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LASSIC

Richard Strauss, Metamorphosen: Study for 23 Solo Strings)

 

Richard Strauss(1864 ~ 1949)

 

 

 

 

Richard Strauss, Metamorphosen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945년 3월 13일부터 4월 12일에 걸쳐서 작곡, 1946년 1월 25일 취리히에서 파울 자허의 지휘로 초연된 <메타모르포젠, 23인의 현악기 독주자를 위한 습작>(바이올린 10, 비올라 5, 첼로 5, 더블베이스 3)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네 개의 마지막 노래>와 <오보에 협주곡 D장조>,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협주곡>과 더불어 80이 넘은 노대가가 남긴 마지막 걸작 가운데 하나다.

처참하게 파괴된 자신의 고향과 전쟁에 대한 비참한 마음을 느린 템포의 악상으로 담아낸 이 작품을 보면 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인 <카프리치오> 이후에도 작곡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은 전혀 노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주의 깊게 들어본다면 폐허가 된 독일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그 형언할 수 없이 쓸쓸하고 참담한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현악 언어로 표현되어 강렬한 설득력과 탐미주의적인 아이러니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943년 연합군이 감행한 대공습 때문이다. 뮌헨 오페라 극장을 시작으로 드레스덴 젬퍼오퍼가 무너지고 베를린의 린덴 오페라 등등이 차례로 화마에 휩싸였는데, 특히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 사이 3600여 대의 폭격기와 1300여 대의 대형 폭격기들이 몇 만 톤 이상의 폭탄을 쏟아 부어 고도 드레스덴을 순식간에 날려버려 폼페이 최후의 날로 만들어버린 것이 작곡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의 아름다운 드레스덴-바이마르-뮌헨, 모두가 끝났다”며 자신의 추억과 꿈이 서려 있는 도시들이 파괴되는 현실에 몹시도 괴로워했다. 이 공습으로 인해 작곡가는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로브 음악사전에는 이 작품에 대해 ‘슈트라우스 자신이 반세기 동안 이끌어 온 독일 음악문화에 대한 비가(悲歌)’라고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1945년 2월 독일 드레스덴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진 후 폐허가 된 모습.

 

 

<살로메>와 <엘락트라>같이 그리스 고전을 통한 에너지와 다이내믹의 강력한 포효를 시작으로 <장미의 기사>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이후 드라마와 음악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해 새로운 극-오페라의 탄생을 이끌어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천성적으로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이며 호기심 많은, 그리고 복잡함을 넘어선 화려함과 단순함을 넘어선 순수함을 동시에 갖고 있던 작곡가이다. 이렇듯 모차르트 이후 최고의 천재로 일컬어진 그에게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1차 세계대전도 겪은 그였지만 당시에는 참호전과 국지전을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진 반면 이렇게 도시 전체와 시민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경우는 없었기에 그 슬픔의 강도는 더욱 컸다.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이라는 단어는 괴테의 시 ‘동물의 정화, 식물의 정화’에서 인용한 것으로 탈바꿈ㆍ변형ㆍ변모ㆍ변성(變性)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작곡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드레스덴을 상징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로 추측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전쟁 교향곡들이나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와 같은 전쟁 음악들이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반영을 그려냈다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은 보다 개인적인 은밀함과 은유적인 간접성이 두드러지며 다른 전쟁 음악들과 대조를 이룬다.

전쟁을 연상시키는 통렬한 심경이나 묘사가 없는 약간은 신비로운 측면을 담고 있어 리얼한 전쟁 음악으로서의 강도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을 겪는 한 개인의 내적인 강렬함을 가장 정제된 형태와 압축된 언어로 담아낸 얼음 속의 불꽃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메타모르포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자신의 도시가 폐허로 변한 변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폐허 위에 미래를 위한 일말의 희망을 심고자 하는 새로운 변형을 염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레스덴의 젬퍼오퍼 오페라 극장은 폭격 후 40년이 지난 1985년에 재건되었다.

 

 

이 음악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의 2악장 장송 행진곡으로부터 인용한 첼로와 더블 베이스의 몇몇 마디들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한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셋잇단음 리듬이 빈번히 사용된다. 이와 동시에 말러의 교향곡 느린악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원하고도 낭만적인 성격과도 닮아 있고, 그 특유의 자유로운 폴리포니적 성격(23개의 악기가 모두 독립된 라인을 갖고 있는)과 자유로운 변주 양식을 연상시킨다.

