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합뉴스]](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1/11/41ea455c-87e4-4c48-ac2c-04fdc7e45b24.jpg)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합뉴스]
반미 외치던 이란, 여객기 격추 고백에 '체제 비판' 틀었다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이란 혁명수비대, 미사일 발사 시인
수도 방공부대 실수 사흘 만에 인정
이란·혁명수비대 이미지 동시 실추
국민 뽑은 대통령에 군 통수권 없고
사제인 최고지도자가 가진 신정체제
사고 계기 개선 목소리 나올지 주목
대학가, 최고지도자 비판 시위 재개
지난 8일 오전 6시쯤(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의 이맘호메니이 국제공항을 출발한 우크라이나 국제항공(UIA) 소속
PS752편 보잉 737-800 여객기가 이륙 2분 만에 추락한 사건이 이란 방공 미사일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파장이
확산하고 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당시 이란 82명, 캐나다 63명, 우크라이나 11명, 스웨덴 10명, 아프가니스탄 4명, 영국·독일
각 3명 등 다국적 탑승객 167명은 전원 숨졌다.
지난 8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이맘호메니이 공항에서 이륙 직후 추락한 우크라이나
여객기의 잔해. 외부에서 파편이 기체를 때린 흔적이 보인다. 이란은 11일이 되어서야
혁명수비대가 발사한 미사일이 167명이 탑승한 이 여객기를 격추했음을 시인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란, 여객기 피격 사흘 지나서야 시인
BBC 방송에 따르면 이란군 합동참모본부는 11일 성명을 내고 752편이 “이를 적기로 오인한 사람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격추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은 사고 직후 서방에서 제기했던 격추설을 ‘음모론적인 심리전’이라며 전날까지 완강하게 인정하지 않다가 이날
사고 사흘 만에 격추를 인정했다.
성명은 “오인 발사의 책임자는 반드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며 “군의 작전 절차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이며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까지 거론한 것이다.
그만큼 스모킹 건, 즉 절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드러났다는 의미다.
그러면서도 군 성명은 “사고기는 테헤란 외곽의 민감한 군사 지역 상공을 통과하고 있었다” “미국의 모험주의가 일으킨 위기 상황” 등을 언급하며 책임 회피에 급급한 인상을 주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 방공사령관이 지난 11일 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됐다는 소식을 듣고 죽고 싶었다“라며
’모든 책임을 인정하고 어떤 결정도 달게 받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혁명수비대 방공사령관, 추락한 영웅으로
혁명수비대의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 방공사령관은 이날 회견에 나와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됐다는 소식을 듣고 죽고 싶었다”라며 “모든 책임을 인정하고 어떤 결정도 달게 받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공부대는 이맘호메이니 공항을 이륙한 여객기를 적의 전투기 공격에 앞서 발사된 크루즈 미사일로 판단
했다”며 “이를 교차 확인해야 하는데 통신 시스템이 원활하지 못해 조급하게 나쁜 결정을 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자데는 지난해 6월 호르무즈 해협 인근 상공에서 미군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를 이란이 자체 개발한 대공 미사일로 격추하면서 영웅이 됐지만 167명이 숨진 이번 사고의 책임을 져야 할 처지가 됐다.
이란은 군대가 2개인 독특한 제도를 운영한다. 지역 방어를 맡는 정규군과 함께 큰 작전을 맡는 정예 혁명수비대를 별도로 운영한다. 두 개의 군대 모두에 육해공군이 모두 있다.
군의 반란을 우려해서다. 그 중에서 혁명수비대는 체제수호 임무를 맡고 있으며 예산과 대우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혁명수비대의 고위 지휘관이 공개적으로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여객기 사고가 군 당국의 실수였음을
시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로하니 대통령, 사과하며 ‘처벌’ 강조
1979년 이슬람혁명의 상징인 루홀라 호메이니의 이름을 딴 국제공항에서 막 이륙한 민항기를 수도권 대공 방위를 책임진 혁명수비대 방공부대에서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한 사건을 무려 사흘 만에 인정한 이번 사건으로 이란의 국가
이미지는 나락에 떨어졌다.
‘정예’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혁명수비대도 평판이 추락한 것은 물론 책임을 져야 할 처지가 됐다.
발표 직후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트위터에 “이란은 참혹한 실수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이번 사건은 용서할 수 없는 비극”이라고 밝혔다.
로하니 대통령은 이어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와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각각 통화하고 사과했다. 캐나다는 2012년 이란의 시리아에 대한 지원과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을 문제 삼아 국교를 단절한 상태인데도
로하니 대통령이 트뤼도에 전화를 걸 정도로 상황이 엄중했다.
