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김 경 식 지음
1) 철학은 인간운명의 길잡이이다.
2) 철학의 근본문제
2. 세계란 무엇인가?
1) 세계의 근원은 물질이다.
2) 세상만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3) 세계의 사물현상은 상호연관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
3. 사람을 살펴본다
2) 사람의 본성은 무엇인가?
사람은 자주성을 갖는다
사람은 창조성을 갖는다
사람은 의식성을 갖는다
3)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다
4.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1) 사람은 세계의 주인이며 세계의 개조변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사람은 세계의 주인이다
사람은 세계의 개조변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2) 사람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5. 참된 철학이 밝힌 사람중심의 세계관
1) 사람을 위주로 하여 세계를 보아야 한다.
세계는 사람에 의해 지배된다
세계는 사람에 의해 개조된다
2)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대해야 한다
사람의 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람의 활동을 기본으로
머리말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유와 행복을 누리면서 한생을 존엄있고 빛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희망과 소원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생을 존엄있고 값있게 살자면 무엇보다도 그것을 누릴 만한 풍부한 정신적 자양분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이 있어야 하고 참뜻을 지켜 어려움을 헤치면서
자기를 이끌만한 정직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자양분과 마음가짐 또한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의 꾸준한 수련과 교양을 통해서만 키울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긴요한 것의 하나가 철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철학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철학들이 다 사람에게 바람직한 정신적 자양분을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정신적 양식을 얻고자 하면 부지런한 농민들이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좋은 땅에
우수품종의 씨를 뿌리고 잘 가꾸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훌륭한 철학을 선택하여 그것을 깊이 익혀 자기의 정신적
양식으로 삼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는 민중을 위한 참된 철학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철학은 있어도 힘과 지혜를 주고 마음의 감옥을 열어주는 참된 민중의 철학이 없습니다.
이 사회에 탁류처럼 범람하는 철학들은 모두 우리의 민족정신을 무너뜨리는 남의 나라 철학인
수입철학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무리 읽어도 마음의 기둥으로 삼을 만한 정신적 양식을 얻지 못합니다.
필자도 오랫동안 참된 삶의 방식을 얻고자 수많은 서점과 도서관들을 찾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철학을 접해 보았으나
종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덧없이 시간만 소비했습니다.
인류역사는 그 발생이래 참으로 수많은 우여곡절과 여러 발전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매 역사적 발전단계에서는 당해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사상과 이념이 있었고 그 사상이념의 작용아래 역사가 전진하고
사회가 발전하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현시대의 특징은 자주성에 있습니다.
지난날 억압받고 천대받던 수억만 근로민중이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 현대역사, 현시대의 기본모습입니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추세와 선량한 인류의 한결같은 의사를 담은 인간해방, 인간긍정의 참다운 이념의 출현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사람과 세계의 의미를 뚜렷이 밝혀 주고 사람을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존재로 내세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민중을 위해 이바지하게 하도록 참된 실천기준을 주는 사람중심의 철학입니다.
이 책에 담긴 철학은 우리 민중에게 참된 삶의 지혜와 정신적 자양분을 안겨 주며 나라와 민족이 나아갈 자주의 길을
밝혀 주는 이념의 밝은 등불이라고 필자는 확신합니다.
또한 이 철학은 참과 거짓, 정과 부정을 헤아려보고 옳은 것과 새것을 익혀서 행위의 참된 지침을 구하게 하는
생활의 교과서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민중의 철학을 배워 우리 민중의 운명과 나라의 장래를 건지고자 이에 대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사람중심의 철학의 원리와 그에 바탕한 세계관을 기본 논제로 삼아 간략하게 서술하였습니다.
필자 자신이 아직 참된 철학의 깊은 뜻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어 미숙한 점이 많으나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어주기 바랍니다.
1.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지성적인 판단력과 지혜, 가치있는 이념과 사상의 소유는 오직 참된 철학적 사고에서 가능한 것이고
철학의 길잡이 없이는 자기와 세계 그리고 자기 운명에 대해 아는 일이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인생의 올바른 방향각을 잡기에 앞서 참된 철학을 찾게 됩니다.
하다면 그 철학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철학을 논할 때마다 뭇사람들이 제일먼저 내놓은 공통의 질문으로 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합리적인 질문에 타당한 대답을 주려고 자기의 학식과 사색을 아낌없이 동원해 온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옛날 어느 한 학자는 철학이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학문이라 하여 ≪애지학≫이라 이름하였고 또 어떤 학자들은
사람과 인생문제를 논하는 ≪인간학≫이 바로 철학이라 했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철학이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는 학≫을 뜻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관광모험≫이나
≪바보의 화랑≫이 철학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철학에 대한 의미를 달리 규정한 실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무튼 철학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으로 학자마다 견해와 주장이 달라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단순히
≪애지학≫이나 ≪인간학≫은 아니고 또 ≪관광모험≫이나 ≪바보의 화랑≫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는 철학의 참의미를 밝히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제목을 설정하고 간명하게 서술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철학은 인간운명의 길잡이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의 근본문제≫입니다.
1) 철학은 인간운명의 길잡이이다.
흔히 사람들은 행복과 재난을 세상형편과 곧잘 결부시킵니다.
살림이 풍족하고 심신이 편안하면 우리 세상이 제일이라고 하고 불행과 화가 잦아 살아가기 힘겨우면
세상이 왜 이다지도 모진 가고 불평합니다.
사람의 이런 상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삶이란 주어진 환경 요컨대 주위세계와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현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별로 하는 일 없이 호강하면서 오래 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생동안 힘겹게 일하면서도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일찍이 죽습니다.
세상에는 평등한 사회가 있는가 하면 한국과 같이 불평등한 사회가 있고 자연은 그것대로 모진 태풍을 몰아오기도 하고
온화한 기후로 풍성한 열매를 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오면서 불행의 원인을 밝히고 행복한 생활을 창조하기 위해 오랫동안 세계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걸어온 유구한 역사는 세계를 탐구하고 개조하기 위한 끈기있는 투쟁의 노정사였습니다.
