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개념과 주요문제
1. 철학의 개념
- 철학 ~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서 ‘개념들에 의한 理性 인식의 체계’ - 과학 ~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인식들의 체계 - 수학 ~ 개념의 구성(作圖)에 의한 理性 인식 체계
- 물리학 ~ 사물의 물리적 원리에 관한 이론 체계 - 심리학 ~ 사랑의 마음에 대한 체계적 이론
1) philosophia ~ 지혜의 사랑 philosophos ~ 지혜를 사랑하는 자, 철학자 구도자(求道 者) philosophein ~ 철학 함, 구도(求道)
2)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arche)를 통찰하고 있는 자(者) 고(故)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어긋남이 없는 자”(論語 爲政4 :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하늘이 명하신 것을 본성(本性)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이 교(敎)라 함이다 즉 哲人의 학문을 哲學이라 할 수 있다.
3)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 “ 전 철학을 하나의 나무에 비긴다면 그것의 뿌리는 形而上學이요, 줄기는 물리학(物理學: 自然學)이며, 가지들은 의학, 역학, 윤리학과 같은 여타 학들이다” ~ 철학을 ‘학문’의 일반을 지칭함
4) 근대적 의미 ~ 철학 : 總體學 또는 根本學, 과학 : 철학을 전제로 한 分科學
5) Kant(최초의 직업(프로) 철학자, 대학에서 강의) “ 개념들에 대한 이성 인식의 체계”로 규정(순수이성비판)
(1) 개념들의 구성(作圖)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인 수학과 구별되고, (2)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인식(cognitio ex datis)들의 체계인 여타의 과학들과도 구별된 다.
*** 이성 인식 ~ 원리적 인식, 즉 순수한 선험적(先驗的) 인식을 말한다.
① 이성의 이성 자신에 대한 인식 ② 이성에 의해 순수하게 원리적으로 생각되는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다.
*** 철학의 두 부분 ~ 이성 자신의 형식에 대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논리학(論理學: logica) 순수하고 원리적이되 대상의 실질[실재] 내용에 대한 인식들로 이루 어진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따라서 논리학은 ‘형식철학’ 형이상학은 실질[실재]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 인식론(認識論; Erkenntnislehre) ~ 인간의 대상에 대한 인식 원리를 반성적으로 다루 는 것으로 19세기 이후에 생겼다.
2. 철학의 방법
**** 칸트는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 ~ ‘내용 없는 개념’을 농으로 하고 ‘흉내 내어 얘기’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제 발로 설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을 철학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소한의 철학하는 자세라고 하였다.
**** 진정으로 스스로 철학하는 방법은 ‘사변(思辨: speculatio)'이다. **** ‘자연과 인간 만상(萬象)의 궁극적 원리를 찾는 학적 작업이다’
그것이 수학적인 방법으로도 과학적인 방법으로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철학적인 문제들은 그 성격상, 자명한 진리를 전제하고 거기에서부터 연역(演繹: deductio)하는 방법으로나 개별적인 사태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보편성을 추리해 가는 귀납(歸納: inductio)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겠다.
그러하니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상(現象)을 진상(眞相)으로 간주하고, 이 진상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충분조건들을 사변적(思辨的)으로, 환원(還元; reductio)적으로 추궁해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철학의 본래적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사변(思辨)’뿐이라 하는 것이다.
3. 철학의 기본 과제
철학의 제일 과제로서 이성 또는 합리성 해명
**** 이성(理性) ~ ‘인간 및 세상 만물의 보편적 질서’ 원리 - 도(道), 이(理), 성(性)으로 표현 로고스, ratio, vernunft, reason - 인간 ~ 이성(理性)을 가진 동물 :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 - 주역(周易) ~ ‘乾爲天 卦爻辭’에서 “하늘의 법도가 변화하니, 만물은 각기 자신의 본성을 바르게 하면서,
서로 합하여 큰 조화를 보전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와 함께 계사전(上 十二)에서는 “형태를 가진 세상 만물을 그릇이라 한다면, 이것을 주재하는 형태위에 있는 것을 도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은 우주전체의 운행 원리로서 ‘道’에 대하여, 이 도의 分殊 내지는 細目으로서 개개 사물에 내재하여 각기 그 사물을 주재하는 원리가 ‘理’라고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그 근본에 있어서 道理는 하나로 이해되었다.
- 중용(中庸) ~ “하늘이 정해준 바가 본성이며, 본성을 따르는 것이 법도요, 이 법도를 마름질하여 격(格)을 세우는 일이 가르침이다. 법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떨어질 수 있으면 법도가 아니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 須臾難也 可離 非道也)” - 로고스 ~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주의 원리로 이해했다.
그리고 세계는 이성에 의해서 주재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계는 무질서한 무더기가 아니라 질서정연한 전체 곧 코스모스(cosmos)이다.
4. 논리학(論理學: logica)
- logos의 學 *** logos ~ 말, 도(道), 관계, 비례, 추리(推理), 이성(理性) - 이성학(理性學: philosophia rationalis) - 논리학은 인식론(認識論)의 방법론이다.
1) 논리학의 성격 ~ 철학의 일부인가? 학문 또는 철학의 도구인가?
2) 논리
- 言 + 侖 ~ 말을 바로 세우는 이치 - 論 ~ 말하다(說), 생각하다(思), 의논하다(議) - 故로 ‘論理’란 말함의 이치, 생각함의 이치, 의논함의 이치라고 할 수 있다.
- 理致 ~ 바로 무엇인 까닭(所以然: 存在), 무엇인가를 바로 그 무엇이게끔 해주는 까 닭(所當然: 法則) - 결론적으로 논리는 내면적으로는 생각의 이치이고, 외면적으로는 말의 이치다.
3) 사고(思考)
- 광의(廣義) ~ 의식 활동과 그 내용 모두를 지칭한다. 상상하고 의욕(意慾)하는 것 도 사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 협의(俠義) ~ 판단과 그것의 요소인 개념, 그리고 판단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 된 추론(推論)으로 이해된다.
4) 논리의 요소와 법칙
(1) 사고의 확실성의 원리 ~ 명료성과 근거 (2) 정합성(整合性)의 원리 ~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
5) 사고(思考)와 개념(槪念)
- 개념(槪念) ~ 말과 글의 최소 의미 요소(意味素) : 思考의 틀을 이룸과 동시에 思考 의 내용도 형성한다. 大槪의 생각(念) - 말, 문장 ~ 개념 + 개념 + 개념 (1) 경험 개념 ~ 사과, 배, 龍....... (2) 순수(純粹: 想像) 개념 ~ 진리, 선(善), 삼각형
***** 다음의 예문에서 논리에 어긋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
① 누가 내 공책에 둥근 사각형을 그려 놓았다. ② 우리 동네 개울에는 청룡이 세 마리 살고 있다. ③ 기독교의 신에게 기도한다. 유대교의 신에게 기도한다. 이슬람교의 신에게 기도한다. 불교의 신에게 기도한다. 이 세상 모든 종교의 신에게 기도한다. ④ 그리운 친구여, 할 일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나는 천장에 작은 네모난 구멍에 걸린 둥근 달을 보며 둥근 사각형을 생각하였다.
둥근 사각형..... 그것은 둥글까 네모일까
생각하다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
⑤ 산자락에 청룡 한 마리가 꾸불꾸불 드러누워 있다.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니 그 위에 독수리 한 마리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
5.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 metaphysics의 본래의 뜻은 ‘자연학(自然學)의 뒤의 것’ 이었다. 그것이 ‘자연적인 것 너머의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말로 전환되었다. -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繫辭上 十二)
1) 철학적 인식의 두 가지 체계
(1) 논리학 ~ 대상의 차이와는 관계없이 사고 형식의 원리 일반 : 철학의 형식적 부문 (2) 형이상학 ~ 대상과 인식 내용을 갖는 진정한 철학 : 철학의 실질적 부문
2) 취급하는 대상의 차이에 의한 형이상학의 분류
(1) 자연(존재) 형이상학 ~ 존재자(存在者)가 대상 : ‘스스로 그러한바’의 것 ⟶ 순수 이 성의 이론적(思辨的) 능력 분석에 의거 (2) 자유(윤리) 형이상학 ~ 당위(當爲), 도덕(道德) : ‘스스로 비롯하는바’의 것 ⟶ 순수 이성의 실천적 능력 곧 자유(自由) 분석에 의한다.
3) 자연(존재) 형이상학의 분류
(1) 일반 형이상학 ~ 존재자로서 존재자, 존재자 일반의 존재 원리를 탐구: 존재론 (2) 특수 형이상학 ~ 한 존재자이지만 결코 감각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특수한 존재자를 탐구: 영혼론(靈魂論), 우주론(宇宙論), 신학(神學)
4) 순수이성 비판 ~ 이성이 그 이론적 사용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이성 사용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하는 일. 곧 순수한 이성이 대상과 관련해서 우리를 어 디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 비판에서 밝히 려는 작업이다.
*** 인간이 감성세계를 인식하는데 쓰던 인식의 원리들을 가지고 초 감성적인 것들을 넘 어서려고 한다. 그러나 감성적인 것과 초 감성적인 것들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 문에 이성이 형이상학이라는 이름 밑에서 자기 능력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인식해 보 고자한다면, 거기에는 큰 위험과 착오가 있다. 이를 피하고 참된 형이상학을 위한 확실한 주춧돌을 놓기 위한 작업이 순수이성비판이다.
