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대리석 흉상(프랑스 툴루즈 생레몽박물관·170~180년께).
로마 철학(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유교, 불교, 기독교, 철학,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세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조예를 갖고 있어야 더 유익하다.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 역시 생각의
조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항상 어떤 사상이나 생애를 접하게 될 때 그것을 절대시하면 나머지 것들에 대한 평가를 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는 로마인이며, 5현재의 마지막 사람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5현제 시대를 받아 로마사 한창 전성기를 누리다가 코모두스에게 가며 로마의 쇠락기에 접어드는 시기이다.
그는 로마의 카엘리우스 언덕에 있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집정관의 딸이었다.
그의 부모가 일찍 사망하자 마르쿠스는, 시의 장관이자 집정관을 세 차례나 역임한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그는 그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애초에 황제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열정이 높았던 마르쿠스는 훌륭한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매우 다양한 분야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당시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소년 마르쿠스를 사랑해 그의 이름은 베루스를 베리시무스로
부를 정도였다. 한편 마르쿠스는 그의 고모 파우스티나와 그녀의 남편 아울레리우스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 입양되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마르쿠스가 열일곱이 되었을 때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마르쿠스의 양아버지 안토니우스 피우스가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스물여섯 살 때 황제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했다.
마르쿠스의 황제 즉위 과정은 순탄했다. 그는 합법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원로원은 그를 다음 황제로 지명했다.
그러나 그는 안토니누스의 다른 양자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나란히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로마제국 역사 처음으로 두 명의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루키우스의 업적은 마르쿠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제위 기간 동안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한 것이었다.
로마사 논고를 보면, 왕위를 세습하면 안 된다고 했다.
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왕권 결정 방법이 틀렸다.
한족은 세습에 의해서 넘겼다. 반면 동이족들은 뛰어나서 왕에 적합한 사람을 황제로 세웠다.
동이족들 가운데는 왕자의 난이 굉장히 많다.
신민사상에 의해서 왕자의 난은 굉장히 나쁘게 말해지지만, 이런 갈등을 통해 국가는 개혁되고 갈등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는 5현제 뒤쪽에서부터 세습이 된다. 마르쿠스가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세습을 시행한 것이다.
한 공동체나 국가의 통수권을 갖고 있을 때, 그 권력을 적임자에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그 통수권을 전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그랬을 때 그 나라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발전해간다. 모든 역사 속에서 나름 이름을 떨친 국가는 많은 경우 세습하지 않았다.
황제가 되어서도 그는 가족, 친지, 스승에게 애정 깊게 대했고 학문에 대한 열정도 식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전염병, 도덕적 타락에 대해 고심하며 보내야 했다. 이 틈을 노리고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왔고,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그들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지만, 베루스가 죽고 나가 마르쿠스는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다.
175년. 년에는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장군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에게 도전해 왔다.
그는 이집트를 장악한 다음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는, 자신이 제국의 황제라고 선포했다.
이에 마르쿠스는 병사들 앞으로 나아가서,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통치권을 양도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을 부정하고 우정을 배신한 가이우스를 용서할 작정이었다. 여기에서 용서는 기독교만의 개념이 아니다.
용서라는 개념은 이미 인류 역사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자신의 부하에게 피살되었고, 마르쿠스는 오히려 자비로써 용서해 줄 기회를 놓친 것을 슬퍼했다.
아우렐리우스의 이같은 박애정신은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80년, 마르쿠스는 돌연 사망했고, 왕권은 아들 코모두스에게 세습되었다. 그의 나이 59세, 왕위에 오른 지 18년
만이었다.
이렇게 생애를 돌아보았는데, 그의 생애 중에는 눈에 띄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일단은 용서라는 부분. 원수 사랑이라는 경지까지 나아가 있는 용서를 볼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명상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참 신기한 것은 그리스도인도 아닌 그가 그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명상록
1.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작은 육체와 호흡.
그리고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성)일 뿐이다.
세 번째 것은 인간을 주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시대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마르쿠스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단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변화되어지는 존재이다.
