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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피아노 비르투오소이자 작곡가였으며 여성 편력도 화려했다.
그러던 그가 50줄에 들어서는 가톨릭의 성직자가 되었다. 이처럼 그는 무어라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다양한 속성을 보여주었던 음악가였다.
그러나 그 소설과도 같은 삶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속성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낭만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게 된다.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보면 그처럼 낭만적으로 살았던 인물도 흔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리스트의 삶 이곳저곳에서는 낭만주의자의 체취가 짙게 배어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비르투오소로서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를 빛낸 위대한 작곡가 리스트를, 그에 대한 그 두꺼운 겉포장을
뜯어버리고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가 낭만주의 음악가의 전형일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고, 선입견의 이면에 가려진
리스트 음악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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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영웅광장의 야경
1.낭만주의 최고의 비르투오소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의 작은 마을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은 하이든이 악장으로
일했던 에스테르하지 가의 영지 관리인이자 후작의 궁정 오케스트라 첼리스트이기도 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하이든으로부터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리스트는
일찍부터 피아노를 공부했으며 9세 때 공개 연주회를 열어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 연주회에서 어린 리스트의 연주에 감동을 받은 그 지방의 귀족들은 그로부터 5년 동안 이 소년의 후원자가 되어주기로 한다.
그 덕분에 리스트는 일찍이 빈으로 가서 베토벤, 슈베르트를 만나볼 수 있었으며, 체르니로부터는 피아노를 배우는
한편 살리에리에게서는 작곡을 공부했다.
그 후 아들을 성공시키려는 열망에 들떠 있던 아버지는 리스트를 파리 음악원에 입학시키려고 파리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곳의 음악원장인 케루비니는 리스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미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혼자 피나는 연습을 거듭했으며 교양을 쌓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은 리스트는 그로부터 더욱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려는 열망을
불태웠으며 그것을 마침내 실현해냈다. 그리고 근대적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의 원형이 되었다.
당시 리스트에 관해 쓴 문헌들을 보면 그의 가공할 만한 피아노 테크닉, 파워, 그리고 시적인 표현력, 그리고 청중들을
사로잡는 뛰어난 쇼맨십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베를리오즈는 리스트가 연주한 베토벤의 ‘황제’를 듣고 이런 글을 남겼다.
“리스트가 장엄하고, 시적으로, 세련되고 충실하게 연주한다는 식의 얘기는 새삼스레 할 필요도 없다. 그는 청중들의
폭발적인 갈채와 오케스트라의 팡파르를 받았는데, 공연장 밖에서도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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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광장
2.파리의 낭만주의자
헝가리에서 빈을 거쳐 파리에 온 후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아온 리스트는 이미 약관의 나이에 파리 음악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미남이기까지 했던 그는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러던 중 마침내 리스트의 그 유명한 연애 사건이 터지고 만다. 남편과 아이들까지 있는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파리 상류사회가 이들의 내연관계를 용납하지 않자 결국 백작부인이 가족을 버리고 리스트와 스위스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이유는 화려한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의 도덕적 인습에 대한 낭만적인 항거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중 둘째 딸이 나중에 지휘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했다가 헤어지고 바그너의
아내가 된 코지마이다.
그럼에도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리스트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창작에 몰두했지만 청중 앞에서 음악가로서 화려하게 성공하려는 야망을 버릴 수 없었던 리스트와 작가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던 백작부인은 서로 공유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더구나 리스트는 백작부인의 성질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막내 다니엘이 태어난 1939년 무렵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당시 리스트는 이미 무희였던 로라 몬테즈와 염문을 뿌렸는데, 그녀는 바바리아의 국왕 루이 1세의 정부이기도 해서
리스트는 루이 1세 앞에서의 연주를 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리스트는 이외에도 화려한 연애행각을 벌였는데 알렉상드르 뒤마의 연인이자 소설 ‘동백꽃 아가씨’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마리 뒤플레시스, 그리고 유명한 피아노 제작자였던 플레옐의 아내인 마리 플레옐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일시적인 관계였고, 리스트에게 진정으로 애절했던 사랑은 단 두 번뿐이 아니었나 싶다.
