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의 시금석’으로 여겨지는 그린란드 빙하가 1990년대보다 7배나 빠르게 녹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해수면 상승으로 2100년에 최대 4억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때마침 올해 북극 평균기온이 관측 사상 두 번째로 높았다는 보고서도 발표됐다.
북반구 빙하가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유실되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라 나온 것이다.
1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영국 리즈대 등 전 세계 50개 연구기관의 연구자 96명이 참여한 빙하질량균형비교운동(IMBIE) 연구팀은 1992~2018년에 3조8,000억톤의 그린란드 빙하가 사라졌으며, 그 결과 해수면이 10.6㎜ 상승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이 기간 11개 위성들이 관측한 빙하의 두께와 이동 속도 등을 토대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연구팀은 특히 빙하 유실 속도가 가속화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1990년대 그린란드의 빙하 감소량은 연간 330억톤이었으나, 지난 10년은 연간 2,540억톤으로 7배 이상 늘었다.
연구를 주도해온 앤디 셰퍼드 리즈대 교수는 “현재 추세라면 세기말에는 전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총 4억명이 홍수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면서 “일어날 리 없거나 작은 파장 수준이 아니라 해안 지역사회에 치명적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약 10억명이 해발 10m 이하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고 이 중 약 2억5,000만명의 거주지는 해발 1m
이하다.
미국해양대기청(NOAA)은 10일 2019년도 북극 보고서를 발간해, 올해 북극의
평균기온이 관측 사상 역대 두 번째로 높았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북극이
지구의 다른 지역보다 온난화가 2배 이상 빨리 진행돼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NOAA 홈페이지 캡처
같은 날 미국해양대기청(NOAA)도 ‘2019년도 북극 보고서’를 통해 진난해 10월부터 올해 9월까지 1년간 북극 평균기온이 관측 사상 역대 두 번째로 높았다고 밝혔다.
올해 9월 북극의 얼음 면적은 지난 41년간의 위성 관찰 역사상 두 번째로 적었고 얼음 두께도 얇아졌다.
전체 빙하 중 4년 이상 된 얼음이 1985년에는 33%였으나, 올해는 단 1%에 불과했다. 형성된 지 1년 밖에 안 된 얇은
빙하가 북극 얼음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북극은 1990년대 이래 지구의 다른 지역보다 온난화가 2배 빨리 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문가들은 이를 ‘북극 온난화 증폭 현상’으로 부른다. 그런데 이번에 밝혀진 북반구 빙하 유실 속도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라고 외신들은 지적했다. IMBIE 연구에 따르면 2100년까지 해수면은 67㎝가량 상승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해수 온도 상승→중위도 기압차 줄면서 제트기류 극소용돌이 중위도로 내려와 러 우랄산맥 막혀 남하한 찬공기도 한몫
지난달 말 기상청이 발표한 ‘3개월(12월~2020년 2월) 기상전망’에 따르면 올겨울은 평년보다 포근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반도 날씨에 영향을 주는 서인도양과 서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30도 내외로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혹한의 가능성도 열어뒀다. 북극해 얼음면적이 지난 9월 연중 최소면적을 기록해 그 영향으로 대륙고기압이 확장하면서 북쪽 찬 공기가 한반도 쪽으로 내려올 가능성이 높아져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질 때가 잦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문득 “지구 온난화 때문에 지구가 점점 더워져 북극 얼음면적이 평년보다 작아질 정도라면 겨울이 따뜻해야 하는 것 아냐”라는 생각이 들기 쉽다.
‘지구 온난화는 과학자들과 중국이 만들어낸 음모’라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매년 북미 대륙에 폭설과 함께 혹한이 닥치면 자신의 트위터에 “엄청난 눈과 추위가 찾아왔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걱정하는 지구 온난화가 지금 필요할 때가 아닌가”라고 비꼬는 글을 올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북극의 바다얼음(해빙)과 추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극진동, 제트기류, 블로킹 현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2017~2018년 우리나라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데 바로 이 세 가지 현상 때문이었다.
북극진동은 극지방에 있는 차가운 공기의 소용돌이가 수십일, 수년 또는 수십년을 주기로 강약을 되풀이하는 현상을
말한다.