5) 정신(精神) 개념과 위상 문제
- 정신(精神)은 1870년 이후 일본이 서양 사상을 수용하면서 ‘spirit' 'Geist' 등을 정신 (精神)으로 번역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 한자어의 정신(精神)은 중국 태생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본 태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 다. - 한국에서의 사용은 언더우드의 한영사전에서 ‘reason'을 지각, 의리(義理). 정신(精神) 등으로 옮긴 예가 있다. - 전병훈(全秉勳: 1860~?)이 1920년경 베이징에서 출판한 “韓國哲學通編”에서 사용하고 있다. - 한국도 서양의 철학 사상이 들어오면서 일본과 같은 이유로 사용하게 되었다.
- 중국 고전에 나타난 정신은 인체의 구성요소의 두 축의 의미가 있다. - 기독교의 고전에서 정신에 상응하는 ‘ruah'는 生氣의 의미가 있다. 곧 생명을 의미한다. - 네폐쉬(nefes)는 ‘ruah' 같이 생명의 원동력의 의미가 아니고 죽음의 상대 개념에 가깝 다.
- 프네우마(pneuma)는 생리적-물질적의미로 많이 쓰였다. -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에서는 혼돈적이면서도 조형적인 물질 내에 혼을 집어 넣는 우주의 형식적 원리로 사용하였다.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은 비 물질적 실재, 곧 신이나 인간의 영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 데카르트는 마음-몸, 정신(mens)-물체(corpus)라는 두 실체론을 도입하였다. 실체(實體) ~ 그것이 존재하는데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그 자체로 존재하 는 것 데카르트 이후에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심신 상호 작용설’ ~ 심리 철학의 발단
- 데케르트는 ‘나란 정확히 말해 다름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이란 곧 ‘정 신’, ‘영혼’, ‘지성’, ‘이성’이라고 풀이하고 “나[자아]=생각[의식]하는 것=정신[마음]이 라고 규정하는 한편 이것과는 다른 ‘물질적인 것 (res materialis)' 또한 존재한다고 하였 다.
- 헤겔 ~ 전체라는 의미에서 하나인 절대자는 자기 운동의 주체, 자유의 실체라는 의미 에서 정신이며, 세상의 역사, 곧 세계사는 이 정신의 자기완성의 도정이다. 절 대자인 정신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형성해 가는 것이고, 그런 뜻 에서 ‘살아 있는 실체’이다.
- 물리(物理)주의(인간 기계론, 인간 식물론) ~ 정신도 생리(生理)=심리적(心理的) 운동 규칙 이상의 의미는 없다.
***** 인간세계의 가치 원리로서 정신
진정한 문제는 단순히 ‘정신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정신인가?’이고. 정신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 보다는 ‘정신이 있다.’, ‘정신이 없다.’가 무엇을 함축하느냐 이다.
정신을 세계 주재(主宰)의 원리나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주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실적 증거들이 필요할 터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정신은 있으며, 적어도 인간 세계를 규제하는 가치 원리로 있다. 그 가치 원리가 어떤 초월적 신(神)에게서 유래한 것이냐, 인간의 자연 신성에서 발원한 것이냐, 인간의 이상에서 정립된 것이냐. 아니면 유한한 인간의 한낱 환상이냐는 물론 여전히 ‘사실적’으로 답해 질 문제이다.
그러나 인간은 줄곧 가치 세계 속에서 살아왔으며, 살고 있고,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그 가치 세계의 원리를 우리는 충분히 ‘정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이 결코 물리적 원리와는 다른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 이다.
Ⅰ. 존재론(存在論: ontologia ontology ontologie)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각각 ‘존재론’,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인식의 원리가 곧 존재의 원리가 되므로, 그런 경우 존재론과 인식론은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없고, 다만 관심과 관점의 면에서 구별이 있을 뿐이다.
1. 존재론의 탐구대상
어떤 것이 존재하는 한에서, 바로 그 존재하는 것(本質)이 존재하는 까닭(이유, 원인, 근거, 목적)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존재로서의 존재자(to on he on)와 이것에 자체적으로 귀속되는 학문이 있다”고 하면서 이 학문을 “제일철학(prote philosophia)"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해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와 이 존재자에 본래적으로 속하는 것은 ‘존재자의 있음(존재, hoti esti)과 무엇임(본질. ti, esti)'으로 해석되어 중세와 근세 초의 형이상학의 핵심문제가 된다. 그러나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란 어떤 특정한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존재한다(있다)‘는 술어가 속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존재론의 탐구대상은 곧 어떤 것이 존재하는 한에서, 바로 그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까닭(이유, 원인, 근거, 목적)이다.
***존재자(存在者) ~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드는 근원적인 존재자를 ‘신(神: theos)이라고 이름 하였고, 그래서 제일철학의 문제는 신학(神學: theologia)로 전이 되었다.
2. 존재론의 문제와 쟁점들
1) 존재론적 물음
(1)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이다. ~ 일반적인 물음 (2) 근원적인 물음 ~ 비둘기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혹은 용(龍)과 같은 상상적인 것이 든 그것은 반드시 ‘무엇이다’ “도대체 이 ‘무엇임’이 무엇인가? (3) ‘있음’과 ‘없음’은 무엇인가?
*** 존재론의 기본 물음
① 도대체 무엇임(본질) 일반을 가능하게 하고, 있음(존재)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 은 무엇인가? ② 존재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엇으로 있다(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재자의 무엇임 (본질)과 있음(존재)의 관계는 무엇인가? ③ 어떤 존재자는 개별성 혹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갖는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산 파인 어머니를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동시에 사람이고 생물이다. 여기서 개별 자 ‘소크라테스’와 보편자 ‘철학자’, ‘사람’ 혹은 ‘생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④ 어떤 존재자,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기원 전 469년부터 399년까지는 존재하다가, 기원전 399년 이후에는 다시 존재하지 않 는다. 왜 어떤 존재는 있다가 없게도 되며, 없다가 있게도 되는가? 모든 존재자가 이러한 성격을 갖는가? 항상 있기만 하는 존재는 없는가? ⑤ 도대체 ‘있다’, ‘존재한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존재론의 물음과 관련된 쟁점들
(1) 본질과 존재 일반의 근거 혹은 원리
존재자의 무엇임과 있음의 규정은 존재자의 존재 방식이며, 그 방식은 근원적인 존재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에, 존재자의 존재 규정 일반은 존재자를 파악하는 인간 의식의 사고방식이라는 견해도 있다.
모든 존재자는 본질의 면에서나 존재의 면에서 그 존재자가 그러한 원인을 가지며, 그 원인은 그 존재자 자신 안에 혹은 밖에 있으되, 그 원인 역시 어떤 형태의 존재자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은 어떤 것을 무엇이게도, 있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규정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시원(始原), 근원적인 존재로서의 신(神: theos)의 개념이다.
① 이신론(理神論: deism) ~ 존재자의 유래를 자연발생적으로 파악한다.
무엇인가 존재함은 내가 존재하고 있으니 확실하다. 그리고 나를 나 자신이 있게 하지 않는 것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를 있게끔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無)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의 원인으로서 존재자의 계열에서 최초의 존재자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고 시원이다.
그러니까 이 최초의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 원인을 더 이상 자신의 밖에 갖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자기 원인 (causa sui)’이라 일컬어지고 ‘신(神: theos)’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ens a se)’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의존되어 있지 않은 ‘자족체 (自足體: autarkeia)’이며, ‘그것은 자신의 본질상 자기 안에 존재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위하여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실체(實體: substantia)'라고 불리고, 모든 존재자들이 그로부터 유래하므로 모든 존재자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최고 완전 존재자(ens perfectissimum)' 혹은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을 다 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 실질(在) 존재자(둔 realismum)'라고도 불린다.
이신론(理神論)의 신 개념으로서 세계의 발생을 설명할 때, 그러한 견해는 보통 ‘유출(流出: aporroia, emanatio)'설이라 불린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老子 道德經 42장)
하나(一者, to hen, 하나님)는 만물이되 유일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만물이 아니라.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플라톤).
‘하나(一者, to hen)’로부터 세계의 발생을 유출(流出)로 설명하면서, 그 ‘하나’를 단지 순서에 있어서 앞서는 것으로 보고 세계의 내재적(內在的)인 것으로 보면, ‘자연과학적’인 세계 생성의 설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세계 생성의 설명에는 “그 ‘하나’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기될 수 있지만, 이신론은 이 질문 자체를 그 ‘하나’는 궁극의 원인이므로 더 이상 그 유래를 물을 수 없다고 배제한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을 갖는다’는 존재 근거율에 단 하나의 예외가 인정되는 셈이다.
이 점 이외의 유출설의 구성은 ‘논리적’이므로 이신론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과 같은 작업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사물(존재자)의 본질에 존재 방식은 그 원인에 따라 규정되며, 그 원인은 자연 안에 있다. 이 원인의 계열, 즉 존재자의 전 계열 자체가 자연(自然)이다.
② 유신론(有神論: theism) ~ 존재자의 유래를 의지적인 창조(創造)의 결실로 파악한 다. 세계의 시원(始原)으로서의 ‘하나’는 의지(意志)와 지혜(智慧)를 가진 존재자이며, 그 ‘하나’의 의지와 지혜의 질서에 따라 만물의 본질과 존재의 양이 정해진다고 파악한다.
이런 ‘하나’를 신(神)이라고 부를 때, 그런 견해는 유신론(有神論)이라고 일컬어지며, 이때 신은 인격성(人格性)을 가짐으로 보통 ‘인격신’이라 불리고, 인격신으로부터 만물의 유래를 ‘창조(創造: creatio)'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그 ’하나‘는 ’하나님(하느님)‘ 혹은 창조주(創造主)’라고 불리며,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자의 존재 원리로 이해된다. 창조주로서 ‘하나’는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과 존재를 규정한다. 그리고 선(善)을 사랑하고 악(惡)을 미워하며, 악의 회개(悔改)를 기뻐하고, 선에 대해서는 상(償)을 내리고, 간절한 소원에는 응답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질들을 완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완전한 인격체’이다. 인격신으로 ‘하나’는 또한 자연 만물의 근원이면서도 자신의 피조물과는 위격(位格)에서 완전히 구분되어, 자연의 존재자들의 계열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초월자’이다.