첫사랑의 여인과 마지막 사랑이 되었던 카롤린 폰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리스트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만나면서 음악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비르투오소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접고, 보다 성숙한 낭만주의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의 남편이 이혼을 해주지 않았고 어렵게 교황으로부터 결혼 허가를 받아내지만 결혼식
날 허가가 취소되고 말자 결국 두 사람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다. 공작부인의 남편이 3년 후 세상을 떠났지만 두 사람은 다시 합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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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슈트반 대성당
3.성직자가 된 낭만주의자
1865년 쉰네 살의 리스트는 로마로 가서 신품성사를 받는다. 리스트는 성직의 일곱 가지 품계 중에서 네 가지 품계만을 받았다.
그는 미사를 집전할 수도 고해성사를 줄 수도 없었으며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성직을 떠날 수 있고 결혼도 가능한
신분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명예 수사신부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79년에 그와 친분이 깊던 호헨로 추기경에 의해 ‘알바노의 수사신부’로 승격되었다.
리스트는 처음에는 로마에 머물렀으나 호헨로 추기경의 배려로 에스테 별장에 기거하면서 작곡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리고 1869년부터는 로마의 수도원과 바이마르, 그리고 고향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생활을 했다.
로마에서는 수도자로서 종교적 성찰과 명상을 했으며, 바이마르와 부다페스트에서는 작곡가와 지휘자로서 활동했는데, 당시 리스트는 자신을 가리켜 ‘반은 프란시스코회의 수도사, 반은 집시’라고 말한 바 있다.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낭만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 리스트는 1886년 7월, 이미 세상을 떠난 사위 바그너의 작품을
보기 위해 바이로이트로 가서 ‘파르지팔’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한 후 딸 코지마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였으며 무수한 연애담의 주인공인 리스트. 그에 대한 이러한 얘기는 진실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면서 정작 작곡가 리스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흐리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위대한 음악가의 반열에 그를 세우는 데 반감을 느끼는 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쇼팽까지도 리스트의 작곡 능력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리스트가 남긴 대부분의 걸작들이 쇼팽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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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의 요새
4.낭만주의 음악의 결정체
리스트는 이전의 피아노 테크닉으로는 연주할 수 없는 상당히 기교적인 작품을 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교적인 작품만을 쓴 데 머무르지는 않았다.
자신이 피아니스트였기에 피아노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던 그는 쇼팽과 더불어 가장 피아니스틱한
음악을 썼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이전의 피아노 음악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음악적 질감과 음색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라는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단순한 화음에서 탈피했으며, 특히 반음계적인 코드를 사용하는 데 아주 능했다. 또 주제를 여러 가지로 변화시키는 주제의 변형 기법에서 탁월한 솜씨를 보였는데, 이러한 새로운 작곡상의 기법들은 그의 사위인 바그너를 비롯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더 나아가 20세기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만년에 씌어진 ‘순례의 해’ 같은 작품에서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인상주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를
예감할 수 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리스트는 교향시 분야에서 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 음악 형식은 베를리오즈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리스트가 여기에다 비로소 ‘교향시’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를 표제음악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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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 산책로에서 바라본 부다 성(Buda Castle)
5.낭만주의적 교양인 리스트
리스트는 피아노 스승인 체르니를 떠난 후부터는 혼자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그의 목표는 위대한 피아노의 비르투오소였기 때문에 피아노 테크닉을 연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만, 음악 외적인 교양을 쌓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32년 리스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다 호메로스, 성경, 플라톤, 바이런, 라마르틴의 책들을 열심히 탐독했다고 쓰고 있다. 독서 애호가로 알려진 그는 독서를 통해 음악가이기 이전에 문화인으로서의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리스트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 넓혀갈 수 있었다. 문학 작품에서 얻은 영감은 피아노 곡이나 교향시에 반영되었다.
하지만 리스트는 이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문학작품이 주는 여운과 느낌을 작품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다.
리스트는 프랑스 사교계의 인사가 되면서 많은 문화 예술계의 인물들과 교분을 나누었는데, 특히 프랑스 문화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리스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인, 음악적으로는 오히려 독일인, 내면적으로는
헝가리인”이라고 말이다.
1861년' 3월 8일 : <마을 선술집의 춤> (메피스토 왈츠 제 1번)이 바이마르에서 초연됨. 5월 : 뷜로우와 함께 남부 독일의 여러 도시를 방문함. 6월 22일 : <시편 제 18편>이 바이마르에서 초연됨. 8월 : '전 독일 음악협회 (Allegemeine
Deutsche Musikverein)' 창설을 위한 모임이 바이마르에서 열렸으며, 여기에 바그너와 코르넬리우스와 뷜로우도
참석함.
8월 17일 : 리스트는 바이마르를 떠나 베를린과 파리로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다구 부인과 재회함.
