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세 및 히틀러생애 연표, 히틀러의 생애 관련 인물들
히틀러의 생애와 전반적인 세계사 흐름에 대한 연표
히틀러의 생애와 관련된 인물들 조사 1.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 29일 ~ 1945년 5월 1일)
2.헤르만 빌헬름 괴링 (Hermann Wilhelm Goring. 1893년 1월 12일 ~ 1946년 10월 15일)
3.아돌프 오토 아이히만 (Adolf Otto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5월 31일)
4. 발두어 폰 쉬라흐 (Baldur Benedikt von Schirach, 1907년 5월 9일 ~ 1974년 8월 8일)
5.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 (Martin Ludwig Bormann, 1900년 6월 17일 ~ 1945년 5월 2일(추정))
6.요하임 폰 리벤트로프 (Ulrich Friedrich Wilhelm Joachim von Ribbentrop, 1893년 4월 30일 ~ 1946년 10월 16일)
7.롤란트 프라이슬러 (Roland Freisler, 1893년 10월 30일 – 1945년 2월 3일)
8.요제프 멩겔레 (Josef Mengele, 1911년 3월 16일 ~ 1979년 2월 7일)
9. 에르빈 롬멜 (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년 11월 15일 ~1944년 10월 15일)
10.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히믈러 (Heinrich Luitpold Himmler, 1900년 10월 7일 ~ 1945년 5월 23일)
11. 루돌프 발터 리하르트 헤스 (Rudolf Walter Richard Hess, 1894년 4월 26일~1987년 8월 17일) 1.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 29일 ~ 1945년 5월 1일) 나치 독일'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히틀러의 최측근 역할을 했다. 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죽은 후 하루 뒤에 포위된 벙커 안에서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데리고 동반 자살하였다.
나치당의 뇌라고 불릴만큼 나치당의 지식인 이였던 그는 나치당의 제복 대신 양복을 주로 입었고 선전 방법뿐만 아니라 유창한 말솜씨 또한 가지고 있었고 그는 사람들을 선전하다 못해 광신적인 사람들로 만들었다.
특히 그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정치 선전을 했었는데. 정기적인 TV방송으로 선전을 한 것은 세계 최초였다. 그의 선전 방송을 들은 당시 독일 국민들은 패전의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많은 매체들이 홀로코스트에 관해서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대학살이 오로지 나치에 의해서만 진행되었는가? 독일의 극적인 통합 이후 유럽과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점에 대해 그동안의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여러 증언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위에서 말한 '휴고 보스' 사건이고, 스위스 은행들의 나치를 위한 돈세탁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 시기 유럽의 거의 각국에는 나치를 본딴 정당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혐오감 역시 뿌리깊은 것이었다.
대전 발발 후 수많은 독일점령지에서 나치 추종자들이 그들의 주구로 활동했었던 것 역시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미국 회사들도 그들이 나치의 잔혹행위를 통해 이익을 취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익의 내용으로는 노예 노동에서 유대인 재산을 헐값에 사들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사실 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치장치 몇 가지를 감안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 대다수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할 수있다.
단지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암묵적인 지지와 열광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은 순수 아리안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자국의 장애자, 정신박약아 등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좀더 순수한 게르만 혈통을 잇기 위해 그들이 무력으로 점령했던 노르웨이의 여성들과 점령군인 독일 병사들의 성관계를 장려하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아기들을 새로운 천년제국의 주인공으로 키우기 위해 별도로 양육하는 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독일은 커다란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이 와중에 독일의 극우민족주의 정당이었던 나치당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일개 군소정당에 불과했던 나치당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으며 그들이 사실상 전세계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소련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기간 내내 정권을 배앗기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결국 히틀러와 나치당이 단순히 폭력에 의해서만 통치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만 하지 않았더라도 독일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깊은 고통의 나락에 빠졌던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운 국부(國父)로 기억할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총통으로 있던 나치 정권은 총통의 최종학력과 나치당 출생의 한계 덕에 당 고위층에 엘리트라 부를만한 인재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히틀러 개인의 지식인 혐오증도 적지 않이 작용했을 것이다. 괴벨스박사는 나치에서 흔치않은 엘리트출신 수뇌부였다. 그는 또한 최후의 순간까지도 히틀러와 함께 한 거의 유일한 나치당 고위 관료였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아버지가 공장 사무원이었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다섯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괴벨스는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었으나 다리가 굽었기 때문에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징집관은 그의 다리와 작은 체격을 보자 그의 앞에서 크게 웃어댔다.
훗날 그의 정적들은 이것을 악마의 갈라진 발톱과 절뚝이는 걸음걸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괴벨스는 문학·연극·언론계에서 거의 무보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정치적 활동에 몸담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패전으로 인해 더욱 뜨겁게 달궈진 시대의 민족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시절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만나게 이에 경도된 듯하다. 그는 나중에 상류계급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계속 반(反)부르주아적 태도를 지켜나갔다.
나치의 악명높은 반유대 정책이 있었지만 괴벨스의 경우엔 처음부터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던 듯 하다. 왜냐하면 그가 존경했던 스승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고, 그 자신이 사실상 유대인이었던 반(半)유대계 소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괴벨스는 어엿한 박사 출신이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문학과 역사, 철학을 공부한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문사철(文史哲)을 두루 갖춘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다. 괴벨스는 문장에 능했다.
<마하엘> 같은 소설을 여러 편 썼고 이를 유명 출판사에 보내 출판을 의뢰했지만 역시 외면당했다. 그때 괴벨스는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제로다. 그러나 위대한 제로다.
”, “결국 자본주의 아래서 노예로 일생을 마치기보다는 차라리 볼셰비즘 밑에서 평생을 바치는 편이 낫겠다. ”1922년 6월 괴벨스는 히틀러를 처음 만났고, 곧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히틀러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는 나치당이 반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당과 히틀러는 반자본주의 정책 같은 걸 취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괴벨스는 히틀러 당수를 '쁘띠 부르주아와 히틀러'라며 비난했다. 그것이 오히려 히틀러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정확히 구현해낼 수 있는 재능을 그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천부적으로 달변이었던 그는 이내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의 엘버펠트 지구 사무장이자 격주로 발행되는 국가사회주의 잡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히틀러는 1926년 11월 괴벨스를 베를린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는 29세 때 자기를 인정해준 사나이 앞에 섰던 마음을 이렇게 일기장에 고백했다. “그는 37세다. 아돌프 히틀러 …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그래, 나는 이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제3제국의 건국자는 이런 모습일 것이다."
NSDAP, 즉 나치당은 바이에른에서 창당되어 발전한 것으로 수도 베를린에는 당조직이 없었다. 괴벨스가 베를린 지구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NSDAP의 좌익인 반자본주의파 그레고르 슈트라서와 '우익'인 당총재 아돌프 히틀러 사이의 대결에서 현명한(?) 선택을 한 덕분이었다.
괴벨스는 내면의 신념과는 반대로 히틀러를 지지했다. 담대하고 위험을 피할 줄 모르는 성격인 괴벨스는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할 때까지 베를린에서 나치 세력을 강화해갔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당의 행사 및 시위의식을 제정하고 정력적인 연설을 행함으로써 독일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괴벨스는 이로서 새로운 악칭을 하나 더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디어 조작', '상징조작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정치가로서의 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뜬 그는 미디어 조작을 통해 단 시간 내에 독일 국민의 정신을 지배했다.
괴벨스는 편집자와 기자들에게 어떤 뉴스는 발표하고, 어떤 뉴스는 잘라버리고, 어떤 뉴스는 어떻게 쓰고, 어떤 제목을 달고, 어떤 행사는 취소해야 하고, 어떤 행사는 개최토록 하며, 그날의 논설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지시했다.
또한 이런 지시가 잘못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말로 명령하는 것 말고도 매일 한 편의 서면지시를 했다. 아주 작은 지방의 신문과 간행물에 대해서까지도 전보나 편지로 지시를 내려보냈다.
이런 언론통제는 독재정권에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마술사요 선전의 천재였다.
다른 나치 당원들과는 달리 한번도 당 제복이며 군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저 '박사'라고 불렀다. "선전은 정신적 인식을 전할 필요도 없거니와 점잖을 필요도 없다.
성공에 이끄는 것이 좋은 선전이다." 그는 온갖 매스미디어의 기술을 총동원해가며 현대 대중선동의 기본과 선전의 무서운 효과를 처음으로 보여준 교과서였다.
괴벨스는 영화보다는 라디오에 먼저 주목했다. 영화에 비해 라디오는 그 속보성으로 인해 당대 매스미디어의 총아로 부각하고 있었고, 선전 전문가로서 그의 동물적 후각은 라디오의 이런 기능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라디오 보급을 위해 34-35년엔 국가 보조금을 사용하여 노동자들의 일주일분 평균 급료인 35마르크만 있으면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게 했다. 세계에서 가장 싼 라디오였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괴벨스는 국가선전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국민계몽선전부'가 그를 위해 만들어졌고 신설된 제3제국의 '문화원' 원장도 겸임했다. 그의 취임 일성은 "국민 정신 함양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문화원 원장으로서 선전은 물론 언론·연극·영화·문학·음악·미술계까지 손을 뻗쳤다. 그러나 국외선전·출판·연극·문학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통제권만을 행사했는데, 그 이유는 관할권을 놓고 심한 마찰을 빚은 까닭이었다.
그는 음악이나 미술을 규제하는 데는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교육과 같은 영역에까지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지는 못했다.
괴벨스의 문화정책은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나 극단적인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압력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선동은 청중의 귀를 마비시킬 따름이라는 논리 때문에 선전 메시지들조차 제약을 받았다.
괴벨스는 교조주의보다는 효율성을, 원칙보다는 편의를 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나치가 벌인 희대의 폭거 가운데 하나는 1933년의 분서사건과 그해부터 시작돼 37년 ‘퇴폐미술전(Entratete Kunst)' 으로 정점에 이른 현대미술 탄압사건이다.
1933년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뮌헨에 '독일예술의 집' 건설을 생각했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것은 소위 '국가주의 리얼리즘'(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다.)을 고취하고 독일의 자유로운 예술의 숨통을 막아버리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괴벨스는 히틀러 정권의 선전상이 된지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3년 3월 13일 괴벨스는 독일의 모든 대학에서 괴벨스의 지휘 아래 이른바 '독일정신에 위배되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케스트너 등 131명의 책이 소각되는‘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1937년의 퇴폐미술전은 어찌보면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 까닭은 여기 포함된 화가들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대개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영화의 적 1위'라 부르며 모든 프린트를 소각시키라고 지시했던 <커다란 환상 La Grande Illusion> (1937, 감독: 장 르누아르) 프린트가 발견된 곳은 46년 뮌헨에서 였던 것처럼 괴링을 비롯한 나치당의 수뇌부는 뒤로 그런 예술품들을 몰래 수집하여 그들의 지하창고에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코코슈카(기법적 연습의 결여), 에밀 놀데(흑인풍, 야만적, 신앙적이지 못함), 오토 딕스(독일 전통예술을 훼손한 죄), 게오르그 그로츠(볼셰비키 예술), 막스 베크만(아나키즘),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미풍양속 훼손), 에리히 헤켈, 칼 슈미트 로도로프, 조각가 에른스트 발라하(기괴, 왜곡, 변형이 심한 예술, 독일민족정신 훼손),
쥴 파스킨,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수틴, 카슬링(유태계 예술인),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라이오넬 파이닝거, 바실리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 바우하우스 교수진(정신병원의 낙서, 어린애 장난에 속하는 풍자화) 등의 죄목이었다.