북극 상공에는 북극의 찬 공기가 남하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제트기류가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높아져 북극 해빙이 녹으면서 수증기가 증가하고 그로 인해 시베리아 지역에 내리는 눈의 양이 늘어나고 고기압이 발달하게 된다.
여기에 인도양과 서태평양 지역 해수 온도까지 높아지면 북극과 한반도, 미국, 유럽이 위치한 중위도 지역의 기압차가 줄면서 극지방을 도는 제트기류인 극소용돌이(polar vortex)가 약해져 중위도 지역까지 내려오게 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극지방 온도가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중위도 지역과 비교하면 여전히 얼음장처럼 찬 공기가 중위도 지역까지
몰아닥치는 것이 최근 지구 온난화로 인한 혹한이다.
한반도에 혹한을 부르는 또 하나의 주요한 원인은 ‘블로킹’ 현상이다. 블로킹 현상은 특정 지역에 고기압이 발생해 오랜 시간 머물면서 저기압의 진행경로를 방해하거나 역행시키는 것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한반도에 혹한을 가져오는 것은 카자흐스탄 북부에서 북극해까지 러시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아시아와 유럽 경계를 이루는 러시아 우랄산맥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랄블로킹이다.
북극 상공의 제트기류가 약해져 중위도 지역까지 내려온 북극의 찬 공기가 우랄산맥과 인근에서 형성된 상층고기압에 가로막혀 휘어져 돌면서 한기가 한반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블로킹 현상은 극지방 얼음이 줄어
제트기류의 힘이 약해질 때 강하게 나타난다.
결국 북극진동과 블로킹 현상은 항상 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중위도 지역 겨울철 혹한을 부르는 이들
현상의 근본 원인은 지구 온난화이다.
이 때문에 기상학자들은 “지구 온난화를 막지 못한다면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에는 찜통 더위, 겨울에는 냉장고
한파 같은 극단적인 날씨만 롤러코스터처럼 오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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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북극곰 ‘고래 사냥’ 포착…지구온난화 속 처절한 생존
캐나다에서 굶주린 북극곰이 벨루가 고래를 사냥하는 순간이 포착됐다.
기후 변화로 북극곰의 생존 방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BBC어스는 30일(현지시간) 자연다큐멘터리 ‘일곱 개의 세계 하나의 행성’(Seven Worlds one Planet)에서 캐나다
북동부 허드슨만의 북극곰 관찰기를 방송했다.
자연 다큐멘터리 거장이자 저명한 동물학자인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은 이날 방송에서 캐나다가 지구상 그 어떤 나라
보다 빨리 따뜻해지고 있다면서 북극곰의 생존을 우려했다. 실제로 BBC는 허드슨만에서 벨루가 고래 사냥에 나선 북극곰 무리와 마주쳤다.
곰들은 바위 위에서 벨루가 고래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등 뒤로 뛰어내려 머리를 물어 고래를 사냥했다.
사진=BBC1
애튼버러 경은 “한 무리의 북극곰이 먹이가 부족한 여름을 버틸 기발한 방법을 찾아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행성을 변화시키고 있고, 계절은 더욱 예측이 어렵게 달라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야생동물이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지상 최강의 포식자 북극곰의 주 먹이는 물범이다.
물범이 얼음에 나 있는 ‘숨구멍’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낚아채는 방식으로 사냥한다.
물고기나 새, 순록 등을 잡아먹기도 하며 여름에는 나무 열매나 해초 등도 먹는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해빙의 면적이 줄어들면서 사냥도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최근 몇 년 사이 고래 사체를 먹거나 고래를 직접 사냥하는 북극곰이 쉽게 눈에 띈다.
▲ 사진=극지 연구
2014년 봄 노르웨이 북극연구소도 얼음에 난 숨구멍 옆에서 흰부리돌고래 사체를 뜯어먹는 북극곰을 발견했다.
당시 연구팀은 겨울과 봄이면 두껍게 어는 북극해가 온난화로 녹으면서 우연히 흘러온 흰부리돌고래가 숨구멍을 찾아 머리를 내밀었다가 북극곰의 먹이가 된 것으로 추정했다.
