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철학의 이해
I.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흔히 접하게 되는 말로서 현대문화를 특징짓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지만,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예술의 각 분야는 물론 철학, 과학을 망라한 모든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뜻과 색채를
달리하면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다양성과 복잡성 때문에, 혹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어떤 방식으로 규정되어지기를
거부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이론 또는 전체성에 대한 혐오”로 정의한 료따르(Lyotard)를 따라서 몇 마디로
규정해 보면, 그것은 곧 절대확실성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 설명체제 또는 하나의 통일된 원리나 이론에 의해 모든 것을 규정하고자 하는 획일적‧전체적 사고방식에 대한 부정과 거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처음으로 보여주었듯이, 연극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연극의 구성요소나 본질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정형을 거부하고, 혼돈과 무의미의 요소 -- 과거의 전통적 시각에서
보면 --로써 연극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로 나타난다.
철학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진리나 지식, 합리성이 갖는 절대확실성과 객관성에 대한 전통철학적 신념을
부정하고, 그것들이 갖는 우연성과 잠정성, 역사성과 사회성, 그리고 국지성과 다원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점을 함축한다. 또한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이란 자연과학적 방법이나 지식이 갖는 절대객관성과 확실성에 대한 가정을 부정하고, 그의 가정과 전제가 갖는 잠정성과 우연성, 그리고 선택성이 강조되어 적용됨을 가리킨다.
II. 포스트모던 철학의 중심적 논의
포스트모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모던 철학(modern philosophy)의 기본가정과 그 특징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모던 철학 또는 근대철학은 17세기 데카르트(Descartes) 이후의 철학을 일컫는다.
그러나 근대철학이라는 말을 넓게 해석하면, 그것은 굳이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전통적인 철학 또는 관점을 가리키게 된다.
그와 같은 전통적 관점의 핵심적 특징은 곧 진리나 선, 가치에는 절대 확실한 근거나 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러한 근거를 밝히는 일을 철학의 기본 과제로 삼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던 철학과는 달리,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지식이나 인간인식에 있어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기초가 존재한다는 기본가정과 신념을 정초주의(定礎主義, foundationalism)라 지칭하며, 이를 비판하고 배격한다.
즉, 반(反)정초주의를 그들의 기본입장으로 표방한다. 니체(Nietzsche), 듀이(Dewey), 그리고 하이데거
(Heidegger)와 같은 선도적 철학자들과 또한 오늘날의 많은 철학자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 곧 반정초주의
(anti-foundationalism)라 할 수 있으며,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모던 철학의 정초주의적 기본가정에 강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하면, 진리나 지식, 합리성과 객관성, 그리고 가치판단에 있어서 불변의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사회적 산물로서의 근거나 기준이 존재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근거나 기준들은 인간의 욕구와 필요, 관심과 목적, 그리고 인간이 처한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며, 이 점에서 그것은 가변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며 또한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성격의 것이다.
이하에서 반정초주의와 상대주의적 사고로 그 특징이 부각되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핵심적인 논의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본다.
1. ‘주어진 것’의 부정과 가치부하설(價値負荷說)
데카르트(Descartes)나 로크(Locke)와 같은 근대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주어진 이성이나 감각적 경험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마치 사진기로 사물을 찍어내듯이, 파악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세계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로서 엄격히 구분되며, 인간과 세계는 서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식주체인 인간과 객체인 세계는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게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찰이나 인식은 바로 이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들은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순수이성이나 감각에 의해 파악된, 순수하고 절대 객관적인 지식으로서의 진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한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하면, 사물에 대한 관찰에 있어서 인간과 사물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관심과 동기, 신념과 가치관, 언어와 개념, 이론과 관점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때문에 어떠한 사실적 지식도 인간밖에 존재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는 이러한 요소들 -- 한마디로, 인간적인 요소 또는 가치적 요소라 일컬을 수 있는 -- 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인식과 지식은 인간이 지닌 관심과 동기, 신념과 가치관, 개념과 이론, 선행 지식과 경험에 기초하여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탐구한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며, 가치적 요소가 실려서 관찰과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흔히 가치부하설(value-ladenness thesis) 또는 이론부하설
(理論負荷說, theory-ladenness thesis))이라 말한다.