또 그는 롯시니, 구노, 알레비(Halevy)와 처음으로 만남.
그는 튈르리 궁전에서 나폴레옹 3세와 으제니 황후 앞에서 연주함.
10월 21일 : 로마에 도착함.
후작 부인은 이호 재가가 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결혼을 위한 준비가 진행됨.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교황은 이혼 허가를 취소함. 두 사람은 파리에 체류하면서 각기 따로 거주지를 정함. =작품= <성 엘리자베드의 전설>에 대한 작업 구노의 <파우스트> 중의 왈츠 출판 : <남성 합창곡집 (Fur mannergesang)>, 12곡 <축제의 함성>, 새로운 형태 <햇빛에 (An den Sonnenschein)>와 <빨간 장미 (Rotes Roslein)> (슈만), 피아노곡 1862년 9월 11일 :
블랑딘 올리비에가 사망함.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태양의 찬가>가 로마에서 초연됨. =작품= <성 엘리자베드의
전설> 완성 변주곡 <울음 고통, 괴로움, 두려움 (Weinen, Klagen, Sorgen, Zagen)> <레베르트와 슈타르크의
대 피아노 교본을 위한 아베 마리아 (Ave Maria fur die grosse Klavierschule von Lebert und Stark)>
<베이스 트롬본과 오르간을 위한 호산나 (Hosannah)> <자장가>, 두 번째 형태 <알렐루야와 아베 마리아
(Alleluja et Ave Maria)> <시스틴 성당에서 (A la chapelle Sixtine)>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태양 찬가
(Cantico del sol di Francesco d'Assisi)> <숲속의 속삭임 (Waldersrauschen)>과 <난쟁이의 춤
(Gnomenreigen)> 1863년 6월 : 리스트는 몬테 카를로의 마돈나 델 로사리오 수도회에 입회했으며, 교황 피우스 9세가 이곳으로 그를 방문함. <슬라비모 슬라브노 슬라베니>가 로마에서 초연됨. =작품= <구유에서의 양치기 노래 (Shepherds' songs at the Manger)>와 <세 동방 박사의 행진곡 (March of the three Holy Kings)> : <크리스투스
(Christus)> 중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다 (Christus is geboren)> <슬라비모 슬라브노 슬라베니 (Slavimo
Slavno Slaveni)> <스페인 랩소디 (Rhapsodie espagnole)> <전설 (Legends)> <살베 폴로니아
(Salve Polonia)> 편곡 : 베토벤 교향곡 제 1-4번과 제 8번 1864년 3월 : 로마의 자선 음악회에서 연주함. 7월
: 에스테 장으로 호엔로에 (Hohenlohe) 추기경을 방문하고, 그런 후 간돌포(Gandolfo) 성으로 교황을 위해 연주함.
8월 : 카를스루에의 '전 독일 음악협회' 회의에 참석함.
그곳에서 코지마를 만나고, 슈트란베르거 제(Sttanberger See)로 바그너를 방문함.
그는 바그너에게 를 연주해줌.
그런 후 뮌헨에서 카울바하를 방문함. 9월 : 바이마르, 베를린 및 기타 독일 도시들을 방문함.
그런 후 파리로 가서 다구부인과 재회함. 남부 프랑스를 경유하여 로마로 돌아옴.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의 남편이 3월에 사망함.
그러나 이제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음. =작품= <로마와 세계에 (Urbi et Orbi)> <밤 (La Notte)> 편곡 :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1865년 4월 15일 ; <죽음의 무도>가 초연됨.
4월 25일 : 호엔로에의 주관으로 리스트의 삭발식을 거행함. 리스트는 바티칸으로 들어갔으며, 이어 5월을 에스테 장에서 호엔로에와 지냄. 5월 25일 : <크리스투스> 중의 <주의 기도> 초연됨. 7월 30일 : 3개의 하위 성직을 수여받음.