이 역사를 톱아 오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견해와 자세를 가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을
일컬어 세계관이라고 이름했습니다.
그러면 그 세계관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사람들의 견해*와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입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계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사는 까닭에 자연과 사회의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에 대한 견해와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개별적 견해와 자세가 곧 세계관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관이 되자면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견해와 자세가 세워져야 합니다.
* 견해 -- 사물과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뜻합니다.
** 관점 --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하게 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게 하는 사고의 기본 출발점 혹은 그에 대한
입장을 뜻합니다.
*** 입장 -- 사상, 견해, 행동 등이 의거하고 있는 바탕 또는 행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몇 해 전 충청남도 은산 지방에서 있었던 사실을 하나 들어보기로 합시다.
이상기후현상으로 이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피해가 이만저만 아닌 데다가 마을에 전염병까지 퍼져
많은 사람들이 신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노인장들은 이 고장에서 제일 높은 산에다 음식을 차려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상서롭지 못한 피해를
면할 수 있다 했고 또 다른 젊은이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연한 짓이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강물을 퍼 올려 논밭에 물을 대는 한편 의원을 불러 약을 쓰고 방역에 손을 써서 병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제사를 지내는 방법으로 가물과 전염병을 막아야 한다는 노인들의 생각은 세상만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천신≫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나온 것이고
자기들의 힘으로 재해를 방지하려고 한 젊은이들의 주장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하늘신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구체적인 행동이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근저에 놓여 있는 이런 세계에 대한 일반적 견해와 관점, 입장이 세계관으로 되겠습니다.
세계관에는 사람들의 일정한 요구와 이해관계가 담겨지게 되고 사람들의 그 요구와 이해관계는 그들의 사회계급적
처지에서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사회계급적 처지가 다르게 되면 자연과 사회에 대한 그들의 요구와 이해관계 역시 서로 달라지게
됩니다.
바로 사람들은 자기의 사회계급적 처지와 요구에 따라 세계의 모든 사물현상을 서로 다르게 보고 대합니다.
예컨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金門橋)라는 다리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살펴봅시다.
이 나라의 많은 부자들은 금문교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다리라고 자랑하고 있고 반대로 근로자들은
이 다리를 서글픔을 자아내는 ≪죽음의 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생활난으로 살길이 막힌 수백 명의 빈민들이 이 다리에서 투신자살하여 그런 대명사를 붙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성낸 시청에서는 몰상식한 가난뱅이들이 유명한 다리에 허물을 남긴다면서 곳곳에 ≪뛰어내리지 말라≫는
푯말까지 세워 놓았으니 근로자들의 눈에 그 다리가 어찌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자들은 그 비극적인 참상에 하등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그들에게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게 합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견지에서 세계를 보는 견해와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입장은 노동계급의
세계관으로 되고 자본가계급의 이익의 견지에서 세계를 보는 견해와 세계에 대하는 관점과 입장은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으로 됩니다.
이렇게 세계관은 사람들의 처지와 요구,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까닭에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세계관을 논하면서 한두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민중이 착취계급이 아니라고 하여 저절로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선 그 하나입니다.
피착취계급이라 하여도 그릇된 사상을 따르면 착취계급의 속된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쉽게도 애꾸눈이 되어 현실의 한쪽만을 보고 다른 쪽을 못 보거나 옳고 그른 것을 전혀
분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정자들의 거짓 선전에 말려들어 올바른 세계관을 세우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게 제 정신을 잃게 되면
자기 운명을 올바로 운전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근로자들과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여 노동계급의 세계관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에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세계관을 가지고 근로대중을 위해 한생을 값있게 바친
예가 적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세계 속에서 살면서 자기의 생존환경인 세계를 어떻게 보고 대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사색과
탐구의 힘을 기울여 오는 과정에서 세계관을 주는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이를테면 철학은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세계관을 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은 세계관을 준다는 점에서 개별과학과 구별됩니다.
물론 수학, 물리학, 화학, 문학을 비롯한 사람의 인식활동에 의해 생겨난 모든 학문들은 이렇게나 저렇게나 사람의
운명문제의 해결에 관계하게 됩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자연과학은 세상만물을 사람의 생존에 유익하게 인식, 개조하는 데 도움을 주고 또 사회과학은
사람들의 정치생활과 인격도야에 큰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과 사람의 운명문제에 해답을 준다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니겠습니다.
철학은 자연과 사회, 인간을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사람의 운명문제를 해명하는 데 주력하지만 개별과학은
세계의 한 부분이나 자연의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이치해명에 머무르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개별과학은 세계의 개별적 분야에 대한 지식은 주지만 세계의 전체에 대한 통일적 견해를
주지 못하며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입장을 밝혀주지 못합니다.
예컨대 물리학은 물질운동의 양상과 그것들의 상호전환에 대한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서 사람의 복리향상에
이바지하나 거기서 직접 사람의 운명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고 또 역사학은 여러 가지 옛 것을 알아서
새로운 것을 익혀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사람과 세계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밝혀주지 못합니다.
오직 철학만이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 관점, 입장을 밝혀줍니다.
참된 세계관은 세계에 대한 사람 위주의 견해와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입장입니다.
인류철학사에서는 여러 갈래의 철학유파들이 있었지만 사람중심의 세계관을 밝힌 철학은 그 어느 때에도 없었습니다.
철학사상 처음으로 보게 된 이런 세계관은 오직 참된 철학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참된 철학의 사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참된 철학이 사람위주의 철학이라는 그 자체의 의미에 의해 스스로 해명됩니다.
