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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플라톤 철학의 선-형이상학적인 구조

 

 

 

 

 

 

 

 

 

 

 

 

 

 

 

 

플라톤 철학의 선-형이상학적인 구조

 

윤병렬

 

 

 

플라톤의 철학은 일목요연하게 설명되거나 쉽게 요약되지 않는데, 그것은 그만큼 깊고 광범위하며 복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한쪽 면만 부각시킨다면 얼마든지 "로고스 중심주의"(데리다)나 인식론이며 존재론이나 신화론, 나아가 관념론이나

형이상학으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일면적인 것을 마치 플라톤 철학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다면, 이는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슈텐쩰(Julius Stenzel)과 같은 플라톤 전문가는 플라톤 철학의 다각도성과 전체적인 면을 읽지 못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으며, 또 이와 유사하게 보어만(Karl Bormann)나중에 자세히 논의하겠지만플라톤의 철학의 사고단초는 늘 새롭기에 획일적이거나 일률적인 체계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되며, 심지어 아주 진지하게 보이는 것도 엄밀하게

고찰하면 농간일 경우도 있음을 주지시킨다.

 

많은 철학사가들이나 철학의 전문가들도 플라톤 철학이 형이상학의 원조인 것처럼 아주 태연스럽게 지목한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그의 철학에서 어떤 일면을 부각시켜 형이상학이나 관념론과 짝을 짓게 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오늘날의 논리실증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현대의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마치 원죄와 같이 취급하는

 상황에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자연과학을 방법론으로 내세운 근대철학은 과학적수학적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면서 비과학적, 초월적, 관념론적, 비실증적인 철학을 부정적인 의미의 형이상학혹은 낡은 형이상학으로 치부하였고, 그렇게 치부된 형이상학은 실증주의자인 콩트를 비롯하여 계몽주의자인 볼테르 등의 철학자들로부터 20세기의 비인학단과 분석철학, 논리실증주의 및 경험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비판의 대상이었다.

 

 니체는 앞으로 논의하겠지만플라톤의 형이상학을 배후의 세계를 조장하는 학문으로 치부하며 그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특히 리오타르, 푸코, 데리다, 로티)망치를 든 철학자인 니체 못지않게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대해

공격적이었다.

 

또 칸트 이후부터 형이상학이 엄격한 학문적, 자연과학적인 옷을 입게 되자 하이데거의 플라톤 비판에 잘 드러나듯이이제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존재자 중심이고 사물존재론적”(dingontologisch)이어서 현대과학기술문명의 모체가 되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모든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난과는 달리, 그런 부정적 의미의 형이상학을 불식시키는 선-형이상학적인 구조가 확실히 존재함을 우리는 밝힐 것이다.

그의 철학에서 형이상학과는 대조적인 선-형이상학적인 구조를 규명한다는 것은 여간 큰

기획이 아닐 것이다. 그런 기획이야말로 이때까지의 플라톤 철학 연구에서 거의 없었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이런 선-형이상학적인 구조는 분명하며, 논의를 통해 우리는 분명히 밝힐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비록 깊고 광범위하며 복합적이지만, 그러나 그의 핵심적인 철학의 성격 또는 사상의 윤곽을 보여주는 플라톤

자신의 비유적 설명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대화록 국가에 나오는 세 가지의 유명한 비유인 것이다. 즉 잘 알려진 태양의

비유”(Sonnengleichnis)의 비유”(Liniengleichnis) 동굴의 비유”(Höhlengleichnis)이다.

 

비유는 어떤 비가시적이면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세계를 해명하고 밝힐 때 동반된다. 이를테면 노자는 최상의 선을 설명하기

위해 물의 비유를 사용한다: “최상(最上)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모든 생물에 이로움을 주면서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즐겨 있다.

그런 까닭에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또 이와 같이 老子道德經4장에선 도는 빈 그릇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얼마든지 퍼내서 사용할 수 있다.

또 언제나 넘치는 일이 없다..”