그들은 '렘브란트'조차도 말년에 유태인촌에 거주했다는 이유로 기피했다. 독일 시인 하이네가 “책을 태우는 곳에서는 장차 사람도 태울 것”이라고 한 말은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을 일으키기 100년전에 한 말이다.
이렇듯 괴벨스와 나치는 오늘날 우리가 중등학교 미술 교재에서까지 자주 인용되는 현대미술가들을 ‘박멸대상’으로 몰아갔다. 이 전시는 이듬해 뮌헨에서 함부르크 등지로 이어졌는데, 많은 날은 관객이 하루 4만명 이상 몰려 잔인한 조롱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런 나치의 박해를 피해 브루노 발터, 클라라 하스킬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오스트리아로, 프랑스로 망명생활을 하다 결국 서유럽이 그들의 군화발에 짓밟히자 영국과 미국 등지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미처 도피하지 못했거나 차마 떠나지 못한 많은 예술가들(푸르트벵글러, 케테 콜비츠)이 전쟁 기간 동안 갖은 박해를 견뎌야 했고 전쟁 후에는 연합군에 의해 전범 취급을 받아야 했다.
물론 카라얀 처럼 그 시기를 출세에 이용한 이들도 있었다.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괴벨스의 영향력은 1937-38년 사이에 다소 약화되었는데 이 시기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책임자가 할 일이 별로 없었던 탓도 있지만 대전 초기 무적 독일군의 신화의 상당 부분은 괴벨스의 선전필름에 의한 것이 많았다.
실전에서 독일군의 기계화 진척도는 당시 알려진 만큼 상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괴벨스에 의해 널리 유포된 선전 필름에 의해서 독일군의 전격전은 신격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여 전세가 역전되면서 괴벨스는 비로소 패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보일 수 있었다.
괴벨스 직접 돌아다니면서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선전활동에 주력했고 그것은 대중의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유력한 나치 간부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버린 한참 뒤에도 괴벨스는 대중 앞에 끊임없이 다가서는 용기를 보였다.
이때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그때까지 극히 부정적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시켰다. 괴벨스의 활동은 특히 후방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바야흐로 총력전의 주창자가 되었다.
1945년 5월 1일 괴벨스는 베를린의 포위된 벙커(일명 '늑대굴') 안에서 초창기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심복으로 히틀러를 보좌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직후 자살하자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 먼저 죽이고 뒤이어 동반자살 함으로써 가장 소름끼치는 잔혹극의 연출을 마쳤다. 전날 그는 히틀러의 뜻에 따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2.헤르만 빌헬름 괴링
(Hermann Wilhelm Goring. 1893년 1월 12일 ~ 1946년 10월 15일) 내무장관 역임, 게쉬타포 창설자, 독일공군 원수, 사령관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1893년 1월 12일 바이에른의 로젠하임에서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대인 대부(代父)인 리터 폰 에펜슈타인 헤르만 덕분에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나는 최후의 르네상스인'이라는 발언을 한 것이나, 미술품과 같은 것을 좋아헀던 것도 어린 시절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직업군인으로 훈련받은 그는 공군이 되어 1차 세계대전 때 무려 22기의 적기를 격추시켰던 대단한 활약을 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까지만 해도 요즘 말로 소위 '엄친아'였다. 그는 명문가 출신에 잘나가는 공군 에이스에다 미남이었다. 때문에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 그는 처음 1921년에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서 1922년에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에 가입했다.
그는 진심으로 히틀러가 독일 민족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믿었다. 괴링의 대중적 인기와 재산은 히틀러에게도 도움이 되어, 서로에게 좋은 파트너가 되었다. 1922년 10월 28일,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이 로마로 진군한 것이다. 이것은 쿠데타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에마누엘레 3세는 그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고, 쿠데타는 피를 흘리지 않고 성공했다. 여기서 영향을 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폭동(비어 홀 폭동)을 일으켰고, 괴링 역시 당연히 참여했다. 그러나 폭동은 실패했고, 히틀러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괴링은 오스트리아로 아내와 함께 도망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다리에 크게 상처를 입어 고통을 누르기 위해 진통 효과가 있는 마약 모르핀을 사용하게 되었다.
괴링은 곧 심한 마약 중독에 걸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살이 찌기 시작한 것이다. 1927년에 그는 귀국하여 나치당 지도부의 자리로 돌아왔고, 1932년에는 국회의장이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 주의 내무장관을 지낼 때 프로이센 경찰을 나치화시키고, 비밀 경찰로 악명높은 게슈타포를 창설했다. 그쯤에는 나치가 정권을 잡았을 때였다.
괴링은 공군 원수가 되었고, 1940년에는 히틀러에게서 '제국 원수'라는 특별한 직위까지 임명받았다. 또한 1945년까지 항공부 장관, 산림부 장관, 4개년 경제 계획부 장관을 겸임했다. 괴링의 공군은 폴란드 공격 때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영국을 공습할 때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항속 거리 등 여러 문제점으로 격퇴되고 말았다.
게다가 독일이 폭격당하면 자신은 개자식이라는 발언을 했지만 영국 공군이 독일을 폭격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파울루스의 6군에 공군만으로도 충분한 보급품을 보낼 수 있다고 했으나 항공기 수가 모자라 그것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히틀러나 괴벨스같은 난해한 사람들과는 달리 푸근한 인상에 재치있고 인간적인 그는 나치 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그는 군사적으로는 무능했지만 다른 면은 봐줄만 했다.
독일이 위기에 처하고 베를린이 위기에 처했을 때 괴링은 히틀러에게 자신에게 총통의 자리를 넘기기로 한 약속을 재확인하기 위해 전문을 보냈으나 패색이 짙어져 굉장히 예민한 상태의 히틀러에게는 반역으로 보였고, 그는 해임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괴링은 스스로 미군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21명의 피고 중 가장 높은우두머리로서 재판에 임하게 되었다.
그는 익살스러워서 연합군의 여러 장교나 병사들과 친해질 정도였다. 또한 다른 피고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해서 그들을 뒤에서 조종했다. 괴링은 재판정에서 좌중을 압도했다.
괴링은 연합군 각국 검사들로부터 공격받을 때마다 재빠르게 방어하고, 심지어 반격까지 해서 그들을 눌렀다. 그의 진면모는 독일 수뇌부일 때가 아니라, 재판받는 피고일 때 드러난 셈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국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군인에게 어울리는 총살형을 요구했지만 이는 기각되었다. 결국 사형 전날 밤인 10월 15일, 청산가리를 사용해 자살하고 말았다.
영국의 저명한 전사가 밥 캐러더스는 “괴링은 지구 역사를 통털어 제일 멍청했던자가 제일 높은 독일 제3 제국의 제 2인자 자리까지 올랐었던 아이러니했던 인물으로서 한마디로 전세기에 보기 힘든 희안했었던자 였다.”라고 말 했다. 괴링은 곧잘 무능력한 돼지같은 자로 불렸으며 2차대전 독일 지휘관중 그만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없다. 히틀러의 제1후계자로 선택받았던 헤르만 괴링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곧잘 "오늘도 어제도 나는 변함이 없다. 나는 언제나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다." 라고 했다. 또 거창하게 폼을 잡는 게 그의 특징이었다.
1940년 프랑스가 허무하게 손을 들고, 38만 (혹은 30만) 연합군은 덩케르크 해안에 총이고 차고 몽땅 내다버린 뒤 몸만 간신히 영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영국에 "우리 독일이 유럽의 지배자임을 인정한다면, 대영제국의 존재를 용인하겠다"라는 통첩을 보낸다.
그러나 이는 영국에게 굴욕적인 통고였고,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박살내기 위해 공군에게 영국의 예봉을 꺾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2,500대의 전투기를 가진 독일과 650대의 영국. 그것도 한달 안에 크게 늘린 수를 가진 영국의 전력차는 거의 4:1에 달했고, 이러한 숫적 우세를 앞서운 독일은 7월과 8월 동안 영국을 마구 두들겨댔다.
이러한 소모전에 영국 공군이 서서히 지쳐갈 무렵, 작은 사건이 일어나는데, 야간 폭격에 들어간 독일 폭격기 부대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것은 히틀러를 크게 자극했고, 괴링 원수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 그리고 잘못된 전과보고로 인해 독일 공군은 거의 다잡은 영국 공군을 내버려두고 런던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이건 결정적인 실수였다. 게다가 폭격기 부대의 손실이 급격히 늘어나자 괴링은 전투기 조종사들을 "겁쟁이들"이라고 몰아붙이면서 폭격기 편대에 근접 엄호를 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한다.
결국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왕립공군과 연합군은 독일 공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잔인했던 두달을 버티어 낸다. 결국, 이 전투는 나치 독일의 몰락을 알리는 전주곡이 된 셈이었다. 훗날 연합군이 유럽 침공을 위해 모인 집결지가 바로 영국이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과의 영국 본토 항공전 (Battle of Britain)에서 독일 공군 사령관으로써의 무능함에 의해 작전 실패로 영국에 대패한 형태를 보여준 것이나 소련군에 의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었던 30만명의 독일 제6군에 대한 공중 보급품 수송에 문제없다고 히틀러에게 호언 장담한 형태를 보면 자명하게 느낄 수 있다.
어릴적부터 반항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던 괴링은 1차대전이 벌어지자 공군 조종사로 지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모한 공격성을 비판했음에도 그 덕분에 그는 빠르게 진급했고 많은 격추수를 올릴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한 독일의 공군이 해산되자, 그는 원치않게 일시적인 민간인 생활로 들어갔다.
나치당이 집권하자, 1932년에 국회의장에 임명된다. 그는 이 자리를 1945년까지 유지한다. 그리고는 1933년 항공장관 취임. 2차세계대전 개전. 폴란드 침공 즈음. 그의 공군(루프트바페)는 대성. 활약한다. 그러나 이후 거듭되는 무능력함을 보여주기 시작하더니 결국 독일공군을 괴멸시켜 버린다. 덕분에 항공엄호를 받지 못한 독일의 지상군과 해군도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괴링은 독일의 패전 요인이기도 했다. 괴링을 처음 본 히틀러는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의 외모는 매력적이었고, 독일 최고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그의 이런 프로필은 대중에게 써먹기 아주 좋은 것이었다. 또한 사업에 능했던 괴링의 재력은 히틀러의 정치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괴링은 나치스 돌격대(SA)의 지휘관이 되었지만, 나치즘 활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괴벨스는 언제나 괴링이 숭고한 나치즘의 이상에는 관심 없고 재물에만 관심있다고 혐오했다. 그는 간부로써의 의무와 활동보다는 높은 직위에서 오는 편안함을 더 즐겼다.
