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에 작곡되어 1902년 4월 5일 파리의 살 플레이엘에서 열린 국민음악협회 연주회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과 함께 라벨이 가장 신뢰했던 스페인 출신의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Ricardo Viñes, 1875-1943)의 연주로 초연된 <물의 유희>(Jeux d’eau). 라벨은 이 작품을 자신이 사랑하는 스승인 가브리엘 포레에게 헌정하였다. 초연과 동시에 출판으로 이어진 이 작품에 대해 청중들은 열광적으로 칭송했는데,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 바 있다.
“이 작품 안에는 후일 나의 작품에서 계속해서 발견되는 바와 같은 피아노곡 작곡상의 모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나는 이 곡의 영감을 물소리와 폭포, 분수, 시냇물 같은 물이 만들어내는 음향에서 얻었다. 이 곡은 소나타 형식의 2개의 주제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고전주의적 음계 배치에 따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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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피아노 음으로 형상화
이 작품에는 앙리 드 레니에(Henri de Régnier)가 붙인 “강의 신은 물결이 간지럽혀 웃고 있네.(Dieu fluiral riant de l’eau qui le chatouille.)”라는 구절이 서문으로 붙어 있다. 이렇듯 특정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여기에 새로운 테크닉과 상상력을 담아낸 이 작품은 드뷔시가 제창한 인상주의적인 피아노 어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와는 구분되는 라벨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언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물의 유희>에서 라벨이 처음으로 선보인 환기적인 묘사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답은 4년 뒤인 1906년에 초연된 <거울>(Miroirs)에 등장하는 <바다 위의 작은 배>(Une barque sur l’Océan)를 통해 제시된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의 <회기>, 2007년, 캔버스에 아크릴화.
무엇보다도 물을 피아노 음으로 형상화한 이 음악은 물의 음악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리스트의 <순례의 해> 가운데 3년에 포함된 <에스테 장의 분수>(Jet d’eau à la villa d’Este)의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상성부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아르페지오만 보더라도 라벨이 얼마나 리스트를 숭배하고자 했는가를 알 수 있는데, 반면 초고에는 왼손의 화성이 훨씬 두텁게 제시되었다가 출판본에는 이를 대폭 수정한 것을 통해 리스트의 아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어법을 갖고자 고심했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
Sviatoslav Richter plays Ravel 'Jeu d'eau'
Sviatoslav Richter, piano
1964.09.26
뉘앙스의 한계를 이끌어내다
처음 등장하는 주제는 물방울이 떨어지거나 흩날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조용하면서 선율적인 오스티나토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15~16번째 마디부터 등장하는 두 번째 주제는 인상주의적인 5음계로서 수직적인 첫 주제와는 대비되는 수평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5분 정도의 연주시간이 소요되는 이 짧은 작품은 이 두 개의 주제가 소나타 형식의 범주 내에서 자유롭게 제시되고 변형되는 것이 특징으로, 엑스터시를 표현하는 듯한 트릴과 이국적인 느낌을 강조하는 검은건반의 글리산도와 같은 고도의 테크닉을 수반하며 24번째 마디부터 50번째 마디까지 광범위한 발전부를 거친다. 왼손과 오른손을 오가며 주제 선율과 물방울을 표현한 모습들이 등장하다가 음악은 복조성을 사용한 정돈되지 않은 카덴차에 이르고 목가적인 분위기로서 물의 여정을 마무리 짓는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 분수의 솟구침, 그리고 거칠게 흐르는 물의 다양한 소리가 <물의 유희>에서는 잘 표현되고 있다.
한 방울씩 떨어지다가 광포하게 흘러내리고 이내 차분한 잔물결처럼 모아져 아르페지오를 통해 사라져버리는 분수의 물방울들을 거울에 비춘 듯 날카로우면서도 투명한 느낌을 머금은 울림으로 그려낸 이 3부 형식의 <물의 유희>는 작곡가가 자신의 제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블라도 페를레무터(Vlado Perlemuter)에게 건넨 말을 통해 그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오로지 뉘앙스의 한계를 첨예하게 이끌어내야 한다. 마치 물음표가 계속 이어지듯이...”
추천음반
1. 로베르 카자드쥐 SONY
2. 블라도 페를레무터 Nimbus
3. 파스칼 로제 DECCA
4. 알렉상드르 타로 Harmonia mundi
5. 마르타 아르헤리치 DG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