신약성서에서의 예수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거나 천국의 비밀에 관해 물어왔을 때, 항상 비유로 설명해주었다. 가시적인 현상계에 속한 인간들로서는 넘을 수 없는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독특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플라톤의 철학을 배후세계”(Hinterwelt)의 형이상학이라고 치부해버리고서 현실을 외친 니체를 비롯해 경험론자들과 실증주의자들은 눈앞의 현실을 주목하라고 외쳤지만, 그런 눈앞의 현실은 그러나

우리 인간의 궁극적이고 심층적인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대안이나 답변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위에서 언급한 세 비유들 속에서 그의 선-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윤리학적 사상 전반에 걸친 기본성격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특히 태양의 비유에서는 선-형이상학적인 근본모델을 보게 하며, “선의 이데아이데아및 앎과 진리의 역할을 태양과 빛의 비유를 통해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비유는 어떤 배후적인성격을 띤 형이상학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생리학적이라고 할 만큼 자명한 것이다.

 

 

 

 

 

 

 

 

2. 플라톤 철학과 형이상학 논쟁

 

 

흔히 사람들은 플라톤이 엄격한 형이상학의 개념을 규명하고서 그에 대한 방대한 체계를 세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월쉬도 지적하듯이 소위 반형이상학적 논객들이 생각하는 표준적인 형이상학 개념은 암암리에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숙고하면 플라톤은 그런 부정적인 형이상학을 건축하거나 형이상학의 체계를 세우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철학일반과 뚜렷이 구별지어 형이상학의 개념을 규정지은 일도 없고, 또한 어떤 특별한 사상적 체계를 세운 일도 없다.

단지 그에 의해 아카데미의 교육용으로 쓰여진 여러 대화록으로부터 후세의 사람들이 체계를 만들고 이론화작업을 한 것이다.

 

잘 알려진 바처럼 형이상학”(ta-meta-ta-physika)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유래했는데,

 이 저서명도 그가 붙인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오늘날 철학적 사유에서 형이상학은 그 이름만으로도 낡고 독단적인 것으로(칸트),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과학적인 것

으로 터부시되며, “형이상학의 위상이란 아주 구시대적인 사이비-학문정도로 취급된다.

 

마치 낡고 케케묵은 고물이나 마차의 5번째 바퀴처럼 필요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편이며, 오히려 우리에게 탈형이상학

이라거나 반형이상학이란 용어가 더 친근하게 들릴 것이다.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형이상학의 역사는 기괴망측한 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앞서 간 철학이 여지없이 (‘낡은’)형이상학의 카테고리에 묶이고, 또 그 다음의 세대는 이전 세대의 철학을 자꾸만 (‘낡은’)형이상학의 영역에 가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칸트는 플라톤을 포함한 고대의 철학과 근대의 관념론적인 라이프니츠 철학까지도 낡은 형이상학의 카테고리에

넣어 비판했으며,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또 다시 현대철학을 여는 철학자들에게서 주요 비판대상이 되어 부정적 의미의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밀리게 되었다.

 

 특히 니체는 이들의 철학을 형이상학이라고 보고서 그런 배후의 세계” (Hiterwelt)를 조장하는 형이상학에 대해 극단적인

알레르기 현상을 일으켰다.

 

20세기의 하이데거는 니체에게서 한편으로 형이상학의 종말(Ende der Metaphysik)을 보면서도 그의 철학이 여전이

근대적인 형이상학, 가치와 의지의 형이상학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하는데, 그에게서 형이상학이란 한마디로 존재망각의

학문에 불과하다.

이미 자연과학을 방법론으로 내세운 근세철학은 특히 칸트의 철학에서 잘 드러나듯이소위 비과학적인 형이상학을 학문의

 법정에 세워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선고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전승된 형이상학은 줄곧 비과학적이라거나 비경험적 내지는 비실증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배척되고 터부시되기

 시작했다.

 

칸트와 흄 이래 형이상학적이라는 수식어는 경험주의자들과 볼테르(Voltaire), 헤르더(Herder),

버크(Burke), 실증주의자 콩트에 이르기까지 아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볼테르는 형이상학을 신학과 연관지어

 미몽에서 깨어나라는 구호로 공격했고, 버크와 헤르더는 형이상학을 현실과 경험세계와는 동떨어진 추상적 사변의 극치로

몰아붙였다.

 

또 흄도 이러한 맥락에서 강단 형이상학의 책들은 궤변과 환상만을 담고 있으므로 불살라버려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반-칸트와 반-헤겔의 철학이 전개되면서 반형이상학의 태도도 뚜렷하였다.