8월 15일 : <성 엘리자베드의 전설>이 부다페스트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초연됨. 2개의 피아노곡 <전설>이 부다페스트에서 리스트의 연주로 초연됨. 9월 : 로마로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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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강에서 본 부다 성(Buda Castle) 야경
=작품= <피아노 곡 (piano pieces)> 제 1번과 제 2번 (S. 192) <크리스투스>에 대한 작업 : 도입부 (Intoduction), 목가와 수태고지 (Pastorale and annunciation), 아름다운 성모는 서 있도다 (Stabat Mater speciosa), 기적 (the Miracle), 예루살렘으로 들어감
(Entry into Jerusalem) 편곡 : <바이마르의 민요> <레지나 코엘리 (Regina coeli)> (라수스) <라코치 행진곡 (Rakoczy March)> (뷜로우) <아프리카의 여인의 일러스트레이션 (Illustrations de l'Africaine)> (마이어베어) 출판 : <암벽에서 바다까지>, 피아노곡 <시스틴 성당에서> <시바의 여왕 (Les Sebeennes)> (구노) 모차르트의 <레퀴엠
> : 판결이 내린 저주받은 자는 (Confutatis), 눈물의 날이여 (lacrymosa) <순례자의 합창> (탄호이저)
<크리스마스 송가 (Weihnachtslied)> 1866년 1월 4일 : <아름다운 성모는 서 있도다>가 로마에서 초연됨. 2월 6일 : 리스트의 어머니가 파리에서 타계함. 3월-4월 : 파리를 방문함.
다구 부인과 최종적으로 결별함. 리스트는 성 클로틸스 (Ste. Clothilde)에서 프랑크의 연주를 들음. =작품= <탓소의
슬픈 개선 (Le Trimphe funebre du Tasse)> <크리스투스> 완성 <헝가리 대관식 미사 (Hungarian Coronation Mass)> <죽은 자들 (Les Morts)>에 남성 합창이 첨가됨.
<피아노곡 A 장조 (piano piece in A flat)> (S. 189) 편곡 : <성 세칠리아에의 찬미가 (Hymme a Ste. Cecile)> (구노) <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 출판 : <단두 대에의 행진 (Marche au supplice)>과 <순례자의 행진
(Marce des pelerins)> (베를리오즈), 새로운 형태들 <비창 콘체르토> <요정의 춤> (베를리오즈) 1867년 6월 8일 : <헝가리 대관식 미사>가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됨.
7월 6일 : <크리스투스> 중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로마에서 초연됨. 8월 : 만하임을 거쳐 바이마르를
방문했는데, 이곳에서 <성 엘리자베드의 전설>이 무대에 올려짐. 그런 후 트립센(Triebschen)으로 바그너를 방문하고, 10월에 로마로 돌아옴.
=작품= <크리스투스> 중의 <교회의 초석 (Foundation of the Church)> <헝거리 대관식 미사> 완성
<장송 행진곡 (Marche funebre)>, 멕시코의 맥시밀리언 황제를 추념함.
<제플 일론카에 의한 판타지 (Fantasy on Szep Ilonka)> (모소니) 편곡 : <사랑의 죽음 (Liebestod)> (트리스탄) <헝거리 대관식 미사> 중의 <베네딕투스 (Benedictus)>와 <오페르토리움 (Offertorium)> 1868년 6월 21일 :
교황 피우스 9세 즉위 20주년 기념일에 교황 앞에서 연주함.
7월-8월 : 그로타마레 (Grottamare)에서 솔파넬리 (Don Antonio Solfanelli)와 함께 지냈는데 그는 리스트에게 진지한 종교적 가르침을 베풀어 줌. 그런 후 리스트는 에스테 장으로 돌아감.
=작품= <크리스투스> 중의 , 새로운 형태 <레퀴엠 (Requiem)> <블로크빌 후작부인 (La Marquise de
Blocqueville)> <테크닉 연습곡집 (Technical Studies)>의 작업 시작 <고별 (Les Adieux)> :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의 모티프에 의한 환상곡 <돈 카를로스 편곡 (Don Carlos Transcription)> (베르디) 1869년 리스트는
바이마르로 돌아와 호프개르트네라이 (Gofgartnerei)에서 가르치기 시작함. 루빈슈타인이 이곳으로 그를 방문함.
5월 13일 : 가 레겐스부르크에서 연주됨. 9월 22일 : 바그너의 뜻에 반하여 뮌헨에서 공연된 <라인의 황금>을 관람함.
10월 17일 : <레퀴엠>이 르보프에서 초연됨. 겨울 : 에스테 장에서 체류함. 로마에서 그리그를 처음으로 만남.
=작품
= <베토벤 칸타타> 제 2번 (S. 40) <주의 기도> (S. 41) <아베 마리아> (S. 38) <아베 마리아> (S. 341) <남성
합창 미사곡>, 두 번째 형태 <시편 제 116편> <동정녀 마리아를 찬송하여 (Inno a Maria Vergine)> <성 스타니슬라우스 (St. Stanislaus)>의 초고 작업 슈베르트와 베버 소나타들의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