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진공동취재단
엄앵란 “죽을 때까지 영화만 생각했던 사람”
지난 4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신성일의 빈소에는 끝없이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고인과 같은 시대를 향유했던 ‘국민 배우’ 최불암은 조문 후 “선배님의 죽음이 아쉽다”며 “그 분이 만든 문화의 역사가 지나고, 후배들이 어떤 것을 배워야 하나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는 “고인이 남긴 업적이 길이 오랫동안 빛나길 바란다”며 “배우들에게 신성일은 굉장히 로맨틱한 존재였다”고
고인을 큰 아빠라고 불렀다는 가수 황혜영은 “생전 신성일 배우와 가깝게 지냈다.
이순재 역시 빈소를 찾았다.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고인을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칭하며 “불과 몇 달 전 병문안을 갔었을 때만 해도
또한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내년이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해인데 그 중요한 자리에 신성일이 없다는 건

이 외에도 가까운 후배들과 동료 영화인들, 그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의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추모하고 슬퍼
하며 아파했다.
그리고 그 많은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까이에서 빈소를 지킨 건 역시나 부인 엄앵란이었다.
남편이자 동료, 그리고 인생의 동지였던 고인을 떠나보내며 엄앵란은 “저승에 가서도 못살게 구는 여자 만나지 말고
그저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서 재미있께 손잡고 구름 타고 그렇게 전세계 놀러다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엄앵란은 "(고인은) 가정 남자가 아니었다. 일에 미쳐서 집안은 나에게 다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고 다녔다.
집에 와서 하는 것은 늦게 들어와서 자고 일찍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며 "늘그막에 재미있게 살려고 했는데 내 팔자가 그런가 보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남편은 까무러쳐서 넘어가는 순간에도 ’영화는 이렇게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걸 볼 때 가슴이 아팠다.
이런 사람이 옛날부터 버티고 있었기에 오늘날의 화려한 한국영화가 나온다는 생각에 넘어가는 남편을 붙잡고
울었다.
존경할 만해서 55년을 살았지, 능수버들 같은 남자였으면 그렇게 안 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인의 아내에게 남긴 유언은 (차녀 수화 씨에 따르면) ‘참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했다’였단다.
한편, 고인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진행된다.
유족과 한국영화배우협회와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등 영화관계자들이 논의 끝에 장례 형식을 결정했다.
배우 안성기와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지상학 회장이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아내 엄앵란과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씨가 유족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은 6일 오전이다.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4일 지병으로 별세한 '국민배우' 신성일 씨의 빈소가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6일, 장지는 경북 영천의 선영이다.
[사진공동취재단]
불꽃같이 살다 간 영화인" 故 신성일 빈소에 동료·선후배 배우들 추모 발길
한국 영화계의 ‘큰별’ 배우 故 신성일이 향년 8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가운데, 장례식장에는 생전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동료 선후배 영화인들의 추모 발걸음이 이어졌다.
지난 4일 오전 2시 30분, 전남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은 고 신성일. 이날 장례식장에는 부인인 배우 엄앵란을 비롯한
유족들이 그의 가는 길을 지켰다. 엄앵란은 유족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식을 도왔다.
신성일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수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을 애도했다.
배우 신영균, 이순재, 안성기, 김수미, 박상원, 임하룡, 황혜영, 조인성, 박중훈, 정준호, 강우석 감독, 강제규 감독 등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넋을 위로 했다.
특히 안성기는 “60년대 아역배우로 데뷔한 후 함께 활동했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 선배님의 모습을 지켜봐왔다.
정말 안타까운 건 내년에 함께 영화 한 편을 하기로 약속했다”며 “시나리오도 거의 다 나왔다.
오랜만에 같이 해서 너무나 기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돼 안타깝고 허망하다”며 고인을 향한 추억과 더불어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생전 절친했던 배우 김수미는 “불과 두 달 전에도 같이 밥을 먹었다.
더 계실 수 있었는데”라며 “하늘에서도 배우하세요”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조인성은 “생전에 한 번 밖에 못 뵀다.
가시는 길 인사드리러 왔다”고 착잡한 마음을 보였다.
