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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Elgar-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Maria Kliegel, cello
Michael Halasz (1938-    , Rumania), conductor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Elgar -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Jacqueline de Pre - Elgar-Barenboim / Adagio}

 

 

 

 

 

에드워드 엘가

 

 

 

 

에드워드 엘가는 1857년 영국의 브로드히스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피아노 레슨을 하며 악보와 악기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엘가는 8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15살 때까지 일반 학교에 다녔다.

 

음악은 독학으로 공부했다. 음악에 관한 책이라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그로브 음악사전》에 있는

허버트 패리의 음악 관련 논문도 읽었다.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으로 유학 가기 위해 독일어도 배웠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엘가는 커다란 실망과 좌절을 느꼈다.

 

1872년, 학교를 졸업한 엘가는 지방 변호사 사무실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이 시절 그는 음악과 문학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엄청난 독서로 해소했다.

그러다가 결국 사무실을 그만두었다.

 

그 후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아버지 가게 일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 갔다.

사실 엘가는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소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소리의 울림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22살 때인 1879년, 그는 월체스터 앤드 카운티 루나틱 어사일럼 부속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이때 연주곡을 직접 작곡하거나 편곡했는데, 이 경험이 작곡가로서 그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악기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치할지 실제로 실험하고 경험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880년, 그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 마들렌 성당에서 생상스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1882년에는 독일 라이프치히로

가서 자신의 우상인 슈만, 브람스, 루빈스타인, 바그너의 음악을 실컷 들었다. 이 무렵 그는 작품을 출판할 출판사를 찾기

위해 런던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1884년 4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절망감을 드러냈다.

 

날이 갈수록 음악가로 성공하려는 희망이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나는 빈털터리. 1센트도 없다.

그의 나이 29살이던 1886년, 엘가는 캐롤린 앨리스 로버츠라는 여성을 제자로 맞아들였다. 귀족 출신인 그녀는

엘가보다 9살 연상이었음에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엘리스의 아버지가 딸의 상속권을 박탈할 정도로 반대했지만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1889년 결혼에 성공했다.

 

엘리스는 아내이자 매니저였고, 엘가 작품의 애호가이자 비평가였다.

그녀는 "천재를 보필하고 그가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일이야말로 여자로서 충분히 일생을 바칠 만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엘가는 아내로부터 상류 사회의 관습을 배우고, 이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 자기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가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런던으로 이사한 엘가는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했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엘가는 다양한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Op.12)〉를 비롯한 몇 곡이 악보로 출판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공은 멀어 보였다.

여러 가지 기회들이 감질나게 찾아왔지만, 번번이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런던에 살고 있었지만 작곡 의뢰는 주로 고향인 우스터에서 들어왔다.

런던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 엘가는 1891년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회가 왔다. 42살 때인 1899년에 발표한 〈수수께끼 변주곡(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36 'Enigma')〉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곡으로 엘가는 헨리 퍼셀 이후 영국이 배출한 가장 훌륭한 작곡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 후에 발표한 합창곡 〈제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 Op.38)〉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작품은 1901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연주되었는데, 한 비평가는 그를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에 비견되는 작곡가라고 극찬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곡을 듣고 "우리 시대 최고의 진보적인 작곡가 엘가에게 건배를 올립시다."라고 외쳤다.

 

1901년,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s March Op.39)〉이 연주되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청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이렇게 엘가는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4년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사흘 동안 엘가 페스티벌이 열렸는데, 이는 그 어떤 영국 작곡가도 누려 보지 못한 호사였다.

 

이듬해 그는 버밍엄 대학 음대에 교수로 초빙되었다.

 하지만 강의에서 영국 음악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등 물의를 일으켰다. 나중에 그는 이에 대해 사과하고, 그 자리를

친구에게 물려주었다.

 

1912년, 엘가의 가족은 런던 근교의 햄스테드로 이사했다.

노만 쇼가 디자인한 네더홀 가든스에 있는 대저택이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엘가 

 

 

 

1920년 4월, 평생의 반려자인 앨리스가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창작을 향한 엘가의 열정도 사그라졌다.

 

그 후 그는 햄스테드의 집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작곡보다는 화학 실험, 축구, 경마, 자전거, 자동차, 여행 같은 취미 생활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1934년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엘가는 시기적으로는 근대에 살았지만, 작품 경향은 고전 형식에 영국의 민족적인 요소를 가미시킨 낭만주의 작곡가로

꼽힌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창성이나 혁신적인 면은 부족하지만, 탁월한 오케스트레이션 실력을 바탕으로 장엄하고 고귀한

영감이 깃든 귀족적인 음악을 썼다.

