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die Brickell
Oh, where have you been, my blue-eyed son ?
And where have you been my darling young one ?
오 어디 갔었니, 내 파란눈의 아들아?
그래, 어디에 있었니, 나의 사랑하는 젊은 아들아?
I’ve stumbled on the side of twelve misty mountains
I’ve walked and I’ve crawled on six crooked highways
I’ve stepped in the middle of seven sad forests
I’ve been out in front of a dozen dead oceans
I’ve been ten thousand miles in the mouth of a graveyard
안개 자욱한 열두개의 산들 옆 에서 비틀거리고 있었어요.
구부러진 여섯개의 고속도로들 위를 기다가 걷다가 했어요.
슬픔에 잠긴 일곱개의 숲속 한가운데 발을 들여놓기도 했어요.
죽어버린 열두개의 바다들 앞으로 빠져나오기도 했어요.
수천 마일 머나먼 무덤입구까지 가있기도 했어요.
And it’s a hard, it’s a hard, it’s a hard, and it’s a hard
It’s a hard rain’s a-gonna fall.
거세고 고된 거세고 고된 비가 오려고 해요.
Oh, what did you see, my blue eyed son ?
And what did you see, my darling young one ?
오 뭘 봤는데, 나의 파란눈의 아들아?
그래 무엇을 보았니, 나의 사랑하는 젏은 아들아?
I saw a newborn baby with wild wolves all around it
I saw a highway of diamonds with nobody on it
I saw a black branch with blood that kept drippin’
I saw a room full of men with their hammers a-bleedin’
I saw a white ladder all covered with water
I saw ten thousand talkers whose tongues were all broken
I saw guns and sharp swords in the hands of young children
갓난아기가 굶주린 늑대들에게 둘러싸인것을 봤어요.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위에 다이아몬드가 있는것을 봤어요.
까만 나뭇가지로 피가 줄줄 떨어지는것을 봤어요.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들의 도끼에 피가 흐르는것을 봤어요.
하얀 사다리가 전부 물속에 잠기는것을 봤어요.
수천명이 말을 하는데 그들의 혀가 모두 다 부러져있는것을 봤어요.
어린아이들 손에 총과 날카롭게 갈은 칼들이 쥐어져 있는것을 봤어요.
And it’s a hard, it’s a hard, it’s a hard, and it’s a hard
It’s a hard rain’s a-gonna fall.
거세고 고된 거세고 고된 비가 오려고 해요.
And what did you hear, my blue-eyed son ?
And what did you hear, my darling young one ?
그래 무엇을 들었니, 나의 파란 눈의 아들아?
그래 무엇을 들었어, 나의 사랑하는 젊은 아들아?
I heard the sound of a thunder, it roared out a warnin’
I heard the roar of a wave that could drown the whole world
I heard one hundred drummers whose hands were a-blazin’
I heard ten thousand whisperin’ and nobody listenin’
I heard one person starve, I heard many people laughin’
Heard the song of a poet who died in the gutter
Heard the sound of a clown who cried in the alley
으르렁 거리며 경고를 치는 어마어마한 천둥소리 를 들었어요.
전세계를 삼키려고 덤벼드는 파도소리의 굉음을 들었어요.
수백명 의 사람들 손이 불꽃을 내며 북을 치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무도 듣지않는데 수천명이 소근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한 사람이 배가 고파 죽어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웃고있는 소리를 들었어요.
한시인 이 시궁창에서 죽어가며 내는 노래소리를 들었어요.
구석진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한 광대 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And it’s a hard, it’s a hard, it’s a hard, it’s a hard
And it’s a hard rain’s a-gonna fall.
거세고 고된 거세고 고된 비가 오려고 해요.
Oh, who did you meet my blue-eyed son ?
Who did you meet, my darling young one ?
오 누구를 만났니, 나의 파란 눈의 아들아?
그래 누구를 만났니, 나의 사랑하는 젏은 아들아?
I met a young child beside a dead pony
I met a white man who walked a black dog
I met a young woman whose body was burning
I met a young girl, she gave me a rainbow
I met one man who was wounded in love
I met another man who was wounded and hatred
죽어있는 망아지 옆에 있는 어린 아이를 만났어요.
까만 개를 걸리는 백인을 만났어요.
몸이 타오르는 젊음이 넘치는 여자를 만났어요.
무지개를 내게 주었던 젊은 소녀를 만났어요.
사랑으로 상처받은 한 사람을 만났어요.
상처와 혐오로 가득찬 다른 사람 을 만났어요.
And it’s a hard, it’s a hard, it’s a hard, it’s a hard
And it’s a hard rain’s a-gonna fall.
거세고 고된 거세고 고된 비가 오려고 해요.
And what’ll you do now, my blue-eyed son ?
