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13.06.12(수), 오후 17:00 - 19:00에 서울역 앞 '트라펠리스'(Trapalace) 회의실에서 '괴사모'(괴테를 사랑하는 모임) 제 111회 정기 발표회가 있었다:
- 대화주제: 괴테(1749-1832)와 베에토펜(1770-1827)의 교류에 대한 추적
- 초청의 말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전초반에 걸쳐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 악성 베에토펜 사이에는 어떤 교류가 있었던가요?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지닌 두 사람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공유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을 괴테는 글로써 그려냈고 베에토펜은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삶을 회상하며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탐색해 보고자 합니다.
- 발표자: 배동인(전 강원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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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표자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얘기를 했다:
1. 베에토펜의 괴테 만남
베에토펜은 그의 젊은 시절에 괴테의 시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그의 텍스트 가운데 몇 개를
가곡으로 작곡했다: 가령, '새 사랑, 새 삶'(Neue Liebe, neues Leben. WoO 127; op. 75 no. 2: 1798-9년 작곡, 1808년 출판[Simrock, Bonn]), '나는 너를 생각한다'(Ich denke dein. WoO 74), '그리움'(Sehnsucht. WoO 134; 'Nur wer die Sehnsucht kennt'[네 가지 작곡]: 1807년 말- 1808년 초 작곡, 출판 1808년[첫 작곡][Geistinger, Wien], 네 가지 작곡 모두 1810년 출판[Bureau des Arts et d'Industrie, Wien]. 베에토펜의 주석: "나는 좋은 노래를 작곡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에 몇 번의 시도들이 있다."), '여섯 개의 노래들' op. 75(1. Mignon['Kennst du das Land'],
2. Neue Liebe, neues Leben['Herz, mein Herz'],
3. Aus Goethe's Faust['Es war einmal ein Koenig' with unison chorus],
4. Gretels Warnung[Gerhard Anton von Halem, 'Mit Liebesblick und Spiel'],
5. An den fernen Geliebten[Christian Ludwig Reissig, 'Einst wohnten suesse Ruh'],
6. Der Zufriedene[Reissig, 'Zwar schuf das Glueck']; 1809년 작곡, 1810년 출판[Breitkopf & Haertel, Leipzig; Clementi, London], Kinsky 공주에게 헌정), '세 개의 노래들' op. 83(1. Wonne der Wehmut['Trocknet nicht'], 2. Sehnsucht ['Was zieht mir das Herz'], 3. Mit einem gemalten Band
['Kleine Blumen']; 1810년 작곡, 1811년 출판[Breitkopf & Haertel, Leipzig], Kinsky 공주에게 헌정),
Der edle Mensch sei huelfreich und gut(1823년 1월 작곡, 사후 출판, Caecilie von Eskeles 남작부인을
위해 작곡함).
그의 괴테 텍스트 작곡은 괴테의 '에그몬트'(Egmont. 1810년 작곡)에 부친 음악에서 절정에 이른다.
1812년 7월에 두 사람은 드디어 Teplitz에서 휴가 중에 만났다: 거기서 그들은 한 동안 매일 동반했다.
머지 않아 베에토펜은 괴테의 'Meeresstille und glueckliche Fahrt'(바다의 고요와 운좋은 항해)(op. 112)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1815년에 완성했다.
이 작품은 1822년에 출판됐는데 괴테에게 헌정됐다.
괴테는 악보의 한 사본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 베에토펜은 그에게 그의 작품들에 대한 지속적인 감탄을 표현하는
편지를 보냈다:
"저의 이미 젊은 시절에 하나의, 그리고 오직 불멸의 괴테에 대해 간직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은
지속되어 왔습니다.
"(편지 1136). 그 해에 그는 또한 그의 최대의 음악적 야망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위한 음악을 마련하는
것이었음을 내비쳤다.
괴테의 베에토펜에 대한 견해는 약간 달랐다.