 

1899년에 작곡한 〈수수께끼 변주곡〉은 주제와 14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진 관현악곡이다.

각각의 변주곡에는 사람의 이니셜인 듯한 알파벳이 붙어 있다.

이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것은 제9변주 〈님로드〉이다.

 

님로드는 성서에 나오는 사냥꾼의 이름인데, 그의 친구인 '예거'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예거'가 독일어로 사냥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13변주에는 '로망스'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름 그대로 아주 낭만적인 선율로 이루어져 있다.

 

엘가가 항해를 하면서 작곡한 것인데, 멘델스존의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의 단편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마지막 제14변주는 엘가 자신의 자화상일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곡은 행진곡풍으로 시작하며, 이것이 클라이맥스에 이른 뒤 제1변주에 목관악기가 대위법적으로 가담하며 오르간을

배경으로 상쾌하게 끝난다. 각 변주곡의 분위기와 표정이 다양한 작품이다.

 

엘가는 1901년부터 1930년까지 모두 5곡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작곡했다.

'위풍당당'이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의 3막 3장에 나오는 오델로의 대사에서 따 온 것이다.

5곡 중에서 제1번이 제일 유명하다.

곡의 제목과 같이 용감한 느낌을 주는 서주에 이어 현악기로 연주되는 활발한 제1주제가 나온다.

 

목관이 이에 가담하다가 다시 역동적인 제2주제가 나오고 그다음에 이 두 개의 주제가 다시 반복된다.

 서주가 이어지면서 제2부의 트리오가 시작되는데, 이 부분이 바로 가사가 붙여져 널리 애창되고 있는

〈희망과 영광의 나라〉이다. 3부에서는 1, 2부의 선율들이 재현되며 힘찬 피날레로 곡을 끝낸다.

 

 

1919년에 작곡한 〈첼로 협주곡(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은 오늘날 첼로 협주곡의 명곡으로 꼽히는

 곡이다.

모두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 2악장은 중단 없이 연주한다.

첫 악장에 나온 서주 선율이 전곡을 통해 계속해서 나타난다든가 4악장에서 3악장의 테마를 교묘하게 재현시킨 점 등

구상의 독창성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1악장은 독주 첼로의 장중한 서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제1주제가 나오는데, 이것이 전체적으로 이 악장을 지배한다.

박자가 바뀌면 첼로가 제2주제를 연주한다.

2악장은 독주 첼로의 활약이 눈부신 스케르초풍의 경쾌한 악장이다.

 

3악장은 낭만적인 분위기의 가요 악장으로 세 개의 선율이 여러 가지 순서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4악장에서는 앞에서 나온 여러 요소들이 참신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독주곡 〈사랑의 인사〉, 〈교향곡 제2번〉, 〈교향적 연습곡 '팔스타프'〉, 칸타타

〈영국의 정신〉, 현악합주곡 〈서주와 알레그로〉, 〈바이올린 협주곡〉, 가곡집 〈바다의 그림〉 등이 있다.

 

 

 

 

 

 

 

 

 

 

 

 

 

 

 

 

 

엘가 [Sir Edward Elgar 1857∼1934]

영국 작곡가. 우스터 근교 브로드힐 출생.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로부터 음악 기초를 배웠으나, 작곡은 독학

으로 익혔다.

초기에는 지방음악가로 활동했으나, 곧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관현악곡 《에니그마 변주곡(1899)》,

 오라토리오(聖譚曲) 《제론티우스의 꿈(1900)》 등으로 지위를 확립했으며, R. 슈트라우스의 칭찬으로 유럽대륙

까지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엘가의 본래 영역은 합창을 이용한 오라토리오·칸타타 등이었으나 교향곡·협주곡 등관현악작품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음악은 후기낭만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친숙해지기 쉬운 선율과 장인적(匠人的) 기교로써 고귀한 인간감정을

 표현하여 영국 국민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행진곡 《위풍당당》의 5곡 가운데 1902년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서 사용한 제 1 번곡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Sir Edward Elgar (1857∼1934)

 

영국의 작곡가. 경 Sir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 엘가는 영국 서남부 우스터 근처의 브로드히스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전형적인 시골이라 할 브로드히스는이후로도 오랫동안 엘가의 삶과 음악 전체를 지배했다.