부인이자 배우 엄앵란은 고인의 마지막 유언을 언급하며 “딸이 ‘마지막으로 할 말 없냐’고 하니 (신성일이)
‘재산 없다’라고 말했다”며 “또 딸이 ‘어머니(엄앵란)에게는 할 말 없냐’고 물으니 ‘참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하다고
전하라’고 했다더라”고 대신 전했다.
그는 남편이자 동료 배우였던 신성일에 대해 “신성일은 사회적이고 일 밖에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 까무러치는 때까지 영화 생각뿐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버텨서 오늘날까지 많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고 밝혔다.
엄앵란은 이어 “저승 가서는 못 살게 구는 여자 만나지 말고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서 재밌게 구름 타고 놀러 다니라고 하고 싶다”고 마지막 말을 전하기도.
한편 고 신성일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과 후배 배우 안성기가
공동 장례위원장이다.
고인의 영결식은 6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며, 오전 11시 서울추모공원으로 옮겨 화장을 진행한다. 장지는 경북 영천의 선영이다.
박태현 기자 pth@kukinews.
별은 졌지만"..故신성일 가는 길 함께한 엄앵란·이순재·안성기
[스포츠조선 문지연 기자] '한국 영화 시대의 아이콘'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신성일이 폐암투병 끝에 4일 새벽 별세했다. 신성일의 빈소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영화계 동료와 선후배, 그리고 각계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4일 오전부터 장례절차를 논의하는 영화인들이 자리했다.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이날 오후 12시 30분께 "신성일 배우의 장례를 영화인장으로 치르기로 했다"며
"신성일 선배는 시대의 아이콘이자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었던 대단한 연기자다.
갑자기 별세하실지 몰랐는데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하며 애도했다.
배우 신성일이 4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돼 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조문하고 있다.
./2018.11.4/사진공동취재단
실제로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대본 수정 작업에 매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평생을 영화인으로 살아왔던 고인이기에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해룡 영화인원로회 이사장은 "불과 얼마 전 준비 중인 시나리오가 완성됐다고 같이 영화를 만들자고 했는데 유언
이 돼버렸다. 평생 톱스타의 긍지와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 것을 정말 칭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동료 배우인 이순재와 후배 안성기 등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이순재는 "1960년대 영화의 획기적 발전을 이룬 거목이 한명 갔다.
너무 일찍 간 것 같다"며 "신성일의 작업은 많은 자료가 남아있어 후학에 좋은 교본이 될 것이다"고 추억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후배 안성기는 "지난해부터 내년에 영화 한 편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시나리오도 거의 완성됐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함께 하게 돼 기뻤는데 허망하게 가시니 너무 안타깝다"며 "빛은 졌지만, 우리들
마음에는 그 빛이 오랫동안 함께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하며 고인을 애도했다.
2018.11.4/사진공동취재단
배우 신영균은 "모든 면에서 열심히 뛴 배우"라고 신성일을 추억하며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하며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을 것이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이젠 행복하게 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수미는 두 달 전에도 함께했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하늘에서도 배우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하룡 역시 "별들이 하나 하나 떨어진다는 느낌"이라며 황망한 마음을 표했다.
55년을 부부로 함께했던 엄앵란도 신성일을 애도했다. 엄앵란은 "우리 남편은 영화 물이 뼛속까지 들었다.
까무러쳐서 넘어가는 순간에도 '영화는 이렇게 찍어야 한다'고 했다"며 "그걸 볼 때 정말 마음이 아팠다.
이런 사람이 옛날부터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영화가 나온다는 생각에 넘어가는 남편을 붙잡고 울었다"고 말하며 고인과의 마지막을 추억했다.
이어 엄앵란은 "내가 존경할만해서 55년을 살았지 흐물흐물하고 능수버들 같은 남자였으면 그렇게 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을 추억하고 애도하는 동료, 선후배 배우들, 그리고 각게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밤 동안 조인성과 박상원 등 배우들이 빈소를 찾았고, 다수 배우들과 감독들이 근조화환을 보냈다.
박찬욱 감독과 강우석 감독, 강제규 감독, 그리고 송강호, 김혜수, 박중훈, 송혜교 등 영화인들이 보낸 근조화환들이
자리를 지켰다.