비통하면서도 명상적인 주제에 가해지는 색다르고 끊임없는 유기적 변형을 담고 있는 이 음악은 정신적으로는 ‘트리스탄’적이지만 마음으로는 절친한 친구였던 말러를 회상하며 결국은 베토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듯하다.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제목과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전쟁의 상흔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인 치유를 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초감각적인 ‘멜로디적인 폴리포니’를 통해 현악 테크닉에 있어서 가장 발전된 승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작곡가의 현대적인 기악 어법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로부터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사이에 벨벳과도 같은 부드럽고 찬연한 사운드로 정화시켜 나가고, 신중하게 선택된 음조를 통해 현혹적이고 ‘아리아드네’적인 화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창조력만이 해낼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이 죽은 다음 일종의 ‘유품’으로 발표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실행되지는 못했고 그 자리는 이후에 작곡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가 대신하게 되었다.

 

 

후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인 그는 근대 독일을 대표하는 최대의 작곡가이며 표제음악과 교향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아버지는 뮌휀 궁정 가극장에서 호른을 부는 단원이었는데,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에게서 최초의 음악 교육을 받았다. 4세 때부터 재능을 보인 그는 6세에 피아노곡과 가곡을 작곡하였다. 16세 때 교향곡 d단조 등 작곡에 진전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모짜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 음악을 숙독시켰는데, 점차 19세기 말의 낭만파 작품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1882년 그는 뭔휀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미학, 문화사 등을 공부하였다. 1883년 그는 베를린에서 그 당시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5년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에게 인정을 받아 마이닝겐에서 뷜로의 보조 지휘자 겸 합창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브람스,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 등의 새로운 음악을 알게 되었으며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1886년 뮌헨 가극장의 제3악장이 되었고, 1889년 바이마르 궁정 지휘자가 되었으며, 1894년에는 다시금 뮌휀, 1898년에는 베를린, 1919년부터 5년동안은 빈 국립 가극장의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1923년에 남 아메리카로 가서 재차 미국을 방문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1932년 나치스 정책은 유대인을 배척하였으며 음악가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그는 처음에 나치스 정권에 협조하여 정부가 설치한 음악국의 총재로 있었는데, 얼마 후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을 말살하고 대신 새 제목으로 작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이를 거부하고 유대인 츠바이크의 대본에 희극 [침물의 여자]를 작곡하였다. 그로 인해 당국으로부터 미움을 사서 1935년에 총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1945년에 독일이 패망하자 그는 나치스 협력자의 혐의로 비난을 받아 작품은 악계에서 매장되어 곤란한 때도 있었다. 그는 생활을 위해 80여세에 런던, 빈 등지에서 지휘봉을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84세의 탄생일을 맞이하는 해에 그는 나치스 숙청 재판소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시금 햇빛을 보게 되어 85세 생일 때는 그를 축하하는 음악회가 각지에서 개최되었고 작품도 연주되어 절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신경질이 있는 반면 완고한 사람이며 정력적인 활동가였다. 그는 어느 파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 환영되는 것도 믿지 않았다. 그는 형식에 중점을 둔 고전주의적인 작곡가였고 젊었을 때는 주로 교향곡과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다시금 그는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의 표제음악의 영향으로 음악을 형식적인 구성에서 해방하고 음을 수단으로 시와 극과 이야기 등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표현력은 대단한데, 라이트 모티브(Leitmotiv)의 기법과 변주법에 의한 기량은 놀랄 만하며 관현악법의 능숙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고전에 대한 애착심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소편성에 의한 기악곡은 주목할 만하다. 가곡 분야에도 200곡 이상이나 되는데, 독일의 예술 가곡 작곡자로서의 비중은 대단하다.

그의 작품은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에서], 교향시로 [돈 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돈키호테][영웅의 생애] 등이 있고 [알프스 교향곡]과 모음곡으로 [서민 귀족], 악극으로 [군트람][불의 결핍][살로메][일렉트라][장미의 기사][그림자 없는 여인][간주곡][이집트의 헬레나][아라벨라][침묵의 여자]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교향시,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많이 있다.

그는 리스트의 뒤를 이어 교향시에 표제적인 내용과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근대적인 작곡 수법을 가미한 작곡가이다. 따라서 [살로메][엘렉트라][장미의 기사] 등으로 바그너가 개척한 악극에 새로운 발전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