20세기 초부터 비인학단(Wiener Kreis)과 분석철학, 논리실증주의와 경험주의철학 등도 거세게 반형이상학의 슬로건을

 내걸고 형이상학 타도에 나섰으며, 후설의 전기 현상학 역시 선험적 현상학이란 칭호를 갖는데도 현상학의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강조한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 못지않게 형이상학에 대한 극단적인 알레르기 현상을 일으키는 부류는 니체와 그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나아가 하이데거일 것이다. 마치 전승된 형이상학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라도 하듯 혹은 원죄를 뒤집어씌우듯 니체와 하이데거,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특히 데리다와 리오타르 및 푸코와 로티)은 형이상학에 적잖은 적개심을 품었다.

 

 

니체가 플라톤의 철학을 공격한 것은 칸트를 비롯한 그 누구보다도 극단적이어서 그 강도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니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이고 강력한 영양공급원이라면 그의 소크라테스-플라톤을 필두로 한 서양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곧 이어지는 하이데거와 아도르노며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가 감행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니체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플라톤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니체의 플라톤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논의하고 재비판하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전적으로 뒤집은 플라톤주의혹은 플라톤주의를 뒤집은 것”(umgedrehter Platonismus)이라고 규명함으로써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자임을 자처했다.

 

또 이와 유사하게 니체는 우상들의 황혼에서 플라톤을 비꼬는 의미로 그를 관념론의 원조라고 규명하였고, 칸트가 구분한 현상계와 본체계(noumenon)며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전제로 하는 모든 철학을 플라톤주의적인 혐의로 덮어 씌었다.

그리하여 자신이야말로 끝내 이러한 관념론을 파기시킬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으며 플라톤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때까지

(bis hin zur Schamröte Platos) 그가 만든 세계가 니체에 의해 철폐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니체에게서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인간의 전형(Typus des theoretischen Menschen)”으로서 그리고

 이론적 낙관주의자의 원형(Urbild des theoretischen Optimisten)”으로서 그의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주로 부정적인 의미의 주지주의와 도덕지상주의의 화신으로 등장하여 고대 그리스 비극의 지혜와 문화를 말살시킨 인물로 구체화 된다.

 

니체는 끊임없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비극의 죽음(Tod der Tragödie)”디오니소적 비극의 해체(Zersetzung der

 dionysischen Tragödie)”디오니소스의 적대자(Gegner des Dionysos)”와 같은 선고를 서슴없이 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소크라테스를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비극적 세계이해의 무덤 파는 인부(Totengräber)”로 만들었다.

 

니체에 의하면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적대자로서 고대 희랍적인 것의 타락 혹은 반-고대

희랍적인(anti-antik) 데카당스에 속하며 이들에게서 허무주의의 원천이 시작된다고 한다.

니체에 의하면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적 비극의 예술적이고 감각적이며 충동적인 세계해석을 지성(Intellekt)과 도덕에 의해

구축한 형이상학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척자로 자처한 니체의 플라톤 비판은 주로 플라톤 철학의 소위 형이상학적인 요소, 배후세계”(Hinterwelt)

 보이는 이데아 형이상학에 집중되는데, 이런 형이상학적 플라톤주의를 니체는 기독교와 결부시킨다.

 니체는 플라톤에게서의 이데아를 철저하게 사이비-실제정도로 평가절하 한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이 실제를 초월하여 사이비-실제(Pseudo-Wirklichkeit)의 근저에 놓여 있는 이데아를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된다고 비난한다.

 

물론 플라톤의 입장에선 이런 니체의 사이비-실제와 같은 표현은 모독에 가까우며, 몰이해의 소산일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는 참된 존재의 성격을 갖고, 이런저런 다변적이고 생성소멸하며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현상들과는 다르게 항구적이고 보편적이며 본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데아는 그러나 현상에 이원론적인 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상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요청된 것이다. 그것은 현실세계의 개별자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개별자를 아우르면서 개별자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비가시적인 보편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때껏 니체가 플라톤의 철학을 배후세계와 관련된 형이상학으로 본 것에 관해 되도록 그의 입장을 반영하였는데,

 물론 그의 주장과 비난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이 논문의 테마에서 벗어나기에 여기선 다음의 장()을 통해 플라톤의

철학이 결코 배후세계의 형이상학이 아님을 보이는 데만 주력한다.

 어쩌면 하거(Hager)가 지적한 대로 니체야말로 플라톤의 철학을 아주 심각하게 오해했거나 곡해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 이후, 하이데거와 포스트모더니즘 및 포스트구조주의자들도 플라톤 철학을 형이상학이란 원죄를 낳은 당사자의 차원에서 비판하고 있다.