And what’ll you do now my darling young one ?
그래 이제 무엇을 할거니 나의 파란 눈의 아들아?
그래 이제 무엇을 할생각이니 나의 사랑하는 젏은 아들아?
I’m a-goin’ back out ‘fore the rain starts a-fallin’
I’ll walk to the depths of the deepest black forest
Where the people are a many and their hands are all empty
Where the pellets of poison are flooding their waters
Where the home in the valley meets the damp dirty prison
Where the executioner’s face is always well hidden
Where hunger is ugly, where souls are forgotten
Where black is the color, where none is the number
비가 떨어지기전에 돌아가려고 해요.
가장 깊고 어두운 숲속의 그 심연으로 걸을거예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손은 텅 비어있는 곳.
독이 든 알약들이 그들 물속에 가득한 곳.
골짜기 집들 과 더럽고 축축한 감옥이 만나는곳.
사형판결을 내리는 사람의 얼굴이 언제나 잘 가려져있는 곳.
배고픔이 추하고 영혼따위는 잊고사는 곳.
어두움이 유일한 색깔 이고 아무것도 없는것이 숫자인 곳.
And I’ll tell and think it and speak it and breathe it
And reflect it from the mountain so all souls can see it
Then I’ll stand on the ocean until I start sinkin’
But I’ll know my songs well before I start singin’
나는 그곳에서 얘기 할거고 생각할거고 말할거고 숨쉴거예요.
그 산속에서 빛을 내어 모든 영혼들이 그 빛을 볼수있도록.
그리고 나는 내가 가라앉을때까지 바다에 서있을거예요.
그러나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기전에 나의 노래가 어떤건지 잘 알고 있을거예요.
And it’s a hard, it’s a hard, it’s a hard, and it’s a hard
It’s a hard rain’s a-gonna fall.
거세고 고된 거세고 고된 비가 오려고 해요.
1962년 당시에 있었던 쿠바의 미사일 위협으로 인해 고조된 전쟁의 기운에 대한 경고성 메세지가 있는 곡이다.
미-소 양국의 냉전이 잔재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우려감이 드러나 있다.
여기서 hard rain은 미사일이나 폭격을 의미한다. 나즈막하고 조용히 시작되다 점차 힘을 더해가는
딜런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밥 딜런(Bob Dylan) < Freewheelin' >(1963)
밥 딜런 이전에도 포크는 존재했고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저항음악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크에 활력과 중요성을 부여하여 60년대 초반 전면적인 포크 붐을 일으켰고
영미 대중음악에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포크는 물론 록 음악이 60년대 내내 저항적 메시지를 견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덕분이다.
한 평론가는 “밥 딜런은 모든 대중음악의 저항성에 대한 채권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후대에 ‘거대한 짐머만의 지구촌’(밥 딜런의 본명이 로버트 짐머만)을 만들었다.
카에타노 벨로소는 브라질의 딜런이었으며 실비오 로드리게즈는 쿠바의 딜런, 이스마엘 로는 세네갈의 딜런,
빅터 가라는 칠레의 딜런, 도노반은 영국의 딜런, 김민기는 한국의 딜런이었다.
이 63년의 디스크는 이들 모두에게 “한 대의 통기타와 까칠까칠한 목소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밥 딜런이 이룩한 포크의 대중화 그리고 그가 전파한 프로테스트(저항) 정신이 이 음반으로 가능했다.
밥 딜런이 활약하던 시기의 미국은 하버드대학 출신의 젊고 의욕적인 대통령 케네디가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케네디의 뉴 프론티어와 그에 따른 민권운동 지원에 고무된 당시의 동부지역 대학생들은 인종평등과 반전(反戰)을
외치며 일제히 밥 딜런의 프로테스트 송을 경청했다.
그의 저항가요는 당시의 행동주의 포크 가수 필 오크스나 톰 팩스턴과 마찬가지로 방금 터진 사건과 같은
구체적 이슈를 노래에 담았다. 현실 그것도 당장의 현실이었다.
굽은 길을 지나 옥스포드 타운.
그는 문에 도착했으나 들어갈 수 없었지.
그의 피부색 때문이지. 친구여,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옥스포드 타운」(Oxford town) 이 곡은
62년 9월 옥스퍼드시의 미시시피대학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제임스 메레디스라는 이름의 흑인 공군 전역병이 이 대학에 입학 등록을 하자 보수적인 인종주의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양상은 놀랍게도 주(洲)방위군과 케네디가 보낸 국립경호대 간의 대결로 치달았다.
텔레비전 연설로 그 대학을 향해 인종분리를 중단하고 메레디스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케네디 대통령은 인종주의자들의 폭력으로 2명의 시위대가 사망하자 즉각 해병대를 파견해 메레디스를 보호했다.
