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k Satie, Gymnopédies et Gnossie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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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의 ‘짐노페디’와 ‘그노시엔’
Erik Satie
1866-1925
Pascal Rogé, piano
1983.05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겁게 지내려고?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로?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태어나 얼마 안 된 아이일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 불렀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 ―에릭 사티의 일기 중에서
20세기 음악계의 엉뚱한 존재 에릭 사티. 기존 음악계의 신조와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 괴팍한 아이디어, 신랄한 유머, 수수께끼 같은 생활 ― 어쨌든 사티는, 시대를 넘나드는 생각과 기법으로,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 역할을 했다.
AnneQueffelec - Erik Satie, Trois Gymnopédies (1988)
‘짐노페디’
3곡의 모음곡 <짐노페디>(1888)는 에릭 사티의 작품 중 <그노시엔>(1890)과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며, 쉬운 구성과 짧은 형식에 실려 전개되는 선율이 매우 순수하고 투명한 음악이다. <짐노페디>에는 당대의 비난에는 아랑곳없이 한평생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살아간 사티의 면모가 오롯이 드러나 있다. 선율은 단순하지만 야릇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작품은, 처음엔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어 단조롭게 들리나 절제된 선율이 고대의 신비감에 젖어들게 한다. 단조로운 음에 실어 세상 속 고적한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짐노페디>는 하나의 곡상에 의한 3개의 변주곡이다. ‘짐노페디’란 고대 스파르타에서 연중행사로 벌이던 제전으로 벌거벗은 젊은이들이 합창과 군무로 신을 찬양하던 의식을 가리킨다.
Daniel Varsano - Erik Satie, Gnossiennes Nos.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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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시엔’
사티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제목에 희한한 용어를 갖다 붙이곤 했는데, 예컨대 ‘오지브’(Ogive)는 ‘첨두형 아치’를 가리키는 건축 용어를 빌려 쓴 것이다. 그런데 ‘그노시엔’(Gnossienne)은 사티가 자기의 작품 제목으로 쓰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이다. 사티가 만들어낸 단어 ‘그노시엔’은 과연 어디에서 유래되었고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이 단어의 유래를 두고는 두 가지 설이 주장되고 있다. ‘그노시스’ 유래설과 ‘크노소스’ 유래설이다. ▶에릭 사티
‘그노시스’(gnosis, 프랑스어로는 gnose)란 ‘지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종교사상적으로는 ‘영지’(靈知)라고 한다.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는 2세기에 성행했던 사상 조류로, 이것이 초기 기독교 사상에 흘러들어와 영지주의 파를 형성하자 정통파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해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후 영지주의는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가 오랜 세월 동안 은밀히 전승되다 19세기 말의 신비주의 흐름을 타고 유렵 각국에서 교단이 설립되면서 표면화하였다. 1891년 사티는 파리에서 설립된 ‘가톨릭 장미십자교단’의 전속 작곡가 겸 합창단 지휘자로 일하면서 그노시스주의와 연관을 맺게 된다. 바로 이 무렵 그는 <그노시엔>을 작곡했다. ‘그노시스’ 유래설은 이런 배경에서 주장된 것인데, gnose와 Gnossienne은 아닌 게 아니라 철자에서 매우 유사한 점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편 ‘크노소스’ 유래설이 주장된 연유는 이렇다. 크노소스(Knossos)는 크레타 섬에 있던 고대 그리스 미노아 문명의 왕궁이다. 크레타 왕 미노스는 이 왕궁 안에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라비린토스(미궁)를 만들고 우인(牛人)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놓았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전설로만 여겨졌던 크레타 왕궁 터가 발견되었다. 유럽인들은 속속 전해지는 발굴 소식에 열렬한 흥미를 쏟았다. 사티도 물론 큰 관심을 가졌다. 미노타루로스가 포효를 하면 미궁 밖에서 처녀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크게 불러 달랬다고 하는데, 사티가 이 춤곡을 악상으로 환기시켜 곡을 만들고 거기에 ‘그노시엔’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것이 ‘크노소스’ 유래설이다.
‘그노시엔’의 음악적 성격
<그노시엔>은 사티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박관념, 또는 자기도취적인 측면을 잘 표현한 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한 음악의 좋은 예이다. 도입부도 없고 종결부도 없는 음악이며, 때도 없이 시작되고 결코 끝나지 않는 음악이기도 하다. 사티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노시엔>의 악보에도 마딧줄이 없다. 마딧줄이 없는 것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티의 <그노시엔>은 또한 침묵과 통하는 음악이다. 그 침묵은 단순함을 향한 열망이기도 하다. 짧은 악절을 쉼 없이 반복하다 어느새 사라지는 단순하고도 흐릿한 존재감으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따라서 <그노시엔>은 단순한 패턴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현대음악의 중요한 흐름인 시간을 초월한 음악이기도 하며, ‘침묵’과 ‘영원’을 두루 함의하고 있는 미니멀 음악의 선구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노시엔>의 공통점은 저음부의 완전화음 위를 선법적인 색채를 띤 선율 또는 그 단편이 진행되어 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음의 첫째 박자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화음에 의지하면서 일종의 흔들림을 계속 유지하고 연주해야만 <그노시엔>의 묘미를 제대로 살려낼 수 있다.
에릭 사티를 듣는 밤
최형심
에릭 사티를 듣는 밤, 집집마다 마을이 있어 나뭇잎이 서성이는 창밖이 여섯.
음악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고요의 잠복기에 든다.
강의 심연이 한 방울의 빗소리로 내려온다.
강의 밑바닥을 생각하며 자주 눈을 깜빡거려야 할까 하얀 수련과 인연을 다하는 날,
우리는 옆으로 누워 문을 여닫는 수생의 뿌리가 될 것이다.
가난이 낙수 소리 곁에 가만히 앉아
어둠을 건너가는 신발의 무늬를 듣는다.
온밤 내내 비의 풍경에 흔들리는 공중의 마음이나 될까
꿈속까지 엄습해 오는 외딴 섬과 돌 벽 틈새에
맹세를 묻은 이교도와 늙은 천문학자의 무릎으로 나가 소리의 밀거래를 만난다.
우리는 구전(口傳)의 부리를 가졌으나
흑백으로 조우할 수 있는 거리의 망명자가 될 것이다.
적막에 든 편지의 매립지에는 제 살을 벗겨 슬퍼질 수 있는 것들만 있다.
그리하여 긴 안부의 말을 묻기 위해 단어들에 음절이 생기면
정물화 속 흑점은 생멸하는 것들의 고해가 된다.
어깨가 들썩이는 풀빛을 위하여
빗소리의 밖까지 나가 귀를 묻을 때
온종일 문 앞을 서성이는 백발은 오래 흔들린 것들이다.
반복적으로 관절을 허무는 손과 꽃을 말하기에 게을렀던 입을 반성한다.
비로소 네 개의 거울을 빌려 사방이 되는 침묵이 거기 있다면
우리는 음과 음의 입술로 벌거벗은 강을 소요할 것이다
별을 향해 떠나기 전
물질을 서두르는 천공의 한가운데,
나무가 갈라지며 날아오르는 새들의 소리가 고요의 내부를 소등하면
우리는 일찍 잠든 연인의 곁으로 가 밤이 되어야 한다.
―대학신문 2012.10.15일(서울대학교 개교 66주년 기념호)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