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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히말라야 시신 9구 모두 흩어져 있어.. 험한 지형에 헬기로 하나씩 수습




구르자히말은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산무리의 봉우리 중 하나다. 높이는 7193m로,

 산 남쪽에는 3000m 이상의 대암벽이 있다.


사진=조진수 사진작가 제공





네팔 히말라야 등반 중 사망한 산악인 김창호 씨를 비롯해 우리 국민 5명을 포함한 9명의 시신이 모두 수습됐다.  이들은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산을 등반하던 중 베이스캠프에서 강풍에 휩쓸려 급경사면 아래로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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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2013년 5월 산악인 김창호 씨가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을 하고 있는 모습. (몽벨 제공) /사진=뉴스1


네팔 히말라야 등반 중 사망한 산악인 김창호 씨를 비롯해 우리 국민 5명을 포함한 9

명의 시신이 모두 수습됐다. 이들은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산을 등반하던 중 베이스

캠프에서 강풍에 휩쓸려 급경사면 아래로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 2013년 5월 산악인 김창호 씨가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을 하고 있는 모습.


(몽벨 제공) /










히말라야 한국 원정대 시신 수색 등에 나선 현지 헬기. [AP=연합뉴스]







히말라야 3500m에 시속100㎞ 제트기류? 500m 날아간 시신



김창호 대장 등 원정대 9명 참변
·산사태 없어 강풍 때문인 듯
베이스캠프 1km 밖 나무도 뽑혀
한국인 5명 포함 시신 모두 수습






지난 12일 오전 10시30분(현지시간)쯤 네팔 구르자히말 원정대의 생사 확인을 위해 베이스캠프(해발 3500m)로 향하던 구르자카니 마을(2620m)  현지 수색대는 베이스캠프 전 500m 지점에서 네팔인 스태프 한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
베이스캠프에서 500m나 떨어진 지점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도 의아했지만, 마치 바람에 날아온 듯 한쪽 다리가 하늘을 향한 모습이었다. 




히말라야 등반 도중 사망한 한국 원정대원 5명과 네팔인 가이드 4명에 대한 시신 수습이 14일(현지시간) 마무리됐다. 구급대원들이 카트만두 네팔 국립대학병원에서 희생자 이송 작업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히말라야 등반 도중 사망한 한국 원정대원 5명과 네팔인 가이드 4명에 대한 시신

수습이 14일(현지시간) 마무리됐다. 구급대원들이 카트만두 네팔 국립대학병원에서 희생자 이송 작업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현지에서 사고를 수습 중인 최홍건 전 한국산악회 회장은 14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수색대의 설명을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기이한 사고”라고 말했다.
 
최 전 회장은 “텐트는 캠프에서 1㎞ 떨어진 지점의 나무에 걸려 있었고, 시신과 유품은 캠프에서 수백m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산사태나 눈사태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고 원인을 바람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지 수습대의 말을 종합하면 사고 시점은 지난 9~10일 밤으로 추정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풍이 불어닥쳐원정대원들이 자고 있던 5~6동의 텐트를 수백m 아래로 밀어냈다는 것이다. 베이스캠프에서 1㎞가량 떨어진 곳에 있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는 수습대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애초 현지 소식을 접한 네팔 언론은 거대한 세락(빙벽)이 무너지며 베이스캠프를 덮쳤다고 보도했다.

베이스캠프를 사라지게 할 정도의 위력은 세락 붕괴 또는 거대한 눈사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눈사태가 아니었다.
8000m 13개 봉을 등정한 김미곤(46) 대장은 “눈사태가 아니라면 제트기류와 맞먹는 바람이 불었다는 말인데, 듣고도 믿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제트기류는 풍속 100~200㎞/h로 대류권 상층부(6000~8000m)에서 불기 때문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산에 미친 두 남자 김창호·임일진 … 30년 동행하다 한날 떠났다



복수의 베테랑 산악인들은 “눈사태나 산사태로 인한 후폭풍이 베이스캠프를 덮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안나푸르나 등반 중 베이스캠프에서 눈사태로 인한 후폭풍을 경험한 김재수(57) 대장은 “무중력 상태처럼
몸이 붕 떴다 가라앉다를 반복하며 퉁퉁 튕겨져 나간다.
 당시에 70m를 날아갔다”고 말했다.