참된 철학은 사람 위주의 철학입니다. 이것은 참된 철학이 사람을 철학적 고찰의 중심에 놓으며 사람의 운명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하는 철학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운명문제는 사람의 생사존망과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운명문제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올바로 개척해 주어진 한생을
사람답게 살아나가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세계를 개조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 개척됩니다. 세계를 개조하고 지배하는 데서 무엇보다
긴요한 것은 세계를 바로 보고 옳게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를 보고 대하는 견해와 관점, 입장은 무엇을 위주로,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대하는가 하는데 따라
그 과학성과 허위성, 혁명성과 보수성이 갈라지게 됩니다.
참된 철학은 ≪신≫이나 물질을 위주로 하여 세계를 보고 대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주로 하여 세계를 보는 견해와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입장을 세워야 인간의 운명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고 따라서
철학이 지닌 자기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사람중심의 세계관을 밝힌 철학은 사람의 운명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주고 사람의 운명개척에 참답게
이바지하는 것을 자기의 마땅한 사명으로 합니다.
우리가 철학을 인간운명의 참된 길잡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철학의 근본문제
철학이 사람의 운명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주자면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고
변화발전하는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사회란 무엇이고 사회역사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자연과 사회,
사람은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등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세계관을 주기 위해 해명되어야 할
큰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들이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세계관을 세우는 데서 꼭 같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철학이 밝혀야 할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도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 문제를 가리켜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합니다.
철학의 근본문제는 철학이 풀어야 할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도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세계관을 세우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 철학의 전반적인 체계와 내용을 전개하는 데서 출발점으로, 그 기초가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의 근본문제를 어떻게 제기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철학의 성격과 내용 그 과학성과
진리성의 여부가 좌우됩니다. 그러면 먼저 종래의 철학들이 제기한 철학의 근본문제부터 살펴봅시다.
종래에는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의 관계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아 왔습니다.
* 물질 - 사람의 의식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 즉 사람의 머리 속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실제로
있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 의식 - 사람의 뇌수기능에 의해서 생기는 정신현상을 뜻합니다. 사람은 이런 정신의 도움으로 일정한 사상,
세계관을 갖고 사물현상을 인식하기도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 존재 - 사람의 의식과 구별되면서 이 세상에 현실적으로 있는 것을 뜻합니다.
**** 사유 - 사람이 사물현상의 본질과 그 발전의 이치 등을 알아내는 생각 또는 그 과정을 의미합니다.
종래의 철학이 내세운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는 주로 이 양자의 선후차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 물질이 먼저 있고 거기에서 의식이 생겨났는가 아니면 의식이 먼저 있고 그에 의해서 물질이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결국 세계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 무엇이냐 하는 세계의 시원문제로 됩니다. 2천여 년의 철학사를 살펴보면
학자들은 저마다 이 문제를 놓고 서로 엇갈리는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물질이 정신보다 먼저 있어 거기에서 정신이 생겨났다고 보았고 다른 철학자들은 정신이 물질보다
앞서 있어 거기에서 물질세계가 생겨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물질이 선차적이고 기본이라고 주장한 견해는 유물론을 이루고 반대로 정신이 선차적이고 기본이라고
주장한 견해는 관념론으로 되었습니다.
물질과 의식의 관계는 세계관을 세우는 데서 반드시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습니다.
오랫동안 심각한 논쟁거리로 되어 온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는 선행한 노동계급의 철학에 의해 옳게 해결되었습니다.
노동계급의 철학은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지고 물질의 운동에 의해 세상만물이 변화발전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혔습니다.
이것은 근로민중의 과학적인 세계관을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세계관을 세우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세계관을 세우자면 무엇이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는 결정적인 힘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해명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참된 철학에 의해 비로소 제기되고 또 명백히 해명되었습니다.
그러면 참된 노동계급의 철학이 새롭게 제기한 철학의 근본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노동계급의 자주적인 철학은 이전 철학과는 달리 사람을 위주로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사람을 위주로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사람이 세계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을 철학의 근본문제로 새롭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람과 세계의 상호관계문제가 왜 철학의 근본문제로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선 사람과 세계의 관계문제를 풀어야 사람이 세계와 자기 운명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관점을 확립하고
자기 운명을 올바로 개척할 수 있는 근본방도를 밝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개척되고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는 자연과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세계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 말하자면 사람은 세계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에 해답을 주어야 어디서나 사람이 운명개척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요컨대 참된 철학이 내세우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사람이 주위세계를 지배하느냐
아니면 다른 존재가 사람을 지배하느냐 그리고 세계를 개조하는 데서 사람이 결정적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계급의 자주적인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줌으로써 사람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근본방도를
이치적으로 찾게 합니다.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문제가 철학의 근본문제로 되는 것은 또한 이 문제를 해명해야 사람이 생겨난 이후의 현실세계에
대한 정확한 세계관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는 오직 자연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모든 것이 자연의 운동법칙을 좇아 자연발생적으로 변화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후의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세계의 발전은 주로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에 의해 세계가 개조되고 사람에게 복무하는 방향으로
변화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사람이 세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철학의 근본문제로 제기하고 그에 해답을 주어야 이러한
현실세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옳은 자세로 세계를 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철학의 근본문제는 현대인류의 철학적 사유가 제기한 가장 훌륭한 과제이며 완성된 세계관의 원리를
밝힐 수 있게 하는 철학의 대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세계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세계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것은 세계라는 말이 그만큼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계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도 쓰이고 넓은 의미로도 쓰입니다.
좁은 의미로 쓰일 때에는 식물세계, 동물세계, 인간세계라는 말과 같이 지구의 일정한 분야를 뜻하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 쓰일 때에는 하늘, 땅, 바다, 천체 등 우주의 모든 것을 세계라 이름하기도 합니다.
철학에서 세계라고 할 때에는 생물과 무생물, 사람과 사회, 세상의 모든 것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바와 같이 세계와 사람과의 상호관계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제기한 이상 일단 여기서는
사람 밖의 외부세계를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과 그 밖의 외부세계 가운데서 어느 것을 먼저 밝혀야 인간의 운명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에 대한 문제를 먼저 해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철학 하는 목적도 사람을 위한 것이고 또 세계를 연구하고 해석하자는 까닭도 사람을 위한 세계로
만들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양자에 대한 해석의 선후차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세계의 본질과 변화발전 그리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적 특성을 어느 만큼 과학적으로 정확히 해명하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양자에 대한 과학적 해명을 중시하는 견지에서 사람 밖의 외부세계를 먼저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외부세계 즉 물질세계가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그 변화발전의 특출한 산물로서 사람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1) 세계의 근원은 물질이다.