고인은 4일 오전 2시 30분께 전남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페암 3기 판정을 받은 이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치료를 받아왔던 신성일은 지난달 4일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 등장해 건강을 되찾은 듯한 모습을 보여줘 영화팬들의 박수를 받았으나,
결국 한 달 만인 4일 오전 2시 30분께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인 엄앵란과 아들 강석현(51)씨, 딸 강경아(53)씨, 강수화(48)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6일 오전이다.
장지는 경북 영천에 마련된다.
[사진=연합뉴스]
신영균 "故신성일, 제주도로 내려오라고 했는데 결국..."
원로배우 신영균이 고 신성일의 마지막 가는길을 추모했다.
신영균은 지난 4일 오후 7시 30분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고) 신성일 빈소를 찾아 취재진 앞에서 "소식을 듣고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들다"며 "나보다 한참 후배인데 이렇게 일찍 갈 줄 몰랐다"고 슬픔을 드러냈다.
같이 활동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신성일 씨와 저는 캐릭터가 달랐다.
신성일 씨는 청춘물, 멜로드라마 위주를 했고 저는 카리스마가 있는 연산군, 대원군 역사물과 군사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자주 만나진 못했다.
그러나 배우협회 회장을 제가 하고 신성일 씨에 인계하며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고 했다.
"6개월 전 폐암이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다. '폐암은 공기 좋은 데가 제일 좋다. 제주도 와서 좀 있어라'라고 했다.
제주도와 제가 인연이 있고 제주도에서 방송을 한다. 제주도에 연예인들도 많이 와 있다.
그래서 연예인들 찾아보고 생활하며 공기 좋은데서 살라고 했다.
자신이 건강해지면 바로 오겠다고 했는데 못 내려왔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신성일 씨는 굉장히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배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도 하고 영화감독도 했다.
모든 면에서 열심히 뛰었다"며 "영화 배우라는 직업을 하며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했을 거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이젠 행복하게 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신성일은 4일 오전 2시 25분께 전남대병원에서 향년 81세 일기로 별세했다.
폐암 투병 중이던 그는 전날인 3일부터 병세가 위독해졌으며, 아들 강석현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으며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는 영화인장(3일장)으로 거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 위원장을 맡았다.
고인의 발인은 오는 6일 오전 11시 예정돼 있다.
화장 후 유골은 고인이 직접 건축해 살던 가옥이 위치한 경북 영천 성일각으로 옮겨진다.
1937년생인 신성일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 후 다수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60, 70년대 최고 미남 및
인기 배우로 군림했다. 1
964년에는 당대 톱 여배우 엄앵란과 결혼해 화제를 모았고,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지난해 6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요양원에서 투병을 해왔다.
[사진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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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했던 고 신성일 모습. /사진=이기범 기자 |
신성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 그래라
신성일은 1957년 26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필름 오디션에 합격해,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빠빠’에서 둘째
아들로 데뷔했다.
이때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강신영이었던 그에에 ‘뉴(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한 일)’이라는 의미로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1964년 ‘맨발의 청춘’을 통해 그야말로 당대를 대표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요즘은 우리가 미남미녀의 표준을 우리나라 배우, 가수들에게서 찾지만 과거엔 서양 연예인을 미의 표준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 시절에 미남의 표준이라고 흔히 거론됐던 사람이 알랭들롱인데, 신성일이 바로 한국의 알랭들롱이라고
불렸다.
그럴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맨발의 청춘’으로 상처 받고 좌절하는 젊은이를 연기해 청춘을 상징하고 시대를 위로하는 국민배우가 되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194편 중 324편에 그가 등장했다고 할 정도로 영화계에서 절대적인
위상이었다.
그의 전성기는 70년대까지 이어져, ‘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 같은 전설적인 히트작들을 만들어냈다.
80년대엔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 출연하기도 했다. 주연작만 507편이고 상대 여배우가 연 119명에 달한다.
신성일은 마지막까지 영화만 생각했다고 한다.
“까무라쳐서 넘어가는 순간까지 영화 생각만 했다.
