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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Beethoven, Symphony No.5, Op.67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Fate'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Beethoven, Symphony No.5, Op.67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Beethoven - Symphony No.5 in C minor, Op 67 (2013)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or : Christian Thielemann (독일 1958 ~ )

 

 

 

 

 

 

 

 

 

 

 베토벤은 창작에 넘치는 계획과 뚜렷한 복안을 심증에 가득 품은 채(사실상 머릿속에선 작품이 완성한 상태로) 무덤속으로 가야만 했다.
베토벤이 런던 필하모니 소사이어티를 위해 계획한 제10교향곡은 서주부가 Es-dur로 돼 있었고, 제 1악장은 알레그로 - 도입부 주제가 보존된 채- c-moll이었는데, 만약에 그가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만큼만 조금 더 오래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들 - 베초벤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 이것은 그의 필생의 거작이 될 것이어서, 이에 비하면 여태까지 완성된 다른 모든 교향곡들은 미미한 가치밖에 갖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r를 위해 베르나르트의 대본에 의한 "십자가의 승리"라는 오라토리오를 약속했으며, 쿠프너의 대본 "사울"을 옛날양식으로 된 코러스와 더불어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었는데, 그 첫부분이 "그의 머리속에선" 사실상 완성된 상태였다.
이 외에 그는 그릴파르쳐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멜루지네"에 대해서도 자주 그릴파르쳐와 이야기하곤 했다.
"당신의 오페라는 완성된 것이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모차르트의 것보다 한층 더 좋아한 케루비니의 "레퀴엠"과 같은 양식의 최초의 "레퀴엠"도 계획하고 있었으며, 바흐의 선율에 의한 서곡도 쓸 작정이었다. 또한 그의 일생을 통한 예술상의 노고에 대한 일대의 결론이 될 것이었던 작품 "파우스트"도 그의 머릿속에선 탄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베토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혹은 그 자신이 스스로의 과업을 오나수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죽었다는 증거이다.
베토벤은 네 차례의 끔찍한 수술 뒤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넉달 이상이나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자신이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827년 2월27일에 시행된 네번째 수술 뒤에 사실상 베토벤이 구세주처럼 믿고 있었던 말파티 박사또한 남아있던 한가닥 희망마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지만, 환자 자신은 그걸 알지 못했다.
당시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와병중이었던 그의 옛 친구 츠메츠칼이 그에게 보내온 안부편지에 대한 그의 회답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나는 절망하지 않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활동을 완전히 중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러나 나쁜 일 속엔 항용 무언가 좋은 일도 있는 법이오. 신께서 그대도 역시 고통스런 상황에서 건져주시기를, 필경 우리는 둘 다 건강을 회복할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서로 이웃으로 상봉하게 될 거요."

그러나 이 불굴의 거인도 마침내 자신의 명이 다했다는 걸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지 못한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어떤 위로의 말도 그를 힘내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따뜻한 봄철이 오면 그의 고통도 완화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내말에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생애는 끝났소. 만약에 나를 낫게 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그의 이름이야말로 불가사의라 불리우겠지요.'라고 그의 주치의 가운데 하나인 바브루흐 박사는 기록하고 있다. 과연 베초벤은 봄이 되기 전에 죽었다.(1827년 3월26일)
그의 나이 57세-위대한 창조가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무덤속에 사장(死藏)되었으니 천만번 애석한 일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은 F-dur 현악사중주로 남아있지만, 그가 끝마친 최후의 작품은 B-dur현악 사중주의 마지막 악장인 Grosse Fuge를 대신한 Rondo였다.
또한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소위 베토벤의 최후의 사상이란 것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C-dur 현악사중주의 단편으로서 베토벤은 이것을 출판업자이며 작곡가였던 안톤 디아벨리에게 약속했었고 또 실제로 시작하기로 했었다.
이 단편은 4분의 3박자로 된 Andante Maestoso의 a la polonaise로서 1826년 11월에 베토벤이 조카 카를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에 있는 동생 요한의 집에 묵고 있었을 때 작곡한 것이었다.
F-dur현악사중주도 여기서 작곡했다.

그나이젠도르프에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베토벤은 12월초에 조카와 함께 죽어가는 사람으로 빈에 돌아왔는데 그의 마지막 거소가 된 슈바르츠파니어하우스에 도착한 이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병상에서 그가 친구 베겔러에게 쓴 장문의 편지(1825년 12월28일에 받은 서신에 대한 뒤늦은 답장)를 보면 그의 정신은 더없이 의기충전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쨓든 나의 좌우명은 이렇다네, nulla dies sine linea(한 줄도 안 쓰는 날은 하루도없었다.), 설사 나의 뮤즈를 잠들게 한다해도 그것은 오직 그녀가 잠이 깼을 때 더욱 활동적이 될 수 ㅣ있기 위함일 뿐이네. 나는 아직도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고 싶다네. 그런 다음 마치 늙은 아이처럼, 친절한 사람들 사이의 어디엔가에서 속세의 삶을 마쳤으면 하네."