 

 하이데거에게서 형이상학이란 개념도 거의 사유의 원죄와 같은 누명을 쓰게 된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인들에게 살아있는 시원적 사유(Anfängliches Denken)”며 존재사유가 사라진,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인 것이고

또 그런 형이상학은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망각에 처한 서구 형이상학의

 시발점을 플라톤에게서 찾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하이데거의 섬뜩한 진단은 많은 논쟁을 불러오며, 수긍할 수 없는 부분 또한 많다고 여겨진다. 또 데리다도 서구의 사유가 현전의 형이상학과 로고스중심주의(이성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라고 보는데, 그런 것도 플라톤에게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리오타르는 더욱 곤혹스럽게도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이론적 테러의 본질이 들어 있다고 보고, 이를 정치 이데올로기적 전체주의와 관련짓고 있다.

 

과연 플라톤은 니체의 비판처럼 배후세계”(Hinterwelt)만 조장하고 디오니소스의 세계를 파괴했는가? 과연 그는 하이데거의 비판처럼 시원적 사유(Anfängliches Denken)”와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를 존재로 오인했는가?

과연 그는 데리다의 비판처럼 현전의 형이상학자이고 로고스중심주의의 창시자인가?

 

 혹은 리오타르의 지적처럼 그는 과연 이론적 테러를 일삼고 정치적 전체주의의 원흉이 되었는가?

배후세계디오니소스의 파괴자”, “존재망각현전의 형이상학과 같은 모독성의 비난에 대해 그들은 앞으로 계속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의 철학이 상당히 복합적인 것을 읽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슈텐쩰(J. Stenzel)플라톤 사유의 다각도성과 탄력적인 하모니’(palintonos harmonia)를 통찰하지 못하면 그의 철학의 통일성과 전체적인 의미를 위태롭게 한다

 경고한다. 보어만(Karl Bormann)도 위의 슈텐쩰과 유사하게 플라톤 철학을 접하는 이에게 각별한 유의사항을 주지시킨다.

 

그의 사유세계엔 로고스뿐만 아니라 마니아(mania: 광기)도 혼재하고 있으며 미토스와 파토스도 포괄되어 있다.

 도대체 이데아의 심층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다 파악되는가?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그를 섣불리 이성중심주의나 디오니소스의 파괴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3. 태양의 비유와 선의 이데아

 

철학사에서 우리는 빛의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 물론 이때의 형이상학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빛은 고래로부터 인류문명에서 많은 숭배를 받아왔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신비한 마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의 태양의 비유에서 빛의 의미와 그 역량 및 위상을 해명하는 데에 있어 빛의 형이상학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빛의 생리적 원리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 비유에서 빛이야말로 배후세계(Hinterwelt)”나 형이상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말하자면 현사실적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관념론의 영역이 아닌, 생리적 영역과 역학의 영역에서 그 전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이 논문의 주요 과제인 플라톤의 철학에서의 선-형이상학적인 구조를 밝히기 위해 국가(Politeia)에 나오는 태양의

 비유를 요약해보자. “선의 이데아와 태양 및 이데아(진리와 존재의 빛)와 빛과의 관계를 한 눈에 파악하기 위해 도식을

그리면 대체로 아래의 도표와 같다.

 

비유란 어떤 현상이나 관념(특히 비가시적인 것일 경우)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이기에, “태양의 비유는 선의 이데아와 이데아의 위상과 역할이 태양이며 빛과 빗대어진 것이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비유의 의미를 파악한다면, 우리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관념론이나 형이상학의 노력이 없이도

선의 이데아와 이데아의 세계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도식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태양이 가시계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눈의 시각과 (보여질 수 있는) 사물과 맺는 관계는

 선의 이데아가 정신계의 영역에서 (사물을 통찰할 수 있는) 예지(νος)(통찰될 수 있는) 사유의 대상에 맺는 관계와 같다. 태양이 보는 것(보여지는 것)의 원인인 것처럼 선의 이데아는 앎과 진리의 원인이다.

 

태양의 비유에서 태양은 선의 이데아의 자손(ekgenos, Sprößling)으로 파악되었다.

말하자면 태양은 선의 이데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감각계의 세계는 태양이 방출하는 빛에 의해 존재 가능하다.

 

 즉 빛은 감각계의 유기체에게 생성과 성장의 원인이며 영양공급원인 것이다.