2015년 네팔 중서부 랑탕의 한 마을도 산사태로 인한 후폭풍으로 사라졌다.
직접적인 눈사태를 피했지만, 후폭풍이 계곡 반대편 마을을 때린 것이다. 또 계곡 아래 약 2㎞ 일대 나무들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한 방향으로 쓰러졌다.  


한국인 대원 5명의 시신은 14일 오후 현지 항공구조대가 수습해 카트만두로 이송했다.
 13일 사고 대책위를 꾸린 산악계는 원정대원의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할 방침이다.
계획대로라면 17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이에 따라 네팔로 떠날 예정이었던 유족들의 출국은 보류됐다.

앞서 김창호(49·노스페이스) 대장이 이끄는 5명의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는 지난달 28일 출국해 이달 초 남서벽 아래 베이스캠프를 꾸렸다. 구르자히말은 네팔 중서부 다울라기리(8167m) 산군 서쪽에 속한 산으로
이 일대는 ‘히든밸리’라 불릴 만큼 오지로 알려졌다.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채널A 방송 캡처.






히말라야 사고로 숨진 원정대 9명의 시신 수습이 완료됐다.


<사진=KBS 뉴스 캡쳐>









시신 9구 모두 흩어져 있어.. 험한 지형에 헬기로 하나씩 수습




흘러내리듯 가파른 산세 속에 풀과 나무도 드문 지역이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협곡에는 산을 찢으며 흐르는 듯한 얼음 계곡이 있었다.
 눈도 없는 민둥산 같은 산허리는 평지라고는 찾기 힘들었다.

그곳에 위치했던 베이스캠프는 통째로 사라져서 군데군데 텐트를 쳤던 구멍만 보였다.
해발 3500m에 있던 베이스캠프 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200m에 원정대의 각종 물품이 흩어져 있었다.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헬기는 현지 시간 14일 오전 7시

 15분 사고 지역에서 70km 떨어진 포카라시를 출발해 오전 8시경 현장에 도착했다.


가파른 지형 탓에 헬기가 착륙할 수 없어 구조대원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와 시신을 한 구씩 차례로 수습했다.

당초 기상 문제로 수습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으나 날씨가 좋아 구조작업은 3시간 만에 끝났다.

 사고 현장 인근 구르자카니 마을에서 신원 확인 및 경찰의 사건조서 경위조서 등을 작성한 후 헬기 2대를 동원해

카트만두로 출발해 오후 5시 15분경 트리부반 국립대병원에 시신들이 안치됐다.


주네팔 한국대사관 측은 현지 병원 및 경찰 당국과 협조체제를 유지하며 부검 및 장례 관련 절차를 협의하고 있다.

대사관 직원 1명이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다.


외교부는 15일 신속 대응팀 2명을 파견해 유가족 및 산악연맹 측이 네팔 현지를 방문할 경우 신속한 입국 절차를 지원하고 장례 및 시신 운구 등을 위해 협조할 계획이다. 비행기표가 매진된 탓에 유가족들의 네팔행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기범 한국산악회장은 “비행기표를 구할 수 없어 유가족 등이 네팔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시신을 국내로 옮겨서 합동 장례식을 치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관계당국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례적 돌풍이 앗아간 현장





시신 수습해 카트만두 병원 안치 구조대가 14일 헬기를 띄워 구르자히말 원정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해 이송하고 있다. 구조대는 시신을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위치한 트리부반

국립대병원에 안치했다.


KBS 영상 캡처



김창호 대장 등 원정대의 도전은 지난달 28일부터 시작됐다.
원정의 예상 종료일은 다음 달 11일까지였다.
이들은 네팔 포카라를 경유해 다르방(1070m), 팔레(1810m), 구르자 고개(3257m), 구르자카니 마을(2620m) 등을 거쳐 구르자히말 남면 쪽 케야스콜라(35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뒤 남벽 직등 신루트 등반에 도전할 예정이었다. 
         

원정대에 이상 신호가 감지된 것은 11일이었다.