CNN 방송에 따르면 트뤼도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의문이 해소되기 전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하고 이란에 정의를 요구했다. 젤
렌스키 대통령은 이란에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희생자 운구와 보상을 요구했다.
지난 11일 이란 테헤란의 아미르카비르 공대 앞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이 모여
집회를 열고 우크라이나 여객기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부와 혁명수비대를
비판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란 대학생, 반정부 시위 재개
여기까지는 이란의 뒤늦은 고백에 대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문제는 이란 국내에서 더욱 크게 터졌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이란 혁명수비대가 우크라이나 여객기 피격을 밝힌 11일 오후 테헤란의 아미르카비르
공대 앞에는 수백 명의 대학생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희생자 추모를 이유로 모였지만 이내 교문 앞 도로에서 “부끄러워 하라” “거짓말쟁이에게 죽음을” 등 구호를
외치며 민항기 격추라는 초유의 사고를 일으킨 혁명수비대와 정부를 비판했다.
“거짓말쟁이에게 죽음을”은 이란이 반미시위에서 주로 외치는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비튼 것이다. 이들은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를 비판하는 구호도 외쳤다.
이란에선 지난해 11월 1일 정부가 석유 보조금을 전격 삭감해 석유 값이 L당 1만 리알(약 100원)에서 1만5000리알
(약 150원)로 50% 인상되면서 수도 테헤란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거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비롯한 강경파의 주도로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란에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란이 국민 저항에도 석유 보조금을 폐지한 이유는 경제난에 따라 재정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악화한 경제에 민심 이반 현상
2015년 핵합의가 가동하면서 일부 경제제재가 풀렸던 이란은 2017년 3.8%의 경제성장률을 이뤘다.
하지만 미국이 핵합의에서 탈퇴하고 경제제재를 재개하면서 경제성장률은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2018년 추정치가 -4.9%로 악화했으며 2019년 전망치는 -8.7%로 더욱 떨어졌다.
물가도 40% 정도 올랐다.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특히 의약품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이처럼 이란은 경제가 심하게 뒷걸음치고 민생에 타격을 주면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정부는 재정 부담을 줄이려고 석유 보조금을 줄였으나 택시 기사와 배달업자는 물론 정부의 무능함과 모험주의를 비난하는
대학생 등의 저항에 부딪혔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이란이 167명에 탐승한 자국 여객기를
격추한 것에 대해 진상 규명과 사과, 그리고 보상을 요구했다.
[EPA=연합뉴스]
솔레이마니 암살로 중단된 시위 재개
이런 저항은 지난 3일 솔레이마니가 이라크에서 피살되면서 일시적으로 멈췄다. 미국의 공격으로 숨진 솔레이마니에
대한 추모와 그를 순교자로 만드는 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8일의 우크라이나 여객기 추락이 11일 이란 방공망의 미사일 때문으로 드러나면서 정부와 체제에 대한 국민
저항이 다시 고개를 든 셈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날 이란 SNS에선 12일 오후 테헤란의 어저디(자유) 광장에서 추모 집회를 열자는 제안까지 돌아
다녔다.
아저디 광장은 1979년 이슬람혁명 당시 테헤란 시민이 모여 시위를 벌이던 상징적인 장소다.
지난 6일 이곳에선 지난 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미군 드론 공격으로 숨진 거셈 술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의 영결식이 열려 주최측 추산 100만 명 이상이 모여 “미국에 죽음을” 등 반미 구호를 외쳤다.
혁명 구호와 반미 구호로 넘쳤던 광장이 체제를 비판하는 구호로 가득 찰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란 이슬람혁명의 상징인 어저디 탑. 이란 대학생들이 12일 이곳에서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채인택 기자]
군 통수권자도 없는 대통령이 설거지
문제는 이번 사고의 뒤처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로하니 대통령이 이란 체제에선 군 통수권자도 국가원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식 명칭이 ‘이란 이슬람공화국’인 이란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 아니라 최고지도자(라흐바르 에 모아잠)로 불리는
이슬람 시아파 성직자다.
1979년 이란혁명 직후 만든 헌법은 ‘지도자(라흐바르)’가 국가원수와 최고 종교지도자는 물론 군 통수권자와 사법부·
입법부·행정부의 상징적 수장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최고지도자가 종교는 물론 국정까지 좌지우지한다.
사실상의 정교일치 또는 종교우위 체제다.