뮌헨 폭동이 실패한 후 부상을 당한 그는 통증을 억제하기 위해 헤로인 아편 약물에 의존했고 그 결과 모르핀 중독에 빠졌다. 그의 모르핀 중독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뮌헨 폭동 관계자들이 사면되자 괴링은 히틀러와 함께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전쟁영웅으로써의 면모는 히틀러가 고위층과 접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히틀러에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면담할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독일 대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아내 당의 재정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그는 히틀러와 함께 권력의 최상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다. 히틀러는 괴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충실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헌신적이고 신뢰할 만한 인물임을 인정했다. 괴링은 정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그 자리를 차지하여 제국에서 가장 많은 직책을 겸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분명 반유대주의자였고,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이끈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인종주의 수준은 히틀러나 히믈러, 괴벨스에 비해 여전히 불명확하다. 그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유태인(예를 들면 예술품 거래상) 들에게는 신변을 보장해주었으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과 친한 유태인에 관해 도움을 청해올 때면 곧잘 특권을 발휘해주곤 했다. 여러 사례를 볼 때 그는 다른 간부들 처럼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히틀러를 따르는 의무로써 인종주의 정책을 실행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 큰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다 사면하고 시민권을 준다고 결정했다 하더라도 괴링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유태인을 친구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유태인과 독일인은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고 선을 명확히 긋고 있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괴링은 공포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 체코 합병 때 그는 혹시라도 전쟁이 날까봐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는 연합군과 다시 전쟁을 벌이는 짓은 무모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독일군이 연합군에 승리할까 의문이 있어서일 수도 있고, 더 현실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자신이 얻은 많은 것을 조금이라도 잃을까봐 그랬던 것이다.
폴란드와 전쟁이 시작되자 괴링은 히틀러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개전 후 괴링은 히틀러와 다른 외교적 견해를 가진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히틀러에 결코 반대하지 못 했기 때문에 자신의 불안감을 속에 끌어안고 안절부절했고 침울해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그의 어께를 토닥여주며 격려의 한마디만 해주면 금방 기쁨에 넘쳐나며 활기가 돌았다. 히틀러가 죽기 직전까지 이런 패턴은 반복되었다. 군사전략가 로써의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괴링을 내칠 수 없었는데, 괴링이 대중과의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괴링 스스로도 주장했듯, 히틀러는 민중의 신이었지만 민중은 사실 극도로 이데올로기적인 히틀러를 어려워했다. 히틀러를 정말 이해하고 따르고 있다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생각을 가진 선지자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 반면 괴링은 나치 정권의 ‘아이돌’이었다. 그는 붙임성이 좋았고 전쟁영웅이란 타이틀도 있었으며 기사도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속물이기는 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괴벨스나 히틀러와 달리 훨씬 인간적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했고, 심지어 뉘른베르크에서는 몇몇 연합군 장교와 병사들과도 친해졌다. 그런 괴링을 내친다는 것은 히틀러의 대중기반 중 상당부분을 내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괴링을 혐오했을 테지만, 괴링이 히틀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듯, 히틀러도 괴링을 버릴 수 없었다.
제3제국의 최후가 다가왔을 때, 괴링은 제국의 2인자, 제국원수의 자격으로 히틀러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하는 전문을 쳐 히틀러의 마지막 분노를 샀다. 사실 괴링은 괴벨스와 달리 히틀러를 신의 경지까지 올리지는 않았고, 현실주의자 괴링은 어디까지나 히틀러 또한 인간이며 언젠가 힘이 다할 때가 될 것이므로 제국의 순조로운 승계를 위해 응당의 요구를 했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요구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노이로제 상태에 빠진 히틀러에게는 또다른 패배주의나 모반 혐의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낭만적인 면모를 고수했으며, 언젠가 자신들이 순교자로써 추앙받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살하기 전날 그는 “50년 혹은 60년 뒷면 독일 전역에 헤르만 괴링 동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약간 머뭇거리던 그는 마저 이어서 말했다.
“아마 동상은 없을지 모르나, 내 초상화는 집집마다 걸려있을 것이다.” 여타 나치 간부들을 능가하는 정치외교적 수완과 비록 속물이라 혐오 당했지만 현실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그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그가 히틀러의 전쟁 명령을 거부하고 독일의 1인자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 없는 괴링은 무모한 전쟁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반유대정책 또한 학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군주에 충성한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낭만주의자 괴링은 절대 히틀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조차 공동수감 죄수들에게 히틀러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조장하기까지 했다. 히틀러가 죽은 뒤 자신을 제국의 1인자로 칭하면서도 히틀러를 비난하는 것만은 피했던 것은 독특한 점이다.
3.아돌프 오토 아이히만
(Adolf Otto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5월 31일) SS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가 수행한 전쟁, 즉 유대인과의 전쟁이 끝난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경찰에게 “나는 결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에서 유대인의 씨를 말리려는 히틀러의 목표를 마치 일생의 과업인 양 수행했다. 이미 패전한 것이나 다름없던 1944년 여름까지도 아이히만은 여전히 학살 대상자들을 열차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분투하였다.
아이히만은 폭력의 행사가 아니라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학살 주모자였다. 그는 희생자를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었다. 아이히만의 진술에 따르면, 만일 그에게 명령이 떨어졌다면, 그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라도 맹목적이고도 광적으로 살해했을 것이다.
평범했지만 사악했던 이 죽음의 관료는 특별한 인물은 아니었다. 수백만 명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유대인 부서”는 처음에는 추방을 담당하는 주무 부서였지만, 이후 자연스럽게 유대인을 제거하는 주무 부서로 바뀌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수송 체계를 조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냉정하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일을 처리했다. 민족 말살을 계획하고 준비했던 반제회의 이후, 아이히만의 죽음의 열차는 밤낮으로 강제수용소로 향했다.
대량 학살에 맞추어 기차시간표를 짜면서, 제국철도와 가장 큰 고객이었던 아이히만은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아이히만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꼼꼼하게 죽음의 열차가 정확하게 출발하고 도착하도록 신경을 썼다. 출발과 도착이 지체될 조짐이 보이면, 이 관료는 흥분상태에 빠지곤 했다.
아르헨티나 망명 중에 그가 한 발언에 의하면,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차 운행 시간이 지연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국철도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다른 열차의 지연에 대한 책임이 내게 전가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전선에 증원군과 보급 물자를 보내기 위해서는 제국철도에서 쓸 수 있는 모든 기차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다른 곳에 투입되었다. 아이히만은 제국철도로부터 언제나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헝가리에서 이 유대인 학살자는 자신의 “필생의 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중령님, 몇 명이 죽었습니까?” 1944년에 한 젊은 나치 소위가 그에게 물었다. 아이히만은 “5백만 명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대해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겁니까?”
그러자 아이히만은, “수백 명의 죽음은 일종의 재앙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일종의 통계다”라고 대답했다. 히믈러가 1944년 8월 말에 모든 헝가리 유대인의 강제수용소 이송을 금지했을 때, 아이히만은 분개했다. 독일이 설사 패전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유대인과의 전쟁에서는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의 한 “동료”가 회상하기를, “그가 원했던 가장 큰 보상은 언젠가 히틀러가 유대인 말살에 대해 감사의 말을 건네며 그를 영접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가슴 아파했다.”
그는 그의 상관인 게슈타포 뮐러로부터 마지막 칭송을 받았다. “우리에게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50명만 있었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했을지 모른다.” 이스라엘 첩보 조직인 모사드가 아르헨티나에 망명 중이던 그를 예루살렘으로 납치해 왔다.
물론 그는 재판에서 기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것은 명령만을 따르는 군인다운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했으며, 심지어 유대 민족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납치되기 6년 전에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유대인을 독가스로 죽이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더라도 나는 그 명령을 수행했을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로 납치한 유대인 정보 요원들을 차갑게 쏘아보면서, “너희들 모두 곧 나를 뒤따르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태연히 교수대로 걸어갔다. 이 전범에게도 그의 희생자들에게 행해진 것과 똑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유해는 지중해에 뿌려졌다.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4. 발두어 폰 쉬라흐
(Baldur Benedikt von Schirach, 1907년 5월 9일 ~ 1974년 8월 8일) 나치 청년단의 지도자. 히틀러 유겐트(HJ)의 우두머리와 빈의 대관구장(Gauleiter), 제국지사(Reichsstatthalter) 역임.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인 발두어 폰 쉬라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했다. 쉬라흐는 열광적인 나치당원은 아니었다. 그는 괴벨스 같은 극악무도함, 멩겔레 같은 잔혹함, 아이히만 같은 회계적인 철저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라면, 허세도 부리고 아양도 떨었다. 바이마르 출신으로 처세에 능하고 명민했던 그는 히틀러를 주저 없이 괴테와 비교하여 부르고는, 스스로 불러낸 정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마법사 제자” 역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쉬라흐에게도 다른 선택을 할 여지는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부유한 월스트리트 은행가인 그녀의 오빠가 1920년대 후반에 젊은 발두어에게 그의 회사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쉬라흐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쉬라흐는 영혼의 포획자인 히틀러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총통 각하! 언젠가 독일 역사상 가장 큰 청소년 조직을 당신을 위해 육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
쉬라흐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보다 병적으로 한 가지에 빠져드는 괴짜에 가까웠다. 그는 청소년을 꾀어 모으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 솜씨는 형편없었다. 쉬라흐가 청소년을 모은 방법이라고는 히틀러의 이름을 판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쉬라흐는 히틀러를 선전하는 모든 기법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쉬라흐는 “총통” 우상화를 시작한 괴벨스보다 더 적극적으로 “총통” 숭배 의식을 거행했다. “당신은 독일의 미래이기 때문에, 당신만이”라는 구호를 통해 그는 청소년들에게 섬뜩하면서도 멋진 느낌을 경험하도록 했는데, 이는 단원 선서 의식의 일부였다.
쉬라흐는 청소년들에게 그들이 아주 특별한 존재이고, 훗날 “강대국 독일”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믿게끔 만들었다. 소년들에게는 “우리는 총통에게로 행진할 것이다. 그가 그것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 행진할 것이다”라는 목표가, 소녀들에게는 “너희들은 새로운 종족의 어머니들이다”라는 목표가 있었다.
물론 실제 목표는 “총통을 위한 총알받이”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폴란드 침공에서 볼 수 있듯이, 쉬라흐의 교육 방법은 결실을 맺고 있었다. 여러 해에 걸쳐서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원들에게 애국심과 전투 준비, 명령에 대한 복종과 희생 의지를 전파하였다.