 김 대장의 친구인 서기석 유라시아트랙 대표는 “격려 차원에서 베이스캠프를 방문했던 정준모 전 한국산악회 이사가 11일 최홍건 한국산악회 고문과 만나기로 약속한 베이스캠프 인근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 고문으로부터 이런 내용을 전해 듣고 내가 베이스캠프로 위성전화를 시도해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2일 서 대표 등이 현지 가이드를 동원해 베이스캠프 수색을 실시한 끝에 시신이 널려 있고 베이스캠프가 파괴됐다는 것을 파악했다.


김 대장의 사고가 정상에서 가까운 캠프가 아닌 베이스캠프에서 일어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보통 베이스캠프는 인근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에 설치되기 때문이다.

남선우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장은 “베이스캠프는 산악인들의 휴식처이자 보급처로 통한다.

많은 인원이 몰려 있는 곳에서 사고가 발생해 희생자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사고 수습을 담당하고 있는 아시아산악연맹 측은 “베이스캠프에 돌풍이 불어닥치면서 이에 휩쓸려 급경사면 아래로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변기태 한국산악회 부회장은 “사고 현장에는 돌풍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시신 9구가 상당한 거리로 모두 분산돼 있고, 계곡 쪽에 나무가 뽑혀 베이스캠프로 올라와 있다.


눈사태가 원인이었다면 시신들이 한곳에 몰려 있는 상태로 발견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변 부회장은 “시신 중 일부는 침낭 안에 들어 있었다고 했다. 밤에 자다가 폭풍이 불어닥쳐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코리안루트’와 ‘코리안웨이’


해발 7193m의 구르자히말이 속한 다울라기리산군은 최고봉 높이가 8167m로 세계에서 7번째로 높다.

지형이 거칠고 급경사가 많은 구르자히말에는 수직 높이가 3000m에 달하는 거대한 벽이 있다.

 김 대장은 아직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 남벽에 ‘코리안웨이’라는 신루트를 개척하려고 했다.


7년 전에도 한국 산악계는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던 박영석 대장은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코리안루트’를 개척하려다가 실종됐다.

 둘의 도전에는 한국 산악인들의 사명감이 숨어 있다.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의 최초 정복 등 많은 기록은 19세기부터 도전을 시도한 유럽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산악인들은 아직까지 남겨진 최고 난도의 코스 개척을 위해 도전해왔다.




정윤철 trigger@donga.com·김정훈 기자

      





히말라야 한국인 시신 수습 /사진=MBN


히말라야 한국인 시신 수습 /사진=MBN




히말라야 한국인 시신 수습 /사진=MBN


히말라야 한국인 시신 수습 /사진=MBN


















네팔 히말라야 등반 도중 눈사태에 휘말려 사망한 한국 원정대원 5명의 시신 수습 작업이 시작됐다



.



김창호 원정대 시신 수습 완료카트만두 국립병원에 안치



히말라야에서 수습된 김창호 원정대원들의 시신이 카트만두로 이송돼 현지 병원에 안치됐다.
외교부와 주네팔대사관 등에 따르면 한국 시간으로 14일 오후 1시45분쯤 시신 9구 중 3구를 먼저 수습해 인근 마을로 이송했으며 나머지 6구도 한 구씩 차례로 수습해 마을로 이송했다.

시신은 대형 헬리콥터 편으로 포카라로 이송된 뒤 카투만두에 있는 네팔국립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수습된 시신 9구 중 8구가 카트만두로 이송됐으며 나머지 1구는 구르자히말 인근 주민이어서 이송되지 않았다.

외교부 해외 안전지킴센터 소속 담당자 등 2명으로 구송된 신속대응팀은 시신 수습 상황과 유족 일정 등을 고려해
15일, 16일 중 파견될 예정이다. 신속대응팀은  운구와 장례절차 지원, 가족 방문 시 행정 편의 제공 등을 맡게 된다.

주네팔대사관과 외교부 신속대응팀은 유족과 한국산악회 등과 상의해 향후 장례절차 등에 대해 협의해 나갈 방침이다. 김창호 원정대는 ‘2018 코리안 웨이 프로젝트’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신루트 개척을 위해 지난달 28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45일간의 일정으로 출정했었다.
그러나 현지 시간으로 12일 베이스캠프에서 강풍에 휩쓸려 급경사면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2017년 10월 31일 서울 인왕산에 오른 김창호 대장.