그는 베에토펜의 능력에 대해 놀랐고 그의 '에그몬트에 부친 음악'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는
'너는 그 나라를 아느냐(Kennst du das Land)'(op. 75 no.1)와 같은 작곡을 너무 지나치게 정교화한 것으로
생각했고 베에토펜의 인성을 오히려 거칠은 것으로 보았다(Cooper, 1992: 46-7).
2. 테플리츠(Teplitz)에서의 두 사람의 만남
위에 언급된 테플리츠에서의 두 사람의 만남(1812년 7월)과 관련하여 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의
퓌클러-무스카우(Pueckler-Muskau) 공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적혀있다:
<두 사람은 산책길에 오스트리아 황후와 공작들과 마주치게 되었어요.
베에토펜이 말하기를 "그냥 나의 팔을 잡은 채로 계십시오. 그들이 우리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이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걸어나아갈 것이오.
" 괴테는 다른 의견이었기에 그에겐 불편했습니다.
그는 베에토펜의 팔에서 손을 떼고 모자를 벗으며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그동안 베에토펜은 팔뒷짐을 지고 공작들 사이로 지나가며 다만 모자를 약간 올릴 뿐이었어요.
그러자 공작들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그에게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모두 친절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저쪽에 그는 서서 괴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괴테는 머리를 깊이 수그리고 그들이 자기 옆으로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이제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을 저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가 당신을 영예롭게 여기고 존경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에게 당신은 너무 많은 경의를 표했습니다.
" 나중에 베에토펜은 우리에게 달려와서 모든 걸 얘기하며 그가 괴테를 그렇게 놀려주었다는 데 어린애처럼
기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두 그대로 사실입니다.
조금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베에토펜은 그걸 여러번 같은 방식으로 얘기했는데 그게 저에게는 하나의
관계로서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Braun, 1959: 27-8).
베에토펜은 1812.08.09일 프란첸브룬(Franzensbrunn)에서 라잎치히(Leipzig)의 고트프리드 헤르텔(Gottfried Haertel)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괴테는 궁정의 분위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그걸 시인이 되기보다 더 좋아합니다. 시인들이 국가의 으뜸가는 스승들로서 존경받아야 하는데 반짝이는
궁정을 즐겨하는 것에서 다른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다면 대가들의 부조리들에 관해 얘기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Kerst and Krehbiel, 1964: 60-1). 그리고 그는 1812.08.15일에 어떻게 거만하게 그가,
그리고 어떻게 겸손하게 괴테가 오스트리아 제국 귀족들 앞에서 행동했는가를 기술하면서 말했답니다:
"괴테와 나와 같은 두 사람이 만날 때 이들 거창한 귀족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같은 곳: 61).
그는 또 로홀리츠(Rochlitz)에게 말했습니다:
"카를스바드(Karlsbad)에서 그 여름 이후 나는 괴테를 매일 읽었습니다
- 내가 뭘 읽을 때면 말입니다."(같은 곳: 61). 1818년 그의 회화책에 그는 썼습니다:
"괴테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더라도 그는 독일의 으뜸가는 시인으로 남을 겁니다."(같은 곳: 61).
그의 괴테 칭송은 지극합니다: 괴테에 관해서 1811.02.10일 Bettina von Arnim에게 한 말입니다:
"누가 한 위대한 시인에게 충분히 감사할 수 있겠는가 - 한 국가의 가장 값진 보석에게!" 같은 날 그는 그녀에게
말했답니다: "당신이 나에 관해 괴테에게 편지할 때 나의 가장 깊은 존경과 감탄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용어들을
찾아내 쓰세요. 나 자신 그에게 내가 작곡한 '에그몬트'에 관해 쓰려고 합니다: 순전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의 시들에 대한 사랑에서 말입니다."(같은 곳: 60).
