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llegro moderato (18'53)
II. Canzonetta : Andante (06'40)
III. Finale : Allegro vivacissimo (09'39)
1878년 봄,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생활에서 온 우울증(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마지못해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 치료차 스위스 제네바 호수 연안의 클라렌스 리조트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 그곳을 그의 제자인 요시프 코테크(Yosif Kotek)가 찾아왔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즐겨 연주했다.
그러던 중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으로 자신의 평생 후원자가 되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때의
사정을 적어 보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하는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것이다.
이 협주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작품에 끌렸다.
방문객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어서 이런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되어준 폰 메크 부인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연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곡의 바이올린 독주 부분은 코테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작곡은 매우 빨리 이루어져 한 달 안에 곡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을 버리고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 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 악보가 이듬해 8월에 출판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연주 경력이 많지 않아 명성이 없었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코프스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에서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을 맡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코프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만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여를 기다리다 지친 차이코프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비르투오소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Adolph Brodsky)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지휘로 초연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째 하루 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 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이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그러나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계를 주름잡던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Eduard Hanslick)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 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유혹한다"는 둥둥.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이어 8월 20일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코프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4대 바이올린 협주곡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칭호를 누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멘델스존 (E단조)을 제외한 세 곡의 협주곡이 모두 D장조로 작곡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바이올린이 가장 아름다운 울림을 낼 수 있는 조성이 D장조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화려함과 애절한 멜로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곡이며,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비해 이 장르의 작품을 처음 접하기에 좀 더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처음 작곡될 당시 많은 말썽을 일으켰었던
작품이었다.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심한 우울증 증세에 빠져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에 작곡되었다 (1878년, 당시 38세).
이 기간은 그가 교향곡 제 4번과 "에프게니 오네긴" 등을 작곡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 때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코데크라는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의 도움으로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초고가 완성된 후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거장이었던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에게 작품에 대한 자문 및 초연을 맡아줄 것을 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답변은 차갑기만 했다.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기교적으로 보아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초연을 거부했던 것이다.
실망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3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묻어두었는데, 아돌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을 칭찬하면서 발표할 것을 적극 권하여 1881년 12월에 빈 필과 한스 리히터의 반주로
브로드스키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연당시의 평은 무척 나빴다.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부터 이 곡에 호의적이지 못했고
브로드스키의 완성되지 못한 기교는 청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결정적으로 독설가였던 평론가 한슬리크는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우리는 천하고 품위없는 얼굴만 봤고 거칠은 고함소리만 들었으며, 싸구려 보드카의 냄새만 맡았다.
프리트리히 피셔는 짜임새없는 그림을 비평할 때 '보고 있노라면 냄새가 나는 그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이 곡은 음악작품에도 들어서 냄새가 나는 작품이 있을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한슬리크의 혹평을 들은 차이코프스키는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이 곡의 가치를 굳게 믿고 있던 브로드스키는 유럽
각지에서 이 곡을 계속 연주하여 결국 청중들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나중에는 아우어 교수도 이 곡의 가치를
인정하여 스스로도 연주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곡은 많은 공로를 가진 브로드스키에게 헌정되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한슬리크가 말한 것처럼 강렬한 러시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1악장의 야성적인 주제나 2악장의 슬라브적 애수가 어린 선율, 3악장의 광포한 리듬과 열정적인 끝맺음 등은
러시아외의 유럽 작곡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민족색채가 넘치는 것들이다.
또한 아우어 교수가 처음에 연주가 불가능할것이라 예견했을 정도로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신예 바이올리스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기교를 세상에
과시하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 음원출처: http://goclassic.co.kr>
모차르트의 가락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신비가 있다. 거기에 비교하면 차이콥스키 가락의 아름다움에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하는 듯한 친근미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우수(憂愁)를 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베토벤과 같은 야성적인 맛은 없다.
그러나 「비창 교향곡」에 나타난 운명관은 베토벤의 「제5 교향곡」에 나타난 그것보다 좀 더 우리들과 가깝다.
유명한 서곡 「1812년」에서 그는 불타는 듯한 애국심을 영원한 기념으로 조국에 남기고 있다.
차이콥스키는 1840년 5월 7일에 러시아의 외딴 시골 카마 강변 보트킨스크에서 광산 기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 중에 음악과 인연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음이 민감해서 10세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였다.
그는 처음에 법률학교에 들어가서 19세 때 사법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늘어나는 마음의 괴로움은
그를 음악의 세계로 몰입시켰다.
1863년에 그는 생활이 안정된 관리 생활을 포기하고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였다.
이론을 자렌바에게, 관현악법을 안톤 루빈시타인에게 배웠다.
음악원에서의 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그것이 루빈시타인의 눈에 띄어 지우(知遇)를 얻게 된다.
안톤 루빈시타인은 이 천재를 감화와 격려로써 지도하였으며, 차이콥스키는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최초의 교향곡이 작곡되어 그의 지위를 확립했고, 그리고 얼마 후 이상적인 후원자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어 오로지 작곡에 매진할 수가 있었다.
그는 유럽을 편력하고, 미국에 가게 됨으로써 크나큰 명성과 영예를 얻었다.
모스크바 근교의 그가 숨어 살던 집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많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1893년 여름에 그는, 제6번 교향곡인 유명한 「비창 교향곡」이 상연된 뒤 몇 주일이 채 못되어 콜레라에 걸려서
급사했다.
사람들은 뜻밖의 급사 소식을 듣고 놀라 차이콥스키 자살설을 믿을 정도였다. 그것은, 우선 「비창 교향곡」에
넘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불안을 상상케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의 전기(傳記)를 읽으면 그 속에는 메크 부인과의 관계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 메크 부인은 부호의 미망인으로 차이콥스키 예술의 훌륭한 이해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차이콥스키와 메크 부인은 생전에 전혀 면식이 없었으며, 우연히 만나도 알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였다는 점이다.
차이콥스키도 편지 왕래는 하고 있었지만, 부인을 방문한 적도 없고 또 찾아가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부인을 신뢰했고, 부인은 그의 예술을 사랑하여 그 성장과 결과를 즐긴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차이콥스키 [Pyotr Ilich Tchaikovsky] (최신명곡해설 & 클래식명곡해설 - 작곡가편,
2012.5.31, 삼호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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