62년과 63년 이러한 공민권 획득 운동이 미국 동부지역에 불길처럼 솟아올랐을 때 밥 딜런은 포크 음악으로
시대 정신을 이끌어나갔다
. 그는 흑인 인권 운동 뿐 아니라 전쟁에 대한 반대라는 테마에도 집착했다.
영원히 폐기될 때까지 포탄은 얼마나 전쟁터를 날아야 하나.
주위를 외면키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이 고개를 돌려야 하나.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
이 노래는 전세계 대학가에 포크 음악 유행을 야기하며 반전가요의 표상이 됐으며 톤을 낮춰 상업화한
피터 폴 앤드 메리(Peter Paul & Mary)의 노래로 먼저 빅 히트, 작곡자인 딜런의 이름을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62년 10월에는 피그만사건에 의해 촉발된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었다.
미 공군에 의한 쿠바 피그만 공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국과 케네디의 위신은 크게 손상되었다.
당시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해 무력을 강화하려고 했고 미국의 첩보 비행기가
그 증거를 포착하자 두 초강대국은 13일간 팽팽히 맞서면서 전면전의 위기에 봉착했다.
소련이 미사일 시설을 모스크바로 철수시키겠다고 한 발짝 물러섬에 따라 재앙은 비켜갔지만 이 사건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미친 공포는 대단했다.
많은 이들이 3차대전이 아닌가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강한 비가 내리리」(A hard rain's a-gonna fall)는
미사일 위기가 초래한 공포를 노래한 곡이었다.
난 천둥소리를 들었어. 고함치며 그것은 경고를 던졌지. 세상을 덮어버릴 파도의 격랑을 들었어.
시궁창에서 죽은 시인의 노래를 들었어.
미궁에 빠져 울고 있는 광대의 소리를 들었지.
물론 이 앨범의 수록곡들이 이 같은 리얼리즘과 프로테스트 계열의 곡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애청되고 번안되기도 한 곡 「두번 생각하지마 괜찮아」(Don't think twice , it's all right)나
「북극에서 온 소녀」(Girl from the north)는 러브 발라드다.
이러한 곡들은 지나치게 참여적인 분위기로
흐르지 않게 앨범의 균형을 맞추는 효율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 앨범은 록 쪽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작품이다.
록의 명반선에 이 음반이 끼는 일은 없다.
통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딜런의 보컬만이 존재하는 ‘심심한’ 포크 음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운드의 부재에 고민하던 딜런은 곧바로 일렉트릭 기타를 잡고 록의 요소를 대폭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포크록’으로 변신하면서 그는 동시에 정치적 행동주의와 저항도 포기하고 내적(內的) 탐구에 몰입,
한층 포크 진영을 분노케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미 많은 음악가들에게 청춘의 저항성을 심어주고 난 뒤였다.
사람들은 밥 딜런이 프로테스트와 절연한 후로도 오랫동안 그를 ‘저항의 기수’로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www.izm.co.kr/)
하나의 틀로 묶이고 싶어하는 아티스트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궤적에는 대부분 일관성이 있다.
그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있는 일관성이.
그러나 밥 딜런에게는 그런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는다.
미가 무엇이고 애국심이 무엇인지도.
나는 그것이 무엇이야한다는 고정 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밥 딜런은 자기 자신조차 규정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밥 딜런 전기영화의 제목이 <아임 낫 데어>인 것은.
밥 딜런은 '거기' 즉,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로부터 늘 탈출하며 살아왔다.
역시 그래서다. <아임 낫 데어>에서 밥 딜런을 연기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그는 저항 가수이자 기독교 전도사였으며 개인주의자이자 몽상가였다.
시인이자 웅변가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아니었다.
밥 딜런의 첫번째 도피는 1965년이었다.
그 해 5월 포크 무브먼트를 대표했던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Like A Rolling Stone'을 연주했다.
포크 순수주의자들에게 일렉트릭 기타는 곧 세속적 상업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청중은 야유했다.
동료들은 당혹했다.
프로테스턴트 포크의 아버지였던 피트 시거는 그 모습을 보고 "전기 톱이 있었다면 당장 기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규정된 포크가 아닌, 자신의 음악을 선택한 것이다. 포크 록이 창시되는 순간이었다.
다음으로 버린 것은 저항 가수의 이미지였다.
아무 것도 지칭하지 않음으로서 모든 것을 말하던, 그의 사회적이고 시적인 가사는 1960년대 말을 끝으로 오랜 종결을
고했다.
그 이전에도 스스로 저항가수가 아님을 수차례 밝힌 밥 딜런이었다. 동료였던 존 바에즈와는 달리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좇아 집으로 몰려 드는 히피와 사회운동가들을 피해, 수 차례 이사를 다녔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이미지를 180도 뒤집어 컨트리 앨범을 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더니
기독교 전도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당혹스러운 음악들이 이어졌다.
