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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Haydn - Cello Concerto No 2 D major op 101 첼로 협주곡 2번 "자클린 뒤 프레"

 

 

 


 

 

 

 

 

 


 

 


1. allegro moderato


2. Adagio


3. Rondo Allegro
 

 

 



 

 

 

 

 

 하이든은 이 곡을 1783년에 작곡했는데,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교라든가, 또 첼로의 서정적 성격을 완전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06년에 '작곡가의 원본에 의거하여'라는 주석을 달아 출간되었음에 불구하고 원작에 대한 논란이 오래

계속되었는데, 발설자는 다름아닌 크라프트의 아들 니콜라우스였다.

 

 

 

그러나 1953년 하이든의 친필 악보를 찾아냄으로써 의심이 풀렸고, 현재 원본은 빈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하이든은 이 곡을 원래 작은 실내합주를 위해 썼는데, 이를 19세기 말에 지휘자이며 음악학자인 제베르가 관현악

 편성으로 확대시키고 솔로 부분과 카덴차를 보완했다.
1960녀대에는 장드롱이 원작에 좀더 가깝게 수정하여 출판했는데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첼로 솔로로 시작되는 2악장의 주제는 3음으로 만들어졌다.

이 3음은 다름아닌 1악장 1주제의 앞부분을 단락짓는 3음들로 하이든의 재치를 엿보이게 한다. 전체 분위기는 조용하고 명상적으로 흐르며, 첼로 솔로 중 가장 아름다운 선율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동생 미하엘 하이든                                    형 프란츠 요셉 하이든

 

요한 미하엘 하이든(1737-1806)은 프란츠 요셉 하이든의 동생으로서 역시 작곡가였다.

미하엘은 헝가리 국경지대에 가까운 로라우(Rohrau)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Mathias Haydn)은 마차바퀴 수선공이었지만 마을에서는 시장과 같은 역할(Marktrichter)을했다.

미하엘의 어머니인 마리아 콜러(Maria Koller)는 하라흐(Harrach)백작궁전의 요리사였다.

하라흐백작은 로라우 마을의 영주와 같은 귀족이었다. 하이든의 아버지나 어머니 어느 쪽도 악보를 읽을줄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 마티아스는 민속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청년시절에 하프를 배웠으며 아이들에게는 노래를 베우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형인 요셉 하이든은 소년 소프라노로서 비엔나의 슈테판성당 합창단에 들어갈수 있었다.

실제로 형인 요셉 하이든은 소년시절에 노래를 대단히 잘 불렀다.

 

당시 슈테판성당의 음악감독인 칼 게오르그 로이터(Carl Georg Reutter)는 하이든의 아버지에게

 ‘나는 요셉의 재능에 대하여 정말로 감동했다.

그와 같은 아들을 둔 당신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만일 당신에게 아들이 열두명이 있다면 모두 재능이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여 열두명 아이들을 모두 보살펴 주겠다.’고 말했다.

이말에 감격한 아버지는 정말로 5년후에 요셉의 동생인 미하엘을 슈테판성당의 로이터 음악감독에게 보냈고 그 후에는 또 다른 동생인 요한(Johann)을 보냈다.

요셉 하이든의 두 동생들은 모두 소년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요셉은 나중에 동생들의 음악교육을 책임 맡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동생 미하엘은 형 요셉보다 더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노래를 더 잘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터를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은  요셉에게 찬사를 보냈다가 나중에는 미하엘에게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미하엘은 슈테판성당의 합창학교를 떠나자마자 그로쓰봐르다인(Grosswardein) 성당의 음악감독을 맡게 되었으며

 1762년에는 잘스부르크에 가서 활동하게 되었다.

 

미하엘은 잘츠부르크에서 무려 43년을 보내며 360편의 교회음악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미하엘 하이든은 성악가인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Maria Magdalena Lipp)와 결혼했다.

미하엘은 레오폴드인지 볼프강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모차르트와 잘 알고 지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식구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가 너무 잘난 체를 한다고 해서 싫어했다.

미하엘은 술을 좋아했다. 하물며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미하엘의 술버릇을 탓하는 글을 적어놓기까지 했다.

미하엘은 칼 마리아 폰 베버, 안톤 디아벨리(Anton Diabelli)와도 친분을 가지고 지냈다.

 

요셉 하이든은 동생 미하엘의 재능에 대하여 높이 평가했다.

특히 종교음악에 있어서는 자기보다 훌륭하다고 얘기했다.

미하엘도 형 요셉을 매우 존경했다.

 

미하엘은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을 형을 생각하여 요세파(Josepha)라고 지었다.

미하엘은 향년 68세로 1806년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 중에서 진혼곡 C 단조는 가장 걸작이라고 알려졌다.

Requiem pro defuncto Archiepiscopo Sigismundo(지그문트 대주교를 위한 진혼곡)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곡은 나중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미하엘의 작품이 모차르트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는  K 141에 미하엘의 Te Deum을 인용하였으며 G장조 사중주곡 (K 387)의 피날레에는 미하엘의 교향곡 23번의 피날레를 인용했다고 한다.  

미하엘은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디플롬(Diplom) 학위를 받았다.

 

이를 기념하여 스톡홀름대학교에 헌정한 곡이 Missa Hispanica(스페인 미사)이다.

이 역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하엘의 작품에 대하여는 오늘날까지도 몇가지가 혼란을 주고 있다.

