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향기로운 삶의쉼터'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교향곡을 '새벽'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여기 '예술' 방에 저의 글 '소리의 사회학'을 보시기 바랍니다. - 새벽 배동인:
베토벤 / ♬교향곡 1번 (SymphonyNo.1 in C major, Op.21) - Staatskapelle Dres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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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thoven, Symphony No.1 in C major, Op.21
베토벤 교향곡 1번
빈 필하모니- 지휘 푸르트 뱅글러-1952 11.29 Wien Live
Ⅰ. Adagio molto - Allegro con brio - 8:10
Ⅱ. Andante cantabile con moto - 7:10
Ⅲ. Menuetto Allegro molto e vivace - 3:45
Ⅳ. Adagio - Allegro molto e vivace -6:45
베토벤이 교향곡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30세에 가까웠을 무렵으로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때까지 교향곡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당시 교향곡이란 장르는 작곡가라면 꼭 써보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분야였기 때문이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도 나이로 봐서 훨씬 이른 시기에 교향곡을 썼다.
까닭이야 어쨌든 베토벤이 이처럼 늦게 교향곡을 썼다는 것은 그가 교향곡 작곡에 매우 신중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교향곡 1번은 베토벤의 빈 체재 시기인 1799년에 본격적으로 작곡이 시작되었지만 소재나 스케치는 훨씬 이전인
1796년부터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발판으로 삼아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은 선배 작곡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첫 교향곡을 내놓음으로써 그때까지의 자신에 대한 빈 음악계의 평가를 한 단계 더 높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겠다는 야심찬 선언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신고식은 화려했다. 베토벤은 30세가 되던
1800년에 그의 첫 교향곡을 완성하고 1800년 4월 2일에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다.
그날 음악회 프로그램은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으로 시작해 하이든의 <천지창조> 중 몇 곡의 아리아와 중창이 연주되고, 베토벤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과 실내악곡이 연주된 후 음악회 마지막 순서로 베토벤의 첫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당시 이 정도로 긴 음악회는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빈의 세 거장들의 작품이 한 무대에서 연주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날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며 암묵적으로 자기 자신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거장 음악가들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베토벤 스스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야심찬 선언이었다.
▶1801년 31살의 베토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일반음악신문>에 실린 음악회 평을 보면 베토벤의 교향곡 1번에 대해 “대단한 예술,
새로운 작품, 아이디어의 충만함”이란 표현이 보인다.
그러나 “목관이 남용되어 전체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치고는 목관의 음향층이 너무 두터운 것”이란 비판도 보인다.
이는 이 교향곡의 혁신적인 음향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사실 이 곡의 파격적인
점은 단지 목관악기의 용법뿐만이 아니다. 엉뚱한 1악장 도입부와 느리지 않은 2악장, ‘스케르초’나 다름없는 미뉴에트
악장, 유머와 풍자로 가득한 4악장에 이르기까지 베토벤이 그의 첫 교향곡에서 시도한 대담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베토벤은 애초에 그의 첫 교향곡을 그의 전 후원자이자 고용인인 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에게 헌정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이 교향곡의 오케스트라 파트보가 출판되기
5개월 전인 1801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어 베토벤의
또 다른 후원자인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에게 이 곡을
바쳤다.
슈비텐 남작은 음악에 대단히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로 하여금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후궁 탈출>의 작곡을
위촉하도록 추천하기도 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으로부터
벗어난 하이든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면서 오라토리오 <사계>의 대본을
제공하기도 했다. ▶슈비텐 남작
만년에 슈비텐 남작에게 온 마지막 천재가 남작과 같이 네덜란드에 가문의 뿌리를 둔 베토벤이었다.
베토벤은 슈비텐 남작의 서가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손때가 묻은 바흐와 헨델의 악보를 꺼내 볼 수 있었고,
이는 그에게 평생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슈비텐 남작은 베토벤의 첫 번째 교향곡을 헌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베토벤이 슈비텐 남작에게 그의 첫 교향곡을 헌정한 것은 의미심장한데, 이로써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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