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1915-1997)가 연주하는 그리그의 <서정 소품집> 전 66곡 중 21곡입니다. 가장 유명한 8권의 6곡 ‘트롤드하우겐의 결혼식 날’은 16번째에 있습니다. 화면 아래 ‘유투브에서 보기’ 상자를 눌러 유투브 창이 뜨면 오른쪽에 곡 리스트가 나오니 거기서 곡을 선택해서 들으시면 편리합니다.
그리그는 민속학적인 취향이 강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19세기 유럽에서 부흥한 국민악파 작곡가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 작품들에서 노르웨이의 민속적인 선율과 신화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는데, 특히 자신이 잘 다루었던 악기인 피아노를 위한 많은 작품들에서 민속음악에 대한 인상주의적인 접근 방식과 낭만주의적인 표현력을 배가시켜 보여주었다.
1869년 작품인 <노르웨이의 춤과 노래> Op.17과 1870년부터 1871년 사이에 작곡한 피아노 모음곡으로 ‘산 위에서’ ‘신부의 행진’ ‘카니발의 장면들’, 이렇게 세 곡으로 구성된 <조국의 삶으로부터의 장면들> Op.19에서 노르웨이의 민속 무곡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특히 극대화된 피아노 효과와 상상력 풍부한 회화적 성격을 고도의 기교로 결합함으로써 독자적인 음악어법을 발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그의 삶이 담긴 소품집
“이 열 권의 서정 소품집은 삶의 밀접한 단면입니다.”라고 그리그는 1901년 페터스 출판사의 편집장인 앙리 힌리쉔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바 있다. 1867년부터 1901년 사이에 작곡 출판된 10권으로 묶인 66개의 피아노 소품들, 즉 ‘서정 소품집’이라는 제목의 이 일련의 사이클은 멘델스존과 슈만, 쇼팽(일부 관점에서)이 추구한 피아노 음악에 있어서의 시적ㆍ함축적 전통을 훌륭하게 이은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소품집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리그의 작품은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민속적인 요소를 적극 끌어들인 참신한 아이디어가 녹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권당 6곡에서 8곡씩 배치되어 있는 이 <서정 소품집>을 그리그는 유독 젊은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작곡해 나아갔다. 각각의 작곡 연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권 Op.12는 1867년, 2권 Op.38은 1883년, 3권 Op.43은 1886년, 4권 Op.47은 1887~88년, 5권 Op.54는 1891년, 6권 Op.57은 1893년, 7권 Op.62는 1895년, 8권 Op.65는 1896년, 9권 Op.68은 1898년, 마지막 10권 Op.71은 1901년에 작곡이 완성되었고 8권(1897년 출판)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작곡이 끝난 해에 바로 출판되었다. 부수음악과 관현악곡 작곡에 몰두했던 1870년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기에 걸쳐 작곡한 이 <서정 소품집>은 그의 타고난 천재성과 발전해 나간 음악어법, 전형적인 낭만주의자로서의 상상력을 담고 있는데, 가히 한 작곡가의 음악 일기라고 말할 수 있는 연대기적 작품이다.
그리그가 활동하던 1890년대 베르겐의 모습. 자연과 어우러진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풍경이 돋보인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1권 Op.12다. 그리그가 자신의 음악어법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초기 시절 작품으로 대단히 순수한 형태(가감을 거의 하지 않은)의 민속적인 주제들이 풋풋하게 등장한다. 1곡 ‘아리에타’(Arietta)를 예로 들면 멘델스존의 <무언가>의 정신과 가장 닮아 있기도 하고 그리그의 독특한 낭만주의적 감수성이 가장 잘 드러나기도 한다. 당시 중부 유럽의 음악에 심취해 있던 그리그는 친구인 리카르드 노르드라크로부터 북유럽 민속음악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소개받았다. 당시 작곡가는 “눈앞에 안개가 끼며 갑자기 내가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2곡 ‘왈츠’(Vals)와 4곡 ‘요정의 춤’(Alfedans) 또한 민속적인 단순함으로부터 낭만성을 증폭시킨 훌륭한 작품으로 이 1권의 중요한 대목이다.
이후 15년 정도가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2권이 작곡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국민음악파로서 노르웨이의 희곡과 전설을 음악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작법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원숙한 방법으로 음악화할 수 있는 방법을 체득했다. 이는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작은 형식의 제목에서 기인하는 함축적인 의미와 인상주의적인 도취 효과를 만개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2권의 1곡 ‘자장가’(Bercuse)와 3곡 ‘멜로디’(Melodi)는 전형적 낭만주의자인 그리그의 본성과 민속적인 분위기가 풍부해진 화성법과 발전된 음악어법에 의해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준 곡이다.▶낭만주의 음악에 북유럽의 민속적인 느낌을 더한 것이 그리그 <서정 소품집>의 특징이다.