엘가의 아버지는 피아노 조율사이며 악기점 주인이기도 했는데 나중엔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를 지낼 만큼 음악적인

 재능도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에드워드 엘가는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으나 첫째가 15살에 성홍열로 죽었으므로 위로 두명의 누나를 두고

에드워드는 장남이 되었다.

그의 아래로는 음악적인 천재로 알려진 동생이 어려서 죽고, 후에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는 남동생과 도미니크

 교단의 수녀가 되는 여동생이 더 있었다.

 

어린 시절의 엘가는 예술적인 감각과 관심이 있긴 해도 음악적인 특출난 천재는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평화스러운 시골에서 엘가의 재능은 평범한듯 두드러지지 않게 발전해갔다.

엘가의 교육은 사실상 그의 나이 15살때 끝났다. 소년 엘가는 스스로 만들어낸 대본으로 가족들과 연극을 꾸미고,

습작에 불과하긴 해도 작곡이란 것에 관심을 갖고 틈틈히 시도해보길 쉬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은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 아버지 가게안의 악기는 모두 다루어봤고 특히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났다.

카톨릭 계통의 지방 학교가 엘가의 음악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그의 아버지와 그의 가게는

 음악의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출구였던 셈이다.

단, 바이올린에 한해서 그는 우스터와 런던의 선생에게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15살이 되면서 엘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하려는 계획도있었지만 그의 집안형편이 그것을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엘가는 무엇이든 대단하고 유명한 인물이되고 말겠다는 꿈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겉봉에 아무런 주소를 쓰지 않아도 자신의 이름 하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있도록. 이 순진한 꿈은 아주

 먼 훗날에 이루어지긴 했으나 그러기까지 엘가는 신념이 흔들리기에 충분한 무명의 시대를 거쳐야 했다.

 

엘가의 이름이 작곡가로서 처음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은 그의 나이 42살 때 <수수께끼 변주곡>을 발표하면서 부터

작품이 완성된 1899년 런던에서 이 곡을 초연했던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로부터, 바인가르트너 · 니키쉬 ·

 쉬타인바흐 · 토스카니니 · 쉬트라우스 · 말러 등 내노라하는 지휘자들의 연주 프로그램에 <수수께끼 변주곡>이

빠지지 않았던 기록이 말해주듯, 엘가의 성공은 이제 의심할 수 없기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음악가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종종 사로잡혔던 지나친 자의식과 음악가로서의 갈등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비전 속에 있던 젊은 엘가를 수없이 괴롭히곤 했다.

엘가가 만일 자신의 음악성에 대해, 혹은 세상에 대해 가졌던 그 많은 갈등에만 사로잡혀 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엘가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지나친 자의식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엘가의 아내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

(Caroline Alice Roberts)였다.

위대한 인물의 생애에서 우리는 종종 그 인물을 위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또다른 "위대한 인물"을

 만나곤 한다. 엘가의 아내 앨리스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엘가는 이 평생의 연인을 그의 나이 29살때 처음 만났다.

야심에 찬 시골 작곡가인 엘가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온 앨리스는, 엘가와는 사회적 계층부터가 다른

육군소장이며 기사 가문의 딸로서 그보다 9살이 더 많았다.

 

 소설과 시에 재능을 지녔고 독일어를 알았던 앨리스는 교회 합창대에 속해 있었다. 피아노 연주 솜씨는 보통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엘가의 소심하고 어두운 심성, 예민한 성격을 간파하고 그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1889년 5월에 그들은 결혼했다.

<수수께끼 변주곡>을 포함해서 엘가 의 중요한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앨리스와의 결혼생활 중에 작곡되었다.

"브라우트(Braut, 엘가가 붙여준 앨리스의 애칭)가 이 곡을 만드는 데에 준 도움은 정말 막대하답니다"엘가가

 그의 아내에게 공을 돌리는 이러한 말은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기록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엘가가 그의 아내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힘을 얻고 있었는가는 앨리스가 세상을 뜬 후 말년의 15년간 그가 이렇다할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결혼 전 엘가는 짧은 곡들을 재빠르게 써내곤 했다.

 

 그의 작곡 스타일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때의 엘가에겐 큰 규모로 곡을 확대시킬 능력이 없는 듯

 했다. 엘가 최초의 중요한 작품 <프로와사르>(Froissart)서곡은 결혼 1년만에 작곡되었다.