히틀러는 반년 동안 군 복무를 수행한 쉬라흐를 빈의 대관구 관구장으로 임명했다. 이미 그곳에서는 합병에 대한 낙관적 분위기가 사라져버린 상태였고, 흥분이 고조된 “오스트마르크 군”과 “프로이센 군” 사이에 간헐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쉬라흐는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갈등을 봉합하고 당을 대표하는 일을 그곳에서 수행해야 했다. 그는 그 일 역시 성공적으로 해냈다.
유럽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동안, 쉬라흐는 낭독회, 오페라 초연과 연극 주간을 개최하였다. 빈에서 전쟁은 이미 먼 나라 이야기였다. 다만 홀로코스트가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쉬라흐는 광적인 유대인 혐오자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의식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생각했다.
지도부에서 유대인 “배척”이 계속 진행되고 비인간적인 계획들이 실행되었을 때, 이 문화 애호가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렇지만 쉬라흐는 권리 침해나 나쁜 행위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반대로, 그는 일찍부터 유대인 강제 추방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빈은 “유대인 없는” 도시가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로 유대인 추방이 진행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소도시로의 이주”였으나, 실제로는 가스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쉬라흐의 부인인 헨리에테가 오버잘츠부르크의 모임에서 네덜란드 유대인 여인들에 대한 취급 방식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았을 때, 히틀러와의 좋은 관계는 다 끝나버렸다. 쉬라흐 부부의 결혼식 증인이었던 히틀러는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소리치며, “당신은 증오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여태껏 히틀러가 그렇게 진노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에 대해 결국 가족이 공동으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인 쉬라흐도 당황하며 속죄를 청해야 했다. 그의 숙적이었던 괴벨스는 흐뭇해하면서 “히틀러는 쉬라흐를 결코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일기장에 그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2년 동안, 쉬라흐의 심리 상태는 결국 전쟁에 패할 것이라는 어렴풋한 인식으로 체념 상태에 빠져 있거나, 그와 반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금 히틀러의 총애를 얻고자 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상태를 오가고 있었다.
쉬라흐는 결코 비인간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기회주의자였을 뿐이었다. 종전이 가까워 오자 대관구 관구장이었던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원들을 전쟁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향토방위대의 투입을 명령했으며, 최후에는 나이 든 남성과 미성년자마저도 전쟁에 투입할 것을 지시했다.
쉬라흐는 그 자신이 시구에서 칭송했던 청소년단원들을 빈, 브로츠와프, 베를린 전투에 투입시켰고, 그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5.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
(Martin Ludwig Bormann, 1900년 6월 17일 ~ 1945년 5월 2일(추정)) 히틀러의 부관
히틀러의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히틀러의 마지막 몇 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인물이다. 마지막에 히틀러는 그를 “가장 충실한 동지”라고 불렀다. 그는 항상 “제3제국”의 막후 실력자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그런 자들을 간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바로 그 모습 때문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보어만에게는 권력만이 주된 관심사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남으로부터 빌린 권력이었다. 이 권력을 얻고 행사하기 위해 그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히틀러에게 복종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권력자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한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독재 정권 하에서 이상적인 출세주의자가 갖춰야만 하는 성격들을 모두 갖춘 그는 아랫사람에게는 잔인했고, 윗사람에게는 비굴했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적이었으며, 냉혹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끈기 있고 부지런했으며, 교활한 음모를 꾸미는 술책가이기도 했다. 보어만은 서류 업무들을 처리했다. 그는 항상 주머니 속에 메모 노트와 필기도구를 갖고 다녔다.
그는 모든 지시 사항과 질문들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느닷없이 내뱉은 발언까지도 부지런히 기록했다. 히틀러가 식사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 기록들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식으로 열심히 기록한 비서 덕분이다. 보어만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을 강구했다.
하지만 “제3제국”에서는 법이 안전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허울뿐인 법조문이 안전을 담보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비록 의미 없이 던진 말이라도 히틀러의 말이라면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비밀리에 기록한 독재자의 발언들을 통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가 어떤 의중을 가지고 있는지 예측하고자 노력했다. 히틀러가 갑작스럽게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할 때, 메모를 통해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보어만의 부하들은 비록 한밤중일지라도 그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지시 사항이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보어만은지체 없이 전력을 다해 그 지시 사항을 처리했다. 보어만에게 명예와 명성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총통”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는 보어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한,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보어만이 히틀러를 필요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그 열성적인 비서가 필요했다. 보어만은 히틀러의 장막이 되어 그가 더 이상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감추어 주었다. 보어만은 히틀러가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통제했다.
그는 정치, 특히 이데올로기와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고 야비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세계관이 개입되는 정치나 이데올로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어만의 장점은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지 “머리를 써서 계획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보어만에게 종교가 아니라 단순한 개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애정 행각을 위해 나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악명 높은 바람둥이는 자신의 일탈 행위를 당의 요구라고 정당화시켰다. 그 요구에 따르면, 향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줄여 나가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독일 남성들이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했다.
히틀러의 그림자였던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협력했다. 그는 자발적인 집행인들에게 “총통”의 의지를 전하는 사자(使者)의 역할을 했다. 또한 히틀러에게 집행인들에 대한 온갖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의 역할과 집행인들이 누구를 처리하고 무슨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잊지 않도록 감시하고 도와주는 기억 장치로서의 역할도 했다.
종전되기 2년 전부터 보어만은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그는 정적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거두기도 했다. 또한 정적들을 칭찬하기도 하고 제거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히틀러의 발언을 금과옥조인 양 비장의 카드로 사용했다. 결국 보어만은 자신이 항상 열망하던 자리, 즉 “총통” 곁의 유일한 충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콘크리트 벙커 안에서 보어만은 다른 측근들보다 더 가까이서 히틀러를 보좌하게 되었는데,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 히틀러가 통제할 수 있는 구역이 제국수상청사 좌우 몇몇 거리에 불과하게 되었을 때, 보어만은 자신이 바라던 목표였던 유일한 충복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소용없는 일이었다. 6.요하임 폰 리벤트로프 (Ulrich Friedrich Wilhelm Joachim von Ribbentrop, 1893년 4월 30일 ~ 1946년 10월 16일) 외교관
히틀러의 조력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전범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전범자의 길을 택했다. 요아힘 리벤트로프는 17살 때 단기간의 방문을 목적으로 캐나다로 갔고, 4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가 그곳에 정착했더라면(그는 정착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존경받는 상인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고,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상류층 여식들과 숙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세련되고 호감이 가는 청년이었다. 그는 또한 성공한 주류업자였고, 친구들 중에는 독일 민주 진영의 기대주였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한편, 그는 편협하고 거만한 파렴치한이었고,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흉악한 독재자에게 맡겨버린 우유부단한 하수인이었다. 리벤트로프는 빠른 시간 내에 히틀러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었다.
1933년 초에 주류업자인 리벤트로프의 저택에서 중요한 모임이 개최되었는데, 이 모임을 통해 히틀러의 권력 탈취 구상이 마무리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이 새로운 인물을 그의 외교 고문 자리에 앉혔고, 그 후에 그를 특사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자신 정권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외국의 모든 회의론자들과의 대화를 위해 능력 있는 상류층 인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외교부의 고집 센 외교관들 중에서는 적격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히틀러에게는 자신에게 무조건 헌신하는 나치당 출신 한 명만 있으면 되었다. 리벤트로프는 언제나 히틀러의 희망을 그의 정치적 이념보다 우선시했다.
그는 결코 히틀러에게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히틀러의 총애와 보호를 받았으며, 특히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내에서 비주류로 벼락출세한 그를 비난했던 정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리벤트로프는 하수인에 불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치 정권의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1933년 5월부터 나치 친위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하인리히 히믈러와 정치적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리벤트로프에게 맞서는 자는 또한 히믈러와 맞서게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정적들도 가지게 되었다. 훗날 리벤트로프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친위대 출신 인사들을 외교부 요직에 앉혔다. 이런 공범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히믈러는 결코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리벤트로프에게서 탁월한 영국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보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신임을 받아 런던 주재 대사로 파견된 그는 악수(惡手)라는 악수는 다 두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는 “나치식 경례”로 영국 국왕 조지 6세에게 인사했고, 그런 편협한 태도로 인해 그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조차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런 리벤트로프가 생각한 것은 “영국과 동맹을 추진하지 않거나 영국에 맞서는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리벤트로프는 샴페인 상인에서 국제 정치가에 이르는 화려한 경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 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이 그와 몰로토프 사이에 체결됨으로써 그의 과감한 시도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조약의 체결로 인해 히틀러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불안감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함 “슐레비히-홀스타인” 호가 폴란드 그단스크 시의 베스테르플라테를 향해 발포함으로써, 리벤트로프의 조력자로서의 역할도 끝나게 되었다.
이제 최고 군사령관인 히틀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을 치를 장군들이었지 외교관들이 아니었다. 리벤트로프가 그의 영웅인 히틀러와 후원자인 히믈러에게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유대인 대량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그는 그 대가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는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리벤트로프는 “패자는 불행하다”라고 말하며 자신에 대한 혐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다른 충복들처럼, 그 역시 히틀러에게 빠져들었다.
그와 히틀러를 연결하는 마력적인 고리가 없었다면 그도 존재할 수 없었다. 히틀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조력리벤트로프도 존재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7.롤란트 프라이슬러 (Roland Freisler, 1893년 10월 30일 – 1945년 2월 3일) 판사
특별재판소 소장인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종전 직전에 폭격으로 사망함으로써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가 살았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법상의 테러로 전제 정치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히틀러의 사형 집행인인 그는 제3제국이 멸망을 고하기 직전에 사망했다.
법은 히틀러의 통치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는 부정한 일을 탁월하게 처리하는 데 있어 대가였다. “제3제국” 최고의 이데올로기 재판관이었던 프라이슬러는 법정에서 자신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려 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존엄성마저도 파괴하고 말았다.
그는 모든 이들이 갈망하던 “총통”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프라이슬러는 독재자 히틀러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실로 무한한 권력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뭔가 아주 특별한 일을 위해 자신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통”은 프라이슬러를 말 잘 듣는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열렬히 갈망하던 “총통”의 칭찬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비극”이었다. 단 한 번도 “볼셰비키”였던 적이 없는 프라이슬러는 일생 동안 “노전사들”의 불신에 시달렸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소련군에 전쟁 포로로 붙잡힌 그는 수용소 위원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을 뿐이었다.
이는 그가 “볼셰비키”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 잔혹한 재판관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프라이슬러는 자신이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였음을 보여 주려 했다. 1918년의 패전은 그에게 “반역”과 같은 것이었고, 이와 같은 일이 독일 역사에서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법부의 최전선에서 “민족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모든 사람들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범죄자이든 반정부 인사이든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반역자”일 따름이었다. 반역자, 즉 “민족공동체에 해가 되는 자”들은 근절되어야 했다. 이렇게 그는 “공포의 법관”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성급하고 소란스러웠으며, 변덕스럽고 무뚝뚝했으며, 자만심이 가득했고 건방졌으며,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미치광이 롤란트”라고 불렀다.