/ 조선일보 DB





국내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8천m급 14좌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49) 대장을 포함한 한국인 5명이 네팔 히말라야 등반 도중 사망했다. 주(駐)네팔 한국대사관은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 구르자히말 원정 도중 실종된 김창호 대장 등 한국인 5명의 시신을 13일 새벽(현지시간)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김창호 대장이 2013년 3월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8천m급 14좌 무산소 등정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 연합뉴스





‘2016 코리안웨이 강가푸르나 원정대’의 김창호 대장의 모습. 노스페이스 제공



‘2016 코리안웨이 강가푸르나 원정대’의 김창호 대장의 모습.


노스페이스 제공










영원한 대장 김창호




산악인 김창호(49) 대장은 2013년 최고와 최악의 순간을 하루 새 겪었다. 그는 산소 탱크 없이 8848m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8000m급 히말라야 고봉(高峰) 14개 무산소 등반의 피날레였다. 국내 첫 기록이자 세계 등반사에서 흔치 않은

 쾌거였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함께 내려오던 후배가 정상 아래 7950m 캠프에서 숨졌다.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고 버티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런 높이에선 산소량이 평지의 40%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는 무산소 등정을 지키려는 후배를 못 말린 죄책감에 시달렸다.


▶산악인에게 등반 사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김창호는 2007년에도 에베레스트 정상 직전 캠프에 있었다.

무전기에서 근처 캠프에서 자던 박영석 원정대 대원 둘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김 대장은 정상 공격을 포기하고 시신 수습을 돕기 위해 철수했다. 7년 전 박영석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됐을 때도 김창호는 구조대에 자원했다.

박영석은 2001년 히말라야 14좌(座)를 완등한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었다.

 수색 작업에 나선 김창호는 절벽을 오르다 로프가 빠지는 바람에 큰 사고까지 당할 뻔했다.

 
기존 등반로가 아닌 새 루트를 뚫는 길에 나선 터였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새 등반로를 개척하는 '코리안 웨이'의 선구자였다.
두 해 전 네팔 강가푸르나 남벽에도 신(新)루트를 개척했다.

이런 공로로 작년 산악계 오스카상으로 꼽히는 '황금피켈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김창호 대장은 4년 전 조선일보가 통일의 꿈을 내걸고 유럽과 아시아 1만5000㎞를 달린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대장정 원정대를 책임졌다.

베를린서 출발한 원정대가 우랄산맥과 시베리아를 건너 고비사막, 만리장성을 거치는 동안 대원들을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다.


 김 대장은 "원정대 제1 목표는 대원 모두가 무사히 원정을 마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다짐대로 한 사람의 낙오 없이 96일간의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From home to h ome' 김창호 대장은 "가장 성공한 원정은 대원 모두가 집 문을 열고 나가서 닫고 들어오는 것"

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런 베테랑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모양이다. 한 해 전 본지 인터뷰에서 왜 산에 오르냐는 질문에 그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른다"고 했다.

후배 산악인들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나선 그의 도전에서 답을 헤아렸을 것 같다.




       








김창호 대장이 네팔의 가장 높은 미등정봉 힘중(7140m) 정상에 세계 처음으로 산소호흡기 없이 올라 피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LS네트웍스


김창호 대장이 네팔의 가장 높은 미등정봉 힘중(7140) 정상에 세계 처음으로 산소호흡기 없이

 올라 피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LS네트웍스







'제로 투 서밋'그가 처음 밟은 길만 11


개척자 김창호 대장] 김창호와 코리안웨이 원정대



다울라기리 구르자히말 남벽은 수직고가 3000m가 넘는다.
아직 단 한 번도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난벽(難壁)이었다.
 김창호 대장은 이곳에 한국인의 힘으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다 유영직(51) 장비담당, 이재훈(24) 식량의료담당,
임일진(49) 다큐영화 촬영감독 등 원정대원 3명과 정준모(54) 한국산악회 이사와 함께 생(生)을 마감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내 길"

김창호 대장이 앞서 14좌를 완등한 선배 산악인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면 산악계로부터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김 대장은 국내의 대표적인 '등로주의(登路主義)' 산악인이다.

