이는 한니발이 스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침공함으로써 대승을 거뒀던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맥아더도 ‘휴브리스의 함정’을 피하지 못했다.
휴브리스(Hubris)란 과거에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방법을 우상화함으로써 실패하게 된다는 뜻으로 역사학자
토인비가 사용한 말이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을 궤멸시키고 잃었던 국토를 15일 만에 되찾자 객관성을 잃었다.
그는 원산상륙작전을 다시 시도하고 중공군이 대규모로 압록강을 넘었다는 정보를 애써 무시함으로써 통한의 1·4후
퇴를 자초했다.
◆‘에버레디 작전’과 ‘뉴 코리안 플랜’
6·25전쟁 때 미국은 한국을 두번 포기하려고 했다.
한번은 영천과 다부동이 한때 뚫려 대구가 위험에 빠졌을 때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62만명 정도를 사모아 섬으로 옮겨 대만처럼 피란 정부를 세운다는 ‘뉴 코리아 플랜'을 검토했다. 다행히 국군과 UN군이 영천과 다부동을 되찾음으로써 그 계획은 백지화됐다.
또 한번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UN군이 맥없이 무너지며 ‘중공군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다.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빼앗긴 뒤 평택까지 후퇴한 UN군은 금강까지 밀릴 경우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철수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다행히 워커 장군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이 된 리지웨이 사령관의 반격과 중공군의 보급문제 등으로 다시 서울을 회복
하고 현재의 휴전선 부근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때 미국과 중공은 휴전하기를 원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지루한 협상을 벌였다.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18일 새벽2시 반공포로를 석방시켰다.
미국은 눈엣가시로 등장한 이 대통령이 끝까지 휴전에 반대할 경우 쿠데타를 일으켜 장택상 총리로 새 정부를 구성한다는 ‘에버레디 작전’을 만들었다.
기해왜란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한국의 반도체·자동차 산업 등을 옥죄는 일본산 핵심소재 및 부품을 다른 나라로 수입선을 바꾸거나 국산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 말이다.
정부는 앞으로 7년 동안 7조8000억원+α를 지원, 핵심 소재와 부품 가운데 20개는 1년 안에, 80개는 5년 안에 국산화
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이 대책이 성공하려면 그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간을 잡기 위해 일본을 유인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들이 원하는 명분이나 실리 등이 어쩔 수 없이 내놓아야 할 공간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해 ‘공간’을 내주는 용기와 그 고통을 어루만지며 시간을 확보하는 어짊과 지혜다.
지인용을 서민에게 바라는 것은 직무유기다.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발휘해야 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05호(2019년 8월13~1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