 

소나타 형식의 이 서곡엔 아직 엘가가 좋아하고 자주 썼던 "품위있게"(nobilmente)라는 지시어는 나오지 않지만,

초기작품의 특징인 재치있는 멜로디와 리듬은 높은 수준을 보인다.

엘가의 초기 창작기라 할 1890년대에 엘가의 에너지는 거의 성악곡 작곡에 바쳐졌다.

 

칸타타 <흑기사>(The Black Knight), 오라토리오 <생명의 빛>(The Light of Life), 극적 칸타타 <올라프 왕>

(King Olaf) 등,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나 곡의 진행에 있어서 엘가의 특징이 자리를 잡아가는 작품들이 이무렵에

쓰여졌다.

 

 그러나 엘가의 진정한 목표는 성악곡이 아닌 대규모 관현악 작품을 쓰는 데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또 영국의

 합창단이 즐겨 레퍼토리로 택하는 성악곡의 작곡자로서 엘가의 이름은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엘가는

 만족감 내지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엘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수수께끼"(Enigma)로 얘기되는 곡의 주제는 그동안 수많은 설명과 추측을 거쳐, 이제는 작곡자 자신의 초상과

창조적인 예술가의 고독감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일반화되어 있다.

작품에서 장조와 단조의 대비는 작곡자의 내면과 외향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춰진 주제가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엘가는 작품을 구성하는 14개의 변주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 헌정했다.

거기에는 엘가와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곤 했던 피아니스트의 이름도 있고, 지방의 지주나 엘가를 찬미했던 젊은

 아가씨의 이름도 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첫번째 변주곡은 아내 앨리스를 위해서, 마지막 변주곡은 엘가 자신을 위해서였다.

 

<수수께끼 변주곡>이 작곡가로서 엘가의 이름을 최초로 널리 알린 작품이었다면, 1900년에 발표된 엘가 최고의

성악 걸작 <제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은 그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작품이라 할 것이다.

뉴만 추기경의 시를 토대로 쓴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은 죽음을 맞은 한 노인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기까지의 신비롭고 극적인 내용으로 짜여지지만, 어쩔 수 없이 작곡가 내면의 갈등을 표출시키고 있다.

 

확고한 신앙과 특정 사회계층의 소속감을 가질 수 없었던 엘가였던 만큼 작품의 전반을 지배하는 절망감과 의심은

 그대로 작곡가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긍정적인 쪽이어서 후반부에서 우리는 내세에 대한 비전을 보게 된다.

제론티우스의 꿈>은 당연히 신학적인 면보다는 예술적인 면을 중시해야 할 작품이다.

 

 

 

 

그렇긴 해도 인간의 원죄설등에 강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엘가의 작품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리하르트 쉬트라우스가 엘가를 "영국 최초의 진보주의자"로 극찬한 것은 바로 <제론티우스의 꿈>이

 독일 초연된 때였다.

의심하고, 갈등을 겪고, 자주 세계로부터 소외의식을 느꼈던 엘가가 지극히 공적이고 대중적인 작품들도 다수 남기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이런 느낌은 비단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던지, 엘가는 대중적인 작품을 쓰는 일이 자신의

 소신과 어긋나지 않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으로 행사를 축하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사했다.

그것이 잘못일까.

사람들이 뭔가 자극이 될 것을 원할 때 아무에게도 호소력이 없는 푸가 따위를 작곡해서 무엇할 것인가"

 

엘가가 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

일 것이다.

모두 5곡으로 구성되는 이 행진곡집에서 유명한 제 1번은 후에 가사를 붙여 <희망과 영광의 나라>로도불려졌다.

 

"일생에 단 한번 나올 수 있는 곡"이라 자부했던 이 행진곡을 엘가는 사실 교향곡의 멜로디로 쓸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인데, 그의 목적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지게 만드는 빠른 템포의 행진곡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위풍당당 행진곡>의 타이틀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에서 인용되었다.

 베르디, 마이어베어 등의 곡과더불어 가장 기품있고 우아한 행진곡으로 꼽히는 이 곡에서 우리는 소심하고 위축되기

쉬웠던 엘가가 아닌, 영국의 전체 국민들이 사랑하는 성공한 음악가로서의 엘가를 느낄 수 있다.

 

1904년 말엽에 엘가는 기사 작위를 받게 된다.

