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with New Japan Philharmonic Orchestra
잉위 맘스틴은 뛰어난 실력을 갖춘 기타리스트 입니다. 그는 그 음악성과 기타리스트로서의 일거수 일투족을
리치 블랙모어와 비교해서 이야기되는 수가 많은데 그만큼 리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잉위 맘스틴은 좋은 가정환경에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1963년 6월 30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의 친정집은 놀랍게도 수백년이나 이어지고
있다는 오페라의 명가라고 합니다.
스웨덴도 독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래전부터 클래식이 사랑받고 있는데, 에드워드 반 헤일런과 에이드리안
반덴버그를 낳은 네덜란드에서는 클래식의 뮤지션이 국가 공무원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합니다.
잉위의 어머니인 리그모어는 잉위가 세 살이 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게하는 동시에 트럼펫도 사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섯살이 되던 생일에는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로 사 주었는데, 그 때는 잉위가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아 2년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잉위와 기타와의 진정한 첫 만남은 일곱살 때 텔레비젼에서 본 지미 핸드릭스(1945~70)의 라이브쇼였다고 합니다.
그 tv프로그램에서는 핸드릭스 뒤에 리치 블랙모어의 딥 퍼플(1기나 2기 때로 리치는 아직 스트라토를 쓰지 않고 깁슨
ES-335TD를 메인으로 하고 있었을 때임)이 출현했는데, 그 리치의 정평있는 화려한 액션은 핸드릭스의 흉내로밖에
비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리치로부터 그 후 강하게 영향을 받은 잉위 였지만, 우선은 핸드릭스가 그 당시 잉위 소년의 히어로였던 것입니다.
핸드릭스라는 마음의 히어로를 얻은 잉위는 기타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빨리 솔로를 쳐보고 싶은 마음에
마구 쳐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1년쯤은 튜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기타를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터져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마구 쳐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형이 튜닝하는 법과 코드를 잉위에게 가르쳐 주었고, 얼마 후 잉위는 어쿠스틱 기타에
어테치먼트 타입의 픽업을 붙이고 라디오에 연결해서 치게 되었습니다.
처음 잉위의 히어로는 지미 핸드릭스 였지만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자연스레 리치 블랙모어로 옮겨갔고, 그렇게
리치광으로 연습에 연습을 계속 하던 그는 1975년 마침내 그가 원하던 팬더 스트라토 캐스터를 입수하였으며,
클래식 기타에도 도전하여 약 1년간의 레슨도 받았다고 합니다.
우선 독보와 스케일 등의 음악 이론은 오케스트라의 멤버가 된 누나로부터 배웠으며, 독보력과 테크닉은 이전부터
잘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어떤 클래식 넘버도 자기가 느끼고 있는대로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었습니다.
클래식 중 그가 심취해서 듣는 것은 바하를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시대의 것으로 "My God"이라 할만큼 바하를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바하라고 하면 오래 전부터 리치가 맨 먼저 나선 셈이라 리치가 좋아하니까 잉위도 좋아하는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째튼 잉위는 의상이나 액션, 기타 사운드 뿐만 아니라 기타 주법면에서도 적지않
게 리치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78년 의무교육을 마친 잉위는 자기의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4트랙의 MTR을 구입하고 데모테입의 제작에도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됩니다.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라는 이름은 그 당시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음악 관계자에게 보내는 데모 테입에도, 또 스테이지에 설 때의 세션 밴드명으로도 라이징 포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합니다.
이로서 잉위와 라이징 포스의 소문은 스웨덴 국내에 퍼지고 스웨덴의 CBS 레코드로부터 계약협상도 거론되었는데,
레코드 회사측이 스웨덴 국내에 히트시킬 목적으로 잉위는 어디까지나 세계, 즉 미국의 록 뮤직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80년 경에는 영국에 단기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상당한 수의 데모 테입을 여로 곳에 계속 보냈고, 82년
여름에는 마참내 본격적인 기회가 찾아옵니다.
당시 "슈라프넬" 레코드를 경영하고 있었던 마이크 버니가 관심을 갖고, 자기가 주관하는 있는 기타 플레이어지의
칼럼에 잉위를 소개했던 것입니다.
마이크는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 것을 조건으로 잉위에게 미국 로스 앤젤레스로 이주할 것을 권하였고, 잉위는 83년
초에 로스 앤젤레스로 갈것을 결심합니다.