그는 1822년 로홀리츠(Rochlitz)에게 테플리츠(Teplitz)에서의 괴테의 사랑스러움을 회상하면서 말했답니다:
"나는 괴테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거에요, 그래요, 열 번이라도 죽음에 이를 수 있어요.
그때, 나의 열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나의 '에그몬트' 음악을 생각해 냈습니다.
괴테, - 그는 살아있고 그와 함께 우리 모두가 살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작곡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만큼 쉽게 작곡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곡들을 작곡하고 싶지 않습니다."(같은 곳: 60).
3. '에그몬트'에 부친 음악
베에토펜의 '괴테의 비극적 희곡 <에그몬트>에 부치는 음악, 작품 84'(Musik zu J. W. v. Goethes Trauerspiel 'Egmont', op. 84)는 1809년 10월에서 1810년 6월 사이에 작곡됐고 1810년 6월 15일에 초연됐다.
괴테는 그의
'에그몬트'를 1787년 9월 5일에 완성했는데. 극적 효과를 노려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 '에그몬트'와는 거리가 있는,
이상화된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베에토펜의 음악은 맨 나중에 작곡된 서곡을 포함하여 10개의 부분으로 구성됐다:
1. 서곡: Sostenuto, ma non troppo - Allegro [8'20], 2. Lied(Claerchen) 'Die Trommel geruehret': Vivache [2'49], 3. Zwischenakt I: Andante - Allegro con brio [2'46], 4. Zwischenakt II: Larghetto [5'11], 5. Lied (Claerchen) 'Freudvoll und leidvoll': Andante con moto - Allegro assai vivache [1'36], 6. Zwischenakt III: Allegro - Marcia, Vivache [3'48], 7. Zwischenakt IV: Poco sostenuto e risoluto - Larghetto - Andante agitato [3'17], 8. Musik, Claerchens Tod bezeichnend: Larghetto [3'07], 9. Melodram (Egmont) 'Suesser Schlaf': Poco sostenuto [4'03], 10. Siegessymphonie: Allegro con brio [1'18].
2. Lied의 노랫말: "북을 쳐라! 피리를 불어라! 나의 애인은 무장하고 군대무리에게 명령한다. 창을 높이 들고
사람들을 다스린다. 나의 가슴은 얼마나 뛰는가! 나의 피는 얼마나 물결치는가! 오, 내가 조끼를 입고 바지와 모자를
썼더라면 좋을 걸! / 나는 그를 따라 성문을 향해 용감한 발걸음으로 나아간다. 지방으로 나아가고 함께 어디든지 간다. 적들은 이미 비켜서고 우리는 그들에게 총을 쏜다.
하나의 남성상임은 얼마나 특별한 행복인가!"
5. Lied의 노랫말: "기쁨에 차고 고통에 차고, 생각에 차서, 그리워하며 조마조마해 하며 떨리는 아픔 속에,
하늘 높이 환호하는 듯하다가 죽음에로 침울해지나니; 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구나!(Gluecklich allein ist die Seele, die liebt.)"
9. Melodram: " 달콤한 잠이여! 너는 오는구나, 순수한 행복처럼 청하지 않아도, 간구하지 않아도 가장 기꺼이
오는구나. 너는 엄격한 생각들의 매듭들을 풀고, 기쁨과 아픔의 모든 그림들을 뒤섞는구나; 거침없이 내면적
조화들의 동그라미는 흐르고 맘에 드는 광기에 싸여 우리는 가라앉고 존재하기를 그친다."
이 음악은 군데군데 베에토펜의 위대한 한 작품을 되새기게 하는데 그의 "한 위대한 인간에 대한 회상"에 바쳐진
'영웅' 교향곡, 특히 그 1악장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부분인 '승리의 교향곡'은 '자유사상의 개선을', '구체적으로는 네덜란드의 해방을' 시사한다
(Hans-Guenter Klein, Deutscher Gramaphon의 LP no. 2530 301[Gundula Janowitz, Berliner Philharmoniker, Herbert von Karajan 연주음반] 해설 중에서).