초월적 인격체로서의 신의 존재 설명에는 초 논리적 요소가 불가피하게 개입되므로, 계시(啓示)에 의한 확인이나 신앙(信仰)이 요구되고,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宗敎的)’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가. 존재(본질)론적 증명(삼단논법적 증명) ~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 신은 개념상 최고로 완전한 것이다. - 완전성에는 존재도 포함한다.(왜냐하면 어떤 것이 완전한데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성의 결여를 뜻하므로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나. 우주론적 증명 ~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방식 중 3번째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말하자면 우연적이고 가능적인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존 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그것의 존재 근거가 자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모든 우연적인 존재들의 근거로서 그것들의 밖에 하나의 존재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 필연적인 존재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다. 목적론적 증명 ~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방식 중 5번째
전혀 지적인 능력이 없는 자연의 사물들도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 그것도 일정하게 의도된 목적을 향하여 마치 화살이 저 혼자 날아가지만 궁수에 의해서 계획된 방향으로 날 듯이, 세계 내의 모든 존재자들은 어떤 지적인 존재자에 의해 계획된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 다. 이 운동의 기획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라. 이성론적 증명 ~ 데카르트
a. 명료하고 분명한 인식만이 참이다.(데카르트의 ‘보편타당한 진리’) b. 명료하고 분명한 의식의 내용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있다. c. 원인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으므로 - 이것은 ‘자연의 빛’으로서 이성이 주 는 명명백백한 사유 법칙이다. -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을 있게 끔 한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d. 이 원인의 내용은 그 결과인 신의 관념의 내용보다 크거나, 적어도 같아야 한다. e. 그런데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은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 지 전능하다. 는 것이다.
f.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의 관념의 원인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 거나, 내 의식 내에 있는 또 다른 어떤 관념일 수가 없다. ‘나’나 내 의식 내의 또 다른 어떤 관념도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자전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 다.
I. 그러므로 내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은 내 의식 밖에 있는 어 떤 것이어야만 한다. g. 따라서 내 의식 내의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신은 내 의식 밖에 실 재(實在)한다.
여러 가지의 유신론의 신에 대한 존재 증명이 논리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이들 증명은 선(善)을 상주고, 악(惡)을 징벌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입증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칸트가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은 논리적으로 허위임을 밝혀냄으로서, 그 후로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오로지 종교(宗敎), 신학적(神學的)인 문제라 볼 수 있다.
또 신의 존재 증명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 없는 존재자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주장이 됨으로서 존재론의 근본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가령 우리는 ‘신은 도대체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존재일 수 있는가?’ ‘신은 도대체 무(無)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인가?’라고 다시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근거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의 ‘본질’이니 ‘존재’니 하는 것은 존재자를 인식하는 의식의 규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의식되는 존재자’로 국한된다. ‘누구에게나 의식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자체로는 존재하는 것’이란 따라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여기서도 이른바 ‘실재론(實在論)’과 관념론(觀念論)‘의 대립을 보게 된다. 관념론의 입장에서 보면 실재론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주장함으로서 철학함의 기본 태도인 확실성의 토대를 벗어나는 것이며, 반면에 실재론의 입장에서는 관념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하면 무의미한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이 논의는 의식의 초월성에 관한 인식론적 쟁론으로 이어진다.
(2) 존재자의 존재와 본질의 관계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관계 문제는 유한자의 성격 반성에서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존재자들은 일정 기간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현실적 존재자는 그 ‘무엇’ 즉 본질(本質: essence)과 그 존재(存在: existence)의 결합체(結合體: composition)이며, 이때 본질과 존재는 실질적인 차이(distintio realis)를 갖는다는 견해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무엇인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 존재란 무엇인 것의 우연적 속성에 불과하다.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어떤 것은 여전히 무엇인 것이므로, 존재와 본질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구별을 통하여 단지 기능적이었던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고, 현실적으로 실재하던 것이 소멸되기 도하는 사태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는 존재와 본질은 실질적인 구별이 아니고, ‘존재’란 무엇인 것의 양태(樣態: modus)라 하고, 수아레즈(Suarez, 1548~1617)는 ‘존재’는 그 자체로 무엇과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 것의 양태도 아니며, 무엇이 ‘있다’, ‘없다’라는 것은 단지 개념상의 구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수아레즈가 말하는 ‘개념’이 인간의 의식작용의 일종으로 해석된다면, 있음과 없음은 실질적인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것의 양태도 아니고 한낱 의식 작용이 됨으로서, 그의 생각은 ‘존재’가 사고의 형식이라는 칸트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진다. 그리고 이 문제 역시 실재론과 관념론의 갈등에 포섭된다.
(3)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
공자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원효는 사람이다. - 공자, 소크라테스, 원효 ~ 개별적 존재자 - 사람 ~ 보편적 존재자
금강산은 아름답다. 대금소리는 아름답다. 이사도라 던컨의 손끝은 아름답다. 고야의 ‘마야’는 아름답다.
위와 같은 예들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별자들과 보편자의 관계에 관해서, 이른바 보편자는 개별적인 것들의 공통 징표에 의한 한낱 개념 내지는 이념[이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 것들은 보편자라는 원본(原本)을 다소간에 닮았거나 본뜬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 개별자들 ~ 끊임없이 발생하고 소멸 ~ 실재를 닮았으나 명멸 ~ 모상(模像), 현상(現像) - 보편자 ~ 그 개별자들에 공통인 보편적 성질들은 존속한다. ~ 영구 불변적-실재
- 플라톤 ~ 보편자를 개별자의 이데아로서 절대 불변적인 참된 것으로 파악 ~ 이데아론 - 아리스토텔레스 ~ 개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으로서 개체들은 고정 불변적 인 것이 아니라 변화 중에서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켜나간다고 본다. ~ 실체론 (實體論: ousia) ~ 보편자는 개별자들의 종(種)이나 류(類)의 표상으로 이해한다.
☆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 문제는 중세에 논리학과 그리스적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앙이 뒤섞여 하나의 격렬한 철학적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보통 ‘보편 논쟁’이라고 부른다.
** 에리우게나(J. S. Eriugena, 810~877)의 실재론(實在論: realism) ~ 아리스토텔레스 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보편자 ~ 명사(名辭)에 불과하다. - 유명론(唯名論; 名目論, nomen)-판단의 술어, 공통적인 낱말, 부호, 말소리에 불과하다. 실체(substantia) ~ 경험되는 개체, 개체는 판단에서 바탕에 놓이는 것
- 이성주의(rationalism) ~ 보편자의 실재를 주장 - 감각주의(sensualism) ~ 개별자만이 실재를 주장 - 개별자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감각 경험에서 성립하는 반면, 보편자는 결코 감각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데서 기인한다. - 무차별주의(indifferentism) ~ 절충적 견해 - 보편자는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은 아니 지만 그러나 개체 안에 내재한다(universalia in re)고 본다(Adelard 1099`1160) - 개념주의(conceptualism) ~ 보편자는 실재하는 것일 수 없고, 그렇다고 한갓 공기운동으 로서 말소리일 수만도 없다. 보편자란 개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 규정, 즉 개념 이다.
** 보편 논쟁에서 문제가 되었던 보편자와 개별자는 주로 피조물로서의 자연 존재자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유한 존재자와 무한 존재자의 구별
- 무한 존재자 ~ 자기 원인적 존재자, 자기로부터의 존재자,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음 - 유한 존재자 ~ 존재가 타자에 의존되어 있음, 타자로부터의 존재자
** 궁극적인 타자 ~ 신(神), 자연이 신
(5) ‘있음[존재]’의 의미(意味)의 문제
- 존재론에 얽힌 많은 문제들은 ‘있음[존재]’의 의미(意味)를 분명히 하지 않은데서 유래한 다.
- 존재자에서 비 존재자, 비 존재자가 존재자로 전환되는 논리적으로 모순 관계인 이 두 항 에 대한 대답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
① 발생, 소멸은 오직 모든 존재자를 주재(主宰)하는 자의 창조(創造)에 의해서 가능 ② 발생 소멸이란 ‘있다’ ‘없다’의 기준은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대체된다. 용(龍)은 상 상의 동물로 있고, 하나님은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삼각형은 칠판위에 그리면 있다 가 지우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경우에나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다.
- 칸트의 사고하는 의식이 무엇인가 ‘있음’의 세 가지 양태(樣態)
① 공간 · 시간상에 나타나고 수량으로 헤아릴 수 있고, 다른 것과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즉 힘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가능적으로 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능적 존재자이다. ②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있다. 그런 것은 말하자면 현실적 존재자이 다. ③ 어떤 현실적인 것과의 관련이 인과관계나 상호 관계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반드시 있 다. 그런 것은 이를테면 필연적 존재자이다.
** 여기서 제시되는 ‘있다’의 기준에 따라 존재자의 개념을 가지게 되면 영혼이나 신(神)과 같은 것은 ‘존재자’라고 일컬어질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있음’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Ⅱ.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 theory of knowledge, Erkenntnislehre)
제 1 절 인식론의 개념
- 반성적으로 문제의 근원을 밝혀가는 작업인 철학의 한 분야가 인식론이다. - 인식의 가능 원리를 탐구한다. - 인식에 대한 이론 ~ 인식에 대한 반성의 결실 : 반성은 인식을 인식이게끔 해주는 토대, 그것도 참된 인식, 즉 진리를 진리이도록 만들어주는 의심할 여지없는 확실한 기초를 추궁하고, 어떤 인식이 참이기 위한 조건들을 성찰한다는 뜻이다. - 인식론은 ‘논리학의 철학’이라 볼 수 있다. - 칸트의 구분
① 논리학 ~ 일반 논리학 또는 형식 논리학 ② 인식론 ~ 초월 논리학, 인식 논리학
** 인식=지식 ‘인식’은 ‘인식하다’라는 동사를 갖는데 반하여 ‘지식’은 그렇지 못한 관계로 통상 ‘인식’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인식론’ 또는 ‘인식이론’을 ‘지식론’ 또는 ‘지식이론’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다.
