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의 진실,몰랐거나 오해했거나
[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아는 만큼 보이는 법, 아니 맛을 느끼는 법이다.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에도 수백 년의 역사와 의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초콜릿에 대해 오해하고, 몰랐던 사실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초콜릿 하나도 알고 먹어야 한다.
참고 문헌 <초콜릿 이야기 이국적인 유혹의 역사>(정한진 지음)
초콜릿은 카카오 열매의 씨앗으로 만든다.
이 납작한 아몬드 모양의 씨앗을 카카오 원두 혹은 카카오빈이라 부른다.
카카오 원두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초콜릿의 기원이 되는 중앙아메리카의 원숭이 덕분이다.
동물들은 과육의 달콤한 부분을 본능적으로 아는데, 원숭이들이 먹고 남긴 카카오 열매의 잔해물, 즉 씨앗을 원주민들이 음료로 이용한 것.
공식적으로 카카오로 만든 음료를 처음을 마신 것으로 알려진, 과테말라 유카탄반도에 살았던 마야족은 이 카카오
원두를 끓여 음료처럼 마신 것으로 전해진다.
카카오 원두를 볶아 껍질을 분리하면 카카오 닙스가 되는데, 이를 으깨어 반죽 형태의 카카오 매스를 만든다.
카카오 매스를 압착하면 카카오 버터가 분리되며, 남은 것을 분쇄한 것이 코코아 가루다.
카카오 매스에 설탕과 카카오 버터를 첨가한 후 입자를 더 곱게 만드는 일렬의 과정을 거쳐야 초콜릿의 원료가 된다.
[카카오 열매(위쪽)와 원두(아래쪽)]
다 같은 초콜릿이 아니다
시중에 파는 초콜릿을 보면, 카카오 고형분 함량이란 단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초콜릿, 준초콜릿, 초콜릿 가공품으로 나뉘는 다양한 제품들도 접할 수 있다.
카카오 고형분 함량은 무엇이며, 초콜릿은 왜 저렇게 다양하게 나뉘는 걸까.
카카오 고형분 함량은 무지방 카카오 고형분(카카오 매스에서 지방을 제거한 부분)과 카카오 버터를 합한 양을 뜻한다. 하지만 카카오의 진짜 성분들, 즉 몸에 좋은 유효성분들은 카카오 매스에 함유됐으니 카카오 고형분 함량이 높다고
해서 좋은 초콜릿이 아니라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의하면, 카카오 고형분 함량 30% 이상(무지방 카카오 고형분 12%, 카카오 버터 18% 이상)을
초콜릿이라 부를 수 있다.
카카오 고형분을 25% 이상(무지방 카카오 고형분 2.5% 이상) 함유하고 유고형분이 12% 이상(유지방 2.5% 이상)인
것을 밀크 초콜릿, 카카오 고형분 함량 7% 이상인 것을 준초콜릿이라 명칭한다.
견과류나 캔디류, 비스킷류 등 식용 가능한 식품에 초콜릿이나 밀크 초콜릿, 준초콜릿을 혼합하거나 코팅, 충전 혹은
접합 등의 방법으로 가공한 것을 초콜릿 가공품이라 지칭한다.
결국, 초콜릿 맛이 난다고 해서 진짜 ‘초콜릿’을 먹는 것이 아닐 수 있다.
1994년, 유럽에서는 초콜릿에 들어가는 카카오 버터의 5%를 식물성 지방으로 대체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프랑스의 유구한 초콜릿업자들과 초콜릿 애호가들은 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2000년 유럽연합(EU)은 결국 이를 허용하게 된다.
그러나 초콜릿이 국가 산업인 벨기에는 순수한 카카오 버터만을 사용해야 초콜릿으로 인정한다.
국가 차원에서 AMBAO 라벨을 만들어 100% 카카오 버터만을 사용한 업체를 보증한다고. 대표적으로 고디바가
AMBAO 인증을 받은 초콜릿 브랜드다.
초콜릿이 충치와 비만의 원인?
