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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Grieg-"Peer Gynt" Suite No.2, O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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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구성

노르웨이 국민주의 음악의 대가 그리그는 1843년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북해로 새우잡이를 왔다가 노르웨이에 정착한 스코틀랜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노르웨이 여성이었다.

그리그가 태어났을 당시 노르웨이는 1536년에 덴마크에 병합되어 약 300여 년간의 지배를 받았고 1814년부터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파한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노르웨이가 독립국이 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고 하니 그리그가 태어난 1843년은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 때(1858년)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한다.

 

이 시절 클라라 슈만이 연주하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도 들었고 바그너의 <탄호이저>도 여러 번 보았다고 전해진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음악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교류했다.

 

그리그는 1865년에 로마를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된다.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16(1868)을 연주한 리스트는 그리그를 극찬했다고 한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에 몰두했다.

 

1867년에 오슬로 음악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부터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리그가 <페르 귄트>를 작곡한 것은 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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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극작가 입센의 작품에 음악을 입히다

 

작곡가들의 작품을 작곡 분위기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확신에 의해서 감전된 듯 써나가는 작품이 있고, 반신반의하며 회의 속에서 작곡하는 곡이 있다고 할 때

<페르 귄트>는 명백히 후자에 속할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리그는 평소 자신의 음악 스타일이 서정적이라 극음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페르 귄트>를 처음 의뢰받았을 때도 반신반의했었다고 한다.

돈 때문도 아니었고 단지 주제가 음악적이지 않아 아무런 영감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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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르웨이가 낳은 위대한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위촉을 받고 힘을 내 작곡에 임한 결과, 그리그의 최고 명곡일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걸작 <페르 귄트>가 탄생했다.

그리그는 의뢰를 받은 31세 때 이 곡을 쓰기 시작했고, 다음해 여름에 완성했다.

 

처음에는 피아노 2중주 형식으로 출판했다가 뒤에 오케스트라로 편곡했다.

이 극음악은 5곡의 전주곡을 비롯하여 행진곡ㆍ춤곡ㆍ독창곡ㆍ합창곡 등 모두 23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

입센은 그리그에게 자신의 작품 <페르 귄트>에 곡을 붙여줄 것을 의뢰했다.

 

헨리크 입센이 노르웨이 민속설화를 소재로 해서 쓴 <페르 귄트>의 환상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페르 귄트는 부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재산을 낭비하고 몰락해버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과부가 된 어머니 오제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페르 귄트는 대단히 게으른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는 자신이 잘될 것이라 큰소리치며 꿈을 꾸는 몽상가이자 방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돈과 모험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면서 기적적인 모험을 겪는 페르 귄트는 남의 부인을 빼앗기도 하고, 험준한 산에서

 마왕의 딸과 같이 지내기도 한다.

 

농부의 딸인 솔베이가 나타나 서로 사랑을 맹세하지만, 페르 귄트는 애인인 솔베이를 두고 늙은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다. 페르 귄트는 다시 먼 바다로 떠난다.

 

아프리카에서는 추장의 딸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는 등

부와 모험을 좇아 고뇌와 유랑의 모험을 하던 페르 귄트는 끝내 몰락한다.

그는 노쇠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다.

 

 

 

 

부와 모험을 좇아 유랑하는 페르 귄트의 모습을 그린 삽화.

 

고향 산중의 오막살이에는 솔베이가 페르 귄트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발이 된 채. 그리하여 페르 귄트는 그를 사랑하던 여인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그는 후에 이 극음악 가운데 가장 뛰어난 4개의 작품을 뽑아 제1모음곡’으로 하고 그 후에 다시 4곡을 선정하여

‘제2모음곡’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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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곡 신부의 약탈과 잉리의 탄식 [Der Bruderovet Ingrids Klage (Ingrid's Lament)]

 

원곡에서는 2막의 전주곡이다.

 신부의 약탈이라는 짧은 테마가 관현악을 통해 격렬하고 야성적인 절규를 하게 된다.

페르 귄트는 신부를 약탈해 산으로 가지만, 곧 그 여자에게 권태를 느껴 새로운 꿈을 그리며

 깊은 산으로 도망치게 된다.

처음에는 약탈을 묘사한 음악이 나오지만나중에는 의지할 데 없는 탄식을 묘사하고 있다.