음식을 먹을 때도‘이걸 먹어야 촬영을 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며 “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고 엄앵란은 전했다.
김홍신 원작의 영화를 내년에 제작할 계획까지 다 세워놓은 상태였다.
신성일은 생전에 "난 '딴따라'가 아닙니다.
종합예술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라고 했었다.
60년대에 한국영화필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필름공장을 건립하려다가 사기를 당해 1억원을 날리기도 했다.
배우로서의 전성기가 끝난 후엔 영화규제제도를 영화계에 유리하게 만들겠다며 정계에 도전했다.
하지만 81년 선거 패배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됐고 엄앵란이 식당을 경영하며 가정을 돌봐야 했다.
그후 2번 더 도전해 마침내 2000년에 국회입성했지만 불법 정치후원금으로 2년여 간 수감됐다.
이때 감옥에서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읽고 말년의 그를 대표하는 스타일인 파마머리를 선택하게 됐다.
실패로 끝난 정치 외도 후 그는 영화에 열정을 불태우며 내년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신성일은 엄앵란과의 부부관계로도 유명하다. ‘로맨스빠빠’로 만나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이들은 바로 그해 11월 14일에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 수가 3천4백 명에 달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그야말로 대혼란 사태가 터진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생활이 아니었고 최근 들어 엄앵란이 주부토크쇼에서 한풀이 토크를 하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엄앵란이 유방암으로 쓰러지자 신성일이 달려와 병간호를 했고, 신성일이 폐암으로 쓰러지자 엄앵란이 병원비를 대며 보살폈다.
요즘 신세대 감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애증의 유대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앵란은 자신들의 부부관계를 ‘동지적 관계’라고 표현했다.
“내가 존경할만한 사람이라 55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엄앵란의 말이다.
방송에선 신성일 험담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신성일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 기본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신성일은 20여 년 간이나 시대를 대표했던, 앞으로 다시 나타나기 어려운 대스타였다.
그 시대를 함께 한 이들 사이에선 신성일의 존재감이 엄청날 것이다. 그런 거목이 세상을 떠났다.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 그래라” 엄앵란에게 전해달라며 신성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배우 엄앵란이 4일 오후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성일 씨의 빈소에서 취재진에 심경을 밝히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죽어가면서도 영화만 말하던 사람…존경할 만해" 엄앵란, 故신성일을 추억하다
‘영화계 큰 별’ 배우 신성일이 지난 4일 폐암으로 별세한 가운데 장례식장에는 그를 사랑하는 많은 영화인의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신성일은 지난 4일 오후 2시 25분께 폐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오전 1시 서울 송파쿠 서울아산병원에 고인의 빈소가 마련됐고 오후 1시부터 조문객을 받기 시작했다.
유족인 엄앵란과 자녀들이 빈소를 지키는 가운데 최불암, 이순재,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김수미,
박상원, 임하룡, 조인성 등 영화계 관계자들이 대거 빈소를 찾았다.
이날 엄앵란은 취재진에 남편이자 영화계 동료였던 故신성일을 추억하며 “(신성일은) 까무러쳐서 넘어가는 순간에도
영화만 생각했고 죽어가면서도 영화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좋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다”며 “앞만 보고 가는 사람. 한 가지만 명심하는 사람”이라고 그를 추억했다.
또한 “신성일은 ‘가정남자’가 아니라 ‘사회남자’였다. 일에 미쳐서 집안은 내게 맡겼고, 그래서 역할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사회적이었고 일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늘그막에 함께 재밌게 살려고 했는데 내 팔자가 이렇다.
존경할 만 해서 55년을 함께 살았다”고 덧붙이며, 고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신성일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뒤 이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로 이름을 알렸다.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그는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다수의 작품에서 열연하며 총 500편이 넘는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 활약해왔다.