그를 잘 알고 있던 한 법관은 “사람들이 전깃불을 켜듯이, 프라이슬러는 자신에 내재한 광기의 스위치를 켤 수 있었다” 라고 말했다. 후방에서 최후의 승리를 위한 전투에 나선 사형 집행인은 죽음의 칼날을 흔들어댔다. 야만적인 사법 기관이 내린 판결을 통해 살인이 자행되었다. 이미 최후의 승리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전황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방어 능력의 붕괴”라고 불렀다. 판결을 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것이 중요했다.
구제할 길 없는 이 사형 집행인은 히틀러의 최전선이 무너지는 동안에 비장한 각오로 정의에 대항하는 마지막 대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피고인들에게 고함을 질러댔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으로 욕을 퍼부어 댔다. 그는 그들을 비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파렴치한 반역자들”의 명예가 아니라 프라이슬러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
그곳에 걸린 하켄크로이츠 깃발 앞에 앉은 한 광대가 큰 소리로 욕을 퍼부으며 자신의 광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프라이슬러의 본래의 적은 피고인들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비인간적인 판결들을 통해, 그는 피할 수 없는 종말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지하 공습 대피소로 가는 도중에 폭탄 파편을 맞은 사형 집행인 프라이슬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프라이슬러는 특별재판소 앞 도로 위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졌다.
그가 마지막 사형 선고 판결을 내리고 그 다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위해 준비하던 그날, 이 공포의 법관 자신에게 정의의 심판이 내려졌다.
8.요제프 멩겔레 (Josef Mengele, 1911년 3월 16일 ~ 1979년 2월 7일) 의학박사. 독일 친위대(SS)장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의사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의사로 불리는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기억은 아이히만과는 다른 형태로 아직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죽음의 의사는 아우슈비츠라는 금세기 희대의 범죄 현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매일같이 위반한 유일한 나치 의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그의 행동 방식, 그의 실험 대상, 나치의 야만적 행위가 종식된 이후 수수께끼같이 사라진 그의 행적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어릴 적에 멩겔레는 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유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청소년기에 그의 집안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부모는 자주 다투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야심이 많았다.
그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싶어 했다. 그의 목표는 연구 분야에서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 멩겔레가 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의학이었다. 처음에 그는 학문적으로 포장된 광적인 순혈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순혈주의가 선호하는 분야였던 인류학과 유전학은 나치 시대에 아리안 민족이 아닌 종족은 열등하다는 갈색 이데올로기의 기본 교의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었다. “보잘것없는 생명”에 대한 망상이 학문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은 것이다.
멩겔레는 영리한 학생이었다. 뉘른베르크 법이 의결된 1935년에 그는 “원시적 인종과 진보적 인종 간의 차이점들”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장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룬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 젊은 박사는 독일 쌍둥이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오트마 폰 페어슈어의 연구 조교가 되었다.
학문 발전을 위한 엄청난 기회가 제공된다는 권고와 함께 나치 의사인 멩겔레를 아우슈비츠로 보낸 사람은 폰 페어슈어 교수였다. 아우슈비츠가 수많은 인종, 인간, 모든 종류의 실험 대상을 다룰 수 있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연구 천국”이라며 권고한 사람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증인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곳으로 죽음의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훤칠한 키에 흰 장갑을 낀 젊은 의사가 화물 전용 플랫폼에 서 있었는데, “세련되고 날씬한 몸매의” 그는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주인처럼 ” 보였다.
멩겔레가 도착한 사람들을 선별할 때, 그들은 가끔 그의 입술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또한 그들은 그가 흰 장갑을 낀 채 부드럽게 박자에 맞추어 오른쪽으로 가면 살고 왼쪽으로 가면 죽는 것을 결정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장면은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수용자들은 그를 “죽음의 천사”라고 불렀다.
멩겔레는 인간 수집가였다. 그는 화물 전용 플랫폼에 내린, 죽음을 목전에 둔 무리들 가운데서 찾아낸 쌍둥이 아이들을 “나의 기니피그”라고 불렀다. 종종 그는 쌍둥이를 차에 태우고 수용소 길을 따라 달리기도 했고, 그들에게 단것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멩겔레는 아이들의 몸에서 내장을 들어내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해부용 탁자 위에 눕혔다. 이 군주적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인간 동물원의 인간들을 실험 대상으로 사용했다.
멩겔레는 그의 “연구” 결과를 페어슈어 연구소로 보냈다. 처음에는 설문지를, 그 다음에는 혈액 검사 자료를, 조금 더 지나서는 “긴급! 전쟁 물자!”라는 문구가 표시된 포장지에 유골을 싸서 보냈다. 1944년 여름에 들어서는 연구가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멩겔레는 마취 주사로 쌍둥이를 죽였고, 살아 있는 육체에서 장기를 빼내었고, 골수를 이식했고, 쌍둥이의 등을 맞대게 하고 꿰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이는 희생자의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살인적인 사디스트는 아니었다. 단지 멩겔레는 그의 “기니피그”의 고통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없었던 차가운 냉소주의자였을 뿐이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살인자가 아닌 학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학자로서 “학문에 봉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1945년 1월, 소련의 붉은군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때, 멩겔레의 실험 대상인 3,000명의 쌍둥이 중에서 180명의 쌍둥이만이 살아남았다. 도망자로 전락한 그는 그의 연구 메모들을 자기 집으로 옮겼다. 그는 언젠가는 자신의 연구 기록들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농장 일꾼으로 가장해 숨어 지냈다. 1949년, 그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나중에는 파라과이로 도피했다. 노쇠한 이민자는 어떤 죄책감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형벌은 그가 발각되어야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발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그에 대한 형벌이었다. “때때로 나는 쌍날 기요틴에 대한 꿈을 꾼다.
” 예전에 어린아이들을 난도질했던 이 강제수용소 의사는 두통과 이통, 불면증과 소화 불량을 호소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해 상파울루 바닷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34년 동안이나 그는 이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그것이 바로 연구 목적으로 살인을 자행했던 대량 학살자에 대한 형벌이었다.
9. 에르빈 롬멜
(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1.15~1944.10.15) 육군 원수, 전선사령관
1944년 10월 15일 정오, 짙은 녹색의 승용차 한 대가 롬멜 원수의 집 앞에 멈추었다. 당시 그는 노르망디 전역에서 부상을 당해 독일 본토로 후송된 상태였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베르크돌프 장군’과 ‘마이셀 장군’이었다.
그들은 롬멜에게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든가, 아니면 명예롭게 자결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10여 분 후 부인과 아들과 작별인사를 마친 롬멜은 두 장군을 따라 승용차에 오른다. 평소에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제복차림이었다.
그의 최후를 지켜 본 운전병 ‘하인리히 도우즈’는 훗날 롬멜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차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고, 마이셀 장군이 저를 데리고 차를 떠났습니다. 한 5분이나 10분쯤 뒤 베르크돌프 장군이 마이셀 장군과 저를 다시 차로 불렸죠.
그 때 롬멜 원수가 뒷좌석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혼수상태였고, 앞으로 쓰러져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신음하는 것도, 숨이 넘어가는 소리도 아닌 흐느낌이었습니다. 그의 군모와 지휘봉은 좌석 밑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바로 앉히고 그의 군모를 다시 씌워 주었습니다.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전 사령관의 하나로 꼽히던 롬멜은 이렇게 최후를 맞이헸다. 그는 1891년 11월 15일, 독일 남부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단 3백 명의 병력으로 8천명에 이르는 이탈리아 군을 포로로 잡는 등 일찍이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던 롬멜이었지만, 당시 독일군 장교단의 핵심을 이루었던 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군 엘리트들에 속하지는 않았다.
전쟁 후 군사학교에서 교관으로 재직하던, 군인으로서는 별 볼일 없는 한직을 전전하던 그를 기용한 것은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 역시도 독일군 참모본부의 귀족출신 장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히틀러의 경호 부대장을 거쳐 42년 6월 50세의 나이로 육군 원수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롬멜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특히 프랑스 침공 당시 그가 보여주었던 눈부신 진격 속도는 같은 독일군 조차 놀랄 정도였다. 그는 보병 출신이었지만,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일찍이 체득한 선각자였다. 후일 그를 상징하는 별명이 된 ‘사막의 여우’라는 말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설픈 동맹국 이탈리아가 영국을 잘못 건드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자 이를 진화하기 위한 소방수로 파견된 것이 바로 롬멜이었다.
비록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독일군이긴 했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내내 열악한 보급과 부족한 장비 문제가 그를 따라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전쟁에 규칙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이기는 것을 찾아내 실행하는 일뿐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유연한 사고와 임기응변으로 승리를 이끌어 내곤 했다.
롬멜의 전술은 적보다 먼저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는 ‘선제 공격’, 적의 강력함은 피하는 ‘강점 회피’, 그리고 적의 핵심을 공격하는 ‘중심 타격’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야전형 군인이었던 롬멜은 부하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제공권과 재해권을 빼앗긴 독일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 필요한 군수지원을 할 수가 없었고, 독일군은 북아프리카에서 물러난다. 서부 유럽의 이른바 ‘대서양 방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은 롬멜은 고뇌한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승기를 잡고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연합군은 독일을 향해 북상하고 있었으며,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독일은 막바지에 내몰리는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조국이 폐허가 될 때까지 싸울 것인가?”, 롬멜은 동서 양방향에서 두 진영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최고지휘관 회의에서 ‘서방측과 강화를 맺어 승산 없는 전쟁은 그만두고, 볼세비키의 유럽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히틀러를 설득하려 하지만, 오히려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그리고 7월 20일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주동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 혐의를 받게 된다. 롬멜이 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를 존경하던 일단의 장교들은 그를 히틀러 이후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롬멜에 대한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는 후대의 필요에 의해 미화되었다는 혐의가 있다. ‘유태인들에 대한 학살을 일삼던 나치 광신자들로 이루어진 친위대의 전쟁 범죄행위와는 거리를 둔, 전투에 있어서는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신사적인 군인’, 이런 이미지는 전후에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하게 된 서방세계가 독일군을 재무장 시키기 위한 필요에서 조장 내지는 방조했다는 것이다.
롬멜처럼 대중적인 인기가 많았던, 또 히틀러에 의해 강제로 자결로까지 내몰렸던 롬멜의 순교자적 이미지와 독일군 전체의 그것과 동일시함으로써 패전한 독일군에게 명예를 선사하려는 의도였다는 의미다.
실제 독일에서는 1990년대 초반 좌파 군사사학자들에 의해 롬멜과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에 대한 역사 재평가 작업으로 독일군 병영에 걸려있던 롬멜의 기념물들이 철거되는 일이 있었다. 히틀러에 의해 발탁되고 중용되었으면서도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던 롬멜, 그는 분명 나치는 아니었다.