2. 진리의 우연성과 통약불가설(通約不可說)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념의 하나로 ‘개념적 틀’(conceptual scheme)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위에서 설명한, 세계나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이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바탕이 되고 있는 요소들 -- 즉
관심, 동기, 관점, 신념, 가치관, 지식, 언어, 개념, 이론 등 -- 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전통철학자의 한 사람인 칸트 역시 개념적 틀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바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인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사고의 범주, 즉 개념적 틀에 의해 세계나 사물을 파악하게 된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칸트처럼 개념적 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불변의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 사회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세계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적 틀은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그 각각은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는 하나의 독특한 관점과 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인식과 지식이 가변적인 개념적 틀에 의존하는 만큼 그것은 상대적이며 우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개념적 틀에 의해 다르게 파악된 세계와 사물에 대한 인식은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비교평가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인식이 바탕하고 있는 개념적 틀을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평가해 줄 수 있는 제3의 중립적인
틀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개념적 틀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인식들을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비교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을 통약불가설이라 한다.
3. 진리의 다원성과 해체설(解體說)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어진 세계에 대한 객관적 묘사로서의 진리개념을 부정하고 개념적 틀과 가변적 언어게임에 의해 형성되는 진리개념을 받아들이게 될 때,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강조하게 되는 것이 곧 진리의 다원성과 국지성
(局地性) 그리고 상대성이다.
그들에 의하면, 유일무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진리는 없으며 항상 그것은 부분적일 따름이며 따라서 불완전하다. 요컨대, 진리는 인간의 역사적‧사회적 산물이자 창조적‧해석적 산물이며, 때문에 진리의 탐구는 결코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끝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 것이다.
진리의 다원성과 국지성, 잠정성과 개방성을 강조할 때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내세우게 되는 것은 이른바 해체
작업이다.
즉, 확실성이나 보편성, 객관성이나 합리성, 그리고 진리의 이름하에 하나의 고정된 사고의 틀과 통일된 관점으로써
세계나 인간을 설명하고 규정지으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따르면, 진리탐구를 위한 우리의 대화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도 사전에 주어져 있지 않다.
만약 모종의 제한을 가함으로써 우리의 대화와 사고를 특정한 방향으로 묶고, 객관성과 보편성이라는 이름하에 하나의 관점만을 진리로 부각시키려고 시도한다면, 그러한 시도가 갖는 의도와 목적, 기본가정과 그 한계를 밝혀서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의 정신을 ‘전체성과의 싸움’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통일성이나 보편성 그리고 획일성을
강렬히 거부하고 개체성과 다양성 그리고 개방성과 불확정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III. 맺는 말
기존의 사고체제나 설명체제의 절대성과 확실성을 부정하고 그 우연성과 가변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은 오늘날 우리 사회나 문화에 심대하고도 포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것은 종래의 일원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보다 다원적이며 개방적인 사고와 신념체제의 형성을
촉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부정적으로 보면 상대주의적인 사고와 개인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사회
곳곳에 확산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미치는 긍정적 영향보다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깊은 관심과 우려를 갖고
있으며, 오늘날 사회문화의 모든 부면에서 전통적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개인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사고와
허무주의적인 경향이 팽배해지고, 그에 따른 수많은 사회병리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기도 한다.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표방되는 오늘의 시대란 바로
상대주의와 허무주의, 혼란과 아노미의 시대로 흔히 규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녕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미하는 바가 곧 자기파괴적 부정과 비합리적 상대주의이며, 그것은 결국 허무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특징지워지는 현대 사회는 어떻게 파국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또는 사회적 파국을 모면하도록 하기 위해 교육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묻고 답을찾아야 하는 시대적 과제인 동시에
교육이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New Trolls- Ada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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