유족은 부인 엄앵란과 장남 석현, 장녀 경아, 차녀 수화 씨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이다. 발인은 6일이며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자기관리 철두철미했는데 어떻게…” 신성일 빈소에 조문행렬
고(故) 신성일 씨의 빈소에는 ‘별들의 별’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한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된 신 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아내 배우 엄앵란 씨(83)와 자녀들, 조카인 강상호 국회의원 등 유족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맞았고, 입구에는
평소 즐겨 입던 흰 셔츠 차림으로 미소 짓고 있는 고인의 초상화가 놓였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은 4일 오후 1시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김동호 전 이사장을 비롯해 선우용여 이동준 등 동료 배우와 이창동 정지영 영화감독 등 영화계
인사들이 빈소를 찾았다.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배우 최불암 씨(78)는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
동 시대 연기자로서 조금 더 우리 곁을 지켜주셨으면 했기에 아쉬움이 크다”고 밝혔다. 또 “고인은 평소 연기자로서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했는데 어떻게 (암에 걸렸는지)…”라며 애통해 했다.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은 김국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은 “고인은 임종 직전까지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보였고, 우리나라 영화계에 대한 고민과 애정도 누구보다 컸다”고 회고했다.
그는 “2019년 중 제작을 목표로 이장호 감독과 함께 새 영화 제작을 준비 중이셨다.
시놉시스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본인의 전기 영화에 가까운 내용이었고, 그렇기에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를 각색
하기까지 하셨다”이라고 말했다.
호상을 맡은 이해룡 한국영화인원로회 이사장도 “고인의 영화계 2년 선배로서 ‘만추’ 등 20편이 넘는 작품에 함께 출연했고, 나는 주로 악역을 맡았다.
(고인은) 내게 ‘선배, 선배’ 하며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라며 “최근까지도 전화 통화로 안부를 나누었는데, 5일 전부터 연락이 끊기더니 3일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때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안색이 상당히 창백했으나 본인은 끝까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혼성그룹 투투 출신의 황혜영 씨(45)도 빈소를 찾았다. 황 씨는 “고인을 ‘큰아버지’로, 엄앵란 선생님은 ‘큰어머니’라고 불렀다”며 “집안 경조사는 물론 내 결혼식도 와 주실 정도로 다정하신 분이셨고, 늘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고 회고했다.
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많이 호전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 안도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돼 당황스럽고 애통
하다”고 말했다.
신성일(왼쪽) 엄앵란 부부가 2016년 1월 채널A ‘나는 몸신이다’ 녹화장에서
포옹하고 있다. 엄 씨는 2015년 12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방암 확진을 받은 후
남편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이듬해 1월 수술을 받은 끝에 완쾌했다.
채널A 제공
2011년 7개월간 본지 연재 ‘청춘은 맨발이다’
1960년 데뷔작 ‘로맨스 빠빠’서 만난 엄앵란과
연애부터 결혼생활까지 숨은 이야기 공개 화제
한국 영화사 톱스타 커플 “부부 이전에 동지”
“『아흔 살에 애인만 넷』이라는 책 보셨나요.
내가 그 책의 저자 마르셀 마티오처럼 90세에 애인 넷 갖는 게 목표는 아니지만, 자기 관리만 잘하면 비슷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사랑 없이는 못 삽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요.”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이들의 영화 같은 삶을 가능하게 해준 주요 발언을 뽑아봤다.
연재 타이틀은 대표작 ‘맨발의 청춘’(1964)에서 따온 말로 젊은이에게는 희망을, 중ㆍ장년에게는 활력을 주고자 하는
바람을 담았다. 그 해 12월 문학세계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김한용 사진집『꿈의 공장』에 담긴 신성일의 모습.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11/05/8ad7381e-b85b-4aeb-8ab1-e82d75f33f40.jpg)
김한용 사진집『꿈의 공장』에 담긴 신성일의 모습.
[중앙포토]
내가 그 자리에서 했던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그래, 너 노래 잘한다.
하지만 난 너보다 잘생겼다는 소리 듣는다. 두고 보자.’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처럼 정신이 나간 채 충무로 3가 중부 경찰서 쪽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발걸음은 새문안교회를 등지고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정신을 차린 곳에서 눈을 들었다. 오른쪽을 보니 ‘한국배우전문학원’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둔 건 아니었지만 뭔가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묘한 힘에 이끌려 1층 문을 열었다.