국민이 투표로 뽑은 로하니 대통령은 행정부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런 로하니가 자신이 통수권도 없는 혁명수비대가 저지른 여객기 격추 사건의 책임을 온통 도맡고 있는 셈이다.
신정 체제의 모순이 온통 드러나는 순간이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그에 걸맞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로하니 대통령이 이날 사건의 원인이 이란군의 실수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책임 있는 모든 사람이
처벌받도록 하겠다고 유난히 강조했다는 사실에 주목이 갈 수밖에 없다.
이란의 군 통수권과 인사권을 가진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 국민이 아닌
이슬람 시아파 율법학자들이 선출한 최고지도자는 종신직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성직자인 최고지도자가 대통령 임면권까지
이란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는 최고지도자에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다. 최고지도자는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최종 임명하는 것은 물론 의회의 3분의 2 찬성을 얻으면 해임할 권한도 있다. 사법부와 군부의 인사권도 쥐고 있다.
임기 8년의 대법원장과 국영방송 사장에 정규군과 혁명수비대, 육·해·공군 수장까지 임명하고 해임한다. 서구에서 이란을 사실상의 신정(神政)국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종신직인 최고지도자는 전문가회의(지도자 선출 전문가회의라고도 함)라는 합의체에서 선출한다.
이 회의는 보통·직접 선거로 뽑힌 임기 8년의 의원 86명으로 이뤄졌다.
전문가회의는 최고지도자 다음 가는 최고 권위의 조직이다.
헌법을 해석하고 대통령과 의원 선거를 감독하는데 입후보자 자격을 심사·인증하는 막강한 권한이 있다.
국회가 가결한 법안이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부합하는지 심사해 합법성을 보증하거나 거부할 수도 있다.
의회 위에 종교조직이 옥상옥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의회도 시아파 사제가 감독
이런 조직이 생긴 이유는 79년 이란혁명을 주도한 아야툴라 호메이니(1902~89)의 이상 때문이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율법학자와 세속 법학자를 망라한 법학자들이 지배하는 제정일치의 법치를 꿈꿨다.
최고지도자를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보호자’로도 부르는 이유다.
전문가회의는 최고지도자의 활동을 감독하는 권한도 갖고 있다.
각 주도의 중앙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주도하는 이맘(이슬람 예배지도자이자 종교지도자)을 임명하는 권한도 있다.
하지만, 임기 8년의 전문가회의 의원이 종신직인 최고지도자를 견제하기란 쉽지 않다.
이란에는 국민이 뽑은 의회(마슈레스)가 존재하지만 이슬람 법학자 6명과 일반 법학자 6명 등 모두 12명으로 이뤄진
감독자평의회가 있어 상원 역할을 한다.
이슬람 법학자 6명은 최고지도자가 지명하며 일반 법학자는 대법원장이 지명한 사람 중에서 의회에서 최종 선출한다.
이란이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3일 미군 공격으로
숨진 것과 관련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의 아인 아사드 공군기지에
지대지 미사일 수십 발을 발사했다고 이란 국영 TV가 8일 보도했다.
(사진=이란 국영방송 캡처) [뉴시스]
현 최고 지도자, 혁명수비대 감독관 출신
이란의 초대 최고지도자는 호메이니가 맡았다.
그가 1989년 세상을 떠나자 오른팔이던 알리 하메네이가 자리를 이어 지금까지 맡고 있다.
하메네이는 어려서 이슬람 종교학교에 다닐 적 호메이니의 제자였다.
그는 혁명 전인 60년대 이슬람 활동으로 친미 샤(이란 군주) 정부에 체포되기도 했다. 샤 정부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피신했다.
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샤가 해외로 망명하자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프랑스 파리에서 귀국한 호메이니는 제자인 하메네이를 수도 테헤란의 금요예배 이맘에 임명했다.
자신의 오른팔로 공인한 셈이다.
하메네이는 국방부 장관과 혁명수비대 감독관을 지내는 등 혁명 정부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1981년 폭탄을 이용한 암살 기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그는 그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95%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돼 3대 대통령에 올랐다.
유권자들이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복심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메네이는 혁명수비대 감독관과 대통령이라는 세속 권력을 경험하고 최고지도자를 맡고 있다.
이란 국기가 게양된 뒤로 수도 테헤란 시내가 보인다.