초콜릿에 관해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초콜릿을 많이 먹으면 이가 썩는다’ 혹은 ‘초콜릿은 살찌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초콜릿 원료 그 자체는 충치를 유발하거나 비만을 초래하는 음식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소화효소의 활동을 둔화해 몸에 실제로 흡수되는 칼로리의 양을 줄이며 식전에 초콜릿을 섭취하면 식욕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초콜릿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기 때문에 치아에 눌러 붙는 캔디나 부스러기가 낄 수 있는 쿠키보다는 충치 발생률이 낮은 편이다.
그뿐만 아니라 초콜릿에 함유된 타닌과 폴리페놀이 구강 내 박테리아 번식을 억제하고 항암효과까지 있다.
그러니 만병통치약이라 해도 과함이 없어 보인다.
다만 이는 진짜 ‘초콜릿’을 먹었을 경우다. 시중에 판매하는 일반적인 초콜릿은 풍미를 좋게 하기 위해 설탕이나 기타
첨가물들이 들어간다.
초콜릿 자체로는 건강에 유익한 음식이지만, 당분과 고체 형태의 식물성 지방, 가공된 유제품들이 충치와 비만을
유발하는 것이다.
의학과 미신의 오묘한 경계
초콜릿의 효능 때문에 어쩌면 초콜릿은 약으로 빈번하게 쓰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4세기부터 마야족은 강장제이자 진정제로 부족의 사제들이 초콜릿을 처방했다고 한다.
14세기 아스텍족은 특권층만 초콜릿을 누릴 수 있었는데, 평민이 초콜릿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때는 전장에 나가기
전이었다.
초콜릿이 자양강장제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조의 해골을 가루로 만들어 초콜릿과 함께 섞어 설사를 멈추게 했다고도 전해진다.
초콜릿이 스페인의 모험가,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스페인에 전파됐을 때도 역시 간식보다는 약으로 사용됐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의 주치의였던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는 해열제와 복통 치료제로 왕에게 초콜릿 음료를 처방했다.
17세기 중반, 영국으로 전파된 초콜릿은 치료 후 회복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1661년 프랑스 의과대학은
초콜릿의 의학적 효용성을 인정, 공식적인 사용을 허용했다.
이를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들이 약국에 기반을 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드보브 에 갈레는 루이 16세의 약제사인 슐피스 드보브가 설립했다.
그들의 초콜릿은 신경성 위염이나 진성콜레라 예방과 회복기 환자들을 위해 처방됐다고 전해진다.
세계 3대 초콜릿 중 하나이자 벨기에의 공식 왕실 납품 업체인 노이하우스는 1875년 브뤼셀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스위스 뇌샤텔 출신의 약사 장 노이하우스에 의해 시작됐다.
꽤 근대까지도 초콜릿은 약으로 활용됐다.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 초콜릿이 시럽 형태로 약국에서 빈번하게 판매
됐는데, 알칼로이드 계열의 약물들 특히 현재에는 마약으로 취급되는 쓰디쓴 모르핀을 초콜릿 시럽과 섞어 진통제처럼 사용했다.
이는 현재의 ‘부루펜 시럽’처럼 쓴 약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효과적이었다고.
19세기 후반, 초콜릿 시럽의 인기가 폭발해 약국에서는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약의 형태로 초콜릿 시럽을 판매했으나 약에 함유된 원료들을 정확하게 표기해야 하는 법률의 시행과 초콜릿 바의 탄생으로, 초콜릿은 약의 개념에서 간식의 개념으로 변하게 된다.
초콜릿이 정신을 지배할까
초콜릿은 처음부터 에로스와 뗄 수 없었다.
아스텍족의 몬테수마 왕은 초콜릿이 최음효과가 있다고 믿으며, 사랑을 나누기 전 반드시 한 잔의 초콜릿을 마셨다.
스페인 정복자들 역시 초콜릿의 최음효과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카사노바와 사드 후작 등 육체적인 사랑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도 초콜릿을 애용했다.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초콜릿에는 성적인 욕구들을 자극하는 그 어떠한 물질도 함유돼 있지 않다.
하지만 초콜릿에 함유된 페닐에틸아민이라는 물질은 사랑에 빠졌을 때 뇌에서 자연적으로 비중이 높아지는 물질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초콜릿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페닐에틸아민 외에도 초콜릿에 들어간 테오브로민과 카페인은 각성효과를 줘 잠이 깨거나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등의
효과가 있다.
