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활
Henri Vieuxtemps
Concerto for Violin no 6 in G major, Op. 47 (Op. posth. 1)
벨기에 태생인 바이올리니스트 앙리 비외탕은 6세에 관현악 반주의 공개 연주회에 나가 청중을 놀라게 한 신동이었다. 피아노 조율사이며 악기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829년부터 부뤼셀음악원에서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베리오에게 배우고 1833년부터 연주 여행을 시작하였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파리 악단에 데뷔하여 19세기 프랑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1846년부터 7년간 페테르스부르크 궁전의 독주자 겸 음악원 교수로 있었으며 1871년부터 3년간 부뤼셀 음악원 교수로 후배 양성에 힘쓰다가 1881년 6월 6일 알제리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6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과 [발라드와 폴로네이즈]가 특히 유명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기교적인 면에서 난곡으로 손꼽히는데 프랑스풍의 기품과 세련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Gerard Poulet, violin
Liege Philharmonic Orchestra
Pierre Bartholomee, cond
대가의 눈에 띈 잠재력 넘치는 소년의 연주
비외탕은 1827년 11월 29일에 리에지(Liege)의 Socie、te、 Gretry 연주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이듬해 초에는 브뤼셀에서 몇 차례 연주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대(大)바이올리니스트인 베리오(Beriot)의 이목을 끌어 그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1829년 5월에 제자를 파리로 데리고 간 스승은 비외탕의 데뷔를 위한 무대를 개최해 주었고,
그는 로드 협주곡 제7번을 연주하여 청중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본 음악회를 지켜본 페티(Fetis)는 비외탕을 ‘타고난 연주가’라 격찬하기도 하였다.
1831년에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까지 베리오는 탁월한 기량을 지닌 제자를 열성을 다해 4년 동안 지도하였다.
독일 연주여행의 성공과 파가니니와의 만남
1833년 비외탕은 늘 엄격한 연습을 고집했던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음악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독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당시에 저명하던 음악가들슈포어(Louis Spohr), 몰리끄(Wilhelm Bernhard Molique), 마이세더(Joseph Mayseder)을 만나고 그들의 음악을 접하게 된다. 비외탕은 순회연주 도중 지몬 제흐터(Simon Sechter)에게 대위법을 배우고, 베토벤과 가까이 지내던 음악가들의 사교모임에 합류하게 되면서 1834년 초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실질적으로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익히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비외탕은 2주간의 연습 끝에 이루어진 1834년 3월 16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 협주곡을 성공적으로 복원시키게 된다. 지휘자이자 비엔나 음악원 학장이었던 란노이(Eduard von Lannoy)는 그의 연주가 ‘독창적이고 참신하면서도 고전적이다’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라이프치히에서는 작곡가 슈만으로부터 그의 연주가 파가니니에 비견된다는 평을 듣는 등 연주여행을 통해 비외탕의 명성이 독일 전역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필하모닉 소사이어티(Philharmonic Society)에서 이루어진 그의 런던 데뷔 무대는 독일에 비하면 그리 열광적인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곳에서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심어주고 당시 런던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 바 있는 파가니니를 만나 음악적 조언을 듣게 된다.
작곡 공부와 러시아 연주여행 재개를 통한 지속적인 발전의 길
비외탕은 1836년 초까지 라이하(Antoine Reicha)에게 작곡을 배우며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스스로 비오티 협주곡의 웅장하고 장대한 형식에 근대의 테크닉적 진보에 발맞춘 화려한 기술을 결합시킨 곡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파가니니로부터의 음악적 영향을 명백히 보여주는 바이올린 협주곡 f#단조(나중에 협주곡 제2번 Op.19로 출판되었다)이다.
라이하 밑에서 작곡 수업을 마친 비외탕은 1837년 유럽을 돌며 연주여행을 다시 시작하였다. 특히 러시아에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1840년 3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근간에 작곡된 「환상 카프리스(Fantaisiecaprice) Op.11」과 제1번 협주곡이 초연되기도 하였다. 첫번째 협주곡의 성공 여파는 브뤼셀에서도 이어졌으며, 1841년 1월 12일 파리에서 베를리오즈는 “훌륭한 독주자로서의 기량이 넘쳐나는 비외탕은 이제 작곡가로서도 그에 못지 않은 명망을 얻고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1841년 4월 19일에 비외탕은 다시 런던을 찾아 무대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런던을 자주 방문하였고, 1845년 첫 시즌부터 베토벤 4중주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1843∼4년, 피아니스트 탈베르크(Talberg)와 함께한 1857∼8년, 그리고 1870∼71년 3회에 걸친 미국 연주여행을 성황리에 끝내었다.
러시아에서 맞이한 비외탕의 전성기
러시아 황제의 전속 궁정음악 연주자로서, 그리고 러시아의 바이올린 연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성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지냈던 1846∼52년의 5년 동안 비외탕은 러시아에서 절찬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4번 d단조를 완성하고, 1851년 12월에 파리에서 연주하였다. 베를리오즈는 제4번 협주곡을 ‘바이올린 솔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장대한 교향곡’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한편, 비에니아프스키가 가장 아끼는 곡으로 유명해진 비외탕의 협주곡 제5번 a단조는 1861년에 완성되었다.
혼신을 다한 후진 양성과 벨기에 악파의 성립
1844년에 비엔나 출신 피아니스트인 요제핀 에더(Josephine Eder)와 결혼한 비외탕은 1855년 프랑크푸르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으나, 1866년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에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게 되자, 그는 해외 연주여행에 몰두하여 그로 인한 성공을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1871년 비외탕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브뤼셀 음악원으로부터 교수 제의를 받게 된다. 그는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전력을 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Eugene Ysa¨ye)도 이 시기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73년에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몸이 마비된 비외탕은 비에니아프스키에게 자신의 교수 자리를 임시로 위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1877∼8년부터는 병세가 호전되어 조금씩 레슨을 재개하게 되었지만, 1879년에는 학교측으로부터 결국 사임 당하게 된다. 병마와 싸우던 그는 2년 후 알제리 무스타파의 한 요양소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비외탕 일가의 가장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앙리 비외탕(Henry Vieuxtemps)은 1820년 2월 17일 벨기에의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4세부터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조율사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르클루(M. Lecloux-Dejonc)를 사사한 그는 6세가 되던 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실력을 선보이게 된다.
의
음악정원에서 보내온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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