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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Debussy - Rhapsodie pour Saxophone Alto et Orchestre, L.98

 

 

Rhapsodie pour Saxophone Alto et

Orchestre, L.98

 

드뷔시 / 오케스트라와 알토색스폰을 위한 랩소디

 

Claude Debussy 1862~1918

 

 

 

 

 

랩소디(Rhapsody)

 

즉흥성을 중시한 악곡의 한 형식으로 서사적, 영웅적, 민족적인 색채를 지니는 환상곡풍의 기악곡

 

색스폰(Saxophone)

 

원추형의 금속관으로 만들어진 홑리드 목관악기. 1846년 앙투안 조제프 삭스가 개발하여 파리에서 특허를 얻었다.

색소폰은 패드가 붙은 키로 조작되는 24개의 구멍이 있고 마우스피스는 클라리넷의 것과 흡사하다.

 2개의 옥타브 키는 원래보다 한 옥타브 위의 음을 낼 수 있게 해준다.

 

소프라니노 색소폰과 B♭ 소프라노 색소폰 가운데 1종류만이 클라리넷과 같이 곧게 뻗은 형태이며

그밖의 모든 색소폰은 아래쪽 끝이 위로 구부러져 있으며 위쪽 끝에는 분리할 수 있는 변조관(목)이 있다.

 통상적인 음역은 원래 B음(가온 C 아래의 B)에서 f 음(가온 C음으로부터 3옥타브 위의 F)까지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로 반음 더 내려가 B♭까지로 확장되었다.

 

 색소폰족 악기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역은 보다 확장되어 알토·테너 색소폰은 f보다 반음 위의 음을,

바리톤 색소폰은 B♭보다 반음 아래의 음을 내게 되었다.

색소폰 악기의 실제 음역은 종류에 따라 다르다.

 

B♭ 소프라노 색소폰은 기보된 것보다 1도 낮은 음을 내며 E♭ 알토 색소폰은 6도 아래를, 그리고 B♭ 테너 색소폰

(파도 모양으로 구부러진 변조관이 있음)은 9도 아래를, E♭ 바리톤 색소폰(고리 모양의 변조관이 있음)은 알토 색소폰보다 한 옥타브 아래를, 그리고 B♭ 베이스 색소폰(외형이 바리톤 색소폰과 비슷함)은 테너 색소폰보다1옥타브 아래

음을 낸다.

 

드문 종류이지만 극단적인 음역을 내는 악기도 있는데 이 가운데는 소프라니노·콘트라베이스·서브콘트라베이스 색소폰이 포함된다.

일반적인 형태의 모든 색소폰들은원래 C조 또는 F조이며 C조 테너 색소폰은 가끔 조옮김 없이 성악음악 연주에 사용되기도 한다.

 

삭스는 색소폰의 발명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의도는 군악대와 관현악단 모두에 적합한

 악기를 만들려는 것이었으며, 금관악기의 마우스피스에 리드를 사용하려 한 실험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곧바로 그의 실험적 시도는 프랑스 육군에 공식 채택되어 악기를 납품하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색소폰은 미국의 대중적인 독주 악기가 되었고 곧이어 댄스 밴드에도 등장하여 스윙이나

그밖의 재즈 형식 발전에 가장 중요한 독주 악기가 되었다.

 

 빅 밴드에서 쓰는 색소폰은 보다 밝고 파고드는 듯한 음을 내기 위해 마우스피스의 형태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지금의 색소폰은 초기의 것보다 관의 지름이 넓어졌다.

 

색소폰은 탄력성이 커서 목관악기는 물론

 금관악기와도 잘 어울린다.

 

연주회용 악기로는 폭넓게 사용되지 않지만 재즈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선율의 즉흥연주 악기로 쓰인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즈 색소폰 연주자로는 레스터 영, 콜먼 호킨스, 찰리 파커, 소니 롤린스, 존 콜트래인 등이 있.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Claude Debussy (1862–1918)

 

 

 

 

 

 

 

 

 

 

 

 

◀1885년 드뷔시가 로마에 있는 메디치 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중앙에 흰 상의을 입고있다.

 

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에 생 제르망 엉 레(Saint-Germain-en-Laye)에서 다섯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 가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는 7세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체루티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아이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레슨비는 그의 아주머니(aunt)가 지불했었다.

 

1871년에 수줍고 겁많은 소년드뷔시는 마리 모테 드 플레비유(Marie Maute de Fleurville) 부인에게 주목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프레데리크 쇼팽의 친구라고 주장했고, 드뷔시도 항상 그녀를 신뢰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쇼팽의 친구였다는 증거는 없다.

 

자신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준 덕분에, 1872년 11살의 나이로 드뷔시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1872년부터 1884년까지 세자르 프랑크 에르네스트 기로(Ernest Guiraud)과 함께 공부하였다. 재학 중에 러시아 음악과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에 접한 것은 이후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탕자>로 로마 대상을 받고, 1887년 말라르메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이때 상징파 시인 및 인상파 화가와의 접촉에 의해 차츰 음악에의 의식이 깊어졌다.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으로 그의 인상파풍의 작품 경향은 확정되었다.

가극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는 반 바그너적, 반 튜튼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의 폭격이 한창일 때 파리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