1. 인식론의 형성
- 인식론이라는 말은 유럽 철학계에서 19세기 중반에 생긴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 한국 철학계에서도 20세기 초 서양철학이 유입되면서 여타의 철학 용어와 함께 사용되었다.
- 흔히 서양의 근대 철학을 ‘인식론 중심의 철학’이라고 일컫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식론의 탐구는 ‘인식론’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훨씬 이전, 적어도 데카르트부터는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인 것으로 인정해 왔으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세운 것이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가를 이미 여러 해 전에 깨닫고, 따라서 내가 앎들에서 언제라 도 확고부동한 자주점(支柱占)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인생에 한 번은 이제까지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고,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 하였다(데카르트: 제1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1641).
** ‘인식’이란 우리인간에게 가능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인식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 참된 인식의 원본 내지 척도로 고려된 것은 신체 없는 인간에게나 가능한 순수 오성적 (悟性的) 인식, 계시(啓示)나 신통력에 의한 직관적 인식 내지 신(神)적 인식이었다.
그러나 근대 인식론에서 문젯거리가 되는 인식은 수학적 인식이라든지 자연적 인식처럼 인간에 의해서 수행된다고 간주될 수 있는 인식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런 모든 인식의 토대는 ‘나’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로크 역시 이 점을 깨달음으로서 비로소 인식론적 작업이 착수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론의 문제가 부상하게 된 사정을 우리는 로크가 ‘인간지성론’의 서두에서 ‘독자에게 부치는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모든 지적 작업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능력을 심사하고 우리의 지성이 어 떤 대상들을 다루기에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점 을 나는 동료들에게 제안하였고, 그들은 기꺼이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점이 바로 우리가 첫 번째로 연구해야 할 문제라는데 합의를 보았다(1690).
- 현대의 거의 모든 인식론적 쟁점의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1781)’도 이 로크적 합의에 동참한 결과이다. 칸트 역시 참된 인식을 거론하기에 앞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물어지고 대답되어야 한다고 보고, 이 작업을 우선적으로 수행한다. 그의 ‘이성비판’은 곧 인식하는 ‘나’ 즉 이성 스스로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인식 대상, 인식 범위, 인식 한계를 규정함이다. 이런 문제에 연관에서 오늘날 인식론은 ‘인식비판(Erkenntniskritik)'이라고도 일컬어진다.
2. 인식론의 쟁점들
- 물음을 그 뿌리까지 반성하여 묻는 학적(學的) 반성 작업인 철학의 한 영역으로서의 ‘인 식론’은 ‘인간에게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으면서 인식 일반에 대해서 해명하고 자 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인식의 기원 ② 인식의 대상 및 내용
③ 참된 인식[진리]의 의미 ④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1) 인식의 기원에 대한 문제
(1) 이성론(理性論, 合理論: rationalism)
인간이 무엇에 대한 인식의 단초는 바로 그 인식을 수행하는 인간 자신의 인식 능력이 구비하고 있는 선험적인 인식 원리라고 본다. 인식 형성의 기본 요소인 사고(思考)는 선험적(先驗的: a prion)인, 그러니까 이성(理性) 자체에 내재 (內在: immanent)하는 원리에 따라 가능하고 언표(言表) 역시 일정한 이성의 규칙을 따를 때만 인식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데, 바로 저 사고의 원리와 언표의 규칙은 표리(表裏) 관계에 있다고 본다.
이성론자들은 사고의 최고의 원리로서 모순율(矛盾律)과 근거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근거율 (根據率: 혹은 충족이유율)을 든다.
** 언표(言表) ~ ‘무엇에 관하여 말함(legein)'인바 말함에서 바탕에 놓이는 것, 그 무엇이 주어(主語: subjectum)이고, 그 말해진 것[내용]을 술어(述語)라 한다. 이 주어와 술어가 결합하여 말이 되게끔 해주는 것이 논리(論理: logos)이다. 이 논리의 최상의 규칙이 모순율 (矛盾律: pricipium contradictions)이다. 주어와 술어는 서로 어긋나게 말해져서는(contradicere) 안 되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표상에도 이 표상과 어긋나는 표상을 덧붙여질 수 없다‘
어떤 언표도 이 모순의 규칙을 어기고서는 참일 수 없다. 사람은 모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실제로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모순율은 사고와 언표, 그리고 인식이 참이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무엇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2)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 感覺主義: sensationalism) ~ 인간에게서 모든 인식의 출발점은 감각 경험이라고 보는 견해로서 인간의 마음은 각각 경험이전에는 한낱 ‘백지’라고 주장한다. 로크는 사람은 ‘이성과 인식의 재료들’을 모두 경험에서 얻는다. 이때 경험이란 기본적으로 감각경험을 뜻하며, 그래서 보통 경험주의 원칙은 ‘감각 중에 있지 않던 어떠한 것도 지성 중에 있지 않다’고 표현된다.
그러니까 철저한 경험론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기능은 순전히 경험에 의존적이며, 일견 필연적인 사고의 법칙 같은 것도 습관적인 경험의 산물에 불과하다.
(3) 초월론(超越論: transcendentalism) 초월철학(超越哲學: Transzendental Philosophy) 비판철학(批判哲學: Kritisghe Philosophy)
논리학, 수학과 같은 형식적 인식에서는 이성론에 동조하면서, 자연 대상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는 감각 재료가 선험적 인식의 원리에 따라 규정됨으로서 인식이 생긴다는 견해이다. 칸트에 의해 대변되는, 이른바 비판철학의 초월론은 이성론과 경험론의 화해를 시도한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통찰함으로서 한편으로 경험론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이성론의 입장에 선다.
- 칸트의 인식론 견해
① 모든 인식은 재료[내용, Materie]와 이 재료를 정리 정돈하는 형식[틀, Form]을 요소 로 해서 이루어진다. ② 인식이 사고의 산물인 한에서 인식의 형식은 사고의 형식이며, 이 사고의 형식은 이미 지성에 ‘예비 되어 놓여 있다.’ ③ 따라서 인간의 모든 인식의 밑바탕에는 선험적(先驗的)인 사고의 형식이 놓여있다.
④ 자연적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 재료가 감각 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적 인식이라고 불리 고, 예컨대 수학인식처럼 그것의 재료가 결코 감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순수한 것 일 때, 이러한 인식은 선험적인식이라고 불릴 수 있다. ⑤ 경험적 재료이든 선험적인 재료이든 인식의 재료가 주어지면, 이 재료들은 종합 정리 하는 기능인 사고 작용을 통해서 한 인식이 성립한다. ⑥ 이 사고 작용은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컨대 ‘~은 ~이다’, ‘그러므로’, ‘~ 과 ~은 (지금 거기에) 있다’ 등등 이러한 형식은 어떠한 감각 기관을 통하여 수용된 것도 아닌데, 사고 작용의 바탕에 있다. 그래서 칸트는 그것들을 사고 기능인 지성이 스스로 산출해 낸 개념으로 보고 ‘순수이성개념’이라 부르며, 사고 작용의 틀이라는 점 에서는 ‘범주(範疇: categoria)'라고 칭한다. ⑦ 칸트는 선험적 기능 개념 가운데 근간이 되는 것을 4종 12개로 파악한다.
가. 양(量)의 규정
a. 단칭 판단 : 하나(단위, 단일성) b. 특칭 판단 : 여럿(다수성) c. 전칭 판단 : 모두(전체성)
나. 질(質)의 규정
a. 긍정 판단 : ‘~이다’, ‘~하다’(실재[질]성) b. 부정 판단 : ‘~아니다’,또는 ‘~않다’(부정성) c. 무한 판단 : ‘~은 아니다’ 또는 ‘~않다’(제한성)
다. 관계(關係)의 규정
a. 정언 판단 : ‘~은 ~이다(하다)’(실체성과 속성) b. 가언 판단 : ‘~ 때문에 ~이다(하다)’(인과성) c. 선언 판단 : ‘’서로 ~ 때문에 ~ 이다(하다)‘(상호성, 교환적 인과성)
라. 양태(樣態)의 규정
a. 미정 판단 : ‘있을 수 있다’([존재] 가능성) b. 확정 판단 : ‘실제로 있다’(현존성, 현실성) c. 명증 판단 : ‘반드시 있다’([존재] 필연성)
⑧ 판단의 방식으로 인식이 이루어지고, 판단은 범주(範疇)에서의 통일 작용이므로, 순수 지성 개념인 범주가 인식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자신은 선험적 표상이면서, 즉 경험에 앞서 있으면서도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것을 칸트는 “초월적 (超越的: 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식은 의식의 초월성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초월적인 의식 기능에는 순수지성개념 이외도 순수감성의 형식인 공간·시간 표상이 있다.