2017년 10월에는 시베리아 북극 해안가에 무려 230마리가 넘는 북극곰이 고래 사체 주변에 몰려들었다. 단독생활을
하는 북극곰이 한데 모여 먹이를 먹는 모습은 먹이 부족에 시달리는 북극곰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줬다.
미국 워싱턴대학 북극과학센터 크리스틴 라이드레 박사는 “만약 지구온난화가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2040년쯤에는
해빙 없는 북극의 여름을 보게 될 것”이라면서 “지난 100만 년 동안 북극곰 서식지에서 일어난 그 어떤 최악의 상황도 뛰어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구온난화는 일종의 ‘거대사물’ 광대하고 복잡해 이해 못할 뿐 외계인, 낯설지만 일상에 있듯 온난화 역시 먼 훗날의 일 아냐
인간 vs 자연 이분법적 사고가 자연을 정복하는 대상으로 인식 인간은 사물보다 우월하지 않아 무한한 가능성은 사물 자체있어
지구 온난화는 언제 등장하는가? 우
리는 이상 기후에 관한 뉴스, 과학 논문, 정책 토론, 거리 시위에서 지구 온난화를 보고 듣는다.
가끔은 너무 더운 여름과 이상하리만치 온화한 겨울을 지내며 이것이 지구 온난화의 여파인지 되묻는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가 특이한 상황, 특정한 시점에서만 등장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고 자기 삶의 문제로 삼기는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미국 철학자 티머시 모턴의 생각은 다르다. 모턴에 따르면 자동차에 시동을 걸 때에도 지구 온난화는 등장한다. 시동을 거는 행동에는 사물, 운동, 공간, 시간 등에 관한 갖가지 판단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지식의 수식화와 시공간을 평평하고 균일한 용기(容器·container)로 보는 시각이 반영된 철학적·이데올로기적 판단”이기도 하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일상적 행동은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연을 규정하며 지구 온난화의 빌미를
제공한다.
모턴은 다분히 일상적인 존재인 지구 온난화를 일종의 ‘거대사물(hyperobject)’로 본다.
그는 거대사물을 “인간에 비해 광대한 시간과 공간에 펼쳐져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한다. 거대사물에서 ‘거대
(hyper-)’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해서 압도적이라는 의미고, ‘사물(object)’은 무한에 가까운 사물(객체)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인간의 지식 체계로 담아내기에는 너무 크고 인간과의 관계로만 쓰임새를 정하기에는 너무 다채로운 것이 바로 거대
사물이다.
따라서 거대사물을 깔끔하게 이해하거나 정의하기는 불가능하다.
거대사물은 마치 외계인처럼 ‘낯설고 낯선 존재(strange stranger)’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대사물이 외계인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거나 먼 미래에야 온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거대사물이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인간이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 온난화를 먼 곳의 일, 훗날의 일로 여기는 것도 착각이다.
그 낯설고 낯선 존재는 바로 지금 우리의 일상에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거대사물을 이해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기에 이것을 ‘느껴야’ 한다.
거대사물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은 감각과 감성으로 작동하는 미학적 영역(aesthetic dimension)에서 경험해야
한다.
모턴은 거대사물의 특징을 끈적거림(viscosity), 비지역성(nonlocality), 시간적 파동(temporal undulation), 페이징
(phasing), 상호사물성(interobjectivity) 등으로 정리한다.
거대사물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일상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고,
가늠하기 힘든 광범위한 연결성 때문에 특정 지역에 국한할 수 없다.
또 인간의 직선적이고 측정 가능한 시간과 달리 유동적이고 무한해 보이는 시간대에 존재하기에 있다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거대사물은 직접 경험하기 어렵다.
“공유된 감각적 공간에 있는 다른 물체”를 통해서, 즉 인과 관계가 명확하지않은 무언가로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보이기에 그 진위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런 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거대사물이 ‘고차원적 공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거대사물과 기묘한 인과 관계에 있는 사물들을 통해 거대사물의 존재를 극히 일부만 감지하게 된다. 이와 똑같은 특징들은 지구 온난화에도 나타난다.