 

 

 

Basil Cameron, cond.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Honey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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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곡 아라비아의 춤 [Arabischer Tanz (Arab Dance)]

 

4막에 나오는 아라비아 추장의 장면이다.

경쾌한 활기를 띤 춤곡으로 동양의 이국적인 매력에 반해버린 페르 귄트의 심리 상태를 묘사했다.

페르 귄트는 마치 예언자처럼 가장하고 춤을 구경한다.

아라비아의 아름다운 소녀들은 “예언자가 나타났으니 플루트와 탬버린이여 기뻐 소리를 외쳐라.” 하면서 합장하며

 춤을 춘다.

 

 

 

Oivin Fjeldstad & LSO, cond.

London Symphony Orchestra

 

제3곡 페르 귄트의 귀향 [Peer Gynts Heimkehr (Homecoming)]

 

 

5막에 나오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해안의 저녁이다.

페르 귄트는 미국에서 금광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돌아가는 길에 폭풍을 만나 배가 부딪혀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알몸뚱이가 된다.

그리그는 천지를 뒤엎는 큰 폭풍우의 정경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Stephen Gunzenhauser, cond.

CSSR State Philharmonic Orchestra

 

제4곡 솔베이의 노래 [Solveigs Lied (Solveig's Song)]

 

페르 귄트의 귀향을 애타게 고대하는 솔베이의 심정을 노래한 너무나 유명한 이 멜로디는 이 극에서 세 번 나온다.

꿈을 그리면서 헤매던 몽상가 페르 귄트는 기쁨과 슬픔이 얽힌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지치고 늙은 몸으로 고향의 오막살이로 돌아오게 된다.

 

 백발이 된 솔베이는 페르 귄트와 만나게 되는데, 그는 자기를 위해 기다려준 솔베이의 무릎에 엎드려 평화스런

죽음을 맞는다.

 

이 곡은 마쓰모토 레이지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서 메텔의 테마 음악으로도 변용되었는데, 아내의 영원한 순정을 노래한 이 명곡의 가사 내용은

 이렇다.

 

그 겨울 지나 봄이 가고

 

봄이 또 가고

 

여름 또한 가면 한 해가 저무네

 

또 한 해가 저무네

 

 

그래도 난 안다네 당신이 돌아오리라는 것을

 

당신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약속한 대로 기다리는 나를 당신은 찾아오리

 

 

기다리는 나를 당신은 찾아오리

 

신께서 보살피리니 홀로 방황하는 당신을

 

홀로 방황하는 당신을

 

 

신께서 힘을 주리니 보좌 앞에 무릎 꿇은 당신에게

 

보좌 앞에 무릎 꿇은 당신에게

 

당신이 지금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더라도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더라도

 

우린 다시 만나 사랑하고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

 

* ‘솔베이의 노래’ 내용은 원래 해설의 것을 빼고 새로 영어 가사를 번역하여 넣었다.

노르웨이어 Solveig는 ‘솔베이지’ 또는 ‘솔베이그’가 아니라 ‘솔베이’로 발음, 표기되기 때문에 

원래 해설의 ‘솔베이그’를 ‘솔베이’로 바꾸었다.

 

또한 ‘잉리의 탄식’(Ingrids Klage)에서 Ingrid도 ‘잉그리드’가 아니라 ‘잉리’이므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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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nda Camilla Tilling, vocal

Paavo Järvi, cond.
Estonian National Symphony Orchestra

 

Marita Solberg sings "Solveig's Song" from Grieg's Peer Gynt Suite No.2

Marita Solberg, soprano

Neeme Järvi,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Berlin Waldbühne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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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귄트 (Peer Gynt)

 

극의 줄거리

 

제 1 막    어려서 부친을 잃은 페르귄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게으름이 몸에 밴 데다가 허황된 꿈만 좇고 있기 때문에 모친 오제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솔베이그라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마을 결혼식에 나가서 다른 남자의 신부 잉그리드를 빼앗아 산속으로 달아난다.