사람 밖의 주위세계는 천태만상의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만 살펴보아도 다양하고 수려한 자연경관이 한 폭의 거대한 그림처럼 눈앞에 안겨옵니다.
수림이 울창한 산들과 가지각색의 꽃들이 피어나는 광막한 들판, 사시장철 출렁이는 망망대해와 흰구름이 유유히
흐르는 푸른 하늘이 돋보입니다.
또 한여름에는 비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일고 낮에는 태양이 빛나다가 밤이 되면 무수한 별들이 반짝입니다.
참으로 세계는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매우 작은 미립자가 있는가 하면 지구보다도 몇십 몇백 만 배나 더 큰 거대한 천체들도 있습니다.
금강석과 같이 굳은 고체들도 있고 물이나 기름과 같이 낮은 곬을 찾아 흐르는 액체도 있으며 공기와 같이 지구를
휘감고 있는 기체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도 있고 돌이나 광물처럼 숨통이 없는 비생명체도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물체라도 중량, 색깔, 모양, 경도들이 모두 같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사람 밖의 주위세계는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주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이고 그 천차만별한 사물현상의 근저에는 또 무엇이 놓여져
있는 것인가?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 거대하고 조화로운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저마다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은 세계의 이 다양한 자연현상은 신비스러운 ≪조물주≫의 솜씨가 아니고서는 이 가지가지의
조화를 설명할 수 없다 하여 세계를 이루고 있는 만물의 근원은 절대적인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종교에서도 세계의 근원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종교철학자들은 신비스러운≪신≫의 ≪의지≫나 ≪영혼≫, ≪정령≫을 우주와 결부시키면서
그것을 세상만물의 근원이라 했습니다.
요컨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최초의 물질도 ≪신≫이나 ≪영혼≫에 바탕하고 세계의 모든 실체들도 다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관념은 종교에 의해 널리 선전되어 오래 전부터 하나의 사회적인 의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물질세계 밖에 있는 초자연적인 신비스러운 존재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의지≫나 ≪질서≫를 따라 움직인다는 견해입니다.
지난날 많은 사람들의 두뇌를 지배해 온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에 대한 관념이 바로 그 견해입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신화적인 이야기도 있고 종교적인 ≪학설≫이나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들도 있어
오랫동안 덧없는 환상이 사회를 풍미하여 왔었습니다.
먼저 신화적인 한두 가지 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옛날 그리스의 사람들은 올림퍼스*에 거처했다는 제우스라는 최고신이 다른 신들을 낳아 그것들이 공간과 시간을
만들고 뒤이어 대지, 태양을 비롯한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했습니다.
또다른 신화에 의하면 어떤 신비로운 용(龍)이 알을 낳아 거기서 나온 파네스라는 존재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고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열어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신화는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하늘은 만물의 처음이요, 하늘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하늘은 모든 것을 창조했음과 동시에 모든 것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한 구절입니다.
* 올림퍼스 -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이 거처했다는 그리스 최고의 산 이름입니다.
종교에서 주장하는 ≪세계창조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이론≫이나 ≪교리≫로 다듬어 놓았을 따름입니다.
그 견해에 의하면 ≪지상의 세계≫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나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밖에는 그 어떤 ≪극락세계≫나 ≪천당≫과 같은 ≪천상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세계의 모든 것은 신비한 존재, 절대자에 의해 지배되고 그의 심리나 질서 밑에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의 길흉화복도 신이나 하느님의 뜻이므로 그에게 은총을 빌면 죽어서라도 극락세계에 가서 지극히 안락한
생활을 하게되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세계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의 적지 않은 사람들까지 이 종교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수도원에 들어가 종신토록 독신으로 지내기도 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복종과 청빈을 지키면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당의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고 저녁과 밤에도 이 종소리와 더불어 먹고 자면서 하늘을 향해 삽니다.
≪천상의 세계≫에 대한 이론은 이렇게 사람들의 넋을 짓궂게 지배하는 것입니다.
종교와는 달리 세계가 사람 밖에 있는 ≪절대정신≫이나 사람이 갖고 있는 ≪정신≫또는 ≪감각≫에 의해
생겨났다는 다른 관념론의 견해를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지만 ≪절대이념≫의 외화(外化)가 세계의 근원이라고 보는 그 한가지 견해만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세계의 어디엔가 존재하는 절대이념이라는 것이 자기 스스로 발전하여 자연으로 나타나고
다시 사회의 모든 것으로 높이 발전했다가 본래의 자기 자태로 되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어느 천상의 세계에 있는 그 절대이념이 지상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이론은 신화나 종교적인 우주개벽설과 꼭 같은 것은 아니나 그 본질을 파고 들어보면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에 관한 종교의 주장과 다를 것이 없겠습니다.
종교나 관념론과는 반대로 유물론에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요구합니다.
세계의 보편적 기초는 오직 물질이고 세상만물은 물질의 각이한 형태라고 봅니다.
물질에 대한 유물론의 견해도 오랜 역사를 거쳐 발전해 왔습니다.
불란서의 라스코동굴이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있는 원시사회의 그림들을 보면 벌써 이 시기 사람들 속에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 흔적들이 역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대사회의 어떤 사람들은 아톰*이라는 가장 작은 물질이 작용하여 세상만물이 생기게 되었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흙, 물, 불, 공기와 같은 물질들이 세계의 근원이라 하고 여기서 천차만별한 사물이 생겼다고
보았습니다.
