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곡

Hugo Wolf -휴고 볼프 / 침묵의 사랑(Verschwiegene Liebe)

 

 

 

 

 

 

Hugo Wolf - Verschwiegene Liebe

 

 

 

 

 

 

Hugo Wolf, Penthesilea (1883-85), Symphonic Poem

 

 

 

 

Re:후고 볼프(Hugo Wolf, 1860~1903)

 

후고 볼프 (Hugo Wolf)
직 업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국 적 : 오스트리아


출생지 : 오스트리아 빈디시
활동년도 : 1860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디슈그라츠)

- 1903년 2월 22일 (빈)

 

 

 

19세기 독일 리트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빈 음악원에서 공부했지만 반항적인 기질의 그는 스승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 때문에 음악원에서 쫓겨났다. 1

875년 바그너를 만나 격려받았으며, 프로이트의 동료인 요제프 브로이어 등을 비롯한 빈의 유명한 아마추어 음악가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1879년 브람스를 만나 격려와 더불어 음악적 시야와 활동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고 젊은시절부터 구스타프 말러의

 친구였다.

 

알마 말러에 따르면 1870년대말부터 작곡가 아델베르트 폰 골트슈미트와 그의 동료들은 볼프와 가까이 지내면서 후원했으며 그와 함께 오페라 극장, 서점, 연주회장 등으로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사창가에도 그를 데려갔는데 그 때문에 매독에 감염되어 신체 장애를 일으켜 끝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병이 자꾸 재발하자 결벽증이 있던 볼프는 친구들과 떨어져 은둔했으며 병세가 진정된 동안에는 눈부신 재능과 창작력을 보였다.

1883년 〈빈 잘론블라트 Wiener Salonblatt〉의 음악 평론가가 되었는데 매주 실렸던 그의 평은 당시의 빈 음악계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 가곡들 중에는 괴테·레나우·하이네·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 포함된다.

1883년에는 클라이스트의 비극을 바탕으로 한 교향시 〈펜테질레아 Penthesilea〉를 작곡했으며 1888년 이후로는 괴

테와 뫼리케 등의 시를 바탕으로 방대한 양의 가곡을 작곡했다.

 

하이제와 가이벨의 시에 곡을 붙인 〈스페인 가곡집 Spanisches Liederbuch〉(1891)이 나왔으며 계속해서

〈이탈리아 가곡집 Italienisches Liederbuch〉(1부 1892, 2부 1896)이 출판되었다. 그밖에 입센과 미켈란젤로의 시에 붙인 연가곡집도 작곡했다.

 

1896년 만하임에서 그의 첫 오페라 〈원님 Corregidor〉(1895,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의 희곡을 바탕으로 함)의 초연이 실패로 끝나자 1898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그 개정판을 무대에 올렸다.

역시 알라르콘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그의 2번째 오페라 〈마누엘 베네가스 Manuel Venegas〉는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가곡 작곡가로서 그의 명성으로 생전에 베를린과 빈에 볼프 협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작품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1897년 표면적으로 말러의 질책 때문인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정신착란과 부전마비 증세가 심해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898년 잠시 퇴원했으나 나중에는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으며 1898년에는 빈에 있는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3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는 초기에 작곡된 첫 100곡 가운데 소수만을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완숙기에 작곡된 가곡들은 매우 독창적이며 독일 리트의 전통에서 가장 뛰어난 곡들이다.

이 작품들은 시적 직관과 감정이 풍부한 반주에서 독특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의 기악곡들에서는 주제가 노출되어 있지 않고 곡 전체에 녹아 있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기악곡으로는 관현악을 위한 〈이탈리아의 세레나데, Italienische Serenade〉(1892, 1887년에 작곡된 현악

4중주를 위한 세레나데의 개작)를 꼽을 수 있다.

 

1911년 R. 바트카와 H. 베르너가 그의 글을 모아 편집한 〈후고 볼프의 음악비평, Hugo Wolfs Musikalische

 Kritiken〉이 출판되었다.

 

 

 

 

 

 

 

 

 

[ 만년의 계획과 죽음 ]

 

오페라 창작의 해는 동시에 마지막 대가곡의 해이기도 했다.

볼프의 예술에 관한 최종적인 표현에는, 미켈란젤로 외에 라이니크 (Reinick)의 아침의 노래 (Morgengesang)를 위한 자리도 마련해야 한다.

 

볼프는 이 곡을 미켈란젤로의 1년 후 스베틀린 (Svetlin)박사의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97년 12월

 아침의 찬가라는 제목의 앞선 작품을 작곡할 때와 같은 흥분 속에서 훌륭한 합창곡으로 편곡했다.