죽으면 그저 원자로 흩어져서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영원히 그런 변화를 반복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적 존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수도사들이 명상을 하는데, 왜 할까?
우주라는 것은 나름대로의 질서를 갖고 있다.
그리고 질서를 갖고 있다는 것은 두 개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목적을 갖고 있고, 다른 하나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 사람들은 이렇게 믿었다. 우주에는 행성이 생겨나고,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란
존재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질서 있는 존재이고, 목적과 방향성을 갖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대게 영, 혼, 육을 갖고 있고, 중심에 있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의해 사람의 정의가 달라진다.
스토아 학파는 그 중심을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목적과 방향성은 결국 우주 전체가 잘되는 방향을 향해 있다. 그래서 이성적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성적인 것은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영혼육에 매인 것이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주의 질서와 우주의 질서를 내가 생각함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것, 우주와 나의 교감이 일어나는 것을 이성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우주를 하나님으로 바꾸면 기독교와도 일치된다.
기독교는 참 진리이기 때문에 이것의 복사품이 수없이 많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모방들을 배운 후 참 진리가 기독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노인이라고 생각하라! 즉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라. 노인이 되면 실리적으로 변하고, 계산이 정확해진다. 삶에 필요한 것들만 말하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영혼육에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란 것을 사용해 우주의 질서와 교감하는, 실질적이고 가장 필요한 활동을 해라.
더 이상 사회가 이성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때, 그에 반하는 반사회적 행동에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해선 안 된다.
개인이 타락해서 마침내 사회가 타락하고, 국가가 타락하면 결국 우주가 타락한다.
그러면 모두가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자.
또한 더 이상 현재에 불만을 품지도 말고 미래에 위축되지도 말라.
쉽게 우리는 두 개로 되어 있다. 우주의 큰 질서를 로고스라고 부르는데, 그 로고스의 조각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영혼육을 에고, 자아라고 부른다. 이성은 항상 만족되어 있고, 자아는 항상 불만을 갖고 있다.
인간은 실존만이 있다. 그리고 이 실존은 에고가 아니고, 이성이 로고스와 함께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전혀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시간이라는 것은 현재를 중심으로 했을 때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 그런데 현재는 결국 찰나로만 존재한다.
즉 모든 시간의 순서라는 것이 파괴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 시간의 순서가 파괴된 상태가 영원이다.
그리고 현재의 찰나와 찰나가 만나 영원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우주에 가 닿았다고 이야기한다. 자아라는 것은 모였다 분열되었다면 반복한다.
자아라는 것은 그래서 우주와 교감하지 못한다. 반면 이성은 우주와 교감할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이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그것을 구체화 시키고 있다.
당시로서는 요한복음이 이성이 예수 그리스도로 변한 것 외에는 굉장히 읽기 편한 책이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철학과 종교 속에서 해탈의 개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다시 틀어간다.
그리고 원수 사랑까지 나가게 된다.
2.신(우주, 로고스)으로부터 나온 만물은 섭리(신의 뜻, 원리)로 충만하다.
즉 우주라는 것 안의 로고스의 원리(중력, 상대성, 황금률 등등)가 가득 차 있다. 우연마저도 자연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또한 섭리에 의해 인도된 것들과 얽혀있다.
우연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원리가 서로 합쳐져서 우주가 잘 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가게 된다.
그러니까 어떠한 것도 우주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고스라는 원리 자체가 그것들까지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은 로고스로부터 흘러나온다.
거기에는 필연성이 있으니, 그것은 당신도 한 부분인 전체 우주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에고가 끊임없이 흩어지고 합체되는 것을 받아들여라. 나의 죽음은 결국 새 창조의 밑바닥이 된다.
즉 이 스토아 학파는 우주가 잘 되는 것이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악이라고 본다.
마르쿠스는 지금 이 글을 전쟁터에서 쓴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에고에 신경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상록은 자기를 일깨우고 다독이려고 쓴 책이다.
예수님 역시 그랬다.