그런데 빛 자체는 생성이나 성장은 아니지만, 생성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태양이 감각계(가시계: 可視界)에서 시각과 보여지는 사물에 관계하는 것처럼 선의 이데아는 정신계에서 이성과 존재며

사유의 대상에 관계한다.

 

 그러나 위에서 태양이 선의 이데아의 자손이라고 했으므로 가시계의 세계도 결국 선의 이데아영향 아래에 놓인다.

선의 이데아는 모든 다른 것보다 상위(시원, 원천, 근원)에 위치해 있으며, 또한 모든 다른 것들의절대적인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전제가 되고 시작을 보장하는 선의 이데아는 결코 배후의 세계”, 즉 형이상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배후적인형이상학과는 절대적으로 대조되는 영역, 즉 선-형이상학이고, 심지어 원초적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로서 선-자연학(πρὸ-τν-φυσικν)의 영역인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존재론적이거나 인식론적인 사건 이전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그 어떤 개념형성보다 먼저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런 영역을 우리는 선-형이상학의 영역이라고 규명하고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선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며 모든 정신계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인 것이다.

마치 태양이 가시계의 원인인 것처럼, 즉 태양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가는 빛으로 말미암아 시각의 인식가능성을 야기하는

 것처럼 선의 이데아는 그로부터 방출하는 진리의 빛으로 이성의 인식가능성을 야기하는 것이다.

 

존재론의 영역에도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태양과 빛의 관계가 보여 주는 것처럼 선의 이데아와 이데아

(존재며 진리)는 그 하는 일(역할)이 비슷하지만, 근원성과 존엄성 및 위상에서 서로 차이를 드러낸다.

 

선의 이데아는 존재와 진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태양이 빛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자신에게서 발원된 이들을 통해서 정신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태양이 생성과 성장이며 영양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제공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의 이데아는 이데아의 세계를 통해 정신계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들은 신적인 근원을 갖고 있으며,선의 이데아아주 어렵긴 하지만(mogis horasthai)태양이 보여질 수 있는 것처럼 예지(νος)를 통해 인식될 수 있다.

플라톤은 명백하게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그의 태양의 비유에서 제시했다. 물론 선의 이데아아주 힘들게 보여지기에”(mogis horasthai)신적인 도움이 동참하는 사건이다”(theia moira)고까지 플라톤은 역설한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굴의 비유에서 밝히듯 동굴의 세계를 벗어나면 그 인식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데아의 세계는 이 세계를 인식할 능력을 갖춘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그러나

특별히 무슨 미스터리 같은 신비가 아니다.

 

 진리를 인식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이데아의 세계(진리 또한)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준비된 모든 사람에게(!)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단계에 있어야 하기에, 더욱이 그런 (선의) 이데아가

비가시적인 세계에 존재하기에, 만약 우리 인간을 출발점으로 그것이 인식되어져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배후의 세계”(Hinterwelt)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기실 인식이 이루어지는 모든 단계에 마치 태양과 빛이 생성계에서 이미 사전에 작용된 것처럼

이미 선의 이데아는 그 좋은(agathon)’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4. 빛의 인식론적-존재론적 속성

 

빛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선천적으로 이타주의적이다. 빛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속성도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코스모스에서 빛의 존재가 거의 절대적인지 기독교의 신()은 그의 창조 작업에서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였다.

 신은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이 있어라고 명하였고 따라서 별도로 어둠이 있어라라고 하지 않고빛과 어둠을 구분하고

낮과 밤을 나눈 것이다.

 

 여기서 어둠은 빛과의 상관관계에 의해 존재하며, 빛의 결핍이 곧 어둠임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 빛은 코스모스를 흑암

 카오스로부터 구분해내는 결정적인 사항임이 명백해진다. 따라서 카오스가 아닌 코스모스에서는 빛의 존재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빛은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빛은 볼 수 있는 기관()을 가진 생명체에게 볼 수 있게 하고, 사물에게는

보일 수 있도록 한다.

즉 말하자면 빛은 사물을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사물을 중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빛의 매개가 없다면 아무리 눈과 시력이

뛰어나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눈이라는 기관은 빛의 중매가 있어야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이 사물이 우리의 눈에 보여질 수 있도록 빛의 도움을 받아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빛이야말로 스스로 보는 눈도 아니고 보여지는 사물도 아닌 제 3자이지만, 사물을 보고 인식하게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근본원리이다.