 이 비극의 해의 마지막 대계획은 제2의 오페라 마누엘 베네가스였다.

 

이 오페라는 알라르콘의 또 다른 희곡 공놀이하는 아이들 El Nin~o de la bola의 번안물이다.

제1막의 음악은 1897년 여름에 스케치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흥분제인 알콜의 과용과 1897년 9월 20일 말러를 방문한 것에서 야기된 발작으로 인해 갑자기 중단되었다.


말러는 이 옛 동창생에게 원님의 공연을 약속했으나 볼프는 그것이 몇 차례 연기되는 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 갑자기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졌는데, 이 흥분은 곧 가라앉았지만 볼프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당화되었다. 완전한 격리상태 속에서 2개월이 지난 뒤 그는 약간의 활력을 되찾아 이탈리아 세레나데와 또 하나의 세레나데를 작곡하려 했지만 모두 이루지 못했다.

 

1898년 1월 말에 퇴원한 그는 일은 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주로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는 등 평온하게 1년을 지냈다.

10월의 어느 날 아침 그는 트라운 호에 투신하여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그곳에서

약 5년 정도 더 살았다.

그는 1903년 2월 22일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그 유해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곁에 매장되었다. P. G. L.

 


[ 후고 볼프와 리트 ]

 

슈베르트는 그의 대부분의 가곡의 악상(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후에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되지만)을, 선택한 텍스트에 존재하는 어떤 정신상태나 분위기에서 얻었으며, 시인이 자기의 감정에 주는 언어적 표현을 반드시 세부에

이르기까지 추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작가 또는 2류 시인들의 텍스트를 어느 것이나 잘 다룰 수 있게 했다.

그가 찾고 있던 것은 언어의 배후에 깃든 정신적 또는 감정적 실재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의 몇 작품은 다른 길도 열어 놓았다. 그 길이란, 필요하다면 기악에 지배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구성의 제약을 부정하더라도 시인의 언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는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의 일부를 이루는, 하이네의 시를 작곡한 6개의 가곡이다.

 이들 가곡에서 그는 언어를 통해서 실재에 접근하고 있다.

이 방법이 후고 볼프와 쇤베르크의 슈프레히게장으로 이어지는 반면, 슈만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발상법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방법이 인정되고 있다.


이리하여 후고 볼프는 단호히 두 번째 방법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적어도 처음부터 그랬었다.

 이미 초기의 가곡집(노래의 꽃다발 Liederstrauss하이네의 텍스트에 의한 것[1878])은 가곡 Lieder라는 타이틀이

아닌 시 Gedichte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언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 후고 볼프 협회에 의해서 사후에 발간되거나 재편집된 70곡의 가곡볼프가 발표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젊은

시절의 작품들중에서 무명 시인의 텍스트는 4편, 그리고 2류 시인의 텍스트는 14편에 불과하다.

우리는 볼프의 작업 방법도 알고 있다. 그는 선택한 시를 큰 소리로 몇 차례 낭송하고 곧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눈을

 뜨면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었다.


베토벤 이후의 음악의 특징은 형식의 확대를 수반하는 생성세포의 축소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슈베르트나

브루크너의 항목;펜테질레아에 대한 설명 참조). 이 이중의 현상이 볼프의 가곡에 나타나 있다.

 

 가령 미뇽의 노래 동경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Nur wer die Sehnsucht kennt의 그의 판(版)과 슈베르트의 판(D. 877/4)을 비교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볼프의 스코어(57소절)가 슈베르트의 스코어(46마디)보다 확대되어 있으면서 볼프는 4음의 모티브로 심리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테크닉은 노래하는 목소리를 음악의 프레이즈에 대한 모든 배려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음성의 아무리 작은 억양이라도 노래하는 음성 속에 재생시킬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볼프가 시인의 노예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운율법(韻律法)을 어기는 것을 허용하기는 하지만(고음에서의 약한 실러블), 그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며 표현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볼프는 리듬에 대해서, 특히 말(馬)의 갤롭 소리를 무대의 배경으로 사용할 때에는 선배들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으나

바그너의 유산인 반음계법에서는 선배들보다 훨씬 변화가 많은 무한화성적 연주를 가능케 했다. 조성이 단번에 확립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령 완전화음으로 시작하더라도 그것은 즉시 버려졌다가 고의적으로 되돌아온다.