예수님은 자신의 불이익이라도 우주의 잘됨을 위해 쓴 잔을 받아들이셨다.
즉 자신의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전체의 본성이 가져오는 것, 이 본성을 유지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은, 자연의 모든 부분에 선한 것이다.
3.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이 이런 일들, 즉 우주와의 교감을 지체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당신이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는지를 기억하라.
우주와 교감하는 것이 바로 신의 은총이다.
로고스가 자신의 뜻을 보여주는 순간 나는 그 뜻에 대해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쿠스가 그에게 반란한 장군을 용서한 이유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주를 잘되는 쪽으로 가게하고, 우주가 잘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즉 선이다.
그런데 이 선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왕권은 별로 상관이 없었고, 그래서 그것이 원수 사랑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이 경험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당신도 우주의 로고스와 인간의 이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당신의 마음을 가리는 구름을 제거하는 데 이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도 지나 가버리고 당신도 지나가버려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이성과 로고스는 영원성을 갖고 있다.
필멸하는 것은 에고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작 신경써야 하는 것은 로고스인데도, 우리는 에고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 에고는 다시는 지금의 나가 되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이 나름대로 우주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이다. 때문에 에고의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4.이것만은 언제나 당신 가슴속에 간직해야 한다. 즉 우주의 본성은 무엇이며, 나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주의 본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한 나의 본성은 어떤 부분인가?
당신이 한 부분을 이루는 본성(자연)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방해할 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즉 우주 속에서 나와 우주와의 관계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확실히 서면 방해받지 않고 확실히
내 목적을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성이 잘 되는 것이 우주가 잘 되는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그런데 분명히 죽음과 삶, 명예와 치욕, 고통과 쾌락 등, 모든 것들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동등하게
일어나며, 이런 것들은 우리들은 더 훌륭하게 만들지도 않으며, 더 나쁘게 만들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들은 결국 에고를 따라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6.죽음이란 무엇인가? 사실 죽음이란, 인간이 그 자체만을 살펴보아, 반성이라는 추상적인 능력으로 죽음이 가져오는
온갖 상상들을 모두 분리해낸다면, 죽음이란 자연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원자로 흩어져 사라질 때, 그것을 토양으로 다음 세대가 살아가기에 그것은 결국 자연적인 과정이다.
7.당신이 얼마나 오래 산다고 해도 어떤 사람도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며,
그가 지금 잃어버리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음은 찰나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 누구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이 다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찰나를 죽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들은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주공간 속에 무엇인가로 변해간다.
그런데 우리는 죽는 그 순간에 우리의 일생 전체를 다 잃는다고 생각한다.
8.그렇다면 인간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인간 내면에 다이몬(신성, 신의 소리)을 안치시키고, 모독하거나 해치지 않으며, 고통과 쾌락을 초월하고, 목적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거짓과 위선을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일어나는 일과 할당된 모든 것을 그곳이 어떤 곳이건 자신이 온 곳(자연, 신, 우주)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끝으로 죽음은 모든 생물을 구성하는 원소의 해체에 불과하다고 보고,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다이몬은 우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원리이다.
이것을 모독하거나 해친다는 것은 에고에 치중해 살아간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들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선포하신다.
그것은 우주의 원리, 다이몬의 소리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고를 포장한 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더 로고스를 따른 사람은 오히려 세례 요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살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엄청나면서도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사람이 이성에 머물러 있을 때는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이며, 반대로 에고에 있을 때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마르쿠스가 위에서 하는 이야기는 결국 철학이다.
그렇다면 우주에는 대체 뭐가 있고, 이성에는 대체 뭐가 있을까?
기독교적으로 우주에는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이성에는 말씀, 성령이 있는 것이다. 이 성령이 뭐라고 말하는지,
실제적으로 영성훈련을 쌓으면서 경험하려 노력해야 한다.