민속적 이디엄에 대한 그리그의 흡수력은 날로 발전해 나아가 3권에 이르러 작곡가의 화성적 언어는 더욱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것으로 변화했다. 특히 1곡 ‘나비’(Sommerfugl)에서의 화려한 장식은 멘델스존을 능가하며, 그 시적 환기는 슈만에 버금감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특히 1888년에 그리그는 로마에서 리스트를 만나 많은 예술적 자극을 받았고,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링>과 <파르지팔>을 듣고 커다란 영감을 받았으며, 라이프치히에서 차이콥스키를 만나 그의 우울함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다른 작곡가들로부터의 영향은 4권의 3곡 ‘멜로디’(Melodi)의 반음계적인 특성과 어렴풋한 에올리언 선법에서 반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권에서는 대비적인 효과와 인상주의적인 색채가 더욱 강화되었다. 3곡 ‘난쟁이의 행진곡’(Trolltog)은 유머와 힘찬 리듬이 대비를 이루는 강력한 곡이고, 4곡 ‘노투르노’(Notturno)는 밤에 대한 인상주의적인 터치와 감미로운 화성이 돋보인다.
Håkon Austbø - Grieg, Lyric Pieces (Complete)
Håkon Austbø, piano
Doopsgezinde Gemeente Deventer, The Netherlands
2001
노르웨이 출신의 하콘 아우스트뵈(Håkon Austbø, 1948~ )는 그리그의 <서정 소품집> 66곡 전곡을 녹음한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입니다. 2003년에 그리그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리그 <서정 소품집> 66곡 전곡 리스트(노르웨이어-영어 병기. 작곡 연도, 출판 연도)는 아래 박스에 있습니다..
30여 년에 걸쳐 작곡한 수미일관된 작품
1890년대 그리그는 열 권 가운데 다섯 권의 <서정 소품집>을 작곡하여 창작력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각 소품들의 제목도 직설적인 단어에서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담은 단어를 선택하는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18세기 쿠프랭이 자신의 클라브생 작품집에서 보여준 발전 과정에 비견할 만하다. 6권의 2곡 ‘가데’(Gade)는 그리그가 1860년대 코펜하겐에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덴마크 작곡가인 닐스 가데(Niels Gade, 1817-90)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종의 음악적 초상화라고 할 수 있고, 3곡 ‘환영’(Illusjon) 또한 특정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추상적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7권의 1곡 ‘공기의 요정’(Sylfide)이나 5곡 ‘유령’(Drømmesyn) 또한 인상주의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대상 자체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인상이 피아노 건반을 통해 아로새겨진다.
8권과 9권은 노르웨이의 자연과 민속적인 요소들에 대한 인상이 그리그의 독자적인 음악어법으로 나타나 있으며, 가장 개성적으로 환원된 <서정 소품집>의 명대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그와 아내인 니나는 1880년대 중반 베르겐 교외에 별장을 지었는데 1892년 그들의 은혼식을 여기서 맞이했다. 8권의 6곡 ‘트롤드하우겐의 결혼식 날’(Bryllupsdag på Troldhaugen)은 원래 ‘독지가들이 오고 있다’라는 제목이었지만 은혼식 이후 음악의 제목을 현재와 같이 변경했다. 이 곡은 그리그의 <서정 소품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자 그의 피아노 협주곡 다음으로 인기 높은 피아노 작품이다. 북적대는 손님들을 묘사한 웅장한 알라 마르치아(alla marcia)를 앞뒤로 그리그 부부를 상징하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흥미진진함을 고조시킨다. 9권의 2곡 ‘할머니의 미뉴에트’(Bestemors menuet)나 5곡 ‘요람의 노래’(Bådnlåt)도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곡이다.▶조국 노르웨이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작곡가 그리그와 그의 아내 니나
마지막 10권에서는 가장 발전한 그리그의 화성언어를 만날 수 있다. 2곡 ‘여름의 저녁’(Sommeraften)이나 6곡 ‘가버림’(Forbi), 7곡 ‘회상’(Etterklang) 등은 어딘지 우울함을 머금은 듯한 애처로움을 연상케 할 정도로 화성도 대범하고 표현도 깊이 있다. 특히 마지막 ‘회상’은 <서정 소품집>의 첫 곡인 ‘아리에타’의 주제 왈츠를 다시 사용한 만큼 이 작품을 시작할 젊은 날에 대한 아름다운 회상을 상징하는 동시에 30여 년에 걸쳐 작곡한 <서정 소품집> 사이클의 완벽한 수미일관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마무리는 더 이상 자신의 음악적 일기인 <서정 소품집>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곡가의 심적 표현이기도 한데, 짧지 않은 자신의 삶이 곧 마감할 것임을 미리 예견한 것이 아닐까 하는 미스터리한 추측(실제로 6년 뒤인 1907년에 사망할 때까지 작곡을 거의 하지 못했다)도 가능케 한다.
추천음반
1. 작품의 유명세에 비하여 전곡 음반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역사적인 녹음 가운데 발터 기제킹의 발췌 녹음(EMI)이 가장 많은 작품을 녹음한 것으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스테레오 시대 에밀 길렐스의 발췌 음반(DG) 또한 이 작품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명연으로 손꼽힌다.
2. 이후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다른 그리그 피아노 작품들과 함께 녹음한 음반(DG)이 특이할 만하고,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의 연주도 노르웨이의 정서를 잘 살린 음반(EMI)으로 추천할 만하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