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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Prokofiev, Piano Sonata No.7 in B flat major

Prokofiev, Piano Sonata No.7 in B flat major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Sergei Prokofiev

1891-1953

Maurizio Pollini, piano

Herkulessaal, Münchner Residenz

1971.09

 

Maurizio Pollini plays Prokofiev's Piano Sonata No.7

 

20세기 전반 동안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몇몇 작곡가들은 자국 내에 안전하게 남아 있을 수가 없어 영구적인 망명이 필요했다. 일부 작곡가들은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지배층이 가진 예술에 대한 요구를 최대한 수용함으로써만 가능했다. 이런 요구는 흔히 정치적인 것과 얽혀 있어서,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결국 그 누구도 혁명의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세기 피아노 레퍼토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곡가

혁명이 일어난 1917년, 스트라빈스키는 30대 중반이었고 이미 작곡가로서의 기반이 잡혀 있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서방 국가에 영구 정착하면서 그는 화려한 커리어를 토대로 종종 러시아 주제의 곡들을 작곡하며 조국을 향한 강한 그리움을 견뎌냈다. 그러한 스트라빈스키도 말년에 단 한 번밖에 고국을 찾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 또한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미국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질은 스트라빈스키와 달랐다. 라흐마니노프는 조국을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돌아가지 않았고, 조국을 벗어나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도 어려워했다. 1918년 뉴욕에서의 프로코피예프.

프로코피예프는 이들과 또 달랐다. 스트라빈스키보다 열 살 아래인 그는 혁명이 일어난 조국을 떠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겨우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는 미국에서의 4년과 파리에서의 12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조국에서 그는, 모든 예술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요구하며 누구든 무엇이든 그 이해될 수 없는 사상적 장막에 순응하지 않으면 힐책당하는 독재체제를 겪어야만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국외에서 오랜 기간 체류했다는 이유로 의심받아 종종 공적인 탄핵을 받았고, 이에 대한 심적인 고통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코피예프는 망명과 귀향 기간 동안 계속해서 상당한 양의 교향곡, 오페라, 칸타타, 실내악곡, 협주곡, 영화음악,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 세대 러시아 작곡가들 중 그의 업적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정도이다. 이들조차 피아노 작품으로는 프로코피예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프로코피예프의 커리어는 혁신적이고 전위적인 작곡가로 시작해서 보수주의적 ‘소련 체제 순응자’로 끝을 맺었다. 답할 수 없는 사실을 규명하는 일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만약 혁명이 없는 서방 국가에서 체류했다면 그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해서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프로코피예프처럼 천재적인 작곡가가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 활동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은 그의 음악적 성향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프로코피예프가 20세기 피아노 레퍼토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곡가라는 점, 그의 피아노 작곡 스타일이 여러 번 변화와 변화를 거듭했다는 점이다.

서유럽의 전통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화

그 시대 러시아의 모든 훌륭한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코피예프는 고전주의 시대의 전통적 작곡 기법에 창작의 기초를 두었다. 이는 유쾌한 <고전 교향곡>(1917)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다른 작품들에서는 신랄한 불협화음과 혁신적인 형식에 매료된 프로코피예프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특성은 피아노 독주를 위한 <다섯 곡의 풍자>(Sarcasms, 1913)와 부드러운 20개의 소품인 <찰나의 환영>(Visions Fugitives, 1917)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상황에 따라 떠오른 악상을 노트 여기저기에 흘려 쓰던 창작 방식은, 에피소드가 가장 중요하고 통일적 구성은 에피소드 다음이라는 그의 음악적 철칙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유래한 포스트 모던한 병치, 혼합 작곡방식은 그의 망명 기간인 1918~36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서유럽의 신고전주의 영항을 받은 그는 음악적으로 단순해졌고 형식은 보다 전통적으로 변했다. 서정성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거친 음도 부드러워졌다. 아마도 피아노 소나타 5번(1925)이 그 변화의 적절한 예일 것이다. 프로코피예프 스타일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에 대하여, 특이한 울림이 많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온음계적 서정성이 초기 작품의 미숙한 활력과 변덕스러움을 벗어난 듯하다고 말한다.

프로코피예프가 소련으로 되돌아온 때는 스탈린 정권이 부상해 공포정치를 할 때였다. 그들은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소비에트 연방을 찬미하는 음악을 쓰도록 권장했을 뿐만 아니라 의무로까지 지정했다. 이에 대한 검열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이 시기에는 애국심보다 더 가치 있는 정서는 있을 수 없었고, 서구 데카당스적 예술 추구보다 더 반역적인 행위는 없었다. 그러나 영원한 변화를 꿈꾸었던 프로코피예프는 이러한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해 나가면서 서유럽 전통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조화시킨 전혀 새로운 음악언어를 만들어 나갔다.