가령 기도 Gebet(뫼리케 시집 제28번)의 전주에서는 완전화음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반음계(기도에 앞선 영혼의

 고뇌) 뒤에 개입되므로 돔형 천정의 높은 곳에서 대성당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 위대한 독일 치클루스 ]

 

 

 

위대한 리트 시대는, 후고 볼프에게 있어서는 뫼리케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의 열성은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슈바벤 지방의 작은 도시의 온후한 목사 뫼리케(180475)는 영혼의 평안함과 겸손한 만족을 지닌, 그리고 약간은 눈에 뜨일 정도의 유머러스한 시인으로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Heinrich von Kleist처럼 충격적인 작가를 좋아했던 격하기 쉬운 볼프가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왔을까?

표면적인 조용함 속에서 맴돌다가 페레그리나 Peregrina처럼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용암을 볼프는 알아차린 것일까?

 

이 시의 놀라운 다양성에 마음이 끌린 것일까? 어쨌든 뫼리케에게 볼프는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주었다.

그리고 만일 무인도에서 볼프의 작품을 연주한다면 뫼리케편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볼프의 다른 작품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뫼리케의 시가 가장 완전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가장 내면적인 종교적 감정(기도, 잠자는 아기 예수 Schlafendes Jesukind, 크리스마스 트리에 Auf eine

 Christblume)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유머(징벌에 Zur Warnung, 이별 Abschied - 이 이별의 후주[後奏]에서는 계단에서 비평가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반주하는 빈 왈츠풍의 색다른 사용방법이 주목된다)에 이르기까지 인간성에 관한 것으로는 이 시에 빠진 것이 없다.

 

야유의 매력(요정의 노래)이 환상으로 가득 찬 드라마(불의 기사[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판, 1892]) 공존하고 있다.

아이헨도르프(1788-1857)는 유명한 표박(漂泊) Wanderlust의 시인으로서 특히 인기가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산업화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생활에 대한 독일혼(이런 말이 생기기 이전의)에 대한 생태학적 항의였다. 특히 볼프를 매혹시킨 것은 이 항의하는 측면이었다.

 

 슈만을 그처럼 매혹시켰던 향수에 가득 찬 노래, 영원히 잃은 과거에 대한 환상은 볼프에게는 적은 부분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밤의 마력 Nacht zauber, 향수 Heimweh). 그의 리트의 대부분은 얼마간 경묘하기는 하지만 매우 리드믹하고 다소 꺾인 가락으로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관에 대한 도전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돈과 명예 또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회의 변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선원, 사기꾼, 음악가, 그리고 시인들, 이른바 히피들의 행렬이다. 황폐한 정원에 조용히 피어나는 꽃처럼 이 가곡집 속에 유일하게

글자 그대로 사랑의 노래인 저 훌륭한 말없는 사랑 Verschwiegene Liebe이 우뚝 서 있다.


괴테가 그 긴 생애(1749-1832)를 통해 거친 여러 가지 단계 중에서 아나크레온풍의 갤런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단계는 볼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70년대의 문학적 혁명과 사회에 대한 항의인 슈투름 운트 드랑 시대의 혈기왕성한 시인에 의한 제2단계로부터 볼프는 세 편의 송가만을 취했다.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가뉴메트 Ganymed와 인간성의 한계 Grenzen der Menschheit가 그것인데, 여기에서만 슈베르트와 중복될 뿐 다른 곳에서는 그와 대립하고 있다.

그래서 볼프의 가곡은 거의 모두가 시인의 위대한 원숙기의 것들이다.

거기에는 얄궂게도 영지, 해탈, 그리고 다툼 이외에 어떤 살아가는 방법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비극적인 가락도 분명히 있다.

 가령 미뇽 Mignon과 수금을 타는 사람의 노래 Harfenspieler 등은 괴테가 쓴 시 중에서 가장 절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역시 다른 작곡가들의 관심도 끌었다(슈베르트, 슈만).


볼프의 독창성은 오히려 유머를 단호히 추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괴테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쥐를 잡는

사나이 Der Rattenfänger, 기사 쿠르츠의 신부찾기 여행 Ritter Kurts Brautfahrt,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 Gutmann

 und Gutweib, 주현절[主顯節]Epiphanias).


제2권은 60세의 괴테가 발견한 페르시아의 시와 새로운 사랑이라는 이중의 충동에서 쓴 시를 모은 서동시집(選詩集)

 Westöstliche Divan의 시에 거의 모두 할애되고 있다. 그러나 볼프는 정열로 가득찬 시는 피하고 술을 예찬하는 노래나 다른 시, 괴테가 참사랑을 하고 있다기보다 사랑을 희롱하고 있는 시를 주로 골랐다.

 

 의기소침한 7년을 보낸 볼프는 견실하고 현명한 남자로 행동했다. 이때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이미 작곡된 텍스트를

 피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 지중해의 가곡집 ]

 

다음의 두 가곡집은 파울 하이제 Paul Heyse와 에마누엘 가이벨 Emanuel Geibel이라는 2류 시인에 의해 번역된 이국(異國)의 시들이다.