요셉 하이든의 사후에 작성된 작품목록에 보면 간혹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 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하이든의 작품을 정리하던 사람이 미하엘이라고 분명히 적혀있지 않고 다만 하이든이라는 이름으로 된 작품이 있으면

 생각 없이 요셉 하이든의 리스트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나중에는 정리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잘 살펴보면 그런 요소가 잇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가 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37번으로 K 444로 분류된 작품은 최근 미하엘 하이든의 교향곡 25번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왜 이런 혼선이 일어났는가하면 모차르트의 교향곡 37번 제1악장의 첫 페이지에 모차르트의 서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항이지만 모차르트는 1악장만 작곡했고 나머지 악장은 미하엘 하이든이 작곡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밝혀진 1907년 이후로는 콘서트에서 모차르트의 교향곡 37번이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하이든 (1732년~1809년)은 고전파 시대를 연사람이다.


교향곡의 아버지로도 불리며, 기악곡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다.

무려 104곡의 교향곡과 83곡에 이르는 현악사중주를 남겼으며음악의 모든 장르에 걸쳐 500여곡의 작품을 남긴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러나 바흐나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이든의 음악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조로운 멜로디로 인해 전문 연주자들이 하이든의 곡을 꺼리는 경향도 있지만,

우리가 한 번 들으면 알 수 있는 익숙한 멜로디조차 하이든의 곡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현악사중주 세레나데와,장학퀴즈 시그널로 유명한 트럼펫 협주곡은 수많은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익히 알고 있지만,

정작 이곡들이 하이든의 곡인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한 현악사중주곡 '황제'는 지금 오스트리아 국가로 사용되고 있으며, 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의 멜로디로도 유명하다.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까운 친척을 통해 음악을 처음 접했던 하이든은 어릴 적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8살 때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인

성 스테파노 대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7세에 이르러 변성기로 인해합창단에서 탈퇴하고, 이후 10년동안 레슨과 연주생활로 어렵게 살아갔다.

 

이 시기 하이든은 민생고에 시달리다 거리의 악사로 나섰으며, 바이올린 연주자와 성악가로 돈을 벌면서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불안정했던 청년기를 보낸 후 1759년 귀족의 궁정악장으로 고용되어 이듬해 결혼하여 안정을 되찾는 듯 했지만,

귀족이 파산하면서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1761년 아스테르하지 후작과의 만남은 그의 음악 인생을 결정짖는 운명이 되었다.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부악장에서, 1765년 악장으로 승격, 이후 30년 동안 한결같이 악장으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꾸준히 성실하게 작곡활동을 하였다.

 궁정악자의 삶은 비교적 안정된 삶이었지만, 바쁜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귀족에게 예속된 음악가는 결국 귀족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해야만 했다.

그래서 하이든의 작품 중 대부분은 귀족을 위한 연회 음악으로 작곡된 것이다.

한 해에 200여회의 각종 연회와 파티를 치뤄야 했던 악장의 삶은 가족조차도 만나기 힘든 고달픈 생활이었다고 한다.

 

1772년 여름 하이든이 이끌고 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불평도 최고조에 달했다.

온화한 성품의 하이든은 기지를 발휘하여, 새로운 교향곡으로 후작을 설득하였다.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고별'은 마지막 악장에 간청하는 듯한 아다지오가 반복되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한명씩 악보를 접고 퇴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명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쓸쓸히 곡을 마치게 되는데, 연주가 끝난 후에야 후작은 하이든과

단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특별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하이든의 작품에는 부제가 붙어있는 곡들이 많은데, 곡마다 재미있는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교향곡 '시계'는

 시계추의 소리와 비슷해서 붙여졌고, '놀람'은 당시 연주회 도중 졸고있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2악장에 큰북 연타를 사용해서 붙여졌으며, 역시 2악장의 '나팔소리'로 인해 붙여진 '군대'...

 

런던에서 작곡해서 붙여진 '런던'...등 재밌는 부제가 붙여진 작품이 많다.

심지어 '기적'교향곡은 초연 때 공연장 로비의 샹들리에가 떨어졌는데,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어... 음악적 내용과는

상관없이 '기적'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렇게 하이든의 음악들은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하이든식의 위트가 담겨있기도 하다.

 

30년동안 한 곳에서 성실히 일했던 하이든은 58세에 비로소 궁정악장에서 은퇴하여. 자유롭게 창작에 전념하여 불후의 명곡들을 다수 남기게 된다.

영국에서 활동했던 바이올린 연주자 잘로몬의 초청으로 두차례 영국을 방문하여 작곡한 12개의 교향곡은 잘로몬 교향곡으로 불리며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798년 초연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는 음악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고 걸작이 되었다.

 1809년 77세의 삶을 마감한 하이든은 클래식 음악사에 보기 드문 행복한 음악가였다.

그는 1750년대에 세상을 떠난 바흐와 헨델의 음악을 청년기에 직접 접할 수 있었고, 24살 연하였던 모짜르트를

스승이라 칭하며 음악적 우정을 쌓기도 했다.

 

베토벤을 가르치며 천재에게 영감을 준 특별한 음악가로서 이들과 함께 빈 고전파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삶의 대부분이 궁정악장으로 예속된 평범한 삶이었지만, 그는 꾸준히 자신의 창작열을 불태웠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성실한 음악가였기에 하이든의 음악은 대부분 밝고 명랑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향곡의 아버지, 현악사중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의 음악은 결코 어려운 음악이 아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깊이의 논란을 배제하고, 소나타 양식을 확립하는 등 음악의 기초를 세운 그의 업적만으로도,

하이든의 음악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송정호 음악칼럼니스트의 글에서 발췌)

우리가 하이든의 세레나데라 부르는 이 곡은 최근 호프 슈테터(1742~1815)의 작품임이 밝혀졌다.

출판업자들이 그냥 하이든의 작품인줄 알고 출판을 해버렸던 것이다.

 

당시 여행 중이던 하이든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도 노래의 제목은 여전히 '하이든의 세레나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