이처럼 빛이 사물들을 자신의 공간 안으로 데려오며 또 사물들이 보이게 하고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도록 중매하는 빛이야말로

이 모든 인지과정에서 미리 전제되는 것임이 명백하다.

 

 빛이 마련한 인지가능성의 공간이 없다면 인간이 사물을 보고 또 사물이 보여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토록 미리 앞서

전제되고(voran-voraussetzend) 미리 앞서 존재하는(voran-seiend) 빛으로부터 우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의 선-

형이상학적인(vor-metaphysisch) 구조를 확실하게 목격할 수 있다.

 

빛을 보낸 이가 태양이므로 태양은 이러한 인식가능성과 인식의 사건이 일어나는 데에서 가장 먼저 전제되고

(voran-voraussetzendst) 또 가장 먼저 존재하는(voran- seiendst) 존재자인 것이다.

인식과 인지의 현상이 일어난 사건엔 빛이 미리 앞서 전제되었기에, 어떤 경우에라도 인지가능성을 부여한 빛의 세계를

배후의 세계” (Hinterwelt), 즉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시각을 인식현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해도, 저 빛의 세계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미숙하고 부당한 인간중심주의인 것이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빛은 무릇 생명체들의 성장과 생존의 원인이며 또 그런 면에서 성장과 생존에서 빛은 전제가 된다.

 

 모든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생존하는 데에 필수불가결적으로 전제되는 빛이야말로 미리 앞서 전제되고

(voran-voraussetzend) 미리 앞서 존재하는(voran-seiend) 것이다. 빛을 보낸 이가 태양이므로 태양은 이러한

존재가능성과 존재사건이 일어나는 데에서 가장 먼저 전제되고(voran-voraussetzendst) 또 가장 먼저 존재하는

(voran-seiendst) 존재자인 것이다.

 

여기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철학에서의 선-형이상학적인 구조가 명확히 밝혀지는 것이다. 이토록 미리 전제되는 빛을 결코 관념론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의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이며 윤리학적인 측면은 굳이 증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현사실성(Faktizität)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비유에서 빛과 태양의 관계는 이데아와 선의 이데아와의 관계이기에, 모든 정신계의 현상이 일어난 곳에 이미

 이데아와 선의 이데아가 전제된 것이다.

미리 앞서 전제된 이데아와 선의 이데아에서 우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의 선-형이상학적인 구조를 읽는 것이다.

이토록 미리 앞서 전제되는 사태를 통해 우리는 결코 배후의 세계”(Hinterwelt), 즉 형이상학을 구축할 수 없는 것이다.

 

인식론에서는 현상계의 문제든 혹은 정신계의 문제든 보는 것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은 인식론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은 우리의 감각기관 중에서 다른 기관에 비해 아주 특출한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세상을 밝히는 빛과 인간의 시각기관()태양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ἡλιοειδή)이라고 했다.

또한 정신적인 세계도 플라톤이 그의 태양의 비유로 잘 설명하듯이 영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ἰδέα)

혹은 에이도스’(εδος)는 그 동사형이 이데인’(ἰδεν)이고, 이는 힐끗 보다의 뜻을 가진 호란’(ὁϱν) 또는 블레페인

(βλέπειν)에서 파생된 것이다.

 

또한 지금은 이론’(Theoria, Theory)이란 말로 변질되어버렸지만, 이 개념의 원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테오리아’(ϑεωϱία. 동사형: ϑεωϱεν)인데, 이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직관이나 본질직관에 사용된 용어로서 대체로 꿰뚫어보는 인식경탄으로 관조하는 것’(ϑεσϑαι)으로 번역된다. 이토록 인식론의 주요한 개념들은 시각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동양의 노자도 그의 도()-인식을 설명하는 데에 시각적인 ’()을 사용하였다. 노자는 본다라는 개념을 자주 쓰고 있다.

 노자도덕경의 제 16장에는 나는 그 생동하는 만물들이 다시 정적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다()”라고 하고,

또 제 1장에는 “... 지극히 미묘한 것을 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노자가 노자도덕경의 제 1장에서 현묘한 세계를본다()”라고 하거나 창밖을 엿보지 않아도 천도(天道)

본다()”(노자 제 47)라고 할 때의 관()은 심오한 정신적인 통찰로서, 이는 플라톤적인 이데인(idein)과도

흡사한 것이다. 또 우리 속담에서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언표는 보는 시각이 듣는 청각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함을

나타내고 있다.