유태인 학살 소식을 듣고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행위는 크나큰 범죄행위”라고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던 그는, 하지만 끝까지 히틀러에 대한 경외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순적 인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당시 대다수 독일국민들의 전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열렬한 나치도 아니었지만 나치에 대한 저항도 선택하지 못했던, 그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군인’, 그에 대한 요란한 수사들을 떼어내고 남게 되는 단어였다. 10.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히믈러
(Heinrich Luitpold Himmler, 1900년 10월 7일 ~ 1945년 5월 23일) 친위대 전국지도자, 게슈타포지휘관, 인종정책 최고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강제수용소와 학살대인 SS특별임무부대를 창설한 사람이자, 최종 지휘 책임자로서, 600만에서 12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산업적 규모로 학살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 학살은 특별히 유대인을 목표로 한 것이었고, 그와 그의 부하들이 고안해낸 것 중에 "Sonderbehandlung", 즉, "특별대우"는 SS식 완곡어법으로 가스실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합군에 의해 주요 전범으로 체포되자 자살하였다. 세기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두사람의 측근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괴링과 히믈러였다. 괴링이 히믈러보다 선배이므로 그가 오른팔, 히믈러가 왼팔이라고 불린다.
어린 시절의 히믈러는 허약하나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등학교때 담임은 그를 매우 정력적이고 성실하며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후일 역사학자가 된 동기 조지 홀가튼(George Hallgarten)은 히믈러를 '양과 같이 온순하여 파리 한마리 건드리지 못하는 학생'이었다고 회상한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히믈러는 바이에른 왕실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장교로 임관하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요세프는 아들의 이 부탁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그러나 제국 해군은 지독한 근시의 허약체질 히믈러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쩔수없이 히믈러는 육군으로 방향을 돌려 1918년 제11바바리아 연대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허약한 히믈러는 군사훈련을 제대로 수료하지 못했으며, 1차 대전이 종료되고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군의 병력 상한이 제한되자 곧장 군대에서 쫓겨났다. 짧은 시간의 농장일과 병치레를 겪은 히믈러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뮌헨 공대(Munich Technische Hochschule)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시기 히믈러는 삶은 평범했으며 단골 식당의 주인 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녀를 여동생처럼 느꼈지만 나중에 사랑을 느끼게되어 고백했다 거절당했다고 한다. 1919년 4월 히믈러는 바이에른 인민공화국에 맞서기 위한 의용군에 가담했다.
그는 란츠후트, 오버란트, 21 소총여단, 주민 자치대 등과 같은 다양한 무장 집단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모두 '치욕스러운 베르사이유 조약'과 '공산주의 독재'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뮌헨 공대생 히믈러는 가톨릭을 믿는 성실한 청년이었으나, 차츰 가톨릭 교리상의 평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다.
프리메이슨, 예수이트 교단, 유대인들에 의한 세계지배를 다룬 여러 작품들을 즐겨 읽었던 그는 차츰 아리안 신비주의 (Ariosophy)에 빠져들었다. 독일 민족의 우월함을 신봉하게된 히믈러 청년은 고대 북유럽의 종교와 신화에 대해서도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인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읽으며 하인리히는 '고귀하고 도덕적이며 순결하고 숭고했던 조상들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독일 민족은 타락하였고 도덕이 문란해졌다.
따라서 히믈러는 순수했던 옛 게르만 시절을 꿈꾸게 되었다. 향후 SS 지도자가 된 히믈러가 친위대를 '고귀한 게르만 영웅들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이끌어내야할 엘리트'라고 열렬히 주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어쨌든 히믈러 청년은 차츰 가톨릭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으며 절대신은 아리안인에게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내렸다고 믿게되었다. 또한 그는 병사가 되고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만일 독일이 다시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면 스스로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를 찾아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3년 11월 히믈러는 에른스트 룀(Ernst Rohm)의 돌격대에 가입하여,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 (Hitler's Beer Hall Putsch)에 참여하게 되었다. 에른스트 룀과 히틀러는 실패로 끝난 폭동의 죄값으로 감옥에 들어갔으나 미미한 잔챙이 히믈러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그러한 현실을 무척 괴로워했다. "허풍이나 치고 말만 많았으며 정력적이지 못했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25년 봄, 히믈러는 루덴도르프가 주도하던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바이에른 전역을 왕성하게 휩쓸고 다녔다.
1925년 2월 27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재창당되어 혼란스러운 와중에 히믈러는 급속한 승진을 거듭하게 되었다. 1926년 히믈러는 피신중이던 호텔 로비에서 스스로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순수한 독일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프로이센 귀족의 딸인 7살 연상의 이혼녀 마르가리테 지그로트(Margarete Siegroth)였다. 그녀는 매력적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아리안인의 특징을 잘 가지고 있었다.
이 둘은 1928년 7월 3일 결혼하여 1929년 8월 8일 딸 구드룬(Gudrun)을 낳았다. 히믈러는 딸을 애지중지하며 인형이라고 불렀다. 마르가리테는 나중에 아들 하나를 입양하였지만 히믈러는 이 아이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둘 사이의 결혼생활을 쉽지 않았으며 1940년부터는 별거에 들어갔다. 당시 히믈러는 군사적인 이상주의에 집착하여 남편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히믈러는 비서였던 헤드위히 포트하스트(Hedwig Potthast)와 점점 친밀해졌으며, 그녀는 1941년 일을 그만두고 히믈러의 정부가 되었다.
둘 사이에서는 1942년 아들인 헬게(Helge), 1944년에는 딸인 나네테 도로테아(Nanette Dorothea)가 태어났다. 1925년 친위대에 가입한 히믈러는 1927년에 친위대 부사령관겸 친위대장 대리로 승진하였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이 역할을 매우 신중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맹목적으로 1인자에게 복종했으며 히틀러는 조건없는 충성을 보이는 이 신하를 차츰 신임하게 되었다.
히믈러의 휘하에서 친위대는 급격히 발전하였다. 1929년말에 200여명이던 인원은 이듬해 1,000명으로 불어났다. 1931년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의 지휘 아래 악명높은 IC 부대가 생겨났다.
1933년 NSDAP가 정권을 잡으면서 친위대의 조직원은 52,000 명으로 급격히 증가되었다. 조직원들은 아리아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제 돌격대 중장이 된 히믈러는 그의 부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함께 무장친위대를 돌격대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편 돌격대 사령관인 에른스트 룀(Ernst Rohm)은 야심이 큰 사나이였다. 그는 돌격대를 독일의 정규군으로 만들려 하였으며, 제국 수상에 취임한 후 정권을 안정시키려던 히틀러에게 공공연히 맞섰다. 히틀러 수상에게는 더 이상 길거리에서 곤봉을 휘두르는 무뢰한들이 필요 없었다.
경제계와 군부, 정치분야의 보수세력은 돌격대의 거친 행위들에 불안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들을 안심시켜야만 했다. NSDAP 간부들은 그가 돌격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
이에 히믈러는 제국의 2인자 자리를 놓고 룀과 다투던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 군부를 대표하는 베르너 폰 블롬베르그(Werner von Blomberg)와 함께 룀을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히믈러는 괴링과 함께 룀의 쿠데타 음모를 날조하여, '총통의 권력과 목숨이 거대한 음모에 의해 위험에 처해있다'라고 히틀러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룀 제거 작전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이에 따라 살생부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쿠데타 음모와는 무관한 히틀러의 정적 그레고르 슈트라세 (Gregor Strasser),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백명에 달하는 살생부의 목록을 20명 이하로 줄였다. 긴 칼의 밤(The Night of the Long Knives)이라고 이름붙여진 1934년 6월 30일, 히믈러는 괴링,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쿠르트 달루에게(Kurt Daluege), 발터 쉴렌베르그(Walter Schellenberg) 등과 함께 룀과 돌격대 수뇌들을 체포하였다.
히틀러는 오랜 동지인 룀을 처형한다는 것을 몹시 망설였다. 그는 한때 룀을 사면해주려 했으나, 돌격대 대장을 반드시 죽여야만한다는 괴링과 히믈러의 설득에 결국 동의하였다.
1933년 경찰국장 대리로서 뮌헨의 행정권을 차지한 히믈러는 1934년 1월에 프로이센을 제외한 모든 독일 지역의 경찰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또한 총통의 생일인 4월 20일 그는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대리 국장 및 감독관이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프로이센 수상인 괴링이 게슈타포를 관할하에 두고 있었으나 지휘권은 1934년 11월 20일에 히믈러로 넘어갔다.
1936년 10월 1일 게슈타포법이 새로운 성립되어 지금까지 연방주의 관할이던 정치경찰이 중앙으로 통합되었다. 독일의 모든 정복 경찰조직이 질서경찰(Ordnungspolizei)로 통합되어 히믈러가 그 수장이 되었으며 친위대의 하부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히믈러는 모든 경찰 조직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1943년 내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히믈러는 무장친위대 제국총통 겸 내무성 산하 경찰총감(RFSSuCdDPidMI)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히믈러는 1934년부터 그의 관할인 경치 경찰조직을 게슈타포로 재조직하였지만 이후 수행 성과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1943년 친위경찰(Politische Staffeln)이 조직되어 게슈타포의 독점 영역을 분할하게 되었다.
히믈러는 또한 크리포(Kripo)라는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권한 밑에 둠으로써 독일 내의 전체 수사기관의 수장이 되었지만 실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1941년 러시아 침공 전에 히믈러는 공산주의자 척결기구를 조직하였다.
친위대장은 제3제국과 중세의 십자군을 비교하였으며 무장친위대(Waffen-SS)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인 지원자들, 그리고 러시아 침공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인 지원자들도 받아 볼셰비키로부터 유럽을 수호하는 다국적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특히 소련에서의 자원자들은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의 군과 경찰 출신자들이 많았으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적대감으로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서방 연합군에 대항하여 조직된 대원들은 위기에 처하면 항복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소련에 대항한 대원들은 끝까지 싸우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소련이 사로잡힌 이들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2년 히믈러의 오른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인 특공대에 의하여 프라하(Prague)에서 암살되었다.
히믈러는 이에 즉각적인 보복 조치를 단행하여 리디체(Lidice) 마을의 모든 남자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히믈러는 민스크에서 200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명령이 이행되지 않자 가벼운 쇼크를 느끼고 "유대인에게 내리는 벌이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라고 격려하였다. 한편으로 엄격한 도덕 기준을 지닌 그는 친위대원에게 유대인을 살해할 권리를 주었지만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에는 엄중한 벌을 내렸다.
1944년 7월 20일, 독일군 정보부(Abwehr)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를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독일군 정보부를 버리고 제국내의 모든 정보 임무를 히믈러의 SD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예비군 책임자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축출되자 이 자리 역시 히믈러에게 주었다.