** 공간·시간의 전통적인 세 가지 견해
가. 공간·시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 ~ 모든 존재자들은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이를테면 ‘그릇’으로서 공간·시간을 이해하는 이런 생각을 우리는 뉴턴의 소위 절대공간-절대시간 이론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공간·시간이 절대적으로 즉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때 ‘존재하다’가 어떤 뜻인가 이다. 만약 그것이 논리적으로 생각 가능하다는 뜻이라면, 논리적 사고 가능성은 곧 존재 가능성이라는 등식을 함축함으로서 존재론적 쟁점에 빠져든다. 논리적 사고 불가능성은 존재 불가능성을 함축하지만, 그러나 논리적 가능성, 즉 무모순성이 존재 가능성까지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공간·시간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감각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문제는 어떤 감각기관을 통하여 공간·시간이 감각되는가이다. 공간·시간이 어떤 감각기관을 통해서도 감촉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 공간·시간은 그 자체가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의 성질내지는 존재들 간의 질서 관계라는 견해가 있게 된다. 이 두 번째 견해는 다시금 존재자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더라도 존재자에 속하는 성질내지는 질서 관계로 보는 편과, 존재자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한에서, 그 존재자가 가지는 성질로 보는 편이 있다. 앞서의 생각은 예컨대 물질적 실체의 본성을 ‘연장선’으로 파악한 데카르트나 로크에서 발견된다.
다. 칸트에 의하면 선험적 표상인 공간·시간의 질서 위에서 갖가지 감각 재료들이 수용되고 이 수용된 감각 질료들이 범주로 가능한 순수 지성 개념에 따라 종합 통일됨으로서 우리에게 한 존재자가 무엇으로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무엇인 한 존재자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인식에서 그리고 그 인식에서 인식된 존재자는 인식하는 의식의 선험적 표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론에 따르면 사고의 형식인 범주는 인식의 성립 조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인식에서 인식되는 대상의 성립조건이기도 하다.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바로 인식에서 인식된 존재자의 가능 조건인 것이다.
- 이로서 칸트는 진리를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고 규정 - 인간의 참된 사물인식은 ‘인식자의 인식 대상으로서의 동일화’로 해석하던 전통을 벗어나 참된 인식은 ‘존재자의 지성에의 합치’, 이른바 인식자-인식 대상 사이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수행한다.
- 칸트는 ‘창조될 사물의 신(神)의 지성에의 합치’를 전제로 ‘인식되는 사물의 형식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는 전통 형이상학을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사물 인식에 대해서도 적용함으로서 ‘사물과 지성 일치’를 ‘[인간] 지성과 [인간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사물의 동일형식성(conformitas)'으로 해석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사물의 창조자‘로 격상시켰다.
2) 인식의 대상 및 내용의 문제
(1) 관념론(觀念論: idealism) ~ 인식 작용의 상관자로서 인식 내용이 있고, 이것이 바로 인식 대상이라고 보는 견해, 현상론(現象論: phenomenalism)도 같은 견해이다.
① 관념론은 실재론이 전혀 명증적이지 못한 가정 위에서 있다고 논박한다. ‘인식하는 의식에 독립적인, 인식하는 자가 인식하거나 말거나 그 자체로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개념은 순전히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경우라도 ‘우리가 인식하는 한’에서만 무엇인가에 대하여 권리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클리는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라고 확언한다.
② 관념론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인식은 그리고 모든 주의 주장은 명증적으로 확실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통찰을 존중한다.
‘나는 존재(存在)이고, 나는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나에 의해 인식된 것(ego-cogito-cogitantum)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③ 관념론자들은 인식의 두 요소, 즉 인식하는 자와 그에 의해서 인식된 것[내용]만을 말한다. ④ 이른바 ‘실재하는 사물’이란 우리 의식에 독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 의해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인식된 것’, 그러니까 그렇게 인식하는 우리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자한다. 이에는 칸트뿐만 아니라 후설(E.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現象學)도 동조한다고 볼 수 있다.
(2) 실재론(實在論: realism) ~ 인식작용이란 인식 대상을 수용하는 매개의 기능으로서 인식 대상은 인식 작용에 독립해서 실재한다고 보는 견해
① 실재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상식적 직관에서 출발한다. 외적대상(external object)에 대한 인식은, 외적 대상이 우리 마음(mind)에 인상 내지 관념들(ideas)을 불러일으키고, 이 관념의 중개를 통해서 우리는 어딴 외적으로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② 실재론에 의하면 ‘실재하는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 말든, 인식하는 우리에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식은 우리의 관념들과 사물들의 실재 사이에 합치가 있는 한에서만 실재적이다.’ 그리고 이 실재적 인식만이 참된 인식 곧 진리이다.
3) 참된 인식 곧 진리의 문제
인식이 무엇에 대한 인식이냐네 따라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1) 정합설(整合說: coherence theory) ~ 무모순성과 체계 내 일관성을 진리의 척도로 보는 것 (2) 일치설(一致說, 合致說, 對應說: correspondence theory) ~ 인식의 사실과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것 (3) 실용설(實用說: pragmatism) ~ 실생활에서의 유용성을 진리의 의미로 보는 견해
*** 일치설이 ‘참된 인식[진리]란 실재(實在)와 합치하는 것이다’는 보편적인 진리의 정의이다. 그러나 여기서 ‘실재’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안고 있다. 예를 들어 관념론/실재론의 얽힘 등이다.
제 2 절 인식과 진리
{인식론은 어떤 구체적인 진리를 발견해 내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의미의 학(學)’ 즉 ‘진리의 근본학(根本學)’이다.}
1. 진리에 대한 철학적 물음
- 사람의 의식 활동 방식 ~ 지(知), 정(情), 의(意)로 구분하고, -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 ~ 진(眞), 선(善), 미(美) - 결국 ‘참’의 가치로 통합된다. * 사각형이 네 변을 갖는 것은 ‘참’이다. * 목숨을 걸고 불의와 싸우는 것은 ‘참’되다. * 예쁜 아가씨한테 “참‘하다. (위의 용례로 보아 우리 한국 사람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참’의 가치를 추구하는 듯이 보이며, 이 세 가지의 ‘참’에는 어떤 통일 원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리(眞理)란 무엇인가? * 무엇이 진리일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 진리의 기준 내지 근거는 무엇인가? * 어떤 의미에서 ‘진리’인가?
-진리[참]인 것은 사고(思考) 인식 혹은 언표(言表)의 형식을 빌려서 드러난다.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치는 진짜 이치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 老子 道德經)”처럼 사고(思考), 인식(認識)될 수도 없으며, 말해질 수도 없는 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참된 道는 無爲).
그렇지만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우리 인간의 앎 중에서 드러나는 진리, 말로서 표현되는 인식이 담고 있는 진리의 의미와 기준 혹은 근거만을 성찰(省察)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2. 형식적 인식과 진리
1) 참된 사고를 위한 두 선험적(先驗的) 원리 (1) 모순율(矛盾律) ~ 한비자의 모순고사(矛盾古事) ~ 모순의 규칙을 어기고서는 참일 수 가 없다. (2) 근거율(根據律) ~ 모든 언표(言表)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 원인에 의해서 발생 *** 위의 두 규칙이 존재(存在)의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2) 모순율과 변증법적 모순 ~ 변증법적 모순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다.(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모순 대립되는 관계이지만 이것이 ‘인간사회’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3) 선험적(先驗的) 인식 원리 문제 (1) 이성론(理性論) ~ 이성이 어떤 감각적 경험에도 의존함이 없이, 즉 선험적으로 갖는 자명한 원리(모순율, 근거율) (2) 경험론(經驗論) ~ 이성(理性)이나 지성(知性)이니 하는 기능들은 모두 인간의 유전적 (遺傳的) 소질이며, 이것은 인간의 축적된 감각 경험에 그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본다.
경험론의 견해는 “감각에 있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이성[지성] 중에 있지 않다.”이것이 경험론의 기본적 주장이다.
3. 실질적(實質的)인 인식과 진리
- 그 인식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그 인식이 그 인식된 대상과 합치(合致)하는 가에 달려 있다. - 부합이나 합치는 언표(言表)나 인식을 참이도록 해주는 근거가 된다. - 실재와 합치하는 인식은 참이다 ~ 대응설(對應說), 합치설(合致說) - 아리스토텔레스 ~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
- 인식이란 일반적으로 아직 모르는 [未知의] 것에 관해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 지를, 즉 본질과 존재방식을 파악하는 의식(意識)의 표상(表象) 작용이다. - 미지(未知)의 것에 대한 인식방법으로 ~ 합의설(合意說), 의사 소통설, 실용주의가 있 다.
제 3 절 인식과 비 진리
1. 비 진리의 문제
- 착오(錯誤: Irrtum) ~ 진상을 혼동하는 것 - 허위(虛僞: Falschheit) ~ 착오로 인한 잘못된 인식
2. 형식적 인식과 허위
1) 지성(知性)의 성격과 형식적 인식
(1) 지성(知性)
인식은 의식(意識) 작용이고, 의식은 어떤 사태에 대해서 그것이 어떠하다는 견해를 가짐으로서 인식을 얻는다. 이때 그 인식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면 ‘참’이고, 그렇지 못하면 ‘거짓’이다. 이런 인식 작용에 대해 판단하는 기능을 우리는 지성(知性: intellect)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지성이 판단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경우에든 진리나 허위를 이야기할 수 없다.
(2) 지성의 활동
지성의 기본적인 활동은 문자 그대로 ‘앎’이다. 인식은 지성이 개념(槪念)들을 결합 ․ 종합하거나 분해 ․ 분석함으로서 생긴다. 그러므로 인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개념이다. 그래서 지성은 인식의 요소들인 개념들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개념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료들은 감성(感性), 감각적 경험을 통해 주어지기도 하고, 상상력에 의해 제공되기도 한다. 다양한 자료들이 주어지면 지성은 이것들을 비교하고 추상하여 개념을 얻는다.
