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겨 읽는 명상록

그리스 철학의 기본 사상가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철학의 기본 사상가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교묘한 논증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 여겼으나, 그는 대가를 바라고

 가르치지도 않았고 그의 목표는 소피스트의 목표와 아주 달랐다.

그의 삶과 활동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무엇이든 직접 가르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늙든 젊든, 높은 신분이든 낮은 신분이든 모든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했으며, 질문을 통해 그들의 의견과 행동 속에 있는 모순점을 밝혀내려 애썼다. 그의 작업은 2가지 흔들리지 않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첫째, 결코 그릇된 일을 하지 않고 그릇된 일에는 간접적으로라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원칙, 둘째, 무엇이 좋고 옳은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원칙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경우에 서로 다른 정권 아래서도 첫째 원칙을 흔들리지 않고 지킨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진 뒤 이른바 30인의 참주가 돈을 탐내어 죄 없는 시민을 잡아들이라고 소크라테스에게

명령하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호하게 명령에 불복종했다.

또 민주주의 시절에 그는 먼저 정치가로서 능력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말 잘하는 연설가의 웅변에 귀 기울이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나 폭로하려고 애쓴 가장 기본적인 모순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좋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자신에게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경멸당하고 비난당하는 것을 자신에게는 좋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견해 덕분에 그는 많은 사람의 열렬한 존경을 받았지만,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공개적으로 행동의 모순을

증명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큰 분노를 샀다.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정치 아래서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로 고발당했으며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그의 영향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대부분에 걸쳐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많은 지지자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글로 씀으로써 그의 철학방법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제자들은 여러 학파나 교파를 세웠다. 이중 어떤 파는 소크라테스 사상의 이론적 측면을 강조했고, 다른 파는 참된

철학자란 물질적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가장 중요한 제자는 아테네의 귀족가문 출신인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젊은 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항상 개인의 태도에 관심을 기울인 스승과는 달리 정치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플라톤은 아테네 대중이 야망에 찬 정치가들의 찬란한 계획에 현혹되어 무모한 정복에 가담했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사건을 목격했다.

 이 재난의 결과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플라톤은 처음에는 30인의 참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특히 그들의 지도자인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곧 참주정권보다는 그동안 멸시한 민주주의가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두정치가 무너지고 회복된 민주주의가 BC 399년 새 법전을 채택했을 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다시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지 않으면 정치사정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철학자들을 교육하는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그뒤 여러 해 동안 그는 몇몇 대화편 외에도 대작

〈국가 Politeia〉를 써서 이상국가의 윤곽을 그렸다.

 사회에서 모든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이기 때문에 이성의 지배만을 받고 충성스러운 전사계급이 뒷받침하는 엘리트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

 

두 통치계급은 개인재산을 가져서는 안 되며 극도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후기의 정치 저작인 〈정치가 Politicus〉와 〈법률 Nomoi〉에서는 오직 신만이 〈국가〉의 철인통치자들이 지닌 절대권력을 위탁받을 수 있음을 밝히려 했다.

삶이 일반법규로 지배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법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지만, 인간 통치자들은 엄격한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플라톤이 이론철학에 가장 많이 이바지한 것은 이데아론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데아론을 이끌어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자들에게 우리가 어떤사물이나 행동이 좋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경건하다거나 용감하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고 자주 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진술을 할 때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플라톤은 때때로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좋다'고 할 때 자기 앞에 보고 있는 에이도스 또는 이데아,

즉 상(像)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분명한 대답은 없다.

 그리고 질문의 의도는 대화상대자가 그러한 진술을 할 때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본다는

 사실을 알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감각세계를 넘어선 다른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며 플라톤은 이 세계를 이데아계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모든 사물은 영원한 이데아의 매우 불완전한 모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데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선(善)의 이데아이다. 선의 이데아는 "존재와 인식을 넘어서" 있지만 존재와 인식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존재'란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어떤 사람, 어떤 사자, 어떤 집 등 성질이나 모양으로 정의되는

특정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인식은 이 현세의 모양에 대한 지각에서 출발하지만 더 높은 이데아의 영역으로 올라간다.

〈국가〉의 제7권에 나오는유명한 동굴 이야기에서 플라톤은 보통 사람을 동굴에 앉아 벽을 바라보는 사람에 비유했는데 이 사람은 자기 등 뒤에있는 진짜 사물의 그림자만 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플라톤은 철학자를 밝은 곳으로 나와 이데아의 진짜 세계를 본 사람에 비유했다.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가면밖에서 본 빛 때문에 눈이 멀어 그림자를 이전보다 잘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실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프란체스코 하예즈,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펠라에 있는 마케도니아 왕실에서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될 왕자의 교사로 일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된 뒤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원을 열었는데, 이 학원의 학생들은 페리파토스(逍遙)라고

 알려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개별 사물들이 불완전하게 모사할 뿐인 초월적 이데아들의 영역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지각된 사물들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사물에 대한 인식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 사물들의 특정 유형이나 집단에

 관해 어떤 점이 일반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분석론 후서 Analytica posteriora〉의 마지막 몇 장을 살펴보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를 그것과 대응하면서도 인간정신이 개별 사물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대체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 또는 합목적성 이론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중요한 요소를 보존했다.

그는 모든 생명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더 완전한 상태로 발달하며 그뒤에는 자손을 낳으면서 다시 쇠퇴하고 결국

 죽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모든 개체가 똑같은 정도의 상대적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많은 개체는 그 정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전에 죽고, 다른 개체는 그 도중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성장이 늦어지거나 불구가 되거나 상처를 입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최선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인간에게 극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떠한 종류의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첫 번째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인간은 뛰어난 사회적 동물이므로 개인으로서는 인간 자체에 가능한 완전성들 가운데 불과 몇몇에만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몇몇 개인은 특수한 종류의 활동을 하기에 매우 뛰어난 재주와 성향을 타고 난다. 그들은 이 성향을 따를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여를 할 것이다.

 

또 어떤 개인은 다양한 기능에 남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고, 따라서 한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옮겨 다니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동물이 가질 수 없는 인류의 엄청나게 큰 장점이다.

왜냐하면 이 장점 덕분에 인류는 모든 종류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도 인류 전체에 가능한 모든 완전성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이 장점은 상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경험관찰에 철저히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학생들에게 법과 정치제도가 어떻게 작용했고 어느 지점에서 그 창시자들이 잘못 이해했는지를 알기

 위해 모든 유명한 도시와 국가의 법·정치제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라고 권유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독단적 철학자로 여겨졌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의 탐구결과들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위대한 경험주의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뒤 제자들이 그의 연구를 이어나갔다.

다음 60여 년 동안 페리파토스학파는 문학사와 물리과학이라는 2가지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그 뒤 이 학파는 잠시 쇠퇴했으나, AD 1세기에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원고가 다시 발견된 후 그의 저작을 주석하는

 큰 학파가 생겨났으며, 이 학파는 중세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A. Vivaldi Nu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