[채인택 기자]
엉성한 나라 만든 체제 개혁 목소리 나올까
이런 신정체제에서는 군과 공직자는 국민이 아니라 최고지도자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
실제로 이란에서는 혁명 유족이나 참가자를 중심으로 능력이 아닌 낙하산으로 공직을 맡은 사람도 적지 않아 ‘불공정
’과 ‘특혜’ 시비를 불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란에서 전근대적인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지 주목된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지난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이란은 그동안 반미와 반서구, 반사우디아라비아를 외치면서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을 지원하면서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
이 과정에서 큰 비용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은 여전히 가난하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로 이란의 2019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506달러로 세계 95위다.
미국의 경제제재 탓도 크지만, 국가의 번영과 국민 복지보다 이슬람 혁명의 유지와 확산에만 관심을 가진 신정체제
지도층의 인식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번이 체제 개혁의 계기가 될 것인지 관심이 쏠린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이란 SNS에 올라온 대학생 시위 장면.
트위터 캡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1일 올린 이란 반정부 시위 지지 트윗.
트위터 캡쳐
'강골' 이란의 이례적 책임 자인…'스모킹건' 나온 듯
미와 대치 속 격추 확인되면 국제 여론 악화 판단"
미 무인기 격추 혁명수비대, 대공 방어능력·국민 지지 '퇴색'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8일(현지시간) 새벽 이란 테헤란 부근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 여객기 추락 사건과 관련, 이란군이 사흘만인 11일 격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이란 민간항공청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여객기가 격추된 것이 아니다"라고 단정했으나 하룻밤 만에 180도 태도가 바뀐 것이다.
비록 이라크 미군 기지에 대한 이란 혁명수비대의 미사일 공격 직후 미국의 반격을 예상해 전군이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한 상황에서 발생한 의도치 않은 실수라고는 했지만, 민항기를 군이 격추했다는 치명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각종 무력 사태와 분쟁을 이란 탓으로 돌리는 서방의 전방위 공세에도 흔들리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던 이란이 여객기 추락과 같은 대형 사건에 신속히 책임을 자인한 것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이란은 이번 여객기 추락을 놓고 서방 정부와 언론이 격추설을 제기하자 '이란을 겨냥한 악의적 심리전'이라고 일축
하면서 기계적 결함을 사고 원인으로 사실상 확정했다.
사고 조사를 총괄하는 이란 민간항공청장은 10일 오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조사 결과가 나와야 사고 원인을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격추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격추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이란 측은 "격추 의혹을 들먹이는 서방은 증거를 이란에 달라. 미국 보잉사(제조사)도 조사에 초청했다"라며 자신의
결백을 자신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에서 급변해 이란이 고개를 숙이게 된 배경엔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 증거, 즉 '스모킹 건'이 확인됐고 이를
더는 감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란을 실시간으로 정밀 감시하는 미국의 군사 정찰 위성의 자료와 추락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외국 언론에 의해
공개되면서 음모론 수준이었던 격추설이 대세론으로 굳어지는 흐름이었다.
일각에선 미국이 이란 내 이익대표부 역할을 하는 주 테헤란 스위스 대사관을 통해 격추를 증명하는 자료를 보냈고,
상대방이 격추를 입증할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다고 판단한 이란이 먼저 책임을 자인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완전히 진실을 덮을 수 없을 바에야 먼저 '자백'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는 터키 주재 자국 총영사관에서 자말 카슈끄지가 사우디 정보팀에 살해되자 관련성을 극구
부인하다 터키와 미국에서 조금씩 기밀 정보가 흘러나오면서 일방적으로 궁지에 몰린 적이 있다.
'미사일 격추'라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한 이란 정부와 군부는 미국 등이 어느 정도로 확실한 자료를 확보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카슈끄지 사건 때처럼 서방 언론을 통해 격추를 증명하는 정보가 조금씩 흘러나와 자신을 옥죄는 상황을 우려했을 수 있다.
사우디는 그나마 친서방 외교와 무기 구매 등으로 국제 여론전을 주도하는 미국과 서방을 달랠 수 있었지만, 이들과
사실상 외교가 단절된 이란으로서는 격추설을 계속 부인했다가는 국제무대에서 회복할 수 없는 고립을 맞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정치·군사적 긴장이 첨예한 상황에서 빼도 박을 수 없는 증거를 외부에서 먼저 제시해 '외통수'에 몰리기 전에 자인하는 게 국제 여론전에서 그나마 유리하다고 이란 지도부가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이 대이란 경제 제재를 강화하고 제3국의 동참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이란은 우군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처지다.