또한 대마초의 주성분, 테트라히드로카비놀의 수용체를 활성화하는 아나다마이드 성분도 함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초콜릿에 대한 의존성이나 초콜릿 중독 등의 문제들이 항상 거론됐다.
심지어 1980년대 식이요법학자 미셸 몽테뉴셸은 그의 저서에서 초콜릿의 의존성을 지적하며 절제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초콜릿에 함유된 테오브로민이나 카페인, 아나다마이드 등은 아주 소량으로, 초콜릿 11kg 이상을 섭취해야만
마약효과를 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밀크 초콜릿이나 초콜릿 가공품에 함유된 다량의 설탕이 중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초콜릿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초콜릿 중독자가 아니라 설탕에 중독된 섭식장애자라는 것이다.
[크림을 섞어 부드러운 풍미를 자랑하는 가나슈(위쪽)와 가나슈를
동그랗게 빚어 카카오 가루를 겉에 입힌 트러플.(아래쪽)]
실수로 만들어진 걸작, 가나슈
가나슈는 크림을 섞어 만든 초콜릿이다.
프랑스어로 ‘바보, 얼간이’를 뜻하는 가나슈(ganache)는 그 이름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 실수로 태어났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한 제과점에서 한 견습생이 실수로 끓는 우유를 초콜릿이 담긴 용기에 부었던 것.
이를 만회하려고 열심히 저은 것이 부드러운 식감과 달콤한 맛을 자랑하는 가나슈의 시작이다.
가나슈는 계피나 후추, 바닐라 등 다양한 향신료와 섞이기도 하고, 과일이나 견과류를 첨가하기도 한다.
커피와 차, 술 등 다양한 재료와도 혼합 가능한 것이 또한 가나슈다.
가나슈는 곧 프랑스의 전통적인 초콜릿, 트러플과 팔레도르의 탄생으로도 이어진다. 트러플(truffle)은 가나슈를
동그랗게 빚어 카카오 가루를 겉에 입힌 것이고, ‘황금이 섞인 작은 돌’을 의미하는 팔레도르(palet’dor)는 가나슈와
버터, 설탕을 혼합한 소스로 속을 채운 후 초콜릿 코팅을 한 뒤 금으로 표면을 장식한 초콜릿이다.
ⓒ 한경 비즈니스,
사진 한국경제DB
유럽의 중세 문학과 문헌 연구자인 사라 모스와 알렉산더 바데녹이 펴낸 <초콜릿의 지구사>의 두 저자가 말했듯이
‘초콜릿은 까다로운 식품’이다. 초콜릿나무는 남북으로 위도 20도 이내, 해발 300m 아래쪽에서만 자란다.
더욱이 큰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과 적당한 습도, 섭씨 16도 이상의 온도도 요구된다.
인간, 신의 열매 ‘카카오’를 탐하다
심지어 병충해에 약해서 잘 자라던 초콜릿나무가 한순간 죽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실제로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와 그 이후의 아즈텍 원주민들은 초콜릿나무의 열매인 ‘카카오 콩’을 화폐 대용으로 사용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럽인들 중에 아즈텍 원주민 부인들이 볶은 카카오 콩 가루에 옥수수가루, 바닐라, 고추, 허브 등을 넣고 반죽해 만든 죽이나 음료를 마셨다면 결코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지로라모 벤초니는 아즈텍 원주민이 마시는 초콜릿 음료를 두고 “인간이 마실 음료라기보다는 돼지에게 더 적합한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이에 비해 크레올(Creole)은 달랐다. 그들은 원주민들처럼 중앙아메리카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활한 에스파냐 계통의 백인들이다.
자주 먹다 보면 자연히 중독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초콜릿이 글로벌 푸드(global food)가 되도록 만든 본질이다. 아즈텍식 초콜릿 음료에 중독된 에스파냐 출신 가톨릭 사제들이 16세기 후반 귀국하면서 에스파냐의 궁중에 초콜릿
17세기 중후반이 되자 초콜릿 음료는 부인용 만병통치약으로 탈바꿈했다.