이미 개척된 루트를 따라 가는 '등정(登頂)주의'와 달리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것에 의미를 뒀다.
김 대장은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에 도전하는 과정에서도 틈틈이 사람의 발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미답봉 (未踏峯)에 눈을 돌렸다.

 파키스탄 바투라2봉(7762m·2008년), 네팔 힘중(7140m·2012년) 등은 김 대장이 세계 최초로 정상을 밟은 산이다.
그가 세계 최초로 오른 산만 3곳이고 8개의 새 루트를 개척했다.





김창호 대장은 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산악인이자 개척자였다.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를 인공 산소 없이 등정했다. 그는 이번 원정에 앞서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코리안 웨이(Korean way)’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 김창호 대장이 지난해 11월 서울 인왕산에 오를 당시 모습.                 


김창호 대장은 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산악인이자 개척자였다.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를 인공 산소 없이 등정했다. 그는 이번 원정에 앞서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코리안 웨이
(Korean way)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 김창호 대장이 지난해 11월 서울 인왕산에 오를 당시 모습.


 /박상훈 기자




김 대장은 "14좌 완등 후 어떤 길을 갈까 고민하다 아무도 닦지 않은 길을 개척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명예로운 현실에 안주했을 나이였지만, 그는 "산에 가지 않으면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며 도전을 택했다.
이번 등정은 그의 '코리안 웨이' 세 번째 목표였다.



산악인 김창호가 걸었던 길

◇'제로 투 서밋'의 사나이


                  

김 대장은 2012년 네팔 힘중을 등정해 '산악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황금피켈상 아시아 부문상을 받았다.

지난해엔 강가푸르나 남벽 새 루트 개척으로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명예와 상업성에 눈을 돌리지 않는 순수한 산사나이였다.


2006년 가셔브룸 1봉(8068m)부터 2013년 에베레스트(8848m)까지 히말라야 8000m급 14곳을 무산소로 완등했다.

특히 에베레스트 등정때는 해발 0m인 벵골만 바닷가에서 카약을 타고 시작해 자전거로 1000여㎞를 달렸다.

그리고 베이스캠프까지 걸어서 이동한 다음 산소통 없이 정상에 올랐다. "신과 공정한 게임을 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김 대장은 2014년 조선일보가 기획한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평화 대장정' 원정대장으로 참여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1만5000㎞의 대장정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미리 답사를 다녀오는 등 대원들의 안전과 루트를 책임졌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돌풍이 베이스캠프를 덮치는 자연재해에 당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엄홍길 대장도 "평소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실천하는 후배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슬퍼했다.

상금·후원금 받으면 후배 원정에 쾌척

1969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김 대장은 서울시립대 무역학과 입학 후 우연히 산악부에 입회하며 '산사나이'가 됐다. 김 대장은 뛰어난 친화력으로 선후배 산악인의 존경을 받았다.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을 찾기 위해 에베레스트 도전을 늦추고 네팔행을 자원하기도 했다.


그는 받은 상금이나 후원금은 늘 후배들 원정기금으로 쾌척했다.

 그는 서울시립대 산악부 4년 후배인 아내와 세 살짜리 딸(단아)을 두고 있다.

김 대장은  원정에 앞서 유라시아 원정을 함께 한 대원들과 만나 단아 사진을 보여주며 "내 가장 큰 행복이다.


돌아오면 가족 셋이 '캐나다 유콘강으로 카약 타러가자'고 약속했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 그 꿈을 이룰 수 없게됐다.

김 대장을 비롯한 원정대 시신은 14일 구조작업을 통해 수습돼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병원에 안치됐다. 17일 한국으로 운구될 예정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5/2018101500339.html






김창호 원정대 히말라야 등반 중 사망 사고(PG)/ 사진=연합뉴스



김창호 원정대 히말라야 등반 중 사망 사고


(PG)/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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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
1977년 이 유명한 무전으로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을 알린 산악인 고상돈. 하지만 그에게 더 오를 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전을 그치지 않았던 그는 1979년 미국 매킨리 등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2009년 여성 산악인 고미영의 목숨을 앗아간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을 처음 밟았던 산악인은 헤르만 불이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를 오른 그는 하산 도중 일몰을 맞아 8000m 고지에서 선 채로 밤을 지새웠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지고도 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불은 4년 뒤 다시 산을 오르다가 추락사했다. 