 

제 2 막    페르귄트는 얼마되지 않아 곧 잉그리드를 버리고 산중을 방황하다가 푸른 옷을 입은 아가씨를 만난다. 곧 뜻이 맞아서 그녀 부친 있는데로 간다. 그곳은 산에서 사는 마왕의 궁전인데, 그녀는 그 마왕의 딸이었다. 마왕이 페르 귄트에게 그의 딸과의 결혼을 강요하므로 그는 깜짝 놀라서 그곳을 빠져나오려 한다. 마왕은 화가나서 부하인 요괴를 시켜서 그를 죽이려 들지만, 그때 마침 아침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마왕의 궁전은 순식간에 무너져, 페르귄트는 간신히 살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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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k Girls Picking up Pebbles by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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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막    산에서 돌아 온 페르귄트는 잠깐 솔베이그와 같이 산다. 어느날 모친 생각이 나서 어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모친은 중병으로 신음하다가, 아들의 얼굴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페르 귄트의 곁에서 운명하고 만다. 모친을 잃은 페르 귄트는 다시 모험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

 

제 4 막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큰 부자가 된 페르 귄트는 어느날 아침 일찍 모로코의 해안에 닿는다. 그러나 사기꾼에게 걸려서 다시 빈털털이가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언자 행세를 하여 순식간에 거부가 되어 아라비아로 들어간다. 거기서 베드윈족 추장의 주연에 초대된다. 아라비아 아가씨들과 추장의 딸 아니트라의 관능적인 춤으로 대접받은 페르 귄트는 아니트라의 미모에 빠져 또다시 전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제 5 막    그 뒤 페르 귄트의 생활은 여전히 파란만장. 마지막에는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으로 큰 부자가 된다. 이제 늙어버린 페르 귄트는 고국의 산천이 그리워서 그 동안에 번 제물을 싣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육지를 눈앞에 두고 풍파를 만나 그의 배는 재물을 실은채로 물에 갈아앉아 버린다. 다시 무일푼이 된 페르 귄트는 거지나 다름없는 꼴로 산중 오두막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이미 백발이 된 솔베이그가 페르 귄트를 기다리고 있다. 페르 귄트는 그녀를 껴안고 <그대의 사랑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 쓰러진다. 늙고 인생에 지친 페르 귄트는 이윽고 솔베이그의 무릎을 베고, 그녀가 노래하는 상냥한 자장가를 들으면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다.

 

노르웨이 극작가 H. 입센의 5막 극시. 1867년 P.C. 아스비외른센의 민화에서 취재하여 극화하였다.

페르는 타고난 몽상가이며 허풍장이·난봉꾼이고 무법자이다.

사랑하는 처녀 솔베지의 애원과 어머니의 죽음도 페르귄트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고치지 못하였고 미국·중국·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노르웨이 극작가 H. 입센의 5막 극시. 1867년 P.C. 아스비외른센의 민화에서 취재하여 극화하였다.

 페르는 타고난 몽상가이며 허풍장이·난봉꾼이고 무법자이다. 사랑하는 처녀 솔베지의 애원과 어머니의 죽음도

 페르귄트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고치지 못하였고 미국·중국·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그가 여러 가지 모험을 치르고 난 뒤 얻은 것은 헛되이 버린 세월과 인생에 대한 환멸이었고, 패배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는 솔베지가 처녀로 늙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페르귄트는 그녀의 순수한 사랑으로 영혼의 구제를 받는다. J.W.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영혼의 순례극이라 할 수 있다.

 

E. 그리그는 이 작품을 토대로 관현악곡 《페르귄트모음곡(제 1 모음곡 op. 46 제 2 모음곡·op. 55, 1888∼91년)》

을 작곡하여 노르웨이적 정서를 아름답게 그렸다.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국민주의 음악가,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때(185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그는 완전히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1865년에 로마로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1868)을 연주한 리스트는 그를 매우 극찬하였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으며, 여류 성악가 니나 하게루프를 사랑하게 되어, 안데르센의 시에곡을 붙인 가곡 《나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하여 유명해졌고, 그들은 결혼해서 오슬로에서 생활했다.

 

또 1867년에 오슬로 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 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 후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했다.

1885년부터는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면서 전원 생활을 즐겼다.

 

이 사이에 가끔 라이프찌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내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직접 불러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리그는 1907년에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배를

 타기도 전에 병이 무거워져 베르겐의 병원에서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1877년부터는 로프트휘스에 틀어박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서정 모음곡》《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1876 초연)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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