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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이완용은 누구인가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지ㆍ주서가 되었다.

규장각대교ㆍ검교ㆍ홍문관수찬ㆍ동학교수ㆍ우영군사직ㆍ의정부검상ㆍ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고,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의 학원(學員)으로 들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5월 병으로 귀국하여 승정원동부승지ㆍ이조참의ㆍ외무참의ㆍ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등을 지냈다.

 이해 다시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미국으로 갔으며, 12월 대리공사로 승진하고

 1890년 돌아와 구미파(歐美派)로 알려졌다.

 

  그 뒤 내부참의ㆍ성균관대사성ㆍ형조참판ㆍ동지의금부사ㆍ동지성균관사ㆍ동지춘추관사ㆍ전환국총판ㆍ육영공원판리ㆍ교환서총판 등을 거쳐 1894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외무협판이 되었다.

이듬해 5월 박정양 내각에서 학부대신과 중추원의관으로 기용되었으며, 그 뒤 김홍집 내각에서도 학부대신을 지냈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 후 학부대신에서 물러나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Allen,H. N., 安連)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896년 이범진(李範晉) 등과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시킨 공로로 박정양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에

취임하고 농상공부대신 임시서리까지 겸하였다.

독립협회에도 한때 관여하였으나 외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제명되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친러파로 몰려 평안남도 관찰사

ㆍ전라북도 관찰사 등 외관으로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1901년 한직인 궁내부 특진관이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1905년 학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일본특파대사 이토(伊藤博文)로부터 조약체결의 제의를 받고, 일본군

무력시위를 이용하여 어전회의를 열고 고종을 협박, 조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을사5적신이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하여 의정대신임시서리 및 외부대신서리까지 겸하였다. 1907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까지 겸하였다.

이해 6월 이른바 내각관제가 공포되자, 내각총리대신으로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초대통감 이토의 사주를 받아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7조약 체결에 관여하여 내정권을 박탈당하게 함으로써 정미7적이 되었다.

 

  또한 그해 8월 10일 군대해산에 앞장서 동조하는 등 이러한 일련의 친일행적으로 일본정부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았는데 목숨은 건졌다.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를 열어 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韓日兩國倂合全權委員)이

되어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를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조약 체결 뒤 공식적으로는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및 퇴직금 1,458원 33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비롯하여 중추원 부의장ㆍ조선귀족원 회원ㆍ농사장려회 회장ㆍ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ㆍ일본제국군인후원회ㆍ조선지부 평의원ㆍ조선귀족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우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간의 혼인을 권장하는 이른바 동화정책에도

 앞장섰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독립투쟁을 비난하며 3차에 걸쳐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후작이 되고,

 농림주식회사고문ㆍ교육조사위원ㆍ총독부산업조사위원ㆍ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ㆍ조선사편찬위원회고문ㆍ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ㆍ선만노몽연구협회고문 등의 명예직을 겸하며 끝까지 일제에 기생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이었다.

 

  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한말 을사5적신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특사사건 후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牛峰) 이씨이다. 부친은 이호석(李鎬奭)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867년 10세 때 친척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던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호준은 청렴한 관리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이완용은 양부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13세 때 양주조씨(楊州趙氏)와 혼인하였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1886년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에 임명되었다.

 이후 검교(檢校), 홍문관 수찬(修撰), 동학교수(東學敎授),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현지생활에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병을 얻었고 이듬해 5월 귀국하여 요양 생활을 했다.

 

 이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1888년 12월 고종의 명으로 미국공사관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189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ㆍ

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을 역임하였다.

그는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개화파가 되었지만 조선왕실에 대해 개화를 주창하지 않았으며

 유교와 전통사상을 고수했다.

 

이후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모임에 가담하여 구미인(歐美人)을 중심으로 친러파 세력이 결집되었으며 정동파(貞洞派) 수장으로 친일, 친청세력을 견제하였다.

 

  제2차 김홍집내각이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이 과도정부의 내각총리가 되자 이완용은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박영효 등 개화파의 급진적인 정책에 반대하였으며 온건책을 견지하였다.

 

1895년 제3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서자 학부대신(學部大臣)·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으며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를 열어 근대적인 교육정책을 펼쳤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자 친일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주도하는 제4차 친일파 김홍집내각이 들어서고 이완용은 해임되었다.

 이완용은 미국공사관에 머물면서 감금된 고종황제를 궁궐 밖으로 탈출시켜 친러내각의 복원을 시도하였고

결국 춘생문(春生問)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이자 1896년(건양 1년)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획하였다. 이완용은 외부대신·학부대신·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고 독립협회가 이를 반대하면서 이완용은 이를 중재하려 하였지만

 양쪽 모두에게 배척되었다.

 

 1897년 내각에서 밀려나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가 1898년 전라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양부 이호준이 죽자 고향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임명되었다.

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하여 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해 11월 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賊臣)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되었다.

 

이때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심을 받게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수만명의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하였고 그의 집은 군중들에 의해 불탔다.

그해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인사,

입법, 행정 등 주요 권한을 일본에 이양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고 그해 12월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ㆍ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侯爵)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192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글씨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ㅡ『두산백과』에서