 스페인 가곡집(188990)은 종교적인 노래 부분과 세속적인 노래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종교적인 노래는 마리아에게 바치는 찬가로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최초의 세 곡이 할애된다.

이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게 되고 이 기적의 아기에게 경배를 드린다.

그리고 이 아기는 우리를 순교의 구세주에게로 천천히 인도한다.

 

 가락은 단순하며, 화성은 다른 대부분의 곡만큼 반음계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뫼리케 이후 거의 표현된 적이 없었던 볼프의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던 종교성이 여기에서 재현된다.

이 가곡집의 세속적인 노래는 특별한 눈물과 미소 사이에서 생기는 감미로운 분위기가 특징이다.

 

 다른 가곡집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이만큼 잘 표현된 경우는 별로 없다. 너무 내성적인 연인(〈상냥한 사랑을 놓친

사람은 Wer sein holdes Lieb verloren)이나 아름다운 사람의 눈길은 행복을 약속해주지만, 그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모든 희망을 빼앗긴 사람( 색다른 현자 요한 Seltsam ist Juanas Weise, 푸른 발코니에서 Auf dem grünen Balkon

mein Mädchen)의 환멸에서 우리는 반은 흥겹고 반은 의기소침해진다.


이탈리아 가곡집(1890-91, 1896) 속에서 볼프가 특히 배려한 주제 중 하나는 연인들끼리의 입씨름이다. 두 개의 멋진 가곡은 화해를 노래하고 있으며(우리들은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Wir haben beide lange Zeit geschwiegen, 자! 화해합시다 Nun lass uns Frieden schliessen), 그밖의 곡은 우리를 다툼 속으로 끌고 들어가지만 그 조롱하는 듯한 가락은 행복한 대단원을 예상케 한다(내가 후작부인이 아니라고 해서

Du sagst mir, dass ich keine Fürstin sei, 아니에요,

 

젊은이 Nein, junger Herr, 그대를 부른 사람은 누구인가 Wer rief dich denn?). 그러나 정말 드라마틱한 내용은 비싸게 머문 예쁜 아가씨 Hoffärtig seid ihr, schönes Kind(이 곡에서는 불운한 연인이 문을 쾅 하고 닫는 장면에서 불협화음을 사용했다)와 왜 화를 내고 있어요?

Was soll der Zorn mein Schatz? 등 두 곡뿐이다.


생전에 볼프가 출판한 이 가곡집에 포함되지 않은 가곡들은 여러 시인에 의한 가곡이라는 타이틀하에 하나로 묶어

놓았다.

매력적인 쥐잡이의 금언 Maus fallenSprüchlein(역시 뫼리케이다!)과 고트프리트 켈러 Gottfried Keller에 의한 6편의 시 외에 가장 유명한 것은 슬픔과 우울함으로 가득 찬 미켈란젤로의 세 편의 시에 의한 가곡집이다. G. K.


[ 작품설명 ]

 

 

로베르트 하스 Robert Haas와 헬무트 슐츠 Helmut Schulz가 1932년에 착수한 후고 볼프의 작품에 대한 완전한 평론판은 국제 후고 볼프 협회의 찬조와 한스 얀치크 Hans Jan?ik의 음악 감수로 1960년부터 빈에서 간행되었다

 

(음악연구 출판사 Musikwissenschaftlicher Verlag/무지크하우스 도블링거 Musikhaus Doblinger). 예정되었던

20권 중의 대부분은 현재 입수할 수 있기 때문에(가곡은 번호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 평론판에 아직 수록되지 않은

작품만 소개하기로 한다.

 

1) 뫼리케시에 의한 가곡 (Morike-Lieder E.)]
뫼리케의 시에 곡을 붙인 후고 볼프(1860~1903)의 가곡. 전체 53곡으로 대부분은 1888년에 작곡된 것이고 11곡은 그뒤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이중 제10곡 〈산책 Fussreise〉, 제12곡 〈칩거 Verborgenheit〉, 제17곡 〈정원사 Der

 Gärtner〉, 제28곡 〈기도 Gebet〉, 제37곡 〈향수 Heimweh〉 등이 유명하다.

 

 

 

[ 참고사항 ]

 

 















후고 볼프(Hugo Wolf, 1860~1903)|





같은 시대의 음악가인 구스타프 말러와 안톤 브루크너의 주요 라이벌의 한 사람이다.

독일계인 아버지는 가업인제피업을 해야 했지만 평생 예술가를 동경했다(건축가도 되고 싶어 했다).