이런 점에서 지성은 ‘개념의 능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지성은 또한 ‘판단의 능력’이기도 하다. 판단은 어떤 개념으로부터 다른 어떤 개념을 분해해 내거나 어떤 개념에다가 다른 어떤 개념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3) 지성활동의 원칙 ~ 내재적(內在的) 규칙 : 선험적(先驗的) 규칙
① 분석적 판단의 지성원칙 ~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 ② 종합적 판단의 지성원칙 가. 실제-속성의 관계 규칙 : ‘ ~ 은 ~ 하다’ 나. 전체-결론의 관계 규칙 : ‘ ~ 이면 ~ 하다’
(4) 형식적 인식 ~ 내재적(선험적) 지성의 원칙에 의하여 인식된 것 *** 예, ‘A = A'나 ’1-1=0‘
2) 형식적 인식에서의 착오 가능성
그러하지 않은 것을 그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착오’이고, 이 착오에 의한 잘못된 인식은 ‘허위’이다. 착오는 지성의 한계나 박약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이것으로는 단지 무지(無知)가 생길 뿐이다. 착오가 일어나는 것은 지성의 결여가 아니라 어떤 적극적인 힘이 끼어듦으로 생기는 일종의 지성의 사생아(私生兒)이다. 상상력, 의지, 경향성, 습성, 관심 따위가 끼어들어 착오가 발생한다.
(1) 상상력 ~ ‘6-9=0’, 신(神)의 관념에 하얀 수염의 노인을 상상하는 것 (2) 의지와 경향성 ~ 명확과 불명확의 그릇됨에 빠진 것
3. 경험적 인식과 착오
경험적 진리는 일반적으로 ‘인식[思考]과 실재[事實]의 합치’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인식은 앎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경험적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판단 내용을 갖는 인식은 허위(虛僞)이다. 그때 그 판단 작용은 착오에 빠진 것이다.
1) 경험적 인식의 착오 가능성
- 경험적 인식은 “지성과 감성이 뒤섞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인식의 착오가 있다 면 지성과 감성이 결합하는데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무한한 상상력이나 의욕 또는 성 향은 지성이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게도 하지만 지성과 더불어 경험적 인식의 근간을 이 루는 감성의 활동이 지성의 활동과 뒤섞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2) 대상 인식의 착오와 자기 교정 능력
- 허위를 진리로 여김, 주관적 가상을 객관적 진상으로 혼동함을 착오(錯誤)라 한다. - 사람은 착오에 빠져 있는 중에는 자신이 착오에 빠져있는 줄 모른다. - 형식적 인식은 이성(理性)이 해결할 수 있지만 경험적 인식은 이성의 앎의 기능, 즉 지 성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인식보다 선행하며 인식의 척도(尺度: mensura)인 것이다. - 의식(意識)의 운동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 인식과 이 의식에 대한 반성적 의식 사이의 조정 운동, 즉 자기 대화, 다시 말해 자기에게 '비춰본다(speculari)'는 뜻에서 변증법적 사변(思辨: speculatio)이다.
이것이 진산, 사실, 실재를 찾기 위한 의식의 자기 지양 노 력이다. *** 뉴턴적 인식을 아인슈타인적 인식으로 변경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적 인식에 대 한 자기 교정의 예라고 할 수 있다. ***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가 36만 km이다. 라는 판단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가 36만 km이다‘ 가 진리라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4. 초험적(超驗的) 인식과 가상
1) 선험적(先驗的) 인식과 초월적(超越的) 진리
- 경험적 인식에서 진리 ~ 인식의 존재와의 합치 - 인식 ~ 인식의 내용, 곧 인식된 것 - 존재 ~ 존재하는 것, 곧 존재자를 의미 - 판단 ~ “(언제),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얼마만큼), (어째서) 있다” 혹은 “무엇이 (왜) 어떠하다” 등의 틀로 짜여 져 있다.
이러한 판단의 틀인 형식들의 유래, 또는 그 틀을 칸트는 선험적(先驗的)이라고 불렀다.
칸트는 모든 위의 틀(형식)의 일치를 “모든 경험적 진리에 선행하면서 바로 이 경험적 진리를 가능케 하는” 의미에서 ‘초월적 진리’라고 부른다. 초월적 진리란 의식의 경험적 인식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본래적인, 그러므로 경험 활동에 선행하는 기능 구조와 의식의 경험적 인식에서 인식되는 존재자의 존재 구조가 일치함을 말한다.
그것이 ‘진리’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인식자[인식]와 인식 대상[존재자]이, 그러니까 의식이 의식임[본질]과 존재자의 존재임[본질]이 일치함을 뜻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초월적’임은 그 인식하는 의식의 작용 형식이자 존재하는 것의 존재 형식인 표상들이 그 자신을 선험적이면서도 그러나 경험적인 의식 활동과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대상들을 가능하게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월적 진리를 이런 의미로 사용할 때 주의할 바는, 앞에서 형식적 진리란 형식적 인식의 참임을, 경험적 진리란 경험적 인식의 참임을 뜻한 반면에 초월적 진리는 같은 의미에서의 초월적 인식의 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적 인식은 그것이 이성(理性)의 규칙에 어긋나면 허위(虛僞)가 되고, 경험적 인식 역시 사실과 맞지 않으면 허위(虛僞)가 된다. 그러나 초월적 인식에는 허위(虛僞)가 없다. 초월적 인식이란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先驗的)인식을 일컫는 것이니, 만약 하나의 선험적 인식이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도록 기능하며, 그것은 초월적 인식인 것이며, 어떠한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한낱 주관적 표상에 머무는 것뿐이다.
또한 초월적 인식으로 기능하는 선험적 인식은 그것에 기초하여 경험접 진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진리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선험적 인식에 허위란 있을 수 없다. 선험적 인식은 초월적 기능을 하거나 말거나 하기는 하지만, 허위인 경우는 없고, 또한 마찬가지로 초월적 인식도 허위인 경우는 없다. 그것은 신(神)이 하는 인식에 허위가 잇을 수 없다는 것과 비견될 수 있다.
신(神)의 인식은 다름 아닌 신의 존재 창조로서, 신은 인식하거나 말거나. 즉 존재를 창조하거나 말거나이지, 잘못하는 일은 결코 잇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이성(理性)의 선험적 인식이 신의 인식처럼 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선험적(先驗的) 인식의 성격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2) 초월적 가상과 초험적 인식
- 선험적 인식이 종종 월권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이를 ‘초월적 가상’이라 한다. - 형식적 인식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적극적으로 어떤 실재성도 함의하지는 않는다.
‘2+3=5’라는 판단이 맞다하여 ‘2’나 ‘3’이나 ‘5’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푸른 하늘은 푸르고, 검은 하늘은 검다.’는 판단이 참이라 하여 이로부터 ‘푸른 하늘’이 존재하고 ‘검 은 하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존재는 ‘이 책상이 존재한다. ’나 ‘이 물이 존재한다.’에서 ‘존재하다’는 다르다. -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자연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는 것은 경험 적 사고의 일반 규칙이다. - 이성(理性)은 이 원인 계열의 최초의 거을 상정하고, 그것을 우주의 시초(始初)라고 생 각한다. 또한 결과 계열의 최종의 것을 생각하고 우주의 종말(終末)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주의 ‘시초’란 더 이상 무엇으로 소급시킬 수 없는 것을 뜻할 터이니,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 ’는 사고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만약 그것이 ‘무(無)’를 지시한 다면 없음으로부터 있음이 유래한다는 모순을 표현하는 것이다. ‘종말’ 역시 그것이 존 재로부터 완전한 무(無)로의 이행을 뜻한다면 모순된 생각이긴 마찬가지다. - 이러한 사고는 이성(理性)의 능력 밖이기 때문에 이를 ‘초월적 가상’ ‘초험적 인식’이라 고 한다.
5. 인간적 인식의 한계와 의미
- 형식적 인식은 그것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성을 갖지 못하며, 감각을 통해 얻는 경 험적 인식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 인간에게는 고유한 인식의 틀이 있고,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음으로서, 인간의 인식은 어제든 착오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인식은 착오의 도정(道程)에서 성장한다.
- 인간의 의식이 오로지 지성적이라면 그는 판단함에서 언제나 충분한 주의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요소가 있을 때는 판단을 중지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결코 판 단에 빠지지 않는 대신에 아주 좁은 세상에 머무를 것이다.
- 그렇지만 인간 의식에는 지성(知性)과 더불어 상상력(想像力), 정념(情念)도 심어져 있 어서, 인간은 잘 모르지만 그리고 때때로는 틀리게 알지만, 그러나 훨씬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산다. 어느 편이 인간적인가?
Ⅲ. 윤리학(倫理學)
1. 윤리학과 윤리(倫理)의 의미
1) 윤리학
윤리학은 윤리적 가치, 곧 선(善)의 의미와 원천을 밝히고, 선(善)이 표현된 윤리적 규범들, 곧 도덕 법칙들을 찾아내고, 그것들 위에 서 있는 ‘도덕(道德)의 나라’를 추구하는 철학의 분야이다.
- 윤리학을 도덕철학(道德哲學: philosophia moralis)라고도 한다. - 윤리학을 덕이론(德理論: Tugendlrher)이라고도 한다. 이는 윤리(倫理)란 실천하는 힘 (virtus), 곧 실천하는 덕(德)으로 인해 현실 세계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 는 이해가 놓여 있다. - 윤리는 인간 삶의 질서이고, 윤리학은 인간적인 것에 괸한 철학이다. - 물리학(物理學)은 자연의 법칙을 다루고, 윤리학은 자유(自由)의 법칙들을 다룬다.
2) 윤리(倫理)
(1) 윤리와 도덕
- 윤리(倫理)란 ‘사람과 사람이 살면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道理)’이다. 사람과 사람 이 함께 사는 마당을 ‘사회(社會)’라고 하는데 윤리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마땅히 행해 야 할 도리이다. - 도(道)란 인륜을 성립시키는 도리로서 윤리와 대략 같은 뜻이고,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상태를 덕(德)이라고 한다. 도덕은 윤리와 대략 같은 뜻으로 쓰이면서도 덕(德)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함의한다.