9.우리는 목적이 없고 쓸모가 없으며, 무엇보다 지나친 호기심이나 악의에서 나온 잡념들이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갑자기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더라도, 아주 솔직하게‘이런저런 일이다’라고
즉각 대답할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즉 언제나 깨어 있고, 자명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주와의 교감 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를 방해하는 것이 에고의 생각들이다.
자명하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자명함은 우주의 잘됨에서 흘러나온다.
십계명은 기독교 내에서 자명한 것이다.
10.육체에는 감각이 속해 있고, 영혼에는 욕망이 속해 있으며, 이성에는 원칙이 속해있다. 즉 자아에는 십계명 같은
원리에 속해 있고, 그것은 우주의 잘됨을 불러온다.
11.사람들은 시골이나 바닷가, 또는 산속에 집들 중에 은신처를 찾는다.
그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당신도 역시 이런 것들을 매우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자신 속에 은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보다 더 고요하고 자유로운 곳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 즉각 완벽한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평온이란 정신이 자명하게 정리된 상태이다.
평온, 쉼은 우주와 교감 상태이다. 기독교인들로 하면 예배, 기도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감으로 온전한
평안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주 이 은신처를 활용하여 스스로를 쇄신시켜라. 또한 원칙들은 간결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그 원칙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영혼은 깨끗이 정화될 것이며, 아무런 불만 없이 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간다.
이와 동일하게 로고스라는 이성에서 원칙이 나왔다. 그래서 내가 이 원칙들을 생각하면 나는 로고스로 들어간다.
이 로고스는 평온하고 고요한 안식처이다.
12.당신의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내가 피해를 당했다는 불평도 없어질 것이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불평을 버려라.
그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즉 에고에 해당하는 부분을 내려놓으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사실 가능하지는 않는다. 이 말을 하는 마르쿠스마져도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에고의 부분에 치중하느냐, 이성에 치중하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가 더 이익이 된다.
13.당신은 이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가? 만약 이성이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내가 내 믿음을 지켰는데도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의를 지켰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14.아침에 마지못해 일어났다면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지금 인간의 임무를 하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 내가 이렇게 자는 것은 우주의 이익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임무는 로고스를 실현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며, 내가 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가 되는 그 일을 하려고 하는데, 불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라는 존재는 잠옷을 입고 누워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15.귀찮고 마땅치 않은 모든 잡념(우주와의 교감을 제외한 모든 생각들)을 물리쳐 씻어내고, 즉각 최고의 평온 속에
머무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신앙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한다는 것이다. 에고에 속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살인을 면하게 하고, 우리의 삶의 여유를 갖게 한다.
그런데 개신교는 말씀이라는 것에 완전히 매몰당해 영성을 버렸다. 기독교는 글자가 아닌데 말이다.
16.당신이 늘 하는 생각이 바로 당신 정신의 특성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계속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왜냐면 영혼은 생각에 의해 물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와의 교감에 집중하라.
17.만약 당신이 올바른 길로 걸어가고, 올바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당신은 행복이 평온하게 흐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신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영혼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정의로운 기질과 정의의 실천을 옳다고 보고, 그 안에서 욕망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욕망과 행복이라고 했을 때,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감소시켜서 행복을 극대화시키자고 말한다.
반면 스토아의 행복은 욕망은 완전히 버리고 이성을 따르는 것이다.
18.신을 생각하며 끊임없는 사회적 행동을 하는 것, 오직 이 한 가지 일을 즐거워하고 이 안에 안주하라!
19.만일 당신이 성취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 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고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면, 당신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
내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은 누군가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 외에는 주시지 않는다. 즉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여러 가지 난관들이 다가올 때 우주의 원리는 우주가 잘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인데, 그것은 국가가 잘 되어지게, 개인이 잘 되어지게 한다.
그런데 개인이 잘 되어지는 것이 에고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면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20.만일 어떤 사람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했다는 것을 지적하여 나를 납득시킨다면, 나는 기꺼이 잘못을
바로잡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진리를 탐구하고 있으며, 진리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오류와 무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피해를 입는다.