히믈러의 권력은 크게 증대되었으며 그는 무장친위대 전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친위대 장교들도 일부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이것을 기회로 보르만은 계속 그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1944년 말 히믈러는 라인강 북부의 독일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미군 및 프랑스군과 맞서서 1945년 초까지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을 격파하며 동쪽에서 밀고 들어왔고, 히틀러는 히믈러를 새롭게 구성된 비스툴라(Vistula) 집단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야전 지휘 경험이 없었던 히믈러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곧 고트하르트 하인리키(Gotthard Heinrici) 장군이 지휘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독일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히믈러가 히틀러의 지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결코 히믈러를 자신의 후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친위대의 수장이었던 히믈러의 여러 행위가 점차 히틀러의 반감을 산 것이었다. 1944년과 1945년 사이의 겨울 무렵 무장친위대 전력은 91만명을 헤아렸다.
여기에 알게마이네 친위대(Allgemeine-SS)를 합하면 그 수효는 2백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1945년 봄, 히믈러는 독일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포기하였다. 그는 NSDAP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 및 영국과 강화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히믈러는 덴마크 국경지대 뤼벡(Lubeck)에서 항복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히믈러는 미군과 영국군이 독일군과 힘을 합하여 소련군을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히믈러와의 평화 협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제의는 언론에 배포되었고 4얼 28일 런던 라디오는 "히믈러가 히틀러는 이미 죽었으며 자신이 그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베를린에서 궁지에 몰려 자살하기 하루전, 이 소식을 전해들은 히틀러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뻔뻔스러운 배신 행위'에 대해서 격분했다.
그는 히믈러를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즉각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히믈러는 친위대 제국총통, 독일 경찰 총감, 독일 국민회(German Nationhood) 제국위원장, 제국 내무장관, 국민돌격대(Volkssturm) 사령관, 그리고 독일내 예비군의 사령관이었다. 협상에 실패하고 모든 직책을 박탈당한 히믈러는 대제독 칼 되니츠(Karl Donitz)에게로 향했다.
되니츠는 U보트 승무원들의 호위하에 책상위에 브라우닝 권총을 올려둔 상태로 히믈러를 맞아들였다. 되니츠는 히믈러를 모든 직책에서 쫓아내고 자신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임명한다는 히틀러의 명령문을 보여주었다. 히믈러는 되니츠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자신은 국가의 2인자로서 그를 위해 일하겠노라고 제안했다.
되니츠는 경찰조직을 장악한 히믈러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그러나 5월 6일 17시, 되니츠는 자신을 찾아온 히믈러에게 더이상 귀하와의 만남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되니츠의 사무실에서 쫓겨난 히믈러는 새로운 외무장관 폰 크로직 백작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웅장한 계획을 언급하였다.
히믈러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장군에게 전갈을 넣어 전범 기소를 피하게 해준다면 전 독일군을 이끌고 연합군에 항복하겠다고 전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히믈러는 전후 독일의 경찰장관직을 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히믈러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연합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히믈러는 되니츠 정부가 위치한 덴마크 국경지대 플렌스부르크(Flensburg)를 수일동안 방황하였다.
그는 콧수염을 깎고 왼눈에 안대를 한 채 가짜 문서들을 가지고 하인리히 히친거(Heinrich Hitzinger)라는 가명을 쓰며 비밀경찰 선임상사를 자처하였다.
히믈러 일행은 바바리아로 돌아가려 했지만 1945년 5월 22일 브레멘(Bremen)을 지나던 도중 영국군 순찰대에 가로막혔다. 키가 작고 마른 몸을 지닌 한 사람이 자신을 하인리히 히친거 상사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완벽한 그의 신분증에 의심을 가진 영국군 병사들이 그들을 바름슈테트 근교의 031수용소로 보냈다. 아직 영국군은 자신들이 악명높은 친위대장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히친거 상사는 소장인 실베스타 대위와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는 눈가리개를 벗고 자신의 안경을 낀 후 지친 목소리로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히믈러는 자신의 지위에 맞는 특별대우를 기대하였지만, 실베스타 대위는 곧장 친위대장의 옷을 벗겨 자살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히믈러는 5월 23일 뤼네부르크(Luneburg)의 영국군 2군단 사령부로 호송되었다. 영국군 정보부의 머피대령이 다시 몸수색을 지시하였다. 의사가 히믈러의 입을 검사하려 하자, 그는 이가 빠진 자리에 소지하고 있었던 청산가리(potassium cyanide) 캡슐을 깨물었다.
영국인들은 구토제와 위 세척을 통해 독약성분을 제거하려 애썼으나, 12분후 제3제국의 전-친위대장은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하인리히 히믈러다(Ich bin Heinrich Himmler)!' 였다고 한다. 히믈러의 시체는 5월 26일 영국군에 의해 장례식도 없이 황야에 묻혔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고있다. 11. 루돌프 발터 리하르트 헤스
(Rudolf Walter Richard Hess, 1894년 4월 26일~1987년 8월 17일) 나치당 히틀러 보좌관.
총통의 대리인 루돌프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독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프리츠 헤스(Fritz Heß)는 대단히 독일적이며 민족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독일황제 빌헬름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황제의 생일에는 상점을 닫아걸고 집에서 가장 질이 좋은 포도주로 잔치를 벌였다.
루돌프는 1894년에 태어났는데 프리츠는 아들이 자신의 가업을 잇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루돌프는 1908년 라인강 유역의 바트 고데스베르크의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그는 평범하며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으나 나름대로 자연과학과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프린츠는 아들이 인문고등학교 대신 가업을 잇기 위해 스위스 노이샤텔에 있는 상업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했던 루돌프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아마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면 루돌프 헤스는 한명의 정직한 상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1914년의 유럽은 민족주의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스무살의 어린 루돌프도 이 열기속에 빠져들어 아버지의 의사를 거스르며 군에 입대했다.
그는 훈련을 받는중 자신이 전선에 투입되기 이전에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닌지 조바심을 냈다. 헤스는 바이에른 보병 제 7연대에 소속되어 서부전선에서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전선이 고착되어 참혹한 진지전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열정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1915년 여름 하사로 진급하였다. 1917년에는 루마니아 전선에서 폐에 관통상을 입어 거의 죽을뻔 했다가 간신히 회복되어 소위 계급장을 달고 보충 중대에 배속되어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상병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이 우연한 만남에서 소위와 상병은 서로간에 큰 인상을 주고받지 못했다. 1918년 봄, 헤스 소위는 수차례에 걸친 지원 끝에 공군의 파일럿이 되었다.
리히트호펜과 괴링 같은 공군의 수퍼 에이스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독일의 어린아이들까지 이들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그러나 루돌프는 너무 늦었다. 전쟁 막바지에 실전에 투입된 그는 한대의 적기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1918년 11월, 독일제국이 붕괴하자 헤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전역한 소위는 뮌헨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그의 자산을 몰수하는 바람에 금전적으로도 궁핍한 처지에 빠졌다.
헤스는 뮌헨 대학에 진학하여 경제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향후 NSDAP의 세계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인물을 만나게 된다. 지정학 강의를 담당하던 퇴역장군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였다. 헤스는 곧 그의 조교가 되어 스승의 학문적 신조(Lebensraum)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헤스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외모를 지녔음에도 여자도 사귀지 않았다. 그는 오직 독일과 정치, 전쟁에만 열광했다. 1920년 헤스는 일제 프릴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후 미지근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헤스는 부모에게 뱀구덩이에서 유일한 뱀장어를 발견했다고 그녀를 소개했다. 일제는 후일 헤스의 부인이 되었고 결혼식을 치르기 전까지 당에서 그의 일을 도와주었다. 1920년 5월의 어느날 밤, 헤스는 슈테른에커브로이라는 뮌헨의 어느 지하 맥주집에서 독일노동당에 소속된 한 사람이 연설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노동당은 바이에른에 무수히 존재하는 민족주의 정당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맥주집에는 스물네명의 청중들이 모여있었다. 각자에게는 1,000cc의 맥주가 돌려졌다. 홀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연사는 헤스보다 몇살 많았는데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기고 콧수염을 직각으로 깍았다. 전단지에는 그의 직업이 화가라고 적혀있었다. 강한 오스트리아 억양으로 연사는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사건들을 열거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민족에 대한 범죄이며,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에 대한 정부의 배신행위라고 정의했다.
또한 이 모든 악행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유태인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연설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신들린듯한 고함소리에 의해 갈수록 열기가 고조되었다. 헤스는 연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날 이후 헤스는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으며 얼굴이 환해졌다. 1920년에 히틀러는 권력과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조그마한 독일노동당 안에서 권력다툼을 벌이는 일개 피라미에 불과했다. 그러나 헤스는 이 화가를 따르기로결심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따르는 이 젊은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헤스는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다.
노동당 사람들은 커피를 먹으러 가서 함께 대화를 나누곤 하던 이 기묘한 커플에 대해 비웃었다. 독일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총통과 그의 대리인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길이 없었다.
헤스는 존경심에 가득차 히틀러는 호민관으로 불렀다. 그는 자신의 스승에게 히틀러를 소개하였지만 하우스호퍼는 벼락출세자인 히틀러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지명도가 낮던 초기의 NSDAP에는 연설능력을 갖춘 인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헤스는 그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연설대에 오르기만 하면 심리적 압박감으로 말을 더듬고, 몸이 마비되기도했다. 초기 당의 연사중 하나이던 헤르만 에세르는 헤스가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제대로된 문장을 말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붕괴되었다. 빵 한덩어리가 무조 1조 라이히 마르크에 달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엉망이 되었고, 화폐는 가치를 상실했다.
사회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특히 독일 남동부의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한 사나이가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1년전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셔츠단이 로마로 진군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총통은 무솔리니가 아니었고 그의 세력인 NSDAP는 바이에른지역을 벗어나면 독일인들에게 이름조차 생소한 집단에 불과했다. 11월 8일 총통은 새로운 제국을 세우려는 일대 모험을 감행했다. 예비역 상병 히틀러는 예비역 소위 루돌프 헤스에게 바이에른 정부의 모든 장관들을 체포할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을 내렸다.
헤스는 이 명령을 감격스럽게 받아들였다. 히틀러와 괴링, 그리고 약간의 돌격대원들과 함께 헤스는 저녁 6시경 주정부의 집회가 열리던 뷔르거브로이켈러를 급습했다.