 

 어머니의 원래 이름은 카타리나 누스바우메르 Katharina Nussbaumer인데 농촌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피가 섞여

있었다(슬로바키아, 오르호보니크 출신으로 독일에 귀화). 미래의 작곡가의 예술가적 기질은 이러한 유전적 특질의

 융합볼프가 음악가로서의 캐리어를 만들게 되는 빈이라는 독특한 융합처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고난에 가득 찬 중등교육을 마친 뒤 그는 빈 고전파의 위대한 음악가들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그의 음악에 관한 배타적 정열을 길러냈다.

일찍이 14세 때부터 시작된 작곡의 습작은 피아노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뒤 곧 리트 작품이 모습을 나타냈다.

 

1875년 신학기부터 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 빈에 온 이 청년은 처음부터 2학년에 편입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조기 성숙:4중주곡에서 펜테질레아까지 1877년에 자발적으로 끝내게 되는 공부(변함없이 몇 가지 상을 획득)와는 별도로, 그는 빈에 온 처음 몇 년 사이에 그 시대의 진보한 음악세계, 특히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크게 경탄했다.

 

 볼프는 1875년 12월 이래 개인적으로도 바그너와 가까웠다.

  이 시기에 그의 모든 정열을 결집시킨 것이 오페라였다.

그는 알보인왕 König Alboin이라는 오페라의 작곡을 시도했는데 그 스케치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그러나 빈 음악원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은 무엇보다 하나의 교향곡이다.

 

이 교향곡은 마지막 두 악장만이 남아 있다(이 악장은 대관현악을 위한 스케르쪼와 마지막 악장 Scherzo und Finale

 für grosses Orchester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곡은 이 시대에 이미 두 가지 다른 형식으로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특히 스케르쪼는 매우 주목할 만한 연구의 흔적이 이미 엿보였다 (그 무렵 오로지 볼프가 본으로 삼은 것은 베를리오즈였다). 난잡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개인교수도 별로 못했고 또 잘츠부르크 가극장의 지휘자 칼 우크 밑에서 했던 합창 지휘자의 자리도 1881년 말의 몇 개월밖에는 근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잘못은 후에 그만한 성과를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이 실패가 언젠가는 연극계에서 유명해지고 싶다던볼프의 야망에 불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알맞는 방향코믹한 양식을 인식함으로써 바그너풍의 드라마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의 조카인 젊은 발랑틴느(왈리) 프랑크 Valentine(Wally) Franck - 볼프는 처음에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 에게 폭풍우처럼 격렬한 사랑을 느낀 그는 아이헨도르프의 시로 6개의 종교적인 노래(1881)를

작곡하였다.

 

 

 

 

 

 

 

이 정열의 메아리는 조숙했던 당시의 주요 작품으로서 대작 현악 4중주곡 d단조에서도 그 곡의 흔적이 엿보인다.

현악4중주곡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따온 말(Entbehren sollst du, sollst entbehren)을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가지 포기의 최초의 하나에 불과하다. 베토벤적 스케일(그러나 서정적 정신은 바그너와 비슷하며 슈베르트에게도 힘입은 바가 크다) 의 이 4중주곡은 1878년에 착수하여 1884년에야 겨우 완성시켰다.

 

이 작품은 1903년 2월, 볼프가 죽기 전날 초연되었을 때부터 예언적 작품이라 하여 추종자들 중에서도 특히 레거와

쇤베르크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젊고 위대한 작곡가 볼프가 오케스트라를 위해 남긴 유일한 작품이자 그의 창작생활 초기의 중요한 유산이 되는 작품이며 이로 인하여 또다시 깊은 실망을 맛보게 되는 교향시 펜테질레아*는 1883년 리스트의 권유로 작곡을

 시작하여 2년 뒤에 완성하였으며, 1886년에 빈 필하모니에 의한 신작시연(新作試演)에서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때 지휘자 한스 리히터의 조소와 욕설을 듣게 된다.

그는 볼프가 평론가로서 브람스의 음악에 대해 혹평했던 사실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펜테질레아가 리스트의 몇 가지 규범(교향시라는 형식)을 훨씬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작곡된 슈트라우스의 유사한 어느 작품보다도 더 우수하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로지 볼프가 브루크너풍이 위대한 선배의 두 작품, 교향곡 제3번과 제4번을 그는 일찍이 들은 적이 있었다의 교향곡에 대해서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 덕분이었다.

 

연극의 내용(여기에서는 클라이스트에 의한 줄거리)이 놀라운 사실주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볼프의

이 작품은 여기에 덧붙여서 교향곡적 구조와도 호응하고 있다.