우주와 교감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우주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지적당했다면 자신은 바로 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쁜 일이다. 그러나 에고에 치우친 사람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기분 나빠한다.
21.깨어있는 정신으로 돌아가서 그대 자신을 회복하라.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면, 당신을 괴롭혔던 것들이 단지 꿈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신이 꿈을 바라보듯이, 깨어있는 동안 당신을 괴롭혔던 것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주와 교감하는 순간이 해탈의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참이다.
그런데 에고는 수없이 변한다.
즉, 미망, 헛된 것이다.
이 관계는 보는 순간, 우리는 이것들이 모두 꿈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22.미래의 일들로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마라.
만약 부득이하게 그것들과 직면하게 되더라도, 당신이 현재의 일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이성이 해결할 것이다. 나는 찰나를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그 찰나를 살아서 미래와 맞닿뜨린 그 순간, 이성이 다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
23.누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반드시 선해야 한다.
금이나 에메랄드가 누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건 나는 반드시 에메랄드이며, 나의 색을 유지한다고 늘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변의 어떤 것이 뭘 하든, 나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24.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처한 현재의 조건을 경건히 받아들이고(인욕바라밀), 당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정의롭게
행동하며(지계 바라밀), 검토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것들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당신의 현재 생각을 잘 닦아놓는 것
(반야 바라밀)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것은 불교 사상과도 일치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부처이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우주의 원리는 우리가 잘 되어가는 방향으로 항상 모든 것들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인욕 바라밀이다.
반야 바라밀은 원칙을 세워놓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왜 도덕적인 행동을 할까?
첫 번째는 무서워서이다.
둘째는 상 때문이다.
세 번째는 평판을 위해서, 넷째는 공동체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다섯째가 공공선을 위해서이다.
여섯째가 바로 양심이다.
서양 철학은 다섯째까지가 끝이다.
그런데 동양 철학은 여섯째부터 시작이다.
그보다 하나 더 높은 단계가 바로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상태이다.
그 정도까지 되면, 그것은 신이다.
25.당신이 오늘 죽었다고 생각하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삶이 끝났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당신에게 허락된 남은 생애는 본성을 따르며 살아가라.
나의 본성을 받아들이라.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신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26.내면을 들여다보라. 내면의 선의 샘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파면 팔수록 더 많은 샘물이 솟구칠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여기로부터 선한 결과물이 나온다.
우주는 선한 방향으로 모든 것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27.당신은 3단 논법, 재물, 명성, 향락,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 경험을 갖고 있다.
즉 모든 지적인 것으로는 평안을 얻지 못한다.
과연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있다.
이 본성은 자신의 철학에 따라, 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행할 수 있는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의 원천이 되는 원칙들을 지니고 있으면 된다.
어떤 원칙들인가? 그것들, 즉 이성의 원칙들은 선과 악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것은 정의, 절제, 용기, 자유(우주와의 교감 안에서 누리는 자유)이다.
이것을 위배하면 에고적인 것이다.
28.알렉산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를 디오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와 비교해보라.
그들(철학자)은 사물과, 사물의 본질(이데아, 형상), 사물의 질료에 정통하였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들이
동일하였다.
그러나 앞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물들에 마음을 뺏겼으며, 얼마나 많은 것들의 노예였던가?
즉 철학자들은 우주와의 교감하는 관계에서 있었던 사람들이다.
반면 황제들은 영토를 정복했지만 그것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물질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29.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왜냐면 모든 것은 우주의 본성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당신이 하는 일의 본성을 잘 살펴보되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당신의 임무란 걸 기억하고,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지체 없이 행하며, 말을 할 때는 가장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을 말하되, 선의를 갖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정의, 절제, 용기, 자유라는 것을 지금 풀이해 놓은 것이다.
깨어있는 것은 우주와 교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가진 본성을 잘 살피고, 우주와의 관계의 위배되지 않도록 그 문제를 처리하라는 것이다.
자명한 것을 지체없이 행하고, 말을 할 때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다 유교 사상이 깃들어 있다.