'에그몬트'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1566년 네덜란드의 스페인에 대항하여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Horn)과
오라니엔의 빌헬름스(Wilhelms von Oranien)의 지도 아래 일어선 민중봉기가 있었고, 1568년 에그몬트와
호른 등의 처형, 1581년 북쪽 지방들의 '우트레히트 연맹'(Utrechter Union)의 스페인으로부터의 해방 선언,
1791년 괴테의 희곡 초연, 1810년 베에토펜의 '에그몬트' 음악 초연이 있었다.
4. 두 사람의 풍류도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와 베에토펜의 '에그몬트' 음악에는 두 사람의 자유와 정의에의 투쟁정신,
그리고 승리와 해방에 대한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정신세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괴테의 온건한 심성과 베에토펜의 거칠고 투박한 행태는 두 사람의 인간적 기질의 차이이지만 그러한 기질적 차이가
그들의 정신적 교류에서의 예술적 융합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인간의 문화예술사에서 위대한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희진 시인의 관점(제 110회 '괴사모' 모임에서
발표된 '소나무와 풍류도' 참조: 여기 블로그 '새벽'에 2013.04.22일에 올려진 글을 보시기 바람)에 따라 보자면
풍류도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문학과 음악을 통한 풍류도의 전범을 실현했다고 본다.
베에토펜은 1792년 기념첩에 썼다: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고, 자유를 무엇보다 사랑하고, 비록 왕좌의 편을
들어서라도 절대로 진리를 배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Wohltuen, wo man kann, Freiheit ueber alles lieben, Wahrheit nie, auch sogar am Throne nicht verleugnen.)" (롤랑, 1972: 15). 베에토펜이 추구한 세 가지
가치관, 곧 선행, 자유사랑, 진리탐구의 정신이 괴테에게서도 그의 삶과 문학을 통해 관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괴테의 자연과학적 진리탐구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 "괴테는 이탈리아 미술을 접하면서 1810년에 ‘색채론’을
발표했다. 뉴턴이 물리학적 광학이론에 입각해 색채를 인간의 시각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실체로 파악한 데 반해
괴테는 주관을 중시하여 빛과 눈 사이의 연관을 우선시했고, 색채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대립 관계로 보았다.
"(김정화 교수[KAIST]: 인터넷 '국민일보 쿠키뉴스'). "괴테의 자연과학적 탐구는 근세에 이르러서야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의 '근원현상'과 현대 언어형태학의 '형태'가 바로 그러한 예다.
로망 롤랑, 앙드레 지드, 1946년 '몽 파우스트'(나의 파우스트)를 저술한 폴 발레리, 파우스트를 초역한 셸리,
칼라일과 미국인 롱펠로우 등 모두가 괴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레첸의 비극은 아직도 독일사람들의
비극으로 남아있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림으로써 그레첸은 영원히 홀로 남게 됐기 때문이다.
'세상은 광대하고 인간은 능력도 없으면서 이 광대한 세상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이 사실이 파우스트를
악마의 품으로 내몰았다.' 문학사가 프리드리히 군돌프의 적절한 표현이다." (이바르 리스너[Ivar Lissner], 2005[2000], 서양 위대한 창조자들의 역사, 538쪽).
풍류도는 자연과의 하나됨 가운데 정신의 일깨움과 바람직한 삶살이에의 추진력을 제공한다: 그러한 힘을 우리는
베에토펜의 음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사람들의 정신으로부터 불꽃이 솟아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Dem Manne muss die Musik Feuer aus dem Geist schlagen.) 음악은
모든 지혜와 철학보다도 더욱 드높은 계시이다.
... 나의 음악의 참뜻을 해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짊어진 비참한 것을 떨쳐버릴 수 있음에 틀림없다.