즉, 모든 주제를 지배하는 단 2도 음정에 의해 굳어진 내적 통일은 그 시대의 브루크너에게서 볼 수 있는 통일과 비슷

하게 완벽하다.

 

실제로 여기에 리스트의 교향시와 쇤베르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상드를 연결시키는 역사적인 고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리트:폭발적 창작 펜테질레아의 실패는, 브람스와 한슬릭의 권위 아래 빈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형식주의와 대립하고 있던 미래의 음악가들에게 준 볼프의 입장이 가져온 직접적 결과이긴 하지만, 이 일로 인해서 볼프의 교향곡 작곡가가 되려는 야망에는 경종을 울리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887)부터 볼프는 빈 살롱 Wiener Salonblatt지(誌)의 음악 평론 담당까지 포기하고 만다.

간주곡 E♭장조(1886), 그리고 특히 유명한 이탈리아 세레나데(1887. 5, 편곡 1892)에서 일시적이나마 실내음악으로

돌아온 후 볼프는 최초의 가곡집을 출판하는 기쁨을 맛본다.

 

  이 가곡집은 곧 성공을 거두었으며(1887), 이 성공은 다음 해인 1888년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는 창작활동이

 글자 그대로 폭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888년에는 거의 100곡 정도의 천재적 가곡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에두아르트 뫼리케 Eduard Mörike(53곡),

 아이헨도르프(13곡), 괴테(25곡) 등의 시에 기초하여 작곡한 가곡집이다.

그 후 2년 동안 이전처럼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마찬가지 노력으로 열심히 작곡이 계속되었다.

 

우선 괴테의 26편의 시에 의한 제2가곡집, 이어서 1889년 10월부터 1890년 4월까지 스페인 가곡집(이것도 2부로

 나뉜다)을 작곡했다.


1890년 말과 1891년 말까지 1년 간격을 두고 2단계로 나누어 초연된 이탈리아 가곡집2집 중 제1집이 여기에 이어지게 된다. 이 가곡들의 창작 기간은 고통스러운 침묵과 재능 고갈의 위기에 놓인 시기였고, 볼프의 편지에는 이 시기의

 그러한 비극적인 흔적이 남아 있다. 반대로 자신의 창작활동으로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열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감동이 공포와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시기부터 정신적인 불안정 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매독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병에 감염된 것은 187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문에 의해 작곡된 무대 작품과 합창곡 등으로 이 결정적인 시대의 대부분의 작품을 갖추게 된다(아우구스트 그라프 폰 플라텐 할러뮌데 August Graf von PlatenHallermünde의 시에 붙인 작은 크리스마스 이브 오라토리오 크리스마스 전야

 

[1886. 121889. 5]와 입센의 희곡을 위한 조르하우그의 축제[1890 말1891] 등). 조르하우그의 축제는 1891년 11월

12일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몇 달 후 연주회에서 재연되었다(사후에 간행). 따라서 볼프에 대한 평가는 생전의

가곡의 연작에 의해서 기본적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이들 가곡의 작곡은 4년(1888-91)이라는 짧은 기간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1896년에는 이탈리아 가곡집 제2집과 여러 시인들의 시를 바탕으로 한 곡들 - 특히 그의 백조의 노래인 미켈란젤로의 시에 의한 3곡 미켈란젤로 가곡집 Michelangelo Lieder이 뛰어나다 - 을 작곡했다. 로맹 롤랑과 볼프의 전기 작가들의 대부분은 볼프의 작품이 모두 이 중심이 되는 수년간에 한정되어 작곡되었다고 조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기록으로 보아도 분명하듯이 전혀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나 브루크너를 교향곡의 바그너라고 부르듯이 볼프를 리트의 바그너라고 평하는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다.

 실제로 이 형식에 있어서 볼프야말로 슈베르트 이후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볼프 자신이 스스로 소형식이라고 보는 것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조해 하기도 했지만 작곡활동의 전성기였던

 20년간을 통하여 고귀한 장르에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4중주곡과 펜테질레아라는 두 가지 예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했었다.

 

매우 중요한 오페라 원님도 이러한 예의 하나이며 이 작품 역시 불운한 작품이었다.

  독일 오페라 코미크의 정점 페드로 데 알라르콘 Pedro de Alarcón의 소설 삼각모자 El Sombrero de tres picos(→마누엘 데 팔랴)에서 로자 폰 마이레더 Rosa von Mayreder가 발췌한 원님은 1895년 봄, 열에 들뜬 듯한 상태에서 착수하여 그해 안에 완성시켰고, 1896년 6월 7일 만하임에서 초연되어 분명히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이 오페라의 평판은 급락했으나 볼프의 생전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다시 한 번 공연하게 된다.