![1960년 신성일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 [사진 한국영상자료원]](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11/05/f1e326c6-bf99-4006-b365-af587033af6d.jpg)
1960년 신성일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데뷔작에서 드러난 내 연기 실력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시쳇말로 ‘발연기’인데 가장 짜증 냈던 사람이 지금의 아내인 엄앵란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훗날 뼈가 되고, 살이 됐다.
이 영화는 엄앵란과 처음 연기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연기를 잘 못 하는 탓에 점점 주눅이 들었다.
엄앵란은 57년 ‘단종애사’로 데뷔한 이후 청춘스타로 떠올랐고,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여동생 역인 엄앵란은 나와 엮이는 장면만 되면 쭈뼛거렸다.
같이 연기하기 싫다는 짜증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1962년 이민자와 호흡을 맞춘 '아낌없이 주련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11/05/33082825-c6ab-4986-811f-c3a113515c8c.jpg)
1962년 이민자와 호흡을 맞춘 '아낌없이 주련다'.
[중앙포토]
대본을 읽는 일주일 동안 ‘굿바이 어게인’을 7번 보았다. 남자 주인공인 퍼킨스는 여성적 느낌이 넘치는 섬세한 멜로
연기에 뛰어난 당대 최고의 배우였다.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퍼킨스만한 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퍼킨스와 일심동체가 됐다. 퍼킨스의 손동작과 눈 움직임을 보며 나를 대입해 보았다.
또 퍼킨스의 연기를 생각하며 대본에 동작을 다 적어놓았다.
대본을 100번도 더 읽었다.
전체 108신(러닝타임 105분)을 외워버렸다.
![1963년 영화 '배신'에서 엄앵란과 입맞추고 있는 신성일. 대본에 없던 키스신을 만들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11/05/39cc61bd-0f90-4b25-abe0-1ed540bc5f38.jpg)
1963년 영화 '배신'에서 엄앵란과 입맞추고 있는 신성일. 대본에 없던
키스신을 만들었다.
[중앙포토]
내 눈앞엔 엄앵란의 빨간 입술만 보였다.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랜만에 엄앵란을 껴안으니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앵란도 당황한 듯했다.
“미스 엄, 가만 있어 봐.” 이 키스는 연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키스를 방해할만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키스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정 감독은 우리 커플이 탄생하는 것을 가장 먼저 지켜본 목격자라 할 수 있다.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연기하고 있는 트위스트 킴과 신성일.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11/05/47d3d670-9331-4125-903d-d6378b5c4948.jpg)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연기하고 있는 트위스트 킴과 신성일.
[중앙포토]
내 생각을 엄앵란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그 기획을 극동흥업에 넘기기로 했다.
‘맨발의 청춘’이란 기획에 깜짝 놀란 극동흥업의 차태진 사장은 우리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곧바로 ‘가정교사’를 각색한 서윤성 작가를 중심으로 대본 입수작업이 이루어졌다.
시나리오는 그 다음 날로 극동흥업에 들어왔다.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니가츠(日活)사 작품이었는데, 서작가가 일본 라인을 통해 구한 것이었다.
극동흥업은 기획과 동시에 촬영에 들어갔고, 결국 ‘맨발의 청춘’은 64년 초 아카데미극장에 걸렸다.
![앙드레 김이 만든 예복과 웨딩드레스를 입고 1964년 결혼식(왼쪽)과 2004년 40주년을 맞아 벽옥혼식을 올린 신성일과 엄앵란.[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11/05/7778e1c6-fd53-40c4-b264-e260947f6351.jpg)
앙드레 김이 만든 예복과 웨딩드레스를 입고 1964년 결혼식(왼쪽)과
2004년 40주년을 맞아 벽옥혼식을 올린 신성일과 엄앵란.
[중앙포토]
들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낭떠러지나 다름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욕실 밖으로 물이 흐르는 홈통이 지나갔다.
나는 야생동물처럼 민첩하게 창틀을 붙잡고 홈통에 발을 디딘 채 4호실 들창 앞에 이르렀다.
창문을 두드리자 불이 켜졌다. 넉살 좋게 말했다.
“미스 엄, 나 떨어져 죽어.” 깜짝 놀란 엄앵란은 나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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