(Musik ist hoehere Offenbarung als alle Weisheit und Philosophie. ... Wem meine Musik sich verstaendlich macht, der muss frei werden von all dem Elend, womit sich die andern schleppen.)" - Beethoven zu Bettina, 1810 (롤랑, 1972: 129; Rolland, 1963: 123).
베에토펜과 괴테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자연에의 사랑을 음악과 문학으로 표현했고 그들 나름의 풍류도를 누렸다고
보여진다.
풍류도는 또한 삶에 대한 태도에서의 변혁을 요구한다. 풍류도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 깨끗함
(몸의 청결성과 마음의 청정성), 조화로움'의 세 요소를 지닌다. 풍류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해본다:
풍류도(風流道)
세계는 바람의 흐름으로 이뤄지고 있나니
사람의 삶도 바람의 흐름 따라 이어나갈지어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857 - ?)은 이 나라에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일컫는다고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밝히셨다.
사람의 몸도, 지구도, 우주도 저마다 하나의 흐름체계이니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된 흐름체계로다.
그 운행의 모습을 바람의 흐름으로 상징화한 것이 현묘한 안목이라
이것이 곧 새로운 세계관의 현묘한 앎이로다. - 2013.05.14, 새벽 배동인
바람의 흐름은 자세히는 흐름체계로서의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기(氣)와 힘의 운행, 곧 바람과 물과 구름의
흐름 속에 인간의 삶도 어울려 흘러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상선약수'와 '곡신불사' 등에서도, 우리 가곡 '저 구름 흘러가는 곳'(김용호 시, 김동진 곡)에서도 풍류도의 감흥을 접할 수 있다.
풍류도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함축하고 있다. 그 세계관에서는 우선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 속의 인간을 가리킨다.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고 언젠가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므로 자연의 일부분으로 인식된다.
인간은 자연의 경이로움과 성스러움 앞에 겸허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자연의 대표적 존재로서는 바람, 물, 구름, 흙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기와 힘 사이에 끊이없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며 변화를 겪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는데 죽음은 자연으로의 복귀를 뜻한다. 자연에서는 존재들의 상호연결성이 돋보이며 각 존재는
자율성과 상호의존성을 지닌다. 이러한 상호성 기제를 통해 흐름체계로서의 자연과 세계의 구조가 형성되고
그 변화과정은 합리성 기제를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어 간다.
인생관에서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이 가장 바람직한 삶으로 인식되고 거기서 이뤄지는 지고, 지선, 지미의 삶이 행복한 삶으로 여겨진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온갖 비자연적 욕구들로부터 해방된 삶이며 그것은 자연스럽고 단순한 삶을 뜻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에서 창조되는 문화예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본받아 장엄한 아름다움(The sublime)을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분야들에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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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0분에 걸친 나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시간에 위의 "새로운 세계관"과 관련하여 베에토펜의 종교관에 대해 나의 설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전능한 신적 지배자에 대한 그의 신앙의 성격은 비정통적이고 특유한, 그러나 절대적으로 순수한(unorthodox and idiosyncratic, but absolutely genuine) 것이었다.
신에 관한 언급이 그의 가곡 'An die Hoffnung'(희망에
부쳐), op. 94와 'Abendlied'(저녁노래), WoO 150에 들어있고 현악4중주곡 작품 132의 제3악장에는 Molto adagio(Heiliger Dankgesang eines Genesenden an die Gottheit, in der lydischen Tonart), 곧 '한 쾌유되어가는 이의 신성에 대한 거룩한 감사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의 신에 대한 생각은 그의 교향곡 제9번 '합창'에 들어있는 쉴러(Schiller)의 '환희에의 송가'(Ode an die Freude)에 나오는 "형제들이여, 별들의 장막 너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살고계실 것임에 틀림없다"라는 정도의 상상에 있다
(Cooper, 1992: 145-8). 그는 명목상으로는 로마-카톨릭 교회에 속했지만 교회에 대한 그의 태도는 무덤덤했고
그가 교회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석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그는 임종 직전에 마지못해 신부가 거행하는 최후의 의식절차를 밟는 것에 동의했었다(같은 곳: 145).