그의 사후에는 독일 문화권의 무대에서 산발적으로 상연되었을 뿐이지만 볼프를 본질적으로 이해한 브루노 발터라는

열렬한 후원자를 찾아내게 된다(1936년 잘츠부르크). 원님의 실패원인은 흔히 볼프의 이른바 무대감각의 결여라고

여겨져 왔다.

 

  이 작품은 연극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케스트라가 있는 가곡집 - 분명히 훌륭하기는 하지만 - 에 더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잘못 본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부정적인 양상은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인물카르멘의 대극인

주인공의 성격 설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인물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배우는 몇 사람밖에 없었다.

 어쨌든 독일 오페라 코미크의 유구한 역사(cf. 특히 로르칭, 코르넬리우스, 괴츠 Goetz)의 도미(掉尾)인 원님이 글자 그대로 절정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즉, 여기에서는 각 부분이 모두 코믹한 것이면서도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익살스러운 점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발라셰프 P. Balascheff에 따르면, 볼프는 바그너의 가르침을 잊지는 않았지만 그 가르침을 정확한 리듬으로 각 등장인물에게 성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요컨대, 비교의 대상은 X 토스카풍의 나쁜 멜로드라마 쪽이 아니라

팔스타프와 같은 걸작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만년의 계획과 죽음 오페라 창작의 해는 동시에 마지막 대가곡의 해이기도 했다.

 

 볼프의 예술에 관한 최종적인 표현에는, 미켈란젤로 외에 라이니크 Reinick의 아침의 노래 Morgengesang를 위한

자리도 마련해야 한다. 볼프는 이 곡을 미켈란젤로의 1년 후 스베틀린 Svetlin박사의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의 찬가라는 제목의 앞선 작품을 작곡할 때와 같은 흥분 속에서 훌륭한 합창곡으로 편곡했다(1897. 12).

이 비극의 해의 마지막 대계획은 제2의 오페라 마누엘 베네가스였다.

 

  이 오페라는 알라르콘의 또 다른 희곡 공놀이하는 아이들 El Nin~o de la bola의 번안물이다. 제1막의 음악은 1897년 여름에 스케치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흥분제인 알콜의 과용과 1897년 9월 20일 말러를 방문한 것에서 야기된 발작으로 인해 갑자기 중단되었다.

 

말러는 이 옛 동창생에게 원님의 공연을 약속했으나 볼프는 그것이 몇 차례 연기되는 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 갑자기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졌는데, 이 흥분은 곧 가라앉았지만 볼프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당화되었다. 완전한 격리상태 속에서 2개월이 지난 뒤 그는 약간의 활력을 되찾아 이탈리아 세레나데와 또 하나의 세레나데를 작곡하려 했지만 모두 이루지 못했다.

 

1898년 1월 말에 퇴원한 그는 일은 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주로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는 등 평온하게 1년을 지냈다.

10월의 어느 날 아침 그는 트라운 호에 투신하여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그곳에서

약 5년 정도 더 살았다.

그는 1903년 2월 22일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그 유해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곁에 매장되었다.

 

 P. G. L. 후고 볼프와 리트 슈베르트는 그의 대부분의 가곡의 악상(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후에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되지만)을, 선택한 텍스트에 존재하는 어떤 정신상태나 분위기에서 얻었으며, 시인이 자기의 감정에 주는 언어적 표현을 반드시 세부에 이르기까지 추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작가 또는 2류 시인들의 텍스트를 어느 것이나 잘 다룰 수 있게 했다.

그가 찾고 있던 것은 언어의 배후에 깃든 정신적 또는 감정적 실재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의 몇 작품은 다른 길도 열어 놓았다.

 

그 길이란, 필요하다면 기악에 지배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구성의 제약을 부정하더라도 시인의 언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는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의 일부를 이루는, 하이네의 시를 작곡한 6개의 가곡이다.

이들 가곡에서 그는 언어를 통해서 실재에 접근하고 있다.

 

이 방법이 후고 볼프와 쇤베르크의 슈프레히게장으로 이어지는 반면, 슈만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발상법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방법이 인정되고 있다.

이리하여 후고 볼프는 단호히 두 번째 방법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적어도 처음부터 그랬었다.

 

이미 초기의 가곡집(노래의 꽃다발 Liederstrauss하이네의 텍스트에 의한 것[1878])은 가곡 Lieder라는 타이틀이 아닌 시 Gedichte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언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 후고 볼프 협회에 의해서 사후에 발간되거나 재편집된 70곡의 가곡볼프가 발표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젊은 시절의 작품들중에서 무명 시인의 텍스트는 4편, 그리고 2류 시인의 텍스트는 14편에 불과하다.