베토벤의 건강은 1815년 이후로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1820~21년 무렵에 처음으로 황달 증세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간 질환의 불길한 징조였다.
결국 이 증세는 나중에 간경변증으로 발전했으며, 베토벤의 지속적인 알코올 섭취량이 가중됨으로써 계속 악화되었다.
그러나 1822~23년의 기간에 베토벤은 '일찍이 생존한 예술가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보통 그는 한밤중까지 일했으며 자주 식사나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아 가정부와 친구들을 낙담시켰다.
이즈음 그의 건망증은 극에 달해서 모자를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험한 날씨에 맨머리로 산책을 해서 잿빛 긴 머리가 곧잘 비에 젖어있고 했다.
요컨데 모든 것이 그의 작품활동에 종속된 생활이었다.
그는 더 이상 개인적인 희열의 극치를 갈구하지 않았다. 생활의 사소한 즐거움 - 산책과 먹고 마시고, 담화와 이따금씩 피우는 담배 -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예술에만 몰두하게 된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1822년 2월에 베토벤 본 시절의 친한 친구 베른하르트 룸베르크가 빈에서 첼로 연주를 하였을 때도 베토벤은 모습을 나타재니 않았다.
처음엔 귓병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호소하였지만, 결국 진짜 이유는작품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불참한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만약에 내가 자네를 찾아가지 ㅇ낳는다면 내가 얼마나 멀리서 살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게나. 또한 거의 쉬지 않고 내가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이나 1년 내내 나는 끊임없이 앓고 있었으니이미 시작해놓은 많은 작품들을 완성하지도 못한 형편이라네."

장엄미사곡, 디아벨리 변주곡 그리고 제9번 교향곡이 모두 1822~23년 시기에 완성되었다.
1824년 이후의 베토벤의 삶은 전적으로 현악사중주 op.127, a-moll(op.132), B-dur(op.130),cis-moll(op.131) 그리고 F-dur(op.135)의 다섯 곡이 그것이다.
127번은 1824~25년에, 132번은 1825년 2월과 여름사이, 130번과 후에 대푸가로 독립해서 출판된 작품 op.133은 같은 해 7월~9월에 걸쳐, 그리고 131은 이듬해에 완성되었고, 1826년 11월에 작품 130의 새로운 피날레와 더불어 F-dur의 op.135번을 완성함으로써 사중주의 일관된 창조작업을 마무리지은 셈이었다.
물론 베토벤은 오직 사중주에만 전념한 기간에도 장래의 모든 계획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1826년 사중주의 긴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베토벤은 오페라와 오라트리오, 그리고 협주곡들과 기타작품들에 관한 새로운 착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1825년의 스케치북은 제10 교향곡과 바흐의 이름철자에 의한 서곡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또한 임종의 침상에서 베토벤은 레퀴엠과 파우스트에 대해 유감스럽게 얘기했고, 피아노 방법을 집필하여는 야심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아쉬워 했다.
베토벤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계속 유기적인 발전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베토벤이 오래살면 살수록 그가 음악으로써 말해야만 했던 것은 더욱 심오한 것이 되었다.
다른 어떤 음악가보다도 베토벤은 음악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전적으로 표출하고자 했고 이같은 태도는 곧 그의 특성과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의 창조과정은 그대로 그의 정신의 발전과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일생동안 그의 영혼 속에서 일관성있게 쌓아올린 거대한 정신의 기념탑이라 할 만한 것이다.
베토벤의 정신의 발전과정을 주로 연구한 J.W.N 설리번은 바흐와 바그너를 베토벤과 비교한 흥미있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성숙기를 거쳐 말년에 이른 작곡ㄱ가에게 있어 베토벤과 같은 지속적인 발전은 매우 드문 현상으로서, 정신의 깊이와 성숙도에 있어 베토벤에 필적하는 바흐의 경우 말년에 이르러 순수한 기교의 미궁 속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또한 바그너로 말하면, 젊은 혈기가 점차 줄어들자 말년엔 피로와 헛된 동경 이외엔 아무것도 표현할 것이 없었따.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은 생애 최후까지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음악이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지닌 삶에 대한 태도의 표현이었던 때문이다."

베토벤 말년의 가장 위대한 창조로서 흔히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 현악사중주곡들은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의 창조행위의 정점을 이룬다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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