유교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유교도 우주가 잘되는 방향으로 따르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해도 작은, 에고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은 우주적인 나를 생각하는 그런 철학이 필요한 때이다.
30.당신이 누구를 만나든지 즉시 자신에게 물어보라.
‘이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왜냐면 쾌락과 고통, 그리고 각각의 원인, 명예와 굴욕, 삶과 죽음에 대해 그가 그런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가 그런 행동을 하더라도 조금도 놀랍거나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 사람은 그 자신답게 이야기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주가 자신의 잘됨을 위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31.‘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이것을 하고 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이 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신과 만물의
원인과 관련시킨다.
우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우주의 유익이 되는 것인지 고찰하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단 한순간도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
32.‘어떠한 악이나 욕망, 혼란도 내 영혼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 내게는 있으며, 모든 사물을 볼 때 나는 그들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고 그 가치에 알맞게 사용한다.’ 자주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망상을 씻어내라.
자연이 부여한 당신의 능력을 상기하라. 정말 이런 능력이 내게는 있다.
에고의 생각이 이성에 침투하지 못하게 우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라. 우리는 우주의 원리에 따라 사물을 볼 때
그들을 어디에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알맞게 사용할 수 있다.
33.인간들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그들을 가르치거나 참아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주적 관계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회, 인간관계이다.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제자관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까지 그들을 가르친다. 가르치는 것이 우주의 선이 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주의 원리는 단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예수님은 성경의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첫째가 우주의 원리를 따르는 것, 둘째가 사람 사랑이다.
그래서 결국 33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전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해야 할까? 그것이 에고에 의해 내 로고스가 방해받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명상록 내용을 정리해 보자.
원자에서 우주가 나왔고, 그곳에 지구에서 인간이 생겼다.
우주에는 로고스라는 질서가 있는데, 그 조각이 인간에게 들어 있다.
스토아 학파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에고와 이성이라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성은 로고스와 교감하게 하는 도구이다. 우주와 교감하는 것을 명상의 자리, 은총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있다.
이런 관계를 우리는 시간에서 경험할 수 있다.
현재를 미세하게 자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영원이라는 것도 시간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찰나에서 영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찰나와 찰나가 마주칠 때 해탈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성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보았을 때, 사람이란 존재가 스토아 학파의 생각에는 에고, 즉 영혼육과, 로고스의 파편인 이성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우주, 또는 자연의 원리, 로고스가 있다.
그래서 이성적이라고 했을 때 우주와 우주의 파편이교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토아 학파는 이것을 은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는 우주라는 건 우주를 잘되게 하는 방향으로 항상 운동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주와 교감하는 사람은 대아적이 된다.
즉 자신 안에 있는 로고스의 파편이 우주까지 넓어져서, 한 사건을 볼 때도 우주적 견지를 가지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감이 이루어지면, 이 사람의 로고스의 파편 속에 우주의 원리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정의, 절제, 용기 등등의 덕목들이 생기게 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이것을 기준해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만일 나의 자아를 중심으로 한다면 내 원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를 이해하는 사람은 명상, 또는 묵상을 통해 자신의 이성으로 들어가 우주의 원리들을 적용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행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자신의 에고를 희생함으로 인해 우주가 잘 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바란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명상록으로 들어가 보자.
34.정의롭지 못한 것은 불경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성은 이상적인 동물들이 각자 역량에 다라 서로 해치지 않고 서로 돕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뜻을 위반하는 자는 명백히 신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정의와 경건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마가복음에는 고르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말이다.
십계명에 부모 공경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부모 공경을 하는데 하기 싫을 때 고르반이라는 말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그는 종교적인 형식은 따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불경건하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경건하다는 것은 정의가 우주의 원리,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정의를 지키지 않으면 불경건하다고 한 것이다.
‘나비’ 라는 말은 선지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선지자란 뜻은 하나님 말씀에 담지자란 말이다. 이스라엘 후기에 선지자들의 활동이 활성화되는데,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것을 질책하신다.
사람들은 모든 절기를 지키고 제사도 했다.