* 아톰(원자) - 모양, 크기, 배치를 달리한다는 최후의 작은 존재로서 결합, 분산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작은 알갱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중세 말과 근세에 이르러 유물론자들은 여러 가지 대상, 현상의 기초에는 물질적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근원적인 물질적 실체는 변하지도 아니하고 또 그 이상 더 쪼갤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물질적 실체는 근본적으로 보아 변화발전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은 이 유물론을 이름하여 기계적 유물론 혹은 형이상학적 유물론이라고 했습니다.
그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물질세계에 대한 견해는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폴란드의 물리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이미 오래전에 지동설을 통해 천상계가 지상계를 돈다는 종교적인 견해를
타파했고 뒤이어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인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그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굴절천체망원경을 제도하여 달 표면의 산과 계곡, 태양의 흑점 그리고 은하수가 무수한 별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우주공간의 모든 천체들이 다 물질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는 신비스러운 비물질적인 ≪천상의 세계≫가 있다는 종교의 사상, 상식을 과학적으로 부정했다는 이유로
교회권력의 가혹한 박해까지 받았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물질에 대한 이해는 더욱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원자를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불변의 입자로 보았지만 자연과학은 원자는 핵과 그 주위를 운행하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다시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물론 현대과학은 핵을 분할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중성자도 더 작은 미립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원자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물질적 존재하는 이론이 파산되게 되었습니다.
유물변증법은 자연과학이 이룩한 성과의 도움을 받아 세계는 본래부터 물질로 되어있고 사람 밖의 현실적인 세계는
참 실재인 물질적인 세계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세계는 어떤 외부의 보충도 없이 물질로 된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해 왔고 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입니다.
세상만물은 다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정신≫으로 만들어진 세계는 없습니다.
물질적인 세계는 사람의 정신이나 의식에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세상의 참 실재가 물질이라는 것은 자연계의 모든 사물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화학원소는 107개인데 그중 천연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97개이고 나머지는 사람의 지혜로 얻은
것입니다.
이 화학원소들이 결합하여 100만개 이상의 분자를 구성하고 그 분자들이 다시 재결합하여 천차만별한 자연을
이루었습니다.
자연은 크게 두 부분으로, 즉 무기체와 유기체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무기계만 보아도 대단히 다종다양합니다. 금, 은, 동, 탄소와 같이 하나의 원소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쇳돌, 흙, 화강암,
금강석, 소금, 무기산들처럼 여러개의 원소로 결합된 것도 있습니다.
기체, 액체, 고체도 있고 크와르크와 같이 원자핵보다 더 작은 미립자와 거대한 천체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무기계와 함께 유기계도 대단히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바탕은 다 물질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생활능력을 가진 것은 다 유기체를 이룹니다 예컨대 지구를 뒤덮고 있는 50만종의 유핵*,
무핵**식물들과 150여만 종을 헤아리는 척추, 무척추동물들이 다 물질적인 유기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 유핵물질 - 세포막, 원형질, 엽록소와 함께 핵을 갖고 있는 식물입니다.
** 무핵식물 - 핵과 엽록소가 없고 세포막과 원형질로 된 하등식물입니다.
특히 놀랍게 발전한 현대과학은 ≪천당≫이나 ≪지옥≫이 없다는 것을 뚜렷이 밝힘으로써 세계의 물질성을 여지없이
확인했습니다.
지금 많은 우주비행기들이 과학기술의 정수라고 불리는 우주비행선을 타고 행성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면서 넓은
우주공간을 깊이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어디서도 신을 만나보았거나 천당을 구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 최신기계들의 힘을 빌어 땅 속을 아무리 깊이 파 보아도 염마*(閻魔)가 있다는 지옥을 발견하지 못했고 5대양의
바닥을 샅샅이 탐사해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용궁의 세계≫는 없습니다.
지상의 세계나 천상의 세계를 비롯한 모든 우주창조설은 다 이치에 맞지 않는 거짓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 염마 -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생존의 선악을 다스려 악을 방지한다는 환상적인 염라대왕을 이르는 말
더구나 물질세계가 ≪정신≫이나 ≪의식≫ ≪감각≫의 산물이라고 보는 당치않는 견해는 물질로부터 사유를
분리시키는 황당한 이론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현대과학에 의하면 정신이나 의식은 고급한 물질인 뇌수의 기능이며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소유자인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100~200여만년 전에 지구 위에 생겨났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는 아득히 70억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세계는 ≪정신≫이나 ≪의식≫의 배설물로 될 수 없고 그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그 자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비인격적인 신비스러운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천상의 세계≫나 그에 의해 창조된 ≪지상의 세계≫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오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 뿐입니다.
사람은 이 물질세계의 장구한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입니다.
사람의 몸은 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무기염류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산소, 탄소,
수소, 질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물질세계의 발전을 대표하는 특수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으며 물질은 세계의 본질을 이룹니다.
물질로서 통일된 세계는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또 내일도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2) 세상만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위에서 본바와 같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물질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겠습니까?
세상만물은 끊임없는 운동속에 존재합니다. 운동은 물질의 기본존재방식입니다.
한자리에 머물러 영원히 정지하고 있는 사물이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넓은 우주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다 운동합니다.
물론 이것은 운동의 기본 의미는 아니나 아무튼 한 곳에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는 존재란 없습니다.
산중턱의 큰 바위들도 겉보기에는 흐르는 세월과 무관하게 영원히 한 상태에 정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 내막이
조용치 않습니다.
맹렬한 운동,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식물의 생태현상을 살펴보면 그 운동의 양상은 더욱 미묘하고 그 차원도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자유운동*, 자극운동**, 자발적 운동***, 물리적 운동****, 원형질 운동*****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운동을 하는데 그 생명활동은 최신자동기계공장 이상으로 매우 조화로운 운동을 합니다.