1704년에 런던에서 발행된 <교양 있는 여교사>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요리법이 적혀 있다. “같은 양의 물과 우유를
신선한 달걀의 노른자에 장미 물에 녹인 가루설탕을 잘 섞어서 넣는다.
초콜릿이 이렇게 권력과 부의 상징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렸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콜릿 관념이 바뀌다
19세기 사양길에 빠져 있던 초콜릿을 건져낸 사람은 네덜란드의 과학자 쿤라드 반 호텐(Coenraad van Houten)이다. 사실 아즈텍에서 수입된 초콜릿 덩어리에는 지방 함량이 매우 높아서 뜨거운 물에 녹인 다음에 이것을 걷어내는 데
이때가 1828년이었다. 그러나 이 개발이 반 호텐을 부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1879년 스위스의 다니엘 페터(Daniel Peter)는 앙리 네슬레(Henri Nestle)가 개발한 가루우유를 초콜릿에 섞어 밀크
로돌프 린트(Rodolphe Lindt)는 초콜릿을 서서히 가열하면서 화강암 롤러로 잘 섞어 부드럽고 풍미가 좋아진 고형이면서도 부드러운 지금의 일반적인 초콜릿을 개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9세기 후반 초콜릿의 대중화를 이끈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은 중남미 국가의 독립으로 식민지를 잃은 서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어났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어서 서아프리카의 영국, 프랑스, 독일 식민지에도 초콜릿 나무가 재배됐다. 마침내 지금의
20세기 초 초콜릿 과자는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유럽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상징했다.
초콜릿을 세계적인 식품으로 만든 또 다른 사건은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기브 미 초콜릿’의 기억
한반도의 초콜릿 역시 그랬다.
한국전쟁 때 거리를 방황했던 아이들은 서양 군인만 보면 “기브 미 초콜릿(Give me chocolate)!”을 외쳤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도깨비시장으로 흘러나온 초콜릿은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1980년대 중반 마침내 한국 사회에서 초콜릿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오리온 초코파이 초기 디자인]
지금은 세계적인 식품이 돼 버린 한국산 ‘초코파이’는 본래 1917년에 미국 남부 테네시주의 채타누가 베이커리
(Chatanooga Bakeries)에서 발매한 문파이(Moon Pie)가 효시다.
이것을 일본의 모리나가 제과 회사가 1958년에씹으면 쫄깃쫄깃한 마시멜로(marshmallow)를 소프트 케이크 속에 넣고 겉에 초콜릿을 입힌 ‘엔젤마크’라는 제품으로 바꾸었고, 이것이 바로 초코파이의 원형이다. 한국 사회에서 초코파이의 성공에는 훌륭한 제품력도 중요하지만, ‘정(情)’이란 광고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산 ‘초코파이’는 중국에서 ‘좋은 친구’로 변신해 세계적인 식품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한국인은 초콜릿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초콜릿은
서유럽인과 만나면서 불행의 길을 걸었다. 평화로웠던 아즈텍 사람들 대부분을 유럽에서 가져간 온갖 전염병으로
몰살시킨 서유럽인들이 가져간 초콜릿 덩어리의 달콤함에는 착취가 있었다.
[사진 설명 : 코트디부아르 아비장 유엔 사무소에서 코코아 재배자들이
카카오 열매 자루를 불태우며 코코아 수출 금지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19세기 말 서아프리카의 가나로 옮겨 심어진 초콜릿 나무는 탐욕에 가득한 대지주 추장들과 영국 상인들의 결탁으로
인해서 값싼 초콜릿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그 나무 아래에서 어린 10대들은 착취당하면서 카카오 열매를 따서 압착기에 넣고 있다. 초콜릿은 결코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서유럽 주도의 ‘산업화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제국주의의 그림자’다.
주영하 교수는…
주로 음식의 문화적
현상과 음식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음식 문화사, 음식 인문학과 관련해 국내를 대표하는 전문가다.
주요 저서로 <음식 인문학>, <맛있는 세계사>, <차폰 잔폰 짬뽕>, <음식 전쟁, 문화 전쟁>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다.
일러스트 허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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