지구 온난화는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사소한 일상 곳곳에서 나타난다. 또한 특정한 국가나 지역의 문제로 국한할 수
없으며, 최근 인류세에 관한 여러 논의에서 암시하듯 인류 종말 너머의 시간대까지 펼쳐진다.
태양계와 블랙홀처럼 인간과 무관하게 탄생한 거대사물도 있지만, 21세기의 세계가 인간이 만들어 낸 거대사물로 넘쳐 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지구 온난화 외에도 인터넷이나 핵 실험이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매일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사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링크 몇 개만으로도 수십 개의 또 다른 사이트로 연결돼 원하는 정보를 자유롭게 습득한다. 하지만 웹 공간의 전체 규모는 한 명의 사용자가 일상적으로 접근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설 만큼 광대하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인터넷을 이용하면서도 인터넷 전체의 규모, 속도, 변화를 잘 실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핵 실험에 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곤 한다. 아무리 가까운 국가에서 핵 실험이 벌어져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핵 실험을 정치적·군사적 문제로만 보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나 중요한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초의 핵 실험에서 발생한 물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공기, 먹는 음식, 사용하는 제품 곳곳에 남아 있다.
핵 실험은 사람들의 막연한 두려움과 일상의 위안 속에 숨겨져 있지만 거대사물로서 엄연히 존재한다.
눈앞에 두고도 보거나 느끼지 못했을 뿐 오늘날의 일상은 거대사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거대사물을 논하는 모턴의 작업은 그가 이전부터 지속해 온 자연 및 생태학 연구와도 관련이 깊다.
모턴은 초기작 ‘자연 없는 생태학’에서 생태와 환경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태 환경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지적하며 그야말로 ‘자연 없는 생태학’을 제안한다.
자연은 전통적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다양한 개념을 대신하는 은유로 쓰이거나 엄격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로
그려지면서 인간과 대비되는 존재로 인식됐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이 확고해지면서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 사용하거나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모턴은 자연을 위한다는 이른바 ‘생태학적 전환’조차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대상으로 상정한 채 여전히 이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이렇듯 자연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를 서로 별개라고 보거나 기껏해야 이들이 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은 환경 문제를 경제 위기, 테러리즘, 지역 분쟁보다 경시한다.
한편 환경 문제가 인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느냐는 질문은 언뜻 가치 판단을 요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구도를 재생산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모턴은 진정한 생태학적 전환을 이룩하려면 자연 개념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 정도로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이로써 다시 보고 느끼며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턴이 특별히 새로운 태도를 내세운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모턴의 논의는 일상을 미학적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의 시선에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들은 새롭고 놀라운 무언가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가늠하기 힘든 거대사물일 수도 있고, 새로운 감각을 자아내는 예술 작품일 수도 있다. 하
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 자체의 새로움을 느낀다면 사람들은 평범한 사물 앞에서도 충만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모턴은 객체 지향 존재론에 자연스레 합류한다. 객체 지향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도구론이나 사물 개념을 바탕으로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이 발전시킨 철학 사조로, 20세기 후반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비인간 존재를 탐구한 포스트 휴머니즘, 신사물론(new materialisms)과도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하먼을 비롯한 객체 지향 존재론자들은 사물의 무한한 가능성이 관계가 아닌 사물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어떤 사물이 익숙한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색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물에 마술과
같은 내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모턴은 저서 ‘거대사물’에서 잠시 언급했던 객체 지향 존재론을 다른 저서인 ‘사실주의적 마술’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객체 지향 존재론의 입장에서 인과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소개하며 “인과 관계란 전적으로 미학적 현상”이라고 역설한다. 중요한 점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런 미학적 현상에 전혀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모턴이 보기에 인간은 여타의 사물보다 전혀 우월하지 않은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작 ‘인류’에서는 객체 지향적 관점에서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humanity) 대신 ‘공생적 실재
(the symbiotic real)’의 일부라는 뜻에서 인류(humankind)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결국 공생적 실재로서 일상이 새로운 이유는 일상에 놀라운 사물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모턴은 이런 이유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사물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