유감스럽게 솔로 앨범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마이크는 슈라프렐에서 데뷔시키려 하고 있었던 "스틸러"에 잉위를
참가시켜 밴드를 강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잉위 참가 이전은 리더 론 킬이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잉위는 기타 쪽이 더 뛰어났음은 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잉위로서는 조금도 참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우선 혼자서 로스 앤젤레스에 있는 것보다는 라이브의 기회가 많은데다가
스틸러에 참가하지 않으면 돈도 사는 곳도 곤란을 받시 때문에 레코드에 참가키로 했습니다. '스틸러'는 잉위의
기타만을 듣는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레코드로 잉위는 자기가 작곡에 참가한 제작하려는 의도임을 알고 이를
거부하고 맙니다.
'애브덕션'과 '노 웨이 아웃'은 좋아하는 작품으로 들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레인보우, M.S.G등을 거친 잘 알려진 그래엄 보네트의 메니저로부터 새 밴드 결성의 일원으로
참가해달라는 권유가 들어왔는데, 그래엄은 잉위가 추구하는 음악과 공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새 밴드를 선택하게
됩니다.
새 밴드는 아직 악곡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라 잉위는 그래엄과 함께 악곡을 만들어 냈고, 83년 말 '알카트러즈'를
발표, 아직 밴드 컬러는 결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래엄의 보컬과 잉위의 기타가 갖추어지면서 그리 어렵지 않게 훌륭한 조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레인보우 시대에 이미 높은 인기를 얻었던 그래엄과 기타 영웅 잉위와의 결합은 팬들을 자극하여 데뷔하자 갑자기
주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84년 1월에는 최초의 동양 공연도 행하였는데 공연마다 모두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공연이 끝난 후 잉위와 그레엄 사이에 음악적 언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세대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잉위는 84년 봄에 알카트러즈를 탈퇴하여 84년 6월에 폴리돌에서 취입한 'Live Sentence'가 그의 알카트러즈에서의
마지막 플레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잉위는 미국에 머물러 솔로 앨범 제작에 돌입하여 84년 11월 'Yngwie Malmsteen's Rising Force'라는 이름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습니다.
그 후 잉위는 앨범 라이징 포스의 제작 멤버를 재편성하여 그룹 라이징 포스를 결성하는데, 데뷔 앨범 'Marching Out'은 영국, 미국 등 각국에서 좋은 판매고를 기록, 탑 밴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85년은 과히 라이징 포스에게는 도약의 해였는데 미국의 기타 전문지 기타 플레이어에서 록 기타리스트 부문에 잉위가, 록 앨범 부문에 솔로 앨범 'Yngwie Malmsteen's Risinf Force'가 선출되었습니다.
86년에 접어들어 "기타 영웅"의좌를 획득한 잉위는 같은 해 봄부터 LA에서 신작 레코딩에 들어갔습니다.
포로듀스는잉위 자신이 담당한 이 작품은 'Trilogy'라고 타이틀 되어 미국에서는 9월 하순에 발매되었습니다.
앨범 발표 후 잉위는 투어 멤버로 또다시 제프 스코트 소트를 맞이하여 11월의 동양 공연을 시발로 월드 투어를 개최하게 는데, 그 사이'You Don't Remember'가 전미에서 히트를 기록하여 그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만 갔습니다.
월드 투어는 이듬해인 87년 봄까지 계속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잉위는 막 복귀한 제프를 다시 해고하고
레인보우에 몸담았던 조린 터너를 맞이하여 본격적인 밴드체제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88년 봄 잉위는 조를 맞이하여첫번째 앨범인 'Odyssey'를 발표하고 동시에 싱글'Heaven Tonight'도 발매했으며,
'애브덕션'과 '노 웨이 아웃'은 7월부터 미국을 비롯 월드 투어를 시작, 영국, 유럽을 돌아 소련에서도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앨범 판매 때문에 폴리돌 레코드와 대립되고 밴드 내부의 음악성의 차이가 원인이 되어 투어 종료 후에 조가
탈퇴하였으며, 키보드의 앤스도 그 뒤를 이어 탈퇴하자, 라이징 포스는 사실상 붕괴를 맞이하였습니다.
따라서 잉위는 앞으로의 활동에 잠시 휴식기간을 갖기 위해 89년 겨울의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수록한 라이브 앨범
'Trial By Fire~Live In Leningrad'와 라이브 비디오 'Live In Leningrad'를 동시에 발표했는데, 이 기간 잉위는
뉴욕을 떠나 마이애미에 이주를 했습니다.
LA에서 뉴욕으로 이주했을 때처럼 기분전환을 하여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한 것입니다. 뉴 프로젝트는 당시
연륜 있는 멤버를 모은 수퍼 그룹이 될 상황이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실현되지 않자, 잉위는 전원이 스웨덴 사람으로 구성된 벡밴드를 구성하여 90년 4월 'Eclipse'를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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