 

 

 

 

 

 

 

5. “선의 이데아와 선-형이상학

 

적어도 플라톤에게서 참된 존재로서의 이데아의 세계는 비물질적이고 영원불변하는 존재로서 모든 실제의 원형(Urbild)이고, 이러한 원형에 따라서 가시적인 세계의 대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데아가 가시적인 세계와 무관하게 배후의 세계”(Hinterwelt)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세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아는 그 자체로, 즉 우리의 인식이나 사고의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의도적인 노력과

의식에 의한 정립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깨어 있는 의식에 의해 인식될 따름이다.

 

여기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 인식현상이 일어난 곳에는 이미 배후’(hinter)가 아니라 오히려 앞서서작용한 이데아의 세계가 전제된 것이다.

또 이 앞서서작용한 이데아 이전에는 플라톤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선의 이데아가 근원으로서, 또한 존재의 목적과 원천으로서 핵심의 위치를 자리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마치 가시계에서 태양이 가시적인 것에 보여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인식론적), 또한 태양 자체가 생성도 아니고 생성되지도 않지만 생성과 성장이며 삶의 자양분을 부여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의 이데아는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이 가능하게 되는 것도 선의 이데아로 인해서인 것이다.

 

그러기에 태양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듯 선의 이데아로부터 이미 존재와 인식의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이든 인식하는 곳에는 선의 이데아가 활성화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선의 이데아의 도움이 인식하고

 인식되는 모든 과정에서 이미 앞서서 작동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지혜를 터득하여 이데아 세계의 배후를 묻기 전에 확실하게 전제되었기에 플라톤의 철학을 배후

강조하는 형이상학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인간중심주의인 것이다.

그러기에 플라톤 철학의 올바른 이해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에 앞선 선-형이상학인 것이다.

 

대체로 존재론이나 (긍정적 의미로서의) ‘형이상학에서 전제들이란 그 어떤 것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고, 또 논리적 귀결로서

귀납될 수도 없으며, 경험에서 추출되거나 경험적으로 확립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필수불가결하며 절대적인 지평이고 토대이며,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들에 대해선 더 이상 참과 거짓을 판별할만한 척도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전제들은 진위의 틀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나 노자의 도()는  자신은 더 이상 전제를 요하지 않으면서(Anhypotheton) 만물의전제가 된다.

 

플라톤에게서 순수하고 영원하며, 불멸하고 초시간적인, 생성되지 않고 불변하는 그런 존재는 존재론-이전에

(vor-ontologisch), 즉 인간적인 로고스로서 존재와 관련된 그 어떤 작업 이전에 그리고 그 어떤 개념적 규명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가진 존재는 마치 즉자적 특성을 가진 진리 그 자체(Wahrheit an sich)”와도 같이 우리 인간 안에(ἐν μν)

있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장소에 스스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진리의 본질이 우리가 이를 인정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우리가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든 혹은 그쪽으로부터 등을 돌리든

개의치 않고 존재하는 것과도 같이 존재의 존재방식 또한 그러한 것이다.

 

심지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Gorgias의 테제)고 주장하는 회의론자를 위해서도 이미 그리고 언제나 존재는 현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진리보다 더 오래된 것은 없다.

 

 이 존재의 진리를 통해 드디어 역사적이고 활동적인 진리의 차원이 개시되는 것이다. 존재의 진리는 그렇다면 명제적 진리

(Satzwahrheit)를 발현하게 하고 존속하게 하며 진리가 시간에 의해 변조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선의 이데아는 만물의 근원(ἀρχή)이고 원인(ατα)이며, 모든 사물에게 존재근원을 부여하고 발생하게 하며 존재하도록 그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παρασχομένη).

 

그러기에 진리와 존재며 인식이라는 것도 이미 선의 이데아의 근원에서 발원되어 그와 닮은 모습(ἀγαϑοειδῆ)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이데아에서 발원한 비춤(Lichtung)이 없이는 존재와 진리, 앎과 인식 및 이해는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것으로서,

 “선의 이데아가 이들을 열고 비춤으로 말미암아 비은폐의 지평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선의 이데아는 그 존엄성과 역량에서 존재자의 존재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사물들에게 대상성을 부여하고 보여지도록 하는 선의 이데아는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 존재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선의 이데아는 그러나 결코 어떤 관념이나 개념 및 종속(Gattung)이 아니고, 또한 어떤 생각과 표상에 의해 구성된

구성체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인식 이전에 벌써 작용하고(vorgeschalten) 척도를 제공해주는 근원인 것이다.