뿌리는 체관부를 통해 물과 영양물질들을 빨아들이고 잎에서는 햇빛을 받아 그것을 공기와 합성하여 성장에 필요한
전분, 당분, 단백질, 지방, 비타민 등을 만들어 다시 줄기와 뿌리, 열매에 공급합니다.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식물을 자양성식물, 다시 말하면 영양물질을 스스로 만드는 식물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등식물들만 해도 5천여 종이나 됩니다.
이렇게 사람도 감히 하지 못하는 그러니 일들을 식물이 하고 있으니 그 운동세계야말로 미묘복잡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 자유운동 - 일부 식물들이 자리를 완전히 옮기는 운동입니다.
** 자극운동 - 외부의 자극을 받아 그 영향으로 일어나는 식물체 내의 운동을 뜻합니다.
*** 자발적 운동 - 외부의 자극이 없어도 스스로 진해오디는 식물체 내의 운동을 말합니다.
**** 물리적 운동 - 식물 자체에 의하여 꽃가루, 씨앗, 포자가 뿌려지고 체내의 물기가 증감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 원형질 운동 - 세포의 원형질이 움직이면서 생식, 포식 등을 하는 운동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작고 작은 미시세계의 원자, 전자, 핵들도 맹렬히 운동하고 상상키 어려운 거시세계의 큰 천체들도
다 운동합니다.
전자는 핵 주위를 돌고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태양은 은하 중심의 주위를 돌면서 다 운동합니다.
예컨대 지구보다 130만 배나 더 큰 태양은 초당 15.3킬로미터의 속도로 25,000년 동안에 한 바퀴씩 은하 중심의
주위를 돈다고 합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사회도 운동합니다.
사람들이 상호 접촉하고 배우며 협력하면서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하며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나 무산계급이 힘을
모아 착취사회를 뒤집어엎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그 자체가 사회적 운동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만물은 예외없이 다 운동합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운동은 물질의 기본존재방식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또 언제나 운동없는 물질이란 있은 일이 없고 또 있을 수 없습니다.
운동없는 물질이란 물질없는 운동과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만물이 갖고 있는 보편적 성질입니다.
물질이 발전하고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운동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운동은 그 성질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됩니다.
역학적 운동, 물리적 운동, 화학적 운동, 생물학적 운동, 사회적 운동들이 그 형태들입니다.
여기서 가장 높은 운동형태는 사회적 운동입니다.
높은 운동형태는 낮은 운동형태들을 온통 자체 내에 안고 있습니다.
자연개조를 위한 사람의 사회적 운동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밥을 먹고 집을 짓고 물건을 생산하자면 육체적 노동을 하거나 기계수단에 의한 역학적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또 몸 안에서는 소화, 흡수, 배설과 같은 생명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생화학적 운동이
진행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운동형태들이 사람의 사회적 운동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운동은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바뀌기도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성냥대신 두 개의 각목판때기를 마찰시켜
불을 얻곤 했는데 바로 이 단순한 행위에도 여러 가지 운동형태들이 이행한 결과 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만물은 운동과 분리할 수 없고 물질세계는 영원한 운동 속에 존재합니다.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떠난 사물의 존재와 운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체구 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한생의 긴 시간을 살고 있는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과 공간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시간의 내막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시간은 세상만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 줍니다.
한번 흘러보내면 되찾을 수도 없고 뒤주나 창고에 장만해 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꺼내어 쓸 수도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이용자의 것이라 하고 자못 중요한 것이라 일컬어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철학에서 쓰는 시간의 의미는 이와 다릅니다.
철학에서는 시간을 물질의 존재형식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세상만물은 시간 속에서 변화발전하며 존재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세상만물은 어떤 조건에서나 변하는 순간과 변하지 않는 순간에 놓이게 되는데 이것을 시간의 계기성이라 하고
또 사물의 상태가 한 순간이나 일정한 기간 유지되는 것을 시간의 지속성리라 합니다.
시간과 무관하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불변부동의 사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만물이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고 하여 시간을 실재 일반의 가장 보편적인 존재형식이라 합니다.
시간은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과거에서 현재에로, 현재에서 미래에로만 흐르는 것이 시간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일단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한가지 실례를 들어봅시다.
이전 일본 수상이었던 도오조는 태평양전쟁의 도발자로서 1945년 8월에 패한 후 1948년 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단두대 위에 선 이 수급전범자는 공포에 질려 두 손을 모으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죄악의 피묻은 양심을 씻어
보려는 듯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내처 앞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은 그로 하여금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 새롭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 않았습니다.
도오조는 무고하게 죽은 수많은 생명의 값을 치르지 못하고 시간이 명하는 대로 황천길로 갔습니다.
이렇게 시간은 과거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만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무궤도한 인생행각을 피하고
언제 어디서나 제나라, 제민족을 위해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무분별한 처사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했다 해도 제때에 반성하고 앞날을 참되게 사는 자가 현명한 사람으로 됩니다.
이렇게 처신하는 사람만이 시간의 참된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미래방향적이라 하여 만물의 과거까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과거를 가집니다.
물 속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는 뭍에서 살고 있는 뱀이나 새보다 먼저 생겨났고 노예사회나 봉건사회는
자본주의사회보다 앞서 존재했습니다.
이렇게 과거는 시간적으로 먼저 있은 사물의 존재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영원성은 시간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 됩니다. 시초도 없고 종말도 없습니다.
사물이 영원무궁토록 변화발전할 수 있는 것이 시간의 영원성과도 관련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공간문제와의 연관 속에서 더 살펴봅시다.
물질세계는 시간과 더불어 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아무런 모양과 크기도 없고 일정한 장소와 위치도 없이 존재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물은 일정한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갖고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22만여 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지고 아시아대륙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고 여기서
제일 높은 산은 해발 2,750미터의 높이를 가진 백두산입니다.
우리나라 영해까지 합치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 면적은 훨씬 넓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만물이 넓이, 길이, 높이, 용적, 위치, 형태 등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공간이라 하여
그것을 위치와 연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물질의 존재형식이라 합니다.
공간은 무한합니다.