- 도덕(道德)이 ‘마당히 행하여야 할 도리(道理)’라는 것은 당위(當爲)의 규범임을 뜻한다. - 도덕의 규범은 대부분 ‘명령’ 형으로 나타난다.
- 이는 인간이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 자연적 경향성을 제압하고 당위적 명령을 수행할 힘을 ‘자유(自由)’라고 한다. - 따라서 도덕 법칙의 근거를 밝히는 도덕철학의 문제는 그 근본에 있어서 곧 인간 의지 의 ‘자유(自由)’ 문제가 된다.
(2) 윤리 도덕과 예의범절(禮儀凡節)
- 윤리 도덕은 일반적으로 표현 형식을 갖는데 예의범절이라고 한다. - 윤리 도덕이 ‘本’이라면 예의범절은 그것의 ‘末.이다. - 예의범절이 반듯한 것이 곧 도덕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3) 윤리의 보편성(普遍性)
- 윤리와 도덕은 상대적 가치가 아니다. 진리, 미(美)의 가치도 그러하다. - 상대적 도덕이란 둥근 사각형처럼 자가당착적이고, 윤리와 도덕은 절대적, 보편적이어 야 한다.
2. 윤리적 가치로서 선(善)
1) 선(善)의 개념
- 선(善)은 ‘좋음’의 일반이 아니라, ‘도덕적 좋음’, ‘착함’에 국한된다. - 선(善)이란 우리가 보통 인간의 의식 작용을 그 성격에 따라 지(知), 정(情), 의(意)로 분별하며, 그것들의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를 진(眞), 선(善), 미(美)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가치 중의 하나이다. 이에 반하여 ‘악(惡)’은 선(善)의 반(反) 가치로서 ‘진(眞)’ 에 대한 ‘위(僞)’나 ‘미(美)’에 대한 ‘추(醜)’와 마찬가지이다. - 가치(價値)란 추구하는 것이고, 반가치란 우리가 회피하거나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 선(善)은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고, 실현해야만 하는 가치이고, 악(惡)은 우리의 행 위에 들어 있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행위를 통해 제거해야만 하는 반(反) 가치이다. - 선(善)은 당위적(當爲的) 가치이고, 인간 행위의 당위적 규범을 ‘윤리’ 또는 ‘도덕’이라 고 일컫는 한에서 ‘선(善)’은 윤리 규범의 가치인 것이다.
- 진리(眞理)가 인식(認識)의 참 가치라면, 선(善)은 실천의 참 가지이다. - 노동(勞動) 행위와 도덕(道德) 행위에 있어서 노동 행위는 사물과 관계하면서 사물 내 지 물품의 가치[品格]를 높이는 것이고, 도덕 행위는 사람과 관계해서 사람의 가치[人 格]을 높이는 것이다. - 도덕 행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천 행위이다.
2) 선(善)의 원천에 대한 물음과 반성(反省)
- 인간 행위의 근거 ① 선하다(性善). ② 악하다(性惡). ③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性無善無不善). ④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다(性善性惡).
위의 문제는 그 성격이 서로 다른 두 본성, 곧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에서의 선(善)의 원천을 보아야 한다. 이런 시각의 차이는 결국 윤리적 가치관의 차이라 하겠다. 서로 상충하면서도 오늘날 한국 사회 윤리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한 가치관을 넷 꼽을 수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자연주의적, 초자연주의적, 이성주의적, 감성주의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유교와 기독교적 선악관(善惡觀)은 각각 앞의 두 가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이것들을 종교적 가치관이라고 일컫는다면, 뒤의 두 가지를 각각 대변하는 것은 (이성) 법칙주의와 공리주의 윤리관으로 이를 인간학적 가치관이라 일컬을 수 있겠다.
참고자료
1. 가치론(價値論: theory of value)
가치에 관한 이론을 말한다. 경제학 ·심리학 등 사실적 개별과학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윤리 ·법률 ·미학(美學) 등 규범에 관한 학문에서는 특히 가치문제와 관계가 깊어, 가치적 술어(述語), 판단 ·체계 등의 표현과 해명을 지향하므로, 철학의 중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진선미(眞善美)의 이상이나 중세철학의 초월명사(超越名辭) 등의 문제가 고전적인 예가 되며, 이처럼 그 역사가 철학사만큼이나 오래 된다.
그러나 문제의식이 선명해진 것은, 근세에 I.칸트가 이론이성(理論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의 이원화(二元化)와 미적(美的) 판단의 목적의식에 의한 그 통일을 주장하고, 신칸트학파가 이를 계승하여 사실적인 ‘존재’ ‘자연’과 규범적인 ‘당위(當爲)’ ‘타당’ 등의 개념을 대조화하여, 여러 가지 문화가치나 역사에서의 가치의식 등의 탐구를 철학적인 중심과제로 삼은 때부터였다.
그 밖에 생(生)의 철학, 현상학(現象學) 등도 가치론을 독자적인 중요과제로 삼는다. 또한 이상과 같은 독일적인가치론의 경향과는 달리, 영국과 미국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나 분석철학 등도 가치의 탐구를 새로운 중심문제로 삼았다.
2. 개념 (槪念: concept)
각각의 사물로부터 공통적·일반적 성질을 추출하여 이루어진 표상(表象)이다. 일반적으로는 사물의 <관념> <심상(心象)>을 뜻하며, 더 넓게는 개요·개관·지식·사고방식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엄밀한 논리·철학 용어로는 경험되는 낱낱의 사물, 즉 개물(個物)·개체(個體)에 대해 그것들을 포괄하여 그것들로부터도 한 단계 차원이 높은 추상적·보편적 존재를 뜻한다.
또한 개념은 심리적인 관념·심상 등으로부터도 구별된다. 특히 전통적 형식논리학에서는 개념에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의 구별을 했는데 전자는 개체의 집합, 후자는 개체의 공통적 성질을 뜻한다.
예를 들면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모임 전체가 소나무의 외연이며, 소나무 전체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 성질이 내포이다. 내포는 생물학적 종(種)이나 유(類)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또한 개념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개념을 표현하는 것은 추상적 명사이다.
현대 논리학이나 의미론의 입장에서는 외연은 <집합>, 내포는 <성질>이며, 전자는 집합기호, 후자는 술어(述語)기호로 나타낸다.
개체와 다른 개념을 가진 보편적 존재의 성격은 예로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고, 중세에는 유명한 <보편논쟁>을 일으켰다. 실념론(實念論)·개념론·유명론(唯名論)의 3가지 입장으로 구별되는데, 개체를 초월한 보편의 실재(實在)를 주장하는 실념론 및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이며 보편은 <이름>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론에 대해, 개념론은 보편을 심중(心中)에 있는 개념으로서 인정하는 절충적 입장이다.
3. 논증(論證: reasoning)
어떤 판단의 진리성의 이유를 분명히 하는 일로서 입증이라고도 한다. 증명해야 할 판단을 가증명제(可證命題: 提題 ·論題 ·主張 ·定立)라 하고 그 이유로서 선택되는 판단을 논거(論據)라고 한다.
가증명제 및 논거는 논증의 구성요소이며 추론의 갖가지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것을 논증의 형식이라 한다. 즉, 논증은 논거를 전제, 가증명제를 결론으로 하는 추론형식을 취하나 결론이 이미 주어진다는 점에서 추론과 다르다.
4. 변증법(辨證法: dialectic)
하나의 사물을 대립하는 2가지 규정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방법, 예컨대 <사랑은 충족과 결핍의 통일이다> 등이다. 동일물(同一物)이 대립한 규정을 갖는 것은 속담이나 전승문학(傳承文學)에 어떠한 것에든 일면적(一面的)인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훈계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여기에서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는 어떠한 일에도 일의적(一義的)인 규정을 부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결론을 도출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쓰다. 그러나 하나의 행위가 한쪽 면에서는 선이고, 다른 한쪽면에서는 악된다면 행위를 하는 사람은 비극에 빠진다. 집안의 법도를 지켜서 오빠를 매장한 안티고네의 행위는 반역자의 매장을 금하는 국법에 비추어 보면 죄이다.
비극만이 아니다. 희극 예컨대,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자기 아내를 하녀로 잘못 알고 유혹하는 백작과 같이 동일물이 대립하는 규정을 가진다. 변증법의 원형은 속담·회의(懷疑)·비극·희극 등에서 볼 수 있다.
그 대립의 통일·모순을 실제와 필연으로 볼 것인가, 우연과 가상으로 볼 것인가. 운동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에 내포되는 <아킬레스와 거북>과 같은 모순을 지적하여 운동·변화·다양의 존재를 부인한 제논은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변증법의 아버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제논의 논리를 인정하고 또한 운동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운동이 모순의 실재를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은 같은 강에 2번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주는 끊임없이 타서 스러져가는 불과 같은 것이다. 정지하여 존속하고 있는 물체도 실제로는 2개의 대립하는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근대에 와서도 G.W.F. 헤겔은 존재를 끊임없이 신진대사에 의하여 자기를 외계로 분해시키면서, 동시에 자기를 재생산함으로써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대립하는 힘의 균형이라고 하는 본질이, 정지한 존속이라고 하는 현상을 지탱하고 있다.
변증법의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디알렉티케(dialektikeē)란, 문답법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의 저술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부정(否定)을 통하여 정신이 진리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변증법이다. 부정을 통하여 고양하는 정신은 동일한 정신이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뿐만 아니라 발전·성장·변화하는 것에는 <달라져 가면서 동일(同一)을 유지한다>고 하는 <대립의 통일>이 내포되어 있다. 발전·변화의 한계점에서는 다른 것이 같은 것이다. 이 한계의 모순성이 수학에서는 미분으로 표현되는 극한점에서 성립한다.