 동시에 엘가 가족은 우스터로부터 헤레포드 근방의 큰 저택으로 이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엘가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콘서트 서곡 <남국에서>(In the South)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3월에 열린 엘가의 페스티벌은 국왕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버밍검의 새로 생긴 대학의

 교수직까지 맡게 된 "엘가 경"은 이제 작곡가로서 정상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그러나 엘가의 소망이던 교향곡은

 아직 한 곡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1903년 버밍검 페스티벌을 위해 썼던 오라토리오 <사도행전>(The Apostles)은 지나친 계획의 비대함으로 실패로

 끝났고,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필적한 작품을 쓰려했던 야심이 불발되자 엘가의 순수 관현악곡에 대한

집념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

 

1905년 <서주와 알레그로>(Introduction and Allegro)로 자신의 역량이 충분함을 확인한 엘가는 1907년,

 드디어 <교향곡 제1번>을 쓰기 시작했다.

이 곡의 첫 악장은 엘가 작품의 상징과도 같은 "품위있고 간소하게"(Nobilemento e semplice)의 지시어로

시작된다.

 

첫 악장과 끝 악장의 소나타 형식과 함께 이 곡에서 엘가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악장은 두개의 가운데 악장이다.

 작품을 헌정받았던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이 곡을 베토벤의 느린 악장과 비교한 바 있지만 실상을 말한다면

엘가 특유의 소박하고 따뜻한 위풍이 담겨 있다.

 

1910년에 완성된 <바이올린 협주곡>의 느린 악장도 단순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엘가가 그의 두번째 교향곡을 발표했을 때 그의 음악은 열렬히 환영받는 걸작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제작도

 아니었다.

 

엘가는 국가로부터 최고훈장인 공로 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고, 1912년엔 런던의 고급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간간히 그는 <영국 행진곡>, <인도의 왕관>등의 작품을 쓰긴 했어도 이전의 작품과 같은 수준의 걸작은

쓰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1차 세계 대전,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처럼 엘가는 전쟁으로 인한 심적 부담감을 겪었고 창작은 점점 어려운

 지경이 되고 있었다.

여기서 구원은 다시 한번 그의 아내 앨리스로부터 왔다. 슬럼프에 빠진 엘가를 위해 서섹스의 작은 오두막

 "브링크웰즈"를 찾아낸 것이다.

엘가는 그곳의 숲을 산책하고 자연을 통해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 이것은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켰다. 1918년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1919 년의 <첼로 협주곡>은 바로

브링크웰즈에서 작곡된 엘가 만년의 걸작들이다.

특히 <첼로 협주곡>은 작곡가 내면의 사상이 간결하고 절제된 형식으로 표현된 작품인데다가, 구세대 작곡가로

 전락될 위기에서 그를 구해줄 만큼 새롭고 정력적인 협주곡이었다.

 

첼로 협주곡>이 초연된 5개월 후에 엘가는 아내를 잃었다. 그것은 단순히 가정적인 불행의 차원이 아닌 엘가

창작생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년에 맺은 버나드 쇼와의 우정을 계기로 다시 한번 작곡을 시도해보긴 했지만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엘가는 이후 15년을 외롭게 살다가 1934년 2월 23일에 세상을 떴다.

 

엘가는 그의 생존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대한 작곡가로 존경받는다.

또한 그는 영국의 민요를 소재로 하지 않았으면서도 민족주의 음악가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이는 그의 음악언어가 지극히 영국적이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따뜻한 선율의 합창곡이 특히 영국 곳곳의 합창단에 의해 자주 불려지는 까닭도 같은 데에 있다.

엘가의 음악을 특징짓는 것으로 따뜻함 못지 않게 확연한 것이라면 거의 언제나 감지되는 우울함이라 하겠다.

빅토리아 시대와 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겪은 동시대인들이 가졌을 당혹감, 종교적 사회적으로 엘가를 붙어다녔던

괴리감,그리고 예술가의 천성으로 그가 느꼈던 고독감 등은 어둡고 슬픈 색조로 엘가 작품 저변에  깔리곤 했다.

 

엘가를 영국적이라고 할 만한 또 하나의 근거는 그의 음악언어가 영어의 억양과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인지 성악곡이 아닐 때조차도 엘가의 음악은 늘 은근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연상케한다.

엘가의 이 "목소리"는 <사랑의 인사>(Salut d'Amour)와 같은 바이올린 소품을 통해 그지없이 친근한 어조를

 띠기도 한다.

 

이 사랑스런 멜로디가 갖는 매력이야말로 <위풍당당 행진곡>에서의 당당한 기품과 함께 그의 이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핵심일지도 모른다.

모든 음악적 배경을 떠난다 해도 사랑의 인사만큼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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