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경부터 1822년 가을 사이 슈베르트는 기악을 위한 대규모 작품 몇 편을 수차례에 걸쳐 작곡했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이 시기에 작곡을 시작했다가 완성하지 못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미완성 교향곡’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그는 네 악장의 소나타 형식에 확장된 주제의 변용을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승리로 이끈 작품이 바로 ‘방랑자 환상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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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이 넘쳐흐르는 역동적 활기
1822년 11월에 작곡, 1823년 카펠리와 디아벨리에 의해 출판된 ‘방랑자 환상곡’은 20대의 슈베르트의 원대한 꿈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급진적인, 혹은 예언적인 측면(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나 슈만의 환상곡을 예견하는)이 다분한 이 작품은 긍정의 힘이 넘치는 작품으로서(악마적인 힘과는 사뭇 다른 에너지), 네 개의 악장에 걸쳐 단일 주제가 순환 형식으로 배치되며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을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낀 산 위의 방랑자>, 1818
슈베르트가 이 환상곡을 완성하는 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부유층 인사인 엠마누엘 폰 리벤베르크 드 치시틴의 후원과 위촉이 강한 영향을 끼쳤다. 훔멜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리벤베르크는 앞뒤 악장에서 보다 폭발적이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기백을 갖춘 외향적인 작품을 위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곡가는 이러한 요청에 적지 않게 당황했음이 마지막 푸가 악장에서 분명하게 나타는데, 그의 친구인 레오폴트 쿠펠바이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슈베르트가 환상곡을 한 번 들었는데... 마지막 악장에서 난관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따위 작품은 악마나 연주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그가 1816년에 작곡한 리트인 ‘방랑자’ D.49-3의 몇몇 주제를 아주 짧게나마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에서 연유했다. 처음에는 ‘불행한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작곡했으나 이후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된 이 작품은 기존의 리트들보다 훨씬 장엄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처음에는 레치타티보로 시작하여 리듬과 멜로디를 빈번하게 바꾸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도입부와 코다를 동반하는 A-B-A 형식에 의한 오페라 아리오소에 가깝다. 산에서 내려온 사나이가 나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다 노래하고,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탄식하다가 마지막에는 그대가 없는 곳, 그곳에 행복이 있다라는 자조적인 내용의 이 리트는 지상에서의 슈베르트의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에서는 대부분 ‘행진곡’의 분위기로 묘사되며 자조적인 성찰보다는 긍정적인 전진이 작품의 주요 주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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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된 승리의 팡파르, 위풍당당한 끝맺음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 가운데 기교적으로 가장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의 낙차에 있어서도 엄청난 힘과 지구력을 요구한다. 여기에 혁신적인 형식까지 가세하여 당시로서는 대단히 교양 있는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확장된 형식과 정교한 주제의 발전 및 전개, 혁신적인 순환주제의 채택(당시로서는 최초의 순환주제 작품), 마지막 푸가 악장 배치 등등으로부터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에서 추구했던 정신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악장은 힘차게 질주하는 위풍당당함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혁신적인 특성 때문인지 프란츠 리스트는 이 작품을 특히 좋아했는데, 슈베르트 사후인 1851년 이 작품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 형태의 작품으로 편곡(S.366)했고, 더불어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S.653)으로 재차 편곡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오리지널 버전에 대한 얼터너티브 버전 및 마지막 악장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편곡 버전(S.565a) 또한 작곡했다. 아마도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오케스트라적인 음향(위촉자인 리벤베르크가 의도했을 법한)은 피아노 한 대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다고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황제는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Pollini plays Schubert's Wanderer Fantasy D.760
1974
음반추천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냉철하면서도 정교한 연주(DG)와 웅장하면서도 강인한 남성다움이 돋보이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연주(EMI)가 이 난곡을 훌륭하게 연주해낸 명연으로 오랜 동안 회자되어 왔다. 각기 추구하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작품의 혁신성과 슈베르트의 독창성을 잘 살려낸 연주로서 이 두 연주의 가치는 대단히 높다. 한편 알프레트 브렌델의 연주(Philips)는 빈의 분위기와 다채로운 세부 디테일을 보다 살려낸 연주로 많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리스트의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으로는 피아니스트 호르헤 볼레와 피아노와 런던 필하모닉을 이끈 게오르크 솔티의 협연(DECCA)이 슈베르트의 정서와 리스트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초절 명연으로 손꼽을 수 있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