어디로나 막힌 데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얼마전에 천문학 연구계에서는 1초동안에 30만 킬로미터씩 가는 빛의 속도로 100억년 동안 가야 도달할 수 있는
먼 거리에서 새로운 항성계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빛의 속도로 180억년 동안 가야 다다를 수 있는 아득히 먼 거리에서 굉장히 큰 하늘색 빛 묶음을
발견했는데 그것 역시 항성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항성계들이 300억개 이상이나 공간에 널려있다고 보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공간의 무한성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영원하든, 공간이 무한하든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쓸데없는 것을 문제삼아 공연한 입씨름을 하는 것 같지만 결코 공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이제 시공의 세계에 대한 관념론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알게 될 것입니다.
관념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 사유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의식이나 정신의 발자취처럼
생각했습니다.
물론 관념론자들도 시간의 계속성이나 공간의 제한없는 확장에 대해 말하자면 종당에는 그 시작과 끝이 있다는
데로부터 시공의 밖에서 ≪신≫이나 ≪절대정신≫같은 것을 끌어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을 그 신비스러운 존재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거없는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시간은 영원하고 공간은 무한합니다.
이 시간과 공간은 운동하는 물질의 객관적 존재형식입니다.
* 선험- 경험에 앞선다는 말인데 주관관념론에서는 사람의 감각이나 경험, 인식은 실재하는 것과 관련없이
선천적으로 즉 미리 주어져 있다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3) 세계의 사물현상은 상호연관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
우리는 앞에서 시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운동은 상호관련이 없이 고립적으로,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물의 운동, 변화발전은 밀접한 연관속에서 진행됩니다.
연관이란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제약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뜻합니다.
연관에는 직접적인 연관과 간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제도는 사람의 경제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을 이룹니다.
자본주의제도는 착취계급에게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지만
근로자들에게는 그런 자유와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체험하고 있는 바이지만 기아임금, 시간외의 노동, 체불임금, 물가고, 저곡가 등 당국의 부당한
경제정책으로 혹심한 민생파탄을 빚어 수많은 근로자들이 생존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회제도와 경제생활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생활과 자연간의 관계는 다릅니다.
물론 사람은 자연을 정복해야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생산물은 직접 근로자들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나 회사, 혹은 통치기관의 관할 하에 그 일부만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제생활과 자연간의 관계는 사회제도를 거쳐서만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연관입니다.
또한 개별은 일반과, 부분은 전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산과 계곡간의 물줄기들이 많이 모여야 넓고 깊은 강이 이루어질 수 있고 우리 사회의 근로대중이 한뜻으로 뭉쳐야
강대한 힘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단결된 힘은 개별적인 근로자들의 힘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물은 공간적으로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낮은 집이 있어야 높은 집을 헤아릴 수 있고 먼 곳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이 있어야 가까이 있는 건물과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사물이 일정한 위치와 장소를 차지하고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가리켜 공간적 연관이라 합니다.
사물은 시간적으로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옛날의 진보적인 정신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더
발전시키면 겨레의 정신적 향상을 바랄 수 있고 그것을 무시하면 훌륭한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이룩해 놓은 물질적인 수단들과 가치있는 재부를 토대로 오늘의 성장이 마련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또 지금 여러 나라들에서 쌓고 있는 물질정신적인 재부들이 확실성있는 장래발전을 위해 소중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사물현상에 이런 관계를 맺어 준다고 하여 철학에서는 이것을 시간상의 연관이라 합니다.
사물현상은 연관과 그 상호작용하에 끊임없이 변화발전합니다. 세상만물의 변화발전은 무질서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법칙을 쫓아 변화발전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양적 변화로부터 질적 변화에로 넘어가는 법칙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양과 질 다 갖고
있습니다.
양만 있고 질이 없는 사물이 없고 질만 있고 양이 없는 사물도 없습니다.
양이란 사물의 크기와 내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상태를 뜻하고 질이라고 하면 그 사물만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성질 그 속성을 의미합니다.
세상만물의 변화발전은 그 양과 질의 변화과정을 통해 이룩됩니다.
어떤 실체든지 양이 변하면 잇따라 질이 변하게 됩니다.
예컨대 물의 조성에 산소원자 한 개를 더 첨가하면 과산화수소가 되는데 이것은 물의 성질과 판이한 산성물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민중이 굳게 뭉쳐 들고일어나 식민파쇼체제를 뒤집어엎고 정권과 생산수단의
소유자로 되면 우리 사회는 민중을 위한 새 사회로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질은 실체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양과 그 결합구조에 상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의 변화에 질의 변화가 따르게 되지만 질은 양을 제약합니다.
말하자면 사물의 질은 그 양의 한정 없는 증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질에 의해 양이 규정되고 자기의 존재방식도 규정됩니다.
질량의 상호통일도 질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져 사물의 상대적 안정성이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양의 변화는 대체로 서서히 진행되고 질의 근본변화는 급속히 진행되는 것이 사물의 피할 수 없는 변화발전의
법칙으로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은 정상기압상태에서 100도에 도달해야 끓습니다.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분자의 운동이 강화되고 원자의 상호 배치와 간격이 변하기는 하나 99도까지는 끓지 않습니다.
그러나 100도가 되면 갑자기 분자운동이 맹렬해지면서 끓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여러 가지 물질의 융점이 다른 데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철은 1,520도 아연은419도, 유리는 800-1,400도에서 고체가 녹아 액체로 되고 알코올은 영하 114도,
수은은 영하 38.9도, 에테르는 영하 123.6도에서 액체가 변해 기체로 됩니다.
이와 같이 사물이 자기의 융점을 가진다는 것은 일정한 상태에서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과정에 분자운동의
변화로 나타나는 그 물체의 양적 변화과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일단 한계온도에 이르면 순간적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우리가 병을 고치자고 할 때 왜 약을 일정 양만 먹어야 하겠습니까?