더 이상 그를 '현재의' 저항가수나 포크가수로 인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목받는다는 건 굴레다.
예수는 주목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말을 실현이라도 하듯,
주목으로부터 도피한 것이다. 70년대부터, 밥 딜런은 그렇게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밥 딜런이 마지막으로 버린 건 은둔이었다.
1997년 발표한한 <Time Out of Mind>부터 지난 해의 <Together Through Life>에 이르는 넉 장의 앨범을 통해서,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장의 음악을 들려줬다.
청년 시절과 조금도 다름없는 시적이고 성찰적인 가사가 있었다.
비음을 간직한 채 늙은, 관조의 목소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되었으며 순차적으로 추구했던 컨트리와 블루스, 그리고 포크가 한데 어우러진 밥 딜런의 음악적 궤적이 한 데 어울려 있었다.
세상이 그를 잊은 게 아니라 그가 세상을 잊었던 거라는 듯, 밥 딜런은 이제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일관성이 없으되
그렇기 때문에 일관적인 인생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벽화를 그리다가 사라진 사람이 나타나 다시 그리기 시작했는데, 사실 사라진 게 아니라 벽의 뒤편에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듯이.
은둔을 털어낸 그는 2006년 생애 첫 자서전을 썼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란 제목으로 국내 출간된 이 자서전은 그 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 올랐다.
원제가 '연대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밥 딜런은 편년체 서술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과 생각을 뒤섞는다.
평생 가사와 인터뷰 등을 통해 빛났던 그의 시적 언어들이 서사로 이어진 것이다.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그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엘비스가 록에 육체를 선사했고
밥이 정신을 선사했다.
오늘날, 위대한 록 음악이 있는 어디에나 밥 딜런의 그림자가 있다."
음악을 언어와 만나게 했고, 언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밥 딜런에게 마땅한 헌사였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포크의 왕과 여왕의 만남. 존 바에즈와 밥 딜런, 그리고 정의(正義)
19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Gerde's Folk City)에서 밥 딜런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녀는 뱅가드에서 자신의 두 번째 음반을 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오프닝 공연에 함께 했고, 이후 포크의 왕과 여왕은 연인이 되어 동거하기도 했다.
이해에 그녀는 처음으로 전미 콘서트 투어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를 통해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 확보를 위한 주장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그녀의 활동은 19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로 실리게 된다. 1955년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발생한 흑인들의 버스승차거부운동은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좀더 자세한 사항은 <유리병편지> 79호를 참조하시길).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간디의 비폭력노선을 추구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존 바에즈는 1963년 3월 25만 명의 민중과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고, 이들 앞에서 <우리 승리 하리라(We Shall Overcome)>을 노래했다.
이 해 8월엔 노예해방 선언 백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대행진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너무도 유명한
연설의 서두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을 말했다.
이 행진엔 존 바에즈, 밥 딜런, 피터 폴 앤 매리, 해리 벨라폰테, 마할리아 잭슨 등의 쟁쟁하고 의식있는 뮤지션들이
함께 했다.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하고, 부통령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65년은 존 바에즈에게 그리고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녀는 1965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에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6월 17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베트남전은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엔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물론 피트 시거(그는 50년대 '위버스weavers'를
이끌며 학생 포크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매카시즘 선풍 때 공산당으로 몰리기도 했다),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포크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였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의 음악에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고, 존 바에즈의 노래는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노래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해 포크 음악이 배출한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의 수입 중
60%가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총탄과 포탄이 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녀는 세금 징수에 불복했고,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존 바에즈는 자신의 주장을 좀더 널리 알리기 위해 흑인 공민권 확대를 위한 콘서트와 반전 등 여러 현장에서
무료로 공연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다.
이 해 연말 존 바에즈의 앨범은 그래미상의 '베스트 포크 레코딩' 부문 수상 후보작이 되었다
이 해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연인 관계를 끝냈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이 두 사람은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저항 정신을 실천한 운동가였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은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 - 인종차별, 베트남전, 세대간의 갈등 등 - 을 저항과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담아냈고, 삶에 대한 열의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했던 청년 문화의 대변인이었다.
물론 존 바에즈에게 끼친 밥 딜런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밥 딜런을 가장 중요한 포크 뮤지션으로
주목받도록 한 사람이 존 바에즈란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뉴스위크>지는 "포크송의 여왕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을 왕자로 책봉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도록 했고, 포크 음악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서로 많은 교감을 이루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프로테스탄트 포크라는 포크 음악의 순수함을 밥 딜런보다 더 오래 지켜나갔고,
포크 음악의 대중화란 측면에선 밥 딜런보다 더 많은 공로를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blog.daum.net/leenogi/11787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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