 

산과 싸운 사람들에게, 산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것이 산이 주는 보상이다. 산을 사랑하고 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산이 너무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 19세기 영국 산악인 프랜시스 영허즈번드 경은 수많은 산악인이 목숨을 걸고 다시 산으로 향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12일(현지 시간) 히말라야 등반 중 구르자히말에서 참변을 당한 김창호 대장의 심정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는 2013년 에베레스트에서 동료를 잃었지만 이후에도 히말라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김 대장의 좌우명은 ‘집에서 집으로’였다. 집에 안전하게 돌아와야 비로소 성공한 등반이라는 뜻이다.
 2004년엔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한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이듬해 원정대가 나선 적이 있다.

“집에 가자!”고 외치며 얼어붙은 동료를 찾던 엄홍길은 그러나, 시신을 찾고도 한국의 집까지 옮길 순 없어 결국
 산장(山葬)을 치렀다.
 이 과정을 옮긴 영화 ‘히말라야’의 임일진 촬영감독도 이번에 목숨을 잃었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이라는 뜻의 ‘히마’와 집을 의미하는 ‘알라야’가 합쳐진 말이다. 눈이 사는 곳,
바로 ‘눈의 집’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눈의 집에서 마지막을 맞았다고 해서 김 대장과 원정대원들의 긴 잠이 편안할 것 같지 않다.
다행히 현지에서 시신 수습이 끝났다고 한다. 어서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등반을 끝냈으면 한다.  


 
주성원 논설위원 swon@donga.com 



김기섭 고상돈 박영석…영원히 산이 된 그들 기사의 사진



지난 201111월 실종된 고() 박영석 대장(가운데 사진)과 신동민(왼쪽 사진), 강기석 대원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관계자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뉴시스

                      



김기섭 고상돈 박영석영원히 산이 된 그들


안타까운 47년 조난사




한국 산악인의 안타까운 사고는 세계 최고봉인 히말라야 산맥에 대한 등정이 본격화된 1970년대 이후 발생하기
시작했다.
1971년 김정섭, 김호섭, 김기섭 형제가 포함된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 마나술루(해발고도 8163m)를 오르던 중 김기섭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마나술루는 56년 일본 원정대가 처음 오른 후 정복하지 못한 봉우리로, 김호섭과 김기섭은 5월 4일 7600m까지 등정한 후 캠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김기섭이 돌풍으로 40m 아래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진 틈)에 추락해 사망했다.
한국 히말라야 원정 사상 최초의 조난 사망 사고였다.

이듬해에는 김정섭, 김호섭 형제와 막내인 김예섭이 합류한 원정대가 다시 마나술루 등정을 시도했다.
선발대가 7250m에 캠프를 설치하고 등정을 노렸으나 폭설에 의한 눈사태로 3캠프(6500m)에 있던 김호섭 등 대원 5명과 셰르파 10명이 희생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김예섭도 눈에 휩쓸렸으나 1100m 아래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조됐다.
두 번의 원정을 주도했던 김정섭은 두 동생을 히말라야에 묻어야 했다.
78년에는 77년 한국인 최초 히말라야 원정에 성공했던 고상돈이 이일교, 박훈규와 함께 미국 알래스카 매킨리(6194m)를 등정한 후 하산하다가 추락사했다.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현옥도 99년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8091m)를 오른 후 하산하다가 7800m 지점에서 셰르파와 함께 실종됐다.
 2006년 히말라야 14좌 등정을 시작해 11개 봉우리를 밟았던 고미영도 2009년 12번째인 낭가파르밧(8125m)을 등정
한 후 내려오다 추락해 유명을 달리했다.

2011년에는 히말라야 14좌, 3대 극점(남극·북극·에베레스트),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정복한 박영석이 이끈 원정대가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르던 중 신동민, 강기석과 함께 실종됐다.
여러 차례의 수색에도 시신을 찾지 못해 시신 없이 영결식을 치렀다.
이번에 사고로 사망한 김창호 대장 역시 당시 시신 수색에 참여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산 / 사진=연합뉴스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산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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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말라야> 포스터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