이번 사고로 친구를 잃은 캐나다 에드먼턴 이란교민회의 간부 페이먼 파르세연은 AP통신에 "이란 정부가 책임을 인정한 것은 옳은 판단이다"라며 "이란이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체면을 차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란이 신속히 책임을 인정한 데는 1988년 미국의 이란 민항기 격추 사건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이던 당시 이란항공 소속 여객기가 테헤란에서 두바이로 향하던 중 걸프 해역 상공에서 미 군함이 쏜 미사일에 격추돼 이란 국민 290명이 죽었다.
당시 미국은 적기로 오인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란은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손해 배상뿐 아니라 지금껏 정치적으로 미국을 압박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1979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에 444일간 억류됐던 미국인 52명과 같은 수의 이란 내 표적을 특정했다고 하자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숫자 290'을 기억하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란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은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공격하는 불법적이고 비인도적인 행태를 하는
곳이라고 비판하고 미국과 비교해 도덕적, 법적 우월성을 과시하곤 했다.
익명을 요구한 테헤란의 정치평론가는 11일 연합뉴스에 "미국과 대치 국면에서 힘에서 열세인 이란은 명분에서 우위를 차지해 균형을 이루려 한다"라며 "잘못을 신속히 인정하는 편이 국제적 고립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외부에서 격추 증가가 계속 제시되는 데도 이를 무시하고 이란 당국이 끝까지 격추를 부인하면 국내적으로도
지도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냉소가 커진다"라며 "차라리 선제적으로 책임지는 지도부의 모습이 국내 정치 측면에서도 낫다"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건으로 이란 군부도 국내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될 전망이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지난해 6월 호르무즈 해협 부근 상공에서 미군의 첨단 무인기를 격추, 국내외에 깜짝 놀랄만한 대공 방어 전투력을 증명했다.
이란 내부에서도 혁명수비대의 대공 방어 능력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또 미국의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살해를 미사일로 보복한 혁명수비대에 대한 이란 내 지지도도 높은 편이다.
지난해 11월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지도부를 향한 이란 국민의 불만이 커졌지만 솔레이마니 사령관 폭사, 미사일
대응이 이어지면서 다시 지지 여론이 결집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런 우호적인 여론이 무르익기도 전에 같은 날 발생한 민항기 격추로 이런 국민적 지지는 물론 혁명수비대가 자랑하는 대공 방어능력도 퇴색되고 말았다.
아울러 이번 여객기 격추로 미군 기지 미사일 공격 뒤 더 강력한 추가공격을 경고했던 이란 군부가 당분간 군사 행동에 위축될 수 있고 악화한 국제 여론을 고려해 미국에 대한 직간접적 무력 대응 수위도 자제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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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실책' 여객기격추에 당황한 이란 "책임자 엄벌" 약속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서방의 적대적 심리전'으로 치부한 우크라이나 여객기의 격추설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이란 지도부는 책임자를 엄벌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하면서 신속하게 진화에 나섰다.
이란 파르스통신은 11일(현지시간)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가 긴급히 열린 최고국가안보회의에서 여객기 격추 관련 정보를 보고받았고, 이를 대중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란 사법부도 "사법수 수장 에브라힘 라이시가 이날 군 사법부에 이번 참극에 대한 법적인 조처를 하기 위한 서류를
취합하라고 지시했다"라며 "책임자는 군사재판을 통해 엄벌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끔찍한 이번 사태의 진상을 명명백백 규명해야 한다"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책임자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처벌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미사일을 쏜 당사자인 이란 혁명수비대도 사건 경위를 자세히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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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수비대 로고
[혁명수비대 홈페이지]
이란 혁명수비대 "여객기 격추에 죽고 싶었다" 통렬한 반성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이란 혁명수비대의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 대공사령관은 8일(현지시간) 테헤란 부근에서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이란의 미사일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죽고 싶었다"라고 11일 말했다.
이란의 정예군인 혁명수비대의 고위 장성이 공개적으로 작전 실패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는 장면은 사실상 처음이다.
하지자데 사령관은 그러면서 "그런 사건을 차라리 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이번 격추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인정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6월 호르무즈 해협 부근 상공에서 미군의 첨단 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를 이란에서 자체 개발한 대공
미사일로 격추하면서 이름을 높인 이란의 유력 장성이다.
그러나 이번 여객기 격추 사건으로 혁명수비대 조직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혁명수비대는 8일 새벽 이란의 미군 기지 공격 뒤 미국의 반격에 대비해 대공 부대가 최고의 경계상태를 유지하던
중 군사구역 상공으로 진입한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적기로 오인, 대공 부대가 의도치 않게 실수로 격추했다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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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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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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