그래프 위의 접점으로 표시되는 극한점에서는 곡선이 직선과 같다. 미분의 변증법적인 해석에는 <점의 본질적인 규정으로서 인접점과의 관계가 포함된다>고 하는 원리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원리를 확장하면, <어떤 것의 본성에는 다른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등의 관계가 내재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관계는 실체와 마찬가지로 실재한다>고 하여도 같은 말이다. 여기에서 다시 <내적인 본질이란 다양한 관계의 집약이다>라고 하는 규정을 도출하면, 문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과의 관계라고 하는 구조로 투영된다. 헤겔은 동일한 구조를 마음의 내성(內省) 속에서도 발견한다.
마음이 그 마음을 의식할 때 의식하는 마음과 의식되는 마음은 동일하면서 또한 동일하지 않다. 주관으로서의 마음과 객관으로서의 마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외부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지각이 성립된다.
예컨대 산을 보고 있는 나는 자기가 <산을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본다>고 하는 의식활동을 의식하는 반성의식은 보는 의식과 동시에 작용하는 동일한 의식이다.
그러나 아는 주체와 알려지는 객체라고 하는 작용면에서의 구별이 있다. 따라서 내성·반성 속에는 <구별 없는 구별> 이라고 하는 대립자의 동일이 포함된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본질과 현상, 하나의 이데아와 많은 개체,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 주관과 객관은 내성· <자기의식>이라는 구조를 매개로 하여 통일된다. 헤겔은 신플라톤파가 주장하는 <이데아의 유출>이나, 그리스도교적인 <성육신(成肉身)>이라는 개념을 이것을 통하여 합리화한다.
그 결과로 생겨나는 <사물에 대한 파악>, 즉 개념은 본질이라고 하는 보편, <이것>이라고 하는 개별 본질이 개별화되어 있다고 하는 매개관계 그 자체(특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사물이란 추론(보편·특수·개별의 종합)이다>가 된다. 헤겔은 <3요소의 일체>라고 하는 신플라톤파의 관념을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에 중합시켜 근대범신론의 토대 위에 재정립하였다. 종래 헤겔의 변증법은 정립(테제)·반정립(안티테제)·종합(진테제)의 3단계(줄여서 正·反·合)로 구성되는 논리라고 설명되어 왔으나 이 어법은 헤겔의 텍스트 속에는 없다. J.G. 피히테의 용어를 빌려서 헤겔변증법을 설명한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수(數)의 연속체에서 한계의 변증법, 등질성의 변증법과 안과 밖의 변증법, 비등질성의 변증법이 종합되어 있지만, S.A. 키에르케고르의 <질적 변증법>에서는 비등질성 속에 역설적인 것이 도입된다. 예컨대 <예수와 자기와의 2000년을 사이에 둔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개념이 있다.
K. 바르트의 <변증법신학>에는 신인(神人)의 절대적인 단절 속에서 존재의 동일이라고 하는 사상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바르트의 사상은 연속성·등질성을 거부한 단절에서 역설적인 매개가 변증법의 개념을 형성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식 이전의 물질의 구조가 정신에 반영되어 변증법의 구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자기의식의 내성구조의 변증법성을 부인하고, <관계의 실재성>이라는 존재론적인 규정으로서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 문답법 → 헤겔 → 테제 → 정·반·합 → 변증법적 유물론
5. 사변(思辨: speculation)
사유가능성을 계속 추적함으로써 인식을 획득하려는 시도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관찰·관조·성찰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A.M.S. 보이티우스는 이를 <관상(觀想)이론> 및 <관조>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으며, J.S. 에리우게나는 <지성적인 사변> <이론적인 사변> 등의 용어에서 지성에 의해서 원리를 이론적으로 관상하고 성찰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스콜라철학에서는 어원을 <거울(speculum)>과 결부시켜 거울에 반영된 모습, 즉 결과로부터 실물(實物)· 현물(現物) 또는 원인을 향해 상승적(上昇的)으로 되돌아가는 추론적 뜻으로 사변을 풀이하였다.
이 용법은 스콜라신학의 신, 즉 만물의 창조자의 사색과 결부된다. 신이 하는 행위에는 신의 전지전능이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반영되고 있으므로, 이 신의 행위를 통하여 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일, 즉 신을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관조하고 파악하려는 초월적 사고가 사변이고, 사변은 명상과 관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겼다.
일반적으로 사변이란, 경험적 현실을 초월하여 현실 전체의 궁극적 원리 또는 근거를 순수이성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관상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그 방향은 스콜라철학에서 시작되었고, 그 정신은 독일관념론, 특히 G.W.F. 헤겔에게 계승되었다.
근세에 이르러 M. 루터에 의한 스콜라신학과 그 기초적 철학체계에 대한 비판 이후, 경험적·실증적 태도가 확대되면서 사변의 상승적·초월적 의의는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사변적이란 말은 공리공론적(空理空論的)이고, 경험과 실제를 무시한 견해를 가리킬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론과 학문이 주어진 사실이라든가 결과를 통해 그 조건·원인·동기 등을 추구하고 가설을 구성하여 이를 검증하는 경우, 주어진 것에서부터 원리 쪽으로의 시행착오를 개재시키는 초월은 어떤 종류의 사변적 요소, 즉 어떤 가능성을 투기(投機)하고 선취(先取)하여 이를 참·거짓의 판단에 내맡긴다는 도박(賭博)적 요소를 끊임없이 내포한다.
주어진 사실과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설마저도 단순한 검증가능성뿐 아니라 반증불가능성의 규준(規準)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경우,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처럼 어슴푸레하게 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6. 선험적(先驗的: transcendental)
칸트 철학의 근본개념으로 독일어 transzendental을 번역한 철학 용어이다. ‘초월론적(超越論的)’이라고도 한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용어인 transcendentalis는 각 범주를 초월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에 적용되는 개념으로서의 존재 · 진 ·선 ·미 등을 뜻하였다.
이것을 I.칸트가 ‘대상에 관한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선천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의 대상 인식방법에 관한 인식’을 뜻하는 근대적 인식론의 용어로 전용하였다. 이 말뜻의 변천은 존재의 철학에서 의식의 철학으로,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인식론(認識論)으로, 중세부터 근세에 걸친 철학의 문제설정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정확히 반영한다.
확실한 학적 인식(學的認識)을 가져다 주어 경험을 가능케 하는 의식의 근본적 구조를 드러내고 아울러 그 한계를 확정하는 철학의 분야를 칸트는 선험철학(先驗哲學)이라 하였는데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은 그 계획의 전면적인실현이었다.
7.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년 간행. 그의 비판철학의 첫 번째 저서이며 철학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룩한 책이다. 이 책은 원리론과 방법론으로 나뉘었는데 원리론은 다시 선험적 감성론(先驗的感性論)·선험적 논리학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선험적 논리학은 또다시 선험적 분석론과 선험적 변증론으로 되어 있다.
칸트는 이 책에서 인간이성의 권한과 한계에 대하여 단적으로 질문하며,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形而上學)의 성립가능성을 묻는다.
즉 인간의 이성은 감성(엄밀히 말하면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과 결합함으로써 수학이나 자연과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확실한 학적 인식(學的認識)을 낳을 수 있지만, 일단 이 감성과 결부된 ‘현상’의 세계를 떠나서 물자체(物自體)의 세계로 향하게 되면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에 말려들어 혼란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초경험적인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인식은 이론이성(理論理性)으로는 도달 불가능하며, 실천이성(實踐理性)에 의한 보완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 후에 저술한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이 이론적으로는 해결불가능으로 여겨졌던 문제의 해결과 인간행위의 기준을 논하였다.
8. 이일분수(理一分殊)
세계를 관철하는 보편적인 원리와 구체적·개별적인 원리 사이에 일치성이 있다고 보는 성리학 이론이다.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이(理)는 보편적인 하나의 이와 동일함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세계를 관철하는 보편적인 원리와 구체적·개별적인 원리 사이에 일치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물이 이법(理法)의 구현이고 그것이 일리(一理)로 귀결한다는 불교의 화엄사상을 근거로, 유교적 도덕으로 재정립하여 만든 성리학 이론으로서 정이(程頤)와 주희(朱熹)가 그 이를 확립하였다. 모든 사물은 하나의 이치(理)를 지니고 있으나 개개의 사물·현상은 상황에 따라 그 이치가 다르게 나타난다(分殊).
개별적 이를 초월하는 보편적 이, 즉 태극(太極)은 ‘이일(理一)’로서의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이며, 개개의 사물에 내재해 있는 개별적 이, 즉 성(性)은 ‘분수(分殊)’로서의 ‘각구일태극(各具一太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일분수는 성리학의 근본명제로 받아들여졌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이(李珥)의 이일분수설, 기정진(奇正鎭)의 이일분수설임성주(任聖周)의 기일분수설(氣一分殊說)이 있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통해 주기파(主氣派)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한 이이에 따르면 이(理)는 모든 사물을 초월하는 정신적 실체로서의 이와, 구체적 사물에 존재와 운동의 원리로 내재하는 개별적 이로 그 성격을 나누어볼 수 있다.
이러한 양면성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이일의 개념이고, 동시에 이는 그 구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기와 분리될 수 없어 각 사물이 차별성을 갖게 된다는 논리가 분수의 개념이다. 또한 이이는 보편적·초월적인 이와 개별적·제한적인 기의 성격을 각각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이통기국론을 제시하였는데,
그 후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기호학파 중 기일원론의 철학사상을 전개한 임성주와 이일원론을 전개한 기정진은 이통기국설에 따른 이일분수설을 비판하고 각각 독창적인 학설을 제시하였다.
참고문헌
백종현(2007), 철학의 개념과 주요문제 서울: 철학과 현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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