그가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그것은 '한 고난받는 동료인간'을 뜻했고 어떤 초월적 신성(divinity)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그의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그리스도'(Christus am Oelberge)에서 강조된 것도 신성보다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고난이었다(같은 곳).
베에토펜이 생각한 '신성'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자연과 인간역사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하나의 범신론적
초월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괴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괴테는 자연 속에 내재된 존재로서의 신을 믿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최두환 교수님의 설명에서 도출되는 내용이었다).
베에토펜의 '불멸의 연인'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없다. 솔로몬은 그의 베에토펜 전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러가지 정황을 분석해 본 결과 그녀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Solomon, 1977). 그러나 그녀가 줄리에타(Giulietta Guicciardi)라고, 또는 테레세(Terese Malfatti)라고
주장하는 설들도 있다.
베에토펜의 폭넓은 독서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Goethe를 많이 읽었고 Schiller의 Don Carlos, Die Jungfrau von Orleans, Die Braut von Messina, Wilhelm Tell 등을 좋아했고 특히 쉴러 전집 21권을 그의 조카 Karl을 위해
주문하기도 했는데 Karl이 역시 쉴러를 좋아했다고 한다.
Homer의 Iliad를 번역본으로 구해서 읽었고, Plutarch의 영웅전도 즐겨 읽었다.
또한 쉐익스피어(Shakespeare)를 읽었다: 그래서 그의 현악4중주곡 작품 18의 1번의 느린 악장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덤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Amenda에 따름). 그러나 Schindler(쉰들러)에 따르면 그의 피아노
소나타 '폭풍우'(op. 31, no.2)는 쉐익스피어의 작품 '폭풍우'(The Tempest)를 생각하고 작곡한 것이라는 얘기는 근거가 희박하다고 지적된다(Cooper, 1992: 149).
또한 베에토펜은 '운명, 인내, 위대한 행위를 통한 불멸의 명예의 성취'를 높이 평가했고 자신을 고대 영웅들의 후계자로 간주하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Cooper, 1992: 150). 그만큼 베에토펜의 자기사랑은 유별났던 듯하다.
우리가 흔히 '저마다 제 잘난 멋에 산다'고 말하는 게 바로 이런 자기애(자기사랑) 또는 자존감을 가리키지 않은가
여겨진다.
베에토펜이 자기 작품들 가운데 특히 제3번 '영웅' 교향곡과 제9번 '합창' 교향곡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는데 제3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의 '에로이카(영웅) 주제'를 그는 세 번이나 더 사용한 걸 보면 그가 이 주제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Die Geschoepfe des Prometheus op. 43), 12 개의 무곡 중 7번(no.
7 of the Twelve Contredanses WoO 14), 그리고 '프로메테우스' (또는 '에로이카') 변주곡 작품 35(Prometheus [or 'Eroica'] Variations op. 35). (Cooper, 1992: 214).
참고문헌:
Braun, Felix(Hrsg.). 1959. Beethoven im Gespraech. Wiesbadoren: Im Insel-Verlag
Cooper, Barry(General Editor). 1992. The Beethoven Compendium: A Guide to Beethoven's Life and Music. New allesYork: Thames and Hudson Inc.
Kerst, Friedrich, and Krehbiel, Henry Edward. 1964. Beethoven: The Man and the Artist, as revealed in his own words. New York: Dover Publications, Inc.
Rolland, Romain(L. Langnese-Hug). 1963.Ludwig van Beethoven. Zuerich: Rotapfel Verlag
Solomon, Maynard. 1977. Beethoven. New York: Simon & Schuster Macmillan
롤랑, 로맹(이휘영 옮김). 1972. 베토벤의 생애. 서울: 문예출판사
2013.06.12, 새벽 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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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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