처방대로 약을 먹지 아니하고 더 많은 양을 쓰면 오히려 병을 더 하게 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독물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양의 변화가 해로운 질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다면 왜 사물의 변화발전에 양적 변화과정과 질적 변화 과정이 있게 되겠습니까.
그 까닭은 사물이 갖고 있는 안정성과 관련됩니다.
일단 질적 변화를 거쳐 자기 고유의 조직, 구조, 성질을 갖춘 사물은 일정한 기간 외부의 작용을 극복하고 자체를
보존하게 됩니다.
만물이 저마다 제 모양, 제 성질, 제 수명을 갖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물이 이 안정성의 테두리 안에서 양적 축적이 진행되다가 그것이 한계점에 이르면 질적 변화를 일으켜
다른 사물로 됩니다.
바로 이것이 질량법칙의 주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물의 변화발전은 긍정과 부정간의 투쟁을 통해서도 진행됩니다.
이것은 사물발전의 기본형식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사물현상에는 반드시 긍정적 측면도 있고 부정적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정확히 알려면 긍정과 부정을 정반비례적으로 옳게 결부시켜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 반대되는 두 면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세상만물이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면으로 이루어져 있느냐 하는 것을 살펴봅시다.
예컨대 이는 더하기와 빼기, 양극과 음극, 작용과 반작용, 오른쪽과 외쪽, 위와 아래, 생산과 소비,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부정의, 공격과 방어 같은 것을 뜻하는데 이런 대립되는 양면은 얼마든지 들 수 있겠습니다.
세상만물은 이 대립되는 양면의 통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한 개의 전지가 있습니다.
전지에는 양극과 음극이 있는데 그 중 한쪽을 없애면 벌써 그것은 전지가 아니게 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이 없이 기업을 운영할 수 없고 노동자는 먹고살기 위해할 수없이 생산에 종사합니다.
이 관계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이 양면의 대립은 투쟁을 낳습니다.
1977년 9월에 있은 서울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살펴봅시다.
그들은 자기들의 실력행사의 이유를 ≪결사선언≫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저 권력자들에게도 겨자씨만큼의 양심이 있기를 바라면서 기도도 하고 눈물어린 호소도 하고 소리치며 통곡도
했으나 주어진 것은 배반과 폭력과 기만뿐이었다....
우리는 이 이상 참을 수 없다. 더 이상 죽어만 갈 수 없다.
우리의 권리를 보장받고 우리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희망과 권리를 빼앗긴 우리 노동자는 죽음이다.
놈들은 제2의 전태일을 요구한다.
노동자의 진정한 권리가 보장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섬이 없이 한 사람이 쓰러지면 또 한 사람이 뒤이어
쓰러지는 죽음의 항쟁을 선언한다.≫
결국 악질기업주와 노동자들간의 대립이 투쟁을 낳았습니다.
이런 투쟁은 누가 싸우라고 시켜서 싸우거나 기업주와 관리들이 그만두라고 해서 끝날 투쟁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순이라고 말하는 그 대립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저절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됩니다.
말하자면 노동자들의 권익을 해치는 기업주와 그들을 옹호하는 착취제도를 영영 무너뜨리고 근로자들을 위해
새 사회제도를 세워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런 모순을 적대적 모순이라고 합니다. 사회에는 실력행사가 아니라 교양, 개조와 같은
순한 방법으로 해결되는 모순도 있습니다.
착취자, 억압자들이 없는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때려엎을 상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앞서 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뒤진 사람이 있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소극적인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를 흘리면서 싸워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뒤진 사람들을 교양, 개조하는 방법으로 부정적 측면을 이겨 나갑니다.
이런 것을 비적대적 모순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도 투쟁임에 틀림없겠습니다.
그렇다면 대립물의 이 양자 사이에 왜 투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은 발전하고자 하는 사물 자체의 성질에 근원합니다.
어떤 사물이 발전한다는 것은 그 사물을 이루고 있는 긍정적 측면의 요소들이 증대되어 높은 차원의 결합과 통일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발전하자면 상대방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되도록 많이 끌어다가 자기와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성질이 다른 요소들로써는 공고한 통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대는 자기의 구성요소를 빼앗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발하고 배척합니다.
이를테면 저항에 부딪칩니다.
그래서 투쟁을 통해서만 저항을 이겨 나가게 됩니다.
운동하는 만물의 밑바닥에는 이런 대립하는 양면간의 투쟁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 현상입니다.
온갖 사물의 변화발전이 운동과 투쟁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변화가 다 발전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없는 발전은 있을 수 없지만 발전없는 변화는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실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뉘나 할 것 없이 많이 보아오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자주 집권자들이 바뀌거나 여당과
≪국회≫의 빈번한 기구개편이 진행되고 합니다.
이때마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새로운 변화발전이 있으리라고 말하면서 이에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발전의 의미와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태는 변화임에 틀림없으나 발전은 아닙니다. 발전이 되자면 정권과 제도의 성질이 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여 발전은 사물의 단순한 자리바꿈이나 같은 물질의 상태변화가 아니라
진보, 새 것의 출현, 성장 등 높은 차원의 변화를 뜻합니다.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점차 복잡한 것으로,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으로 변하는 것이 사물발전의 일반적 양상이라 하겠습니다.
예컨대 식물은 원생대 단세포식물로부터 은화식물로 발전했습니다.
은화식물이라는 것은 수술과 암술의 구별이 없고 포자로 번식하는 저급한 식물입니다.
그것은 다시 꽃으로 생식기관을 삼고 있는 현화식물로 발전했습니다. 동물 역시 원생아메바로부터 연체동물,
척추동물, 포유류를 거쳐 인간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여러 개의 발전단계를 거쳐 오늘 사회주의 사회에까지 이른 사회발전의 이 실상도 그것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만물은 이렇게 변화발전합니다.
낡은 것이 새 것으로 교체되는 것은 사물발전의 중요법칙의 하나입니다.
새 것과 진보적인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할지라도 항구적으로 보면 어느 때에 가서는 승리하는 것이
객관적인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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