그러나 이 서툰 쿠데타 시도는 다른 우익세력들과 육군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초조해진 총통은 다음날 불리한 형국을 역전하기 위해 3천명의 인원으로 진군을 시작했지만 결국 경찰의 발포로 피만 흘린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매년 11월 9일마다 쿠데타 시도에서 목숨을 잃은 14명의 희생자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거창한 횃불과 북소리와 함께 총통의 대리인인 루돌프 헤스가 항상 이 행사를 이끌었다. 그러나 사실 발포가 이루어 질 때 헤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당시 바이에른 주정부의 장관 슈바이어와 부첼호퍼를 인질로 감시 중 이었는데, 쿠데타 실패 소식을 듣고 즉각 바트 퇴르츠 방향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히틀러는 11월 11일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다른 주동자들도 붙잡혀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헤스는 완전히 종적을 감춰버렸다. 쿠데타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은 무명 정치인 히틀러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이 재판에서의 변론을 통해 독일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3가지 원칙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결국 히틀러는 5년간의 금고형과 200 마르크의 벌금이라는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히틀러의 변론에 힘을 얻은 헤스는 자수하는 길을 선택했고, 18개월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아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헤스가 감옥에 도착했을 무렵 히틀러는 벌써 자기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1층에서 생활했는데 총통은 헤스를 특별히 자신의 옆방으로 불러들였다. 이곳에서의 몇달간은 히틀러와 헤스의 관계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헤스는 히틀러의 토론상대 겸 청중이 되었다. 이곳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역작인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저술하였는데, 특히 레벤스라움과 같은 개념을 정립하는데는 하우스호퍼 교수의 제자인 헤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히틀러는 감옥에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총통은 감옥에서 앞으로 최소한 5년, 길어도 7년 내에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풀려난 히틀러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 경제가 인플레이션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계속적인 집회와 연설로 대중의 환심을 사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0년까지 제국의회에서 NSDAP는 득표율 2%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개인 비서 헤스는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예언했다.
헤스는 비서로서 히틀러의 일정을 짰고, 그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너무 잦은 연설로 히틀러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말없이 연단에 머리를 기대기도 했고, 목이 쉬어 연설 내용을 알아듣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히틀러가 오버잘츠베르크에 새롭게 구입한 집에 머무를 때도 헤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공적인 장소에서 두 사람은 서로 존칭을 썼지만 사석에서는 오래전부터 허물없이 지냈다.
다른 부하들은 헤스에 대한 히틀러의 총애를 시기했다. 대중들은 헤르만 괴링이나 괴벨스, 돌격대 사령관인 에른스트 룀을 주목했지만 실제로는 헤스야말로 숨어있는 권력자였다. 후일 헤스는 이 시기야말로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노라고 회상했다.
당의 상황도 호전되었고 히틀러와의 관계도 더할 나위 없이 친밀했으며 독일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희망도 점차 현실화되는 것 같았다.
1927년 12월 30일, 헤스와 일제는 히틀러의 중매로 결혼에 골인했다. 입회인은 히틀러와 하우스호퍼 교수였다. 그러나 새신랑 루돌프 헤스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히틀러 곁에서 보냈다. 항간에서는 헤스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지만 성실한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그것이 사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헤스는 당 후원금을 모으는 일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NSDAP의 정강정책은 상당히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루르 지역의 부유한 기업가들은 이들에게 후원하는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인의 아들인 헤스는 당의 과격한 운동가들보다 더 쉽게.. 괴링보다 더 원만하게 대기업가들과 접촉을 가졌다. 결국 이들이 낸 많은 후원금은 NSDAP의 선거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2년 7월 NSDAP는 37퍼센트를 득표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수상에 임명되기를 바라던 히틀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헤미안 상병에 대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혐오감과 헌법에 충실하겠다는 히틀러의 다짐을 믿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의심이 문제였다.
당은 위기에 봉착했다. 초조감과 재정적 궁핍현상이 확산되었다. 기업들이 돈주머니를 꽉 틀어쥔 관계로 NSDAP의 부채는 1,200만 라이히 마르크에 달했다. 실망감으로 헤스는 병에 걸려 요양소로 들어가야만했다. 그가 요양소에서 나왔을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선거에서 NSDAP는 200만표를 잃었다. 당내에서 히틀러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이루어졌다. 그레고르 슈트라서는 12월 4일 제국 수상인 슐라이허와 직접 담판을 벌였다. 이것은 히틀러와 헤스에 대한 공개적 도전행위였다. 그러나 결국 권력투쟁은 히틀러의 승리로 끝나고 슈트라서는 이탈리아로 도주했다.
궁지에 몰렸던 NSDAP에 행운이 찾아왔다. 독일 정계를 지배하던 슐라이허와 파펜 전 수상의 불화로 인해 1933년 1월 히틀러를 제국 수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행운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헤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헤스에게도 새로운 시기가 찾아왔다. 1933년 4월 21일 히틀러는 그를 총통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이 직함에 실질적인 권력이 따라온 것은 아니다. 이미 헤스는 중앙위원회 의장으로서 형식적으로 히틀러를 잇는 2인자였던 것이다.
1933년 가을에 그는 무임소 장관으로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 헤스는 자신을 보좌할 유능한 비서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마르틴 보르만이었다. 헤스는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서류작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르만은 그 틈을 파고들어 자신만의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유약한 헤스는 권력을 틀어쥐지 못했다. 최고 당직자인 헤스는 자신의 권력을 주변에 나누어주었지만 그들은 헤스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지역당을 책임지는 몇몇 대관구 지도자들은 공개석상에서 대리인에게 무례하게 굴기도 했다. 결국 헤스는 당을 관리할 능력이 없음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총통을 향한 대리인의 충성심은 여전했다.
헤스는 히틀러의 측근 중에서 청렴결백하며 예의바른 당의 양심이라 부를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수천건씩 지역당 간부의 직권남용이나 잘못된 처신에 대한 투서가 쏟아졌다. 그러나 부정직한 간부들에 대한 헤스의 준엄한 경고는 흥미거리로 취급당했다. 뮌헨의 헤스와 베를린의 히틀러는 물리적인 거리처럼 서서히 멀어져갔다. 1934년 여름 히틀러는 에른스트 룀을 숙청했다. 그러나 헤스는 그 일을 미리 알지 못했다.
그는 또한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서명했다. 3일후 헤스는 하우스호퍼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그의 가족에게 아무런 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우스호퍼의 부인은 인종법에 따르면 절반의 유대인이었다.
총통의 대리인은 뮌헨 근교에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 날에는 몇몇 손님들만 초대되었다. 히틀러도 아들의 대부로 참석했다. 바로 그날 헤스는 독일 전역의 유대인 교회당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바 수정의 밤이었다. 그는 분노했다. 아무도 총통의 대리인에게 그 정보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헤스는 대관구 지도자들에게 전보를 통해 위법행위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대리인의 지침은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대전을 일으켰다. 이틀 후 대리인은 수상관저에 있었다.
그날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이 접수되었다. 당황한 히틀러는 영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외무상 리벤트로프에게 호통을 쳤다. 모든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나의 투쟁 세계관의 핵심 전제이던 영국과의 우호 관계가 실패로 돌아갔다. 히틀러는 스웨덴을 통해 협상을 위해 괴링을 보내도 되는지를 영국에 문의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괴링과 협상을 할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다. 독일군은 곧 폴란드와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헤스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우스호퍼의 아들인 알브레히트가 포루투갈에 있는 중개인을 통해 영국과 접촉을 시도했다. 선을 대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영국 정보부가 밀사를 체포해버렸던 것이다. 이제 헤스는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스스로 평화의 메신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먼저 아우구스부르크의 공장에서 BF 110 전투기를 한대 얻었다.
그리고 이 비행기를 장거리 비행용으로 개조하였다. 가을부터 그는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비밀리에 북해 상공의 기상상태를 알아보고 비행 금지 구역에 대한 지도도 마련했다. 1월 10일에 그는 첫 시도를 감행했다. 이륙전 그는 자신의 부관 칼 하인츠에게 봉투 두개를 건넸다. 하나는 히틀러 앞으로 쓴 이별의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이륙 네시간 후 열도록 명했다. 그러나 출발 후 두 시간이 지나며 날씨가 악화되어 헤스는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5월초 헤스는 베를린에 있었다. 히틀러는 이미 소련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의 마지막 대화는 4시간이나 이어졌다.
5월 10일 저녁 스코틀랜드 상공으로 빠른 속도로 BF110 한기가 접근하고 있었다. 레이더 기지가 경고를 울렸고 두대의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요격을 위해 날아올랐다. 스핏파이어가 불과 몇 마일 거리로 접근했을 때 BF 110의 캐노피가 열리고 조종사가 뛰어내렸다. 총통의 대리인이 영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 소식을 처음 듣고 믿지 못했다. 사실임이 판명되자 결국 "헤스가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며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러나 총통은 앞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헤스의 임무가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틀러의 결심은 굳어졌다.
대리인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신분열 증상을 보여 광기어린 생각의 희생자가 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히틀러는 헤스가 돌아온다면 총살이나 정신병원중 택일해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후일 자신의 생애 마지막 밤에 그에 대해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 참여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한편 처칠은 헤스를 평화의 사절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와 워싱턴이 이 상황을 오해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현실감각을 상실한 헤스는 인류를 구하려는 임무를 띠고 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심문이 끝난 후 헤스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감옥에 수감되었다. 헤스가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제3제국은 서서히 몰락해갔다.
2차대전이 종결된 후 독일 전범을 처단하기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헤스는 범죄음모죄, 반평화범죄, 전쟁범죄, 반인륜죄 등 4가지 항목에 걸쳐 기소당했다. 헤스는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기 이전에 독일을 떠났고, 전쟁 지휘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다. 결국 뒤의 두가지 항목에 대한 기소는 중지되었다. 소련은 헤스의 사형을 요구했고 미국은 제한적인 금고형을 원했다. 양자의 견해가 절충되어 종신형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루돌프 헤스는 베를린의 슈판다우 감옥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헤스의 시간은 1941년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료 죄수들의 관계는 항상 좋았다. 슈페어와 폰 쉬라흐는 이 늙은이를 위해서 항상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슈페어는 심지어 그의 침대를 봐주기도 했다.
1966년 이후에 슈판다우 감옥은 헤스를 위한 독방이 되었다. 종신형 판결을 받았던 다른 죄수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서독 정부는 헤스 또한 석방시키려 노력했으나, 소련이 끝까지 거부한 관계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감옥에 수십년 동안 갇혀있으면서도 헤스는 여전히 충성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1969년에야 가족들이 자신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1987년 8월 17일, 헤스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헤스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발표되었는데 이는 격렬한 논란을 몰고왔다.
루돌프 헤스의 장례식은 그가 청년기를 보냈던 라이히홀츠그릔에서 수킬로 떨어진 분지델(Wunsiedel)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헤스 추종자들이 묘지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장례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히틀러」이언커쇼 (교양인, 2010)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귀도 크놉 (울력, 2011)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교양인, 2006) 「독일 국방군」볼프람 베테 (미지북스, 2011) 「게슈타포」루퍼트 버틀러 (플레닛미디어, 2011) 「독일 제3제국의 비극」안진태 (까치글방, 2010) 「히틀러와 홀로코스트」로버트 S. 위스트리치 (을유문화사, 2004) 「2차세계대전사」존 키건 (청람미디어, 2007) 「곁에 두는 세계사」수요연구사학회 (석필, 2007) 「연표와 지도로 읽는 20세기 세계사」마르크 누쉬 (이끌리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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