 

우리는 볼프의 작업 방법도 알고 있다.

 그는 선택한 시를 큰 소리로 몇 차례 낭송하고 곧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눈을 뜨면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었다.

  베토벤 이후의 음악의 특징은 형식의 확대를 수반하는 생성세포의 축소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슈베르트나

브루크너의 항목;펜테질레아에 대한 설명 참조). 이 이중의 현상이 볼프의 가곡에 나타나 있다.

 

가령 미뇽의 노래 동경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Nur wer die Sehnsucht kennt의 그의 판(版)과 슈베르트의 판(D. 877/4)을 비교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볼프의 스코어(57소절)가 슈베르트의 스코어(46마디)보다 확대되어 있으면서

볼프는 4음의 모티브로 심리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테크닉은 노래하는 목소리를 음악의 프레이즈에 대한 모든 배려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음성의 아무리 작은 억양이라도 노래하는 음성 속에 재생시킬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볼프가 시인의 노예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운율법(韻律法)을 어기는 것을 허용하기는 하지만(고음에서의 약한 실러블), 그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며 표현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볼프는 리듬에 대해서, 특히 말(馬)의 갤롭 소리를 무대의 배경으로 사용할 때에는 선배들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으나

 바그너의 유산인 반음계법에서는 선배들보다 훨씬 변화가 많은 무한화성적 연주를 가능케 했다. 조성이 단번에 확립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령 완전화음으로 시작하더라도 그것은 즉시 버려졌다가 고의적으로 되돌아온다.

가령 기도 Gebet(뫼리케 시집 제28번)의 전주에서는 완전화음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반음계(기도에 앞선 영혼의

고뇌) 뒤에 개입되므로 돔형 천정의 높은 곳에서 대성당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위대한 독일 치클루스 위대한 리트 시대는, 후고 볼프에게 있어서는 뫼리케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의 열성은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슈바벤 지방의 작은 도시의 온후한 목사 뫼리케(180475)는 영혼의 평안함과 겸손한 만족을 지닌, 그리고 약간은 눈에 뜨일 정도의 유머러스한 시인으로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Heinrich von Kleist처럼 충격적인 작가를 좋아했던 격하기 쉬운 볼프가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왔을까?

표면적인 조용함 속에서 맴돌다가 페레그리나 Peregrina처럼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용암을 볼프는 알아차린 것일까? 이 시의 놀라운 다양성에 마음이 끌린 것일까? 어쨌든 뫼리케에게 볼프는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주었다.

 

그리고 만일 무인도에서 볼프의 작품을 연주한다면 뫼리케편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볼프의 다른 작품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뫼리케의 시가 가장 완전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가장 내면적인 종교적 감정(기도, 잠자는 아기 예수 Schlafendes Jesukind, 크리스마스 트리에 Auf eine Christblume)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유머 (징벌에 Zur Warnung, 이별 Abschied - 이 이별의 후주[後奏]에서는 계단에서 비평가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반주하는 빈 왈츠풍의 색다른 사용방법이 주목된다)에 이르기까지 인간성에 관한 것으로는

이 시에 빠진 것이 없다.

 

 매력(요정의 노래)이 환상으로 가득 찬 드라마(불의 기사[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판, 1892])와 공존하고 있다.

아이헨도르프(1788-1857)는 유명한 표박(漂泊) Wanderlust의 시인으로서 특히 인기가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산업화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생활에 대한 독일혼(이런 말이 생기기 이전의)에 대한 생태학적 항의였다.

 

특히 볼프를 매혹시킨 것은 이 항의하는 측면이었다.

  슈만을 그처럼 매혹시켰던 향수에 가득 찬 노래, 영원히 잃은 과거에 대한 환상은 볼프에게는 적은 부분 밖에 차지

하지 못했다(밤의 마력 Nacht zauber, 향수 Heimweh). 그의 리트의 대부분은 얼마간 경묘하기는 하지만 매우 리드

믹하고 다소 꺾인 가락으로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관에 대한 도전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돈과 명예 또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회의 변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선원, 사기꾼, 음악가, 그리고 시인들, 이른바 히피들의 행렬이다.

황폐한 정원에 조용히 피어나는 꽃처럼 이 가곡집 속에 유일하게 글자 그대로 사랑의 노래인 저 훌륭한 말없는 사랑

  Verschwiegene Liebe이 우뚝 서 있다.

 

 

 

(음악연구 출판사 Musikwissenschaftlicher Verlag/무지크하우스 도블링거 Musikhaus Dobli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