 

말하자면 선의 이데아는 스스로 무전제(Anhypotheton)이면서 타자들의 전제가 되는, 아직도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의 지평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가다머(H.-G. Gadamer)도 플라톤의 철학에 입각하여 선의 이데아에 대하여 온당하게 인식하고 있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가 모든 존재자의 원인이기 때문에 존재자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고 말한다: 선의 이데아는 모든 것의 존재근거이고 또한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한 인식근거이다. () 선의 이데아는 모든 정의로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그렇게 좋은

(agathon) 것으로 하며, 그리하여 그런 정의로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그런 존재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때껏 고찰했듯 선의 이데아시원적으로 여는 자(das uranfänglich Eröffnende)”이고 그 무엇보다도

 앞서 존재하는 자(das Vorwesende)”로서 가장 앞서서 기초를 제공하는 요인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플라톤의 철학이 배후세계(Hinterwelt)”로 비꼬아지는 형이상학(Metaphysik), μετὰ-τὰ-φυσικά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자연학에 앞서서 자연학을 가능케 하는 -자연학”(πρὸ-τν-φυσικν)이며, “-형이상학

(Vor-metaphysik)”인 것이다.

 

선의 이데아는 결코 어떤 사유로 획득되는 성과가 아니며, 더더욱 형이상학에 의한 고정된 개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배후세계(Hinterwelt)”에 남아있는 존재자가 아닌 것이다.

 

 

 

 

 

 

 

 

 

6. 나오는 말

 

철학사에서 형이상학은 그 이름만으로도 낡고 독단적인 것으로,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이며 구시대적인 것으로

매도되고 터부시되어왔지만, 더욱이 많은 철학자들, 특히 반-형이상학과 탈-형이상학의 논객들은 플라톤의 철학을 형이상학의

 원조로 지목하여 그 책임을 물어왔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획이 결코 온당하지 않음을 파악해보았다.

 

논의를 전개하면서 칸트로부터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과 형이상학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을 요약해보았는데, 기괴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앞서 간 철학을 후계자들이 여지없이 경멸조로 낡은형이상학의 카테고리에 묶고, 또 그 다음의 세대는

그 이전 세대의 철학을 또다시 매도하면서 낡은형이상학의 영역에 가두는 것이다.

 

특히 니체는 플라톤의 철학에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를테면 플라톤의 철학이 배후의 세계를 조장하는 형이상학이라는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플라톤 철학의 선-형이상학적인 구조를 밝히는 것이 주요 테마이기에, 말하자면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변증하거나 옹호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니체의 비난에 대한 정당성 여부에 관해 검증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일방적인 그의 비난이 온당하지 않음을 언급했었다.

 

본론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태양의 비유와 빛의 인식론적-존재론적 속성을 통해 그의 핵심적인 철학의 내용이 선-형이상학

(Vor-metaphysik)이고 선-자연학(πρὸ-τν-φυσικν)적이라는 것을 밝혔다.

 “태양의 비유에서 비유는 어떤 사변적인 이론도 관념론도 형이상학도 아닌, 태양과 빛의 생리적 원리로써 플라톤 철학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밝히는 데에 아주 적절한 양식이다.

 

사물들을 보는 곳과 사물들을 인식하는 곳에, 또 생명체들이 생성과 성장을 이룩하는 곳에 빛은 미리 앞서 전제되고

(voran-voraussetzend) 미리 앞서 존재하는(voran-seiend) 것이고, 나아가 태양은 가장 먼저 전제되고

(voran-voraussetzendst) 또 가장 먼저 존재하는(voran-seiendst) 존재자로 드러난다.

 

이 태양의 비유는 플라톤의 철학이 배후의 세계”(Hinterwelt)를 조장하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오히려 선-형이상학적인

(vor-metaphysisch) 구조를 밝혀주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이 정신계에서는 이데아와 선의 이데아가빛과 태양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껏 경멸적 의미로 사용되는

형이상학에 대한 책임을 플라톤에게 묻는 철학자들의 소행은 중단되어야 한다.

 

 

 

 

 

 

 

Jean Philippe Audin - Toute Une Vie (일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