우상도 같이 섬기면서. 이들이 불경건했던 이유는 십계명 첫 번째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이 각을 세운 부분이 ‘외식’ 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외식은 형식만 갖추고 원리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35.남에게 죄를 짓는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또한 남에게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악하게 만드니, 결국 자신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36.현재의 의견이 이성을 토대로 하고 있고, 현재의 행동이 사회적 선을 지향하고 있으며, 현재의 마음이 일어나는
모든 일에 만족하고 있다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현재의 의견이 이성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우주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고, 사회적 선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가 그것에 만족한다면 주변의 어떤 환경의 변화와 상관없이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다.
만족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세상에 헤아릴 수 없는 욕심이 사람들을 멸망이라는 곳으로 밀고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37.가능하면 남의 행동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습관을 가져라.
말이 실현된다는 이야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누군가 행동할 때 그 사람의 말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안 된다.
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할 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해라는 것은 그 사람과 눈높이를 맞춰 서보는 것이다.
37번의 말은 일단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밑바탕이 무엇인지 깨닫고, 내 지식 체계가 어느 정도 되는지 보고 내 지식
체계를 내 바탕에 맞춰 주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되는 것이다.
38.이웃에 대한 사랑, 진실, 겸손, 그리고 자신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이성적 영혼’의 특징이며, 동시에 ‘법칙’의
특징이다.
따라서 ‘올바른 이성’과 ‘정의의 원칙’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제 결론을 확실하게 내린다. 이웃 사랑, 진실, 겸손, 자기 존중, 그것이 바로 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며, 동시에 그 개인이 살아가는 법칙이다.
그래서 올바른 이성과 정의의 원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하나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39.만약 당신이 지배적 능력으로부터, 감각에게 받은 인상, 다가올 사물이나 과거의 사물을 분리시키고, 자신을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완전히 둥글며 그 안에서 즐겁게 쉬는 구체처럼 만들어야 한다.
또한 당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면, 죽는 날까지 마음의 동요 없이 고귀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다이몬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원을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로 이해했다. 즉 에고라는 부분을 통해 우리는 방해를 받는데, 우주의 교감을 통해 이 에고를 분리시켜서 우주와의 교감이 온전한 원을 그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우주와 교감하며 지금 이 순간의 삶의 최선을 다한다면 장래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우주의 원리, 즉 신의 뜻에 합하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기에 전혀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스토아 철학의 가장 골자가 되는 사상이고, 모든 종교 활동 속에서 영성, 영성 훈련이라는 것은 이것을
전제로 한다.
-명상록, 올곧은 삶에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책
마르쿠스는 골치 아픈 국정 수행 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명상록이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책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까지도 전부 모아 놓은 책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 왔다.
그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 목표를 추구했으며, 사색 속에서 에고가 덧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에 그는 어떤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 병고에 시달렸다. 책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불안한 그의 진솔한 내면과,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 것이다.
명상록은 오랜 세월 동안 역사상 위대한 책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했지만 스토아
학파의 도덕 철학이고, 에픽테토스(마르쿠스의 노예이자 스토아 철학자)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이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이성의 일부이기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던져진다 해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주와의 교감 속에 있고, 그것이 원만한 원을 그리고 있다면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그 교감을 허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는 성령님과 교재하고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한편 마르쿠스 사상의 몇몇 측면은 플라톤에 가깝지만,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 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
학파를 벗어나지 않았다.
플라톤주의의 핵심은 영혼론에 들어가 있다. 플라톤은 영혼이 윤회하면서 불멸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는
영혼 불멸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성, 즉 로고스가 영원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한 인간의 고매한 양심이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기록한 산 증인이다.
넓은 대륙은 우주의 한 줌이며, 영원 속에 한순간에 불고하듯, 만물은 끊임없는 변화와 유전을 거듭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도 육체적 욕망에 몸을 맡기지 말고 불굴의 의지로 국가 안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
본연의 의무라는 스토아적 도덕성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Chris Spheeris - E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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