Sviatoslav Richter plays Prokofiev's Piano Sonata No.7 (Moscow 1957)

20세기의 전쟁 소나타

프로코피예프는 외부의 정치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공교롭게도 그는 스탈린과 같은 날에 죽었다) 정력적으로 작곡을 했다. 그러나 <피터와 늑대> 및 교향곡 5번과 같은 단순하면서도 대중 친화적인 작품과 1939년에서 1944년 사이에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전쟁 소나타’(6, 7, 8번)들 사이에 나타나는 음악적 불연속성은 쉽게 받아들기 힘들다. 특히 이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에는 뛰어난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맞물려 하행하는 장-단 3도로 된 6번 소나타의 시작 동기는 1세기 이전에 베토벤이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시작 부분에 썼던 유례없는 반복 화음만큼이나 그 개성이 강렬하다. 형식적인 고전주의가 무시되며 베토벤의 32번 소나타’ 세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8번 소나타 또한 이에 못지않은 혁신성이 내재되어 있다.

프로코피예프의 7번 소나타는 전쟁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드라마틱하게 폭로한다.

 

1939년부터 1942년 사이에 작곡된 7번 소나타는 20세기의 우상 파괴적 모더니즘과 미래를 만들기 위한 폭력을 음악에 반영한 20세기 최고의 피아노 소나타다. 당시에 독일의 소련에 대한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 전망은 암울했다. 작품 전체는 고전주의를 연상시키는 규칙적인 진행과 서사적인 스케일, 그리고 비극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서린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패시지, 이 두 가지 요소가 날카롭고 정교하게 대조를 이루며 낯선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이 가운데 서정적 패시지(2악장)는 이 작품에 보완적이고 은유적인 측면을 더하는 것이다. 이 역시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리스트에서 비롯한 비르투오소의 전통과 라벨에 의해 만개한 피아노적인 음악언어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자신만의 개성적인 언어로 창출해냈다. 이런 관점에서 7번 소나타의 역사적인 의미는 높다. 초연은 1943년 1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Vladimir Horowitz plays Prokofiev's Piano Sonata No.7 (Carnegie Hall 1951)

1악장: 알레그로 인퀴에토-안단티노-알레그로 인퀴에토-안단티노-알레그로 인퀴에토

이 악장의 성격을 극명하게 확인해주는 ‘인퀴에토’(Inguieto)라는 악장 지시는 불안한 또는 요동하는 뜻이다. 악마적이며 한 치의 빈틈도 없는 클라이맥스를 형성하는 1주제는 현대사회와 전쟁의 고통, 갈등을 연상시킨다. 이와 확연한 대비를 이루는 2주제 ‘돌렌테’(Dolente)는 허무하고도 끝없는 애상감을 서정적으로 그러내는 대목이다. 전체 구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주제다.

이 두 주제를 비롯한 총 일곱 개 정도의 단편적인 모티브들은 훈련받지 않은 청중들도 금방 이해될 수 있는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작곡가가 찾고자 했던 독창적이고도 개성이 있으며 쉬운 멜로디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발전부에서는 튼실한 구조 위에 비르투오소적인 피아노의 효과와 엄청난 타악기적인 불협화음이 춤을 추는 듯하다. 재현부는 2주제가 먼저 등장하며 압축적인 표현 기법으로 끝을 맺는다.

2악장 : 안단테 칼로로소-포로 피우 아니마토-피우 라르가멘테-운 포코 아지타토-템포1

아름답고 중후한 분위기의 느린악장. 동시에 도시적인 차가운 느낌의 낭만성이 담겨 있어 앞과 뒤 악장을 이어주는 훌륭한 가교로서의 효과 또한 빼어나다. 오른손 내성에 주제 선율이 전개되고, 왼손은 대비되는 선율로서 세련된 조화를 이룬다. 마치 우주 속에 떠도는 듯한 공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악장으로, 포코 피우 아니마토부터 감정이 고조되고 표현 또한 거칠어져 운 포코 아지타토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 후 다시 곡은 고요해진다. 곧이어 종을 울리는 듯한 코드 진행이 등장하고 페달이 최면적인 효과를 고조시키며 끝을 맺는다.

3악장 : 프레치티타토

성급하게 혹은 맹렬하게를 지칭하는 ‘프레치티타토’(Precititato)라는 악장 지시는 프로코피에프가 격렬한 음악을 만들 때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7/8박자 토카타 풍의 지속적인 연타 리듬이 특징적으로, 양손의 확장된 화성과 야만성을 배가시키는 분절, 압도적인 음량과 승리에 도취된 듯한 음향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피아니스트에게 비르투오소로서의 본질을 요구하는, 작곡가의 초기 작품인 토카타 Op.11과 비견되는 힘이 넘치는 악장이다.

 

추천음반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의 세계 초연은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 스튜디오 레코딩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1958년 모스크바 실황녹음(Archopel)이 현재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음반으로 초연자로서의 권위와 악마적인 피아니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역사적인 레코딩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녹음은 미국 초연자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차지였다. 그의 1945년 레코딩(RCA)은 리흐테르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틱한 전개와 칼로 에는 듯한 날카로운 기교는 듣는 이를 압도한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DG)는 현대적인 아름다움과 날카로움이 물씬 풍기는 명연주로서 오래 전부터 그 명성이 높고, 예핌 브론프만의 연주(SONY) 또한 러시아적인 정서와 세부의 의미를 잘 살려낸 호연으로 